담마의 거울

삼박자가 갖추어진 이 시대 최고의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25. 11:02

 

삼박자가 갖추어진 이 시대 최고의 법문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비록 넷상에 만든집이지만 이렇게 방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가르침에 대한 갈증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이 찾아 오는 것이다.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

 

가르침을 찾아 오는 이들에게는 가르침을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런 가르침은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한 가르침이어야 한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접하고자 찾아 오기 때문에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여야 한다. 그래서 글쓰기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

 

글쓰기를 하면서 이곳저곳 검색을 많이 한다. 가급적 객관적 자료를 확보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신문사이트에 실린 기사나 학자들의 논문, 그리고 명사들의 컬럼이 좋은 대상이 된다. 그런 글을 인용하여 글을 쓰다 보니 개인적인 견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이처럼 경전과 기사를 근거로 글쓰기를 하다보니 어떤 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고 비판한다. 자신의 견해는 없이 남의 말만 골라 사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야기 한다. 만일 자신의 이야기만 쓴다면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고 비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지일관 경전과 사실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글쓰기도 수행이다

 

글쓰기를 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통불자의 일상으로서 글쓰기이고 또 하나는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다. 이렇게 두 가지 목적으로 글을 쓰다 보니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글쓰기는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안쓴다거나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해서 블로그를 폐쇄 한다거나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해서 절필하는 경우는 없다. 누가 보건 보지 않건 누가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고 그저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그런 바탕에는 글쓰기가 마치 밥먹는 것처럼 일상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이런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쓰기를 통하여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과 문제를 해결하고자 글을 쓴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어느 신문 컬럼에서 글쓰기를 통하여 수행하는 불자라고 필명과 함께 소개한 바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글쓰기도 하나의 훌륭한 수행이라 볼 수 있다.

 

누가 방문하는가?

 

사이버공간에 만든 집에 찾에 오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로그인하지 않고도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누가 방문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로그인 하여 방문한 경우 데이터 산출이 가능하다.

 

관리자 모드에서 제공되는 도표에 따르면 최근 6개월간 방문자가 25만명에 달했다. 일평균방문자는 약 1400명이다. 이들 방문자는 어떤 계층의 사람들일까? 인터넷에서는 어떤 계층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연령대별 통계는 가능하다. 월평균으로 계산하였을 때 20대가 5%, 30대가 10%, 40대가 18%, 50대가 20%, 60대 이상 6%이다. 그리고 분류가 안된 경우는 40%에 달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방문 연령대가 사오십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삼십대에 주목한다.

 

이삼십대에서도 꾸준히 찾아 오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있어서일것이다. 특히 20대에 경우 아마도 학생층일것으로 판단된다. 학교에 다니면서 접속한 케이스라 볼 수 있다. 교리나 경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올려 놓았기 때문에 과제물 작성을 위한 검색결과 방문한 것이라 보여진다ㄱ그래서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올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 빠일리 문구를 인용하였을 때 원어와 틀림 없는지 확인해야 하고, 한문을 사용하였을 때 용례가 맞는지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블로그에 올려진 글이 과제에 활용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블로그에 올려진 글은 쓰레기이다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다.

 

확인 하고 또 확인한다

 

한번 작성된 글은 인터넷공간을 떠 다닌다.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정보에 대한 것이다. 오타, 오기 등이 실려 있는 글을 발견하였을 때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럴경우 발견되자 마자 수정을 한다. 그럼에도 스크랩된 글에서 잘못 된 부분을 발견하면 구업을 지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올린 글은 혹시라도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보고 또 보고 확인 하고 또 확인한다.

 

이렇게 확인하는 이유는 “인터넷에 떠 다니는 글은 자료로서 가치가 없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이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위해서는 자주 확인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 글을 올리고 있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하여 글을 쓴다. 또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글을 쓴다. 이렇게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어느 특정계층이나 연령대를 타겟으로 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가르침으로서 누구나 초대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서 보라!(ehipassika)”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할 때 마다 힘이 난다. 경전에서 멋진 게송을 발견하였을 때 뿌듯함을 느낀다. 더구나 이를 빠알리어로 옮겨 실었을 때 기쁨은 배가 된다. 바로 이맛에 글쓰기를 한다. 그래서 방문하는 님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공감하였을 때

 

글쓰기를 하면서 가장 보람 있는 것은 올린 내용에 대하여 ‘공감’하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이다. 비록 글의 형태로 표현 되어 있지 않지만 추천수가 많다는 것은 글쓴이로 하여금 고무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어떤 블로거들은 대놓고 추천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넷상에서 공감한다는 것은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공감한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바꿀수도 있기 때문에 올린 글은 당사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하나의 글로 인하여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포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데 있어서 인터넷만큼 강력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잘못 들어가면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 보면 온통 교회 십자가만 보일 뿐 갈만한 절은 보이지 않는다. 깊은 산중에나 들어 가면 모를까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다 보니 불자들은 마땅히 의지처를 둘 만한 곳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공간을 기웃거려 본다.

 

하지만 인터넷공간은 지뢰밭이나 다름 없다. 잘못 들어가면 마치 좀비에 물려 좀비가 되듯이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사이트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단멸론 사이트가 대표적이다. 단멸론자들의 그럴 듯한 주장에 현혹 되어 윤회는 없다느니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다느니 하는 견해를 가지기 쉽다.

 

인터넷공간에서 정법을 만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설령 정법을 알리는 사이트일지라도 내용이 부실하거나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기 쉽상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이트는 없는 것일까?

 

헛탕치게 하는 사이트

 

수 년간 글을 쓰면서 수 많은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관심을 갖는 것은 주로 초기불교관련 카페나 블로그 등 초기불교사이트이다. 주로 초기불교를 전공한 스님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이다.

 

어떤 초기불교 블로그가 있다. 스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그런데 올린 글을 보니 예전에 보았던 것 그대로이다. 최근에 올린 글이 없다. 전혀 사이트 관리가 되지 않아 마치 방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자들은 무언가 하나 건질 것이 없을까 하고 기대하면서 오늘도 방문한다. 그러나 방문은 실망으로 바뀐다. 헛탕친 것이다. 그런 헛탕도 한 두번이다. 매번 헛탕치게 되면 기대에서 실망으로 바뀐다. 그래서 더 이상 사이트를 찾지 않게 된다. 아마도 바빠서일 것이다. 너무 바쁜 나머지 사이트를 관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일 것이다.

 

어떤 초기불교 카페가 있다. 한 때 열심히 활동하였던 스님은 글을 거의 올리지 않는다. 다만 동호회원들이 글을 올리지만 시시콜콜한 잡담 수준의 글도 있어서 그다지 공감이 가는 글은 아니다. 그래서 이제나 저제나 스님의 글을 기대해 보지만 올라오지 않는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세 달 이렇게 여러 달이 지났건만 한 건도 올라오지 않는다. 아마도 바빠서일 것이다. 하는 일이 바빠서 사이트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라고 생각된다.

 

갈증을 어디서 풀어야 할까?

 

불자들이 사이트를 방문하는 이유는 새로운 글을 읽어 보기 위해서이다. 비록 전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일지라도 새로운 글을 바라는 것은 글을 접함으로서 위안을 삼기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무리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기 때문에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런 글에서 한 구절에 인생이 바뀔 수 있다. 한 구절로 인하여 인식의 변화를 일으켜 180도 다른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극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 가르침을 불자들은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나 사이버상에서나 불자들은 좀처럼 가르침을 접하기 힘들다. 그런 갈증을 어디서 풀어야 할까?

 

대상을 객관화 하였을 때

 

최근 묘원법사의 법문을 듣고 있다. 인터넷 카페에 실려 있는 음성법문을 들으면 공감이 간다. 음성법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는 먼저 ‘통증이 일어났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벌써 대상이 객관화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미 마음은 통증을 싫어해 버렸으므로, 그러면 반응한 마음을 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아까 일꾼이 일을 할 때 일꾼의 상태를 측정해야 한다고 했는데, 마음이 싫어할 때 싫어하는 마음을 지켜보지 않으면, 수습하여 수행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통증 때문에 내 마음이 싫어했네’ 하고 알아차리면 수습이 됩니다. 이것은 고도의 테크닉인데, 그래야 일하는 마음이 제대로 대상을 겨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우리가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17:통증, 2013.02)

 

 

 

Sitting

 

 

 

매주 한 차례씩 방송되는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프로에서 묘원법사가 말한 것이다. 좌선 수행시 누구나 겪게 되는 통증에 대한 것이다. 다리가 저리는 등 통증이 일어 났을 때 통증이 일어났네라고 마치 남의 집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에게서 발생되는 현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바라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대상을 객관화 하였을 때 괴로움은 사라질 것이라 한다.

 

삼박자가 갖추어진 법문

 

묘원법사의 법문은 많이 들어 보았다. 지난 2009년의 경우 일년간 직접 들었고, 2010년의 경우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라디오로 들었다. 들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전혀 질리지 않는 것이다. 똑 같은 내용을 반복할 때도 많지만 질리지 않는 것은 수행과 교학이 겸비 되어 있기 때문으로 본다. 더구나 분명한 목소리로 전달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다.  이렇게 수행과 교학과 전달능력이 있어서 삼박자를 갖추었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편안한 자세로 경청한다.

 

가장 좋은 법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라 본다. 경전에서도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잘 설해진 법문은 그 사람의 삶을 180도 바꾸어 버린다. 마치 인생의 기로에 있는 사람이 친지나 스승,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180도 생각이 바뀌듯이 잘 설해진 법문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통증이 왔을 때 통증이 왔네라든가, 화가 났을 때 화를 내고 있네라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 보았을 때 괴로움은 사라진다는 가르침은 인식의 전환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객관명상 같은 가르침을 불자들은 접하고 싶은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수행과 교학이 겸비된 묘원법사의 법문은 이시대 최고의 법문이라 본다. 더구나 매일매일 글을 올리고 매일 수행지도를 하는 묘원법사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법사라 본다.

 

 

 

 

2013-10-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