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재가자와 심출가(心出家)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17. 11:03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재가자와 심출가(心出家)

 

 

 

지난밤 세찬비바람에

 

지난 밤 번개를 동반한 천둥이 쳤다. 그리고 세찬바람과 함께 비가 내렸다. 오래 지속된 것은 아니지만 불과 한 두시간에 걸친 번개, 천둥, 바람, 비로 인하여 그 동안 힘겹게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맥없이 떨어졌다. 이른 아침 일터로 나가는 길에 낙엽이 이리저리 나뒹기고 있다.  

 

 

 

 

 

거리에도 낙엽이 수북하다. 도시의 가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은행나무이다. 지난 몇 년간의 관찰한 결과 은행나무잎은 11월 20일 전후하여 일제히 지는데 17일이니 바로 그때가 온 것이다. 하루밤 자고 났더니 세찬 비바람에 낙엽이 가득 깔려  있는 것이다. 더구나 암은행나무에서는 힘겹게 매달려 있던 은행열매가 모두 떨어진 듯 하다.

 

 

 

 

 

 

 

 

 

 

낙엽이 지는 것은 죽음으로 묘사 될 수 있다. 그래서 숫따니따빠따에서도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Sn3.8)”라 하였다. 빨갛게 또는 노랗게 물든 잎파리가 떨어지는 것 역시 죽는 것과 같다. 한여름 푸른잎파리이었을 때는 그 어떤 천둥번개와 비바람에도 견디어 내었으나 늦가을 작은 바람에도 맥없이 떨어지는 것이 울긋불긋 물든 잎파리이다. 마치 백발이 된 노인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는 늙음에 대한 것이 많다. 숫따니빠따에 늙음의 경(Jarasutta, Sn4.6), 법구경의 늙음의 품(Jaravagga, Dhp146-156), 상윳따니까야의 늙음의 품(Jaravagga, S6.51-60)  그것들이다.

 

숫따니빠따의 늙음의 경에서

 

숫따니빠따의 늙음의 경에서는 늙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Appa vata jīvita ida
Ora
vasassatāpi miyati,
Yo cepi aticca j
īvati
Atha kho so jaras
āpi miyati.

 

[세존]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는 것입니다.

 

(Jarā sutta-늙음의 경, Sn4.6, Stn804, 전재성님역)

 

 

결국 늙어 죽는다고 하였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잎이 노랗게 물들어 매달릴 힘이 없을 때 조그마한 충격에도 떨어지고 말듯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어느날 감기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것과 같다. 그런 인간의 목숨은 백년이 넘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65세 이상 무임승차에 대하여

 

요즘 기대수명이 크게 늘었다. 그래서 80세, 9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90세 까지 사는 것은 이제 보통인 것 같다. 불과 몇십년전까지만 해도 60세까지 살면 환갑잔치를 해 주었으나 이제 먼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60을 청춘이라 한다. 이렇게 60청춘이 되다 보니 60먹은 사람을 이제 노인 취급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65세가 되면 전철과 지하철의 무임승차가 가능다. 그래서 수도권에 있는 광역전철망은 노인들의 놀이터가 된 듯 하다. 북쪽으로는 동두천, 동쪽으로는 춘천, 남쪽으로는 천안까지 모두 무임승차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뉴스에 따르면 무임승차 부당론이 제기 되고 있다. 60대의 나이는 팔팔 하기 때문에 이제 슬슬 연령을 올리자는 이야기이다. 노인들의 무임승차로 인하여 적자가 수천억원에 달함을 강조하면서 현행 65세 기준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군불을 때는 것을 보니 조만간 샹향조정될 것 같다. 아직 노인표가 무서워 당장시행에 옮기지 않겠지만 점차 높아지는 기대수명과 갈수록 적자가 확대 되는 현실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상향조정 될 것임에 틀림없다.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무한정 남은 것처럼 보이는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준다.

 

 

Sovanti janā mamāyite
Na hi satt
ā niccā pariggahā,
Vin
ābhāva sattamevida
Iti disv
ā nāgāramāvase.

 

사람들은 내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지만,  

소유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

 

(Jarā sutta-늙음의 경, Sn4.6, Stn805,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 늙어 졌을 때 재가에서 생활하는 것 보다 수행자의 길을 걸으라는 뜻으로 받아 들인다. 이 구절에 대하여 나까무라 하지메는 “こののものはただするものである、とて、在家にとどまっていてはならない。(stn805, 中村 )”이라 하였다. 이는 “이 세상의 것들은 단지 변하여 멸한다고 본다면 재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모두 출가해 버린다면

 

만일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모두 출가해 버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보았다.

 

 

これはする説教ともいてありません。「在家にとどまっていてはならない。」、これはへのびかけですか。四章六節い」の一部ですから、家督子息ったへのけかもれません。しかし、ここばかりでなくスッタニパ全体れる囲気からして、わらず出家修行はないといているとみてよいのだといます。
しかし、これはねずみ
構造ですから、こんな矛盾した教説はありません。出家者えれば人間がいなくなってしまい乞食成立しなくなり破綻してしまいます。こういう無茶理論改良されるです。ブッダのえと乗仏教とのに、在家のままらの修行によっていたなりがあってよさそうにいますがはどうなのでしょうか。ブッダの乗仏教んでしまうのですか。門外漢直感としては中間的教説があると推測します。
よろしくお
いします。

(スッタニパタ805にして)

 

 

숫따니빠따 805번 게송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책에서는 해설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검색결과 スッタニパ805して(숫따니빠따 805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견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하는 교설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재가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것일까요? 사장육절( Sn4.6)에 있는 ‘늙음’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장의 권한을 자식에게 양도한 후에 은거하라는 호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 숫따니빠따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를 판단하여 부처님은 연령과 관계 없이 출가하여 수행해야 된다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쥐를 잡는 강론(ねずみ)’과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그렇게 모순적인 교설은 아닙니다. 출가자자 증가하면 공덕을 쌓는 사람들이 줄어 들기 때문에 걸식이 성립되지 않아 파탄에 이르고 맙니다. 이와 같은 무익한 이론은 반드시 개량되어야 할 엉터리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대승불교와의 사이에서, 재가인 채로 스스로 수행에 의하여 해탈하였다는 경전상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부처님 사후에는 단숨에 대승불교로 바뀌었습니다. 문외한의 직감으로는 중간적인 교설이라 추측됩나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재가불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해탈과 열반을 이야기 하면 재가자의 주제에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재가자는 재가자 답게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이라 한다. 원론적으로 맡는 말이다. 그러나 재가의 삶이라고 해서 반드시 재가에 머물러 있으라는 법은 없다. 재가자도 출가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초기경전에 수 없이 등장하는 말이 해탈과 열반이다. 이 말은 재가자의 삶과 관련이 없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로지 출가승만의 가르침이라면 재가자는 해탈과 열반이 나오는 경을 읽을 필요도 없고 따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간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추구하는 식욕, 성욕, 안락욕, 명예욕, 권력욕 이렇게 오욕락을 삶을 살면 될 것이다. 다만 불자이기 때문에 삼보에 대한 믿음과 오계준수, 그리고 지역과 사회에 대한 봉사의 삶을 살아 간다고 볼 수 있다.

 

재가자가 시계())하면 생천(生天 )한다고 한다. 지역과 사회에 대하여 봉사를 하는 삶, 오계를 준수하는 삶을 산자에게 죽었을 때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에 항상 강조하는 것은 지계(sīla)와 보시(dāna)이다. 이렇게 하였을 때 죽어서 천상에 태어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가서 볼일이다.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이 이렇게 시퍼렇게살아 있는데 단지 믿음, 지계, 보시의 삶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재가자의 삶은 인욕 그자체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출재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비록 재가의 몸이라고 할지라도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이런 재가의 삶은 오히려 출가자 보다 더 유리할 수 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경험이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유리한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가자의 삶이라는 것이 따로 인욕할 것이 없다. 마음 내키는대로 훌쩍 떠나 버리는 출가자와 달리 재가자의 삶 자체가 인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가에서 경험하는 처절한 삶 자체가 공부이고 수행 그 자체이다. 그래서 항상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경전을 열어보고, 가르침이 틀림 없음을 확신 하였을 때 비로소 믿음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이것이 이해를 바탕으로 합리적 믿음, 즉 불교적 믿음 삿다(saddha)인 것이다.

 

재가자와 심출가(心出家)

 

재가자가 해탈과 열반을 추구한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하여야 된다는 법은 없다. 또 재가자 출가한다고 하여 이 세상의 인류의 씨가 마를 것이라 우려 하지 않아도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디에 있든지 가르침만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가의 생활에 머물지 마십시오.(Stn805)” 라 하였을 것이다. 이 말은 반드시 출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가에 머물라는 말이 아니다. 일종의 심출가(心出家)’라 볼 수 있.  

 

경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를 보면 재가자일지라도 재가에 머물지 않는 삶을 살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늙어서 까지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말라는 것과 같다. 나이가 들어 늙어 갈 때는 재가에 머물지 말고 출가를 해야 하는데, 이는 심출가를 하라는 말과 같다. 마치 고대 인도에서 바라문들이 인생 4주기에서 할 것을 다해 마치고 유행기를 보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나이가 들어 할일을 다 해 마친 사람에게 소유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Stn805)”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어서 까지 욕심을 내는 것을 보면 추해 보인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성질을 내는 것을 보면 보기 싫어진다. 나이가 들어 형편 없이 늙어 버린 자가 욕심이나 내고 화만 낸다면 단지 나이만 먹은 노인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어 늙었을 때 어떤 삶을 살아 가야 할까? 그것은 경에서와 같이 재가에 머물지 않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행자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하라는 것은 아니다. 비록 재가에 머물러 있지만 마음으로 출가하는 것이다. 심출가를 말한다. 이렇게 심출가 하였을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기대수명 80세를 넘어 90세를 바라 보는 시대에 있어서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013-11-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