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코끼리와 장님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완전하였던 것일까? 아니면 도중에 추가 되어 나중에 완성된 것일까? 이는 깨달음에 대한 문제일 수 있다.
대승불교주의자들은
대승불교주의자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덜 완성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부처님이 처음 정각을 이루었을 때 그 깨달음과 현재 대승불교의 깨달음을 다르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대하여 폄하하는 의미에서 ‘원시불교’라고 칭한다. 아직 ‘덜 완성된 불교’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계속 발전되는 것으로 본다.
21세기에 맞는 대승경전에 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실제로 도법스님의 경우 현시대에 적합한 경을 창작해 내기도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한밤중에 진리의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평화의 벗들이여!”라고 시작되는 ‘생명평화경’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대승주의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폄하 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산중승도 있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佛敎]라는 宗敎가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즉,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한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
이런 견해는 선종의 전통을 가진 선사들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은연중에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비하하고 대승의 우월성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극에 달한 한국불교의 혼란상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소위 불교학자라 불리우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첫째,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둘째, 수행의 목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증진에 있다.
이 두 가지 전제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은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이다. 불교는 도그마의 종교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해왔다. 초기불교·대승불교·선불교·밀교 등 다양한 불교 전통은 단순한 시대적 구분이나 지리적 구분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부단히 적응해온 사상사적 구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수행과 깨달음의 문제에 관해 ‘현대’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 환경을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불교적 정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성택교수, 깨달음의 불교에서 행복의 불교로, 불교평론 2004-03-10)
조성택 교수에 따르면 수행의 목표가 깨달음에 있지 않다고 엄청난 선언을 한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불교의 병폐를 지적한 것이라 본다. 화두를 들며 평생선방에서 보내는 스님들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리고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고발하는 성격이 짙다. 그럼에도 수행의 목적이 깨달음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수행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은 차라리 ‘외도’에 가까운 사상이다. 극에 달한 한국불교의 혼란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무상정등각과 정등각자
이렇게 대승주의자들은 불교는 계속 발전 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심각한 ‘폐불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도중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서 깨달음이 업데이트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하시사야도의 경우 자신의 법문집인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의 ‘삼전십이행상’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면 깨달음을 선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성제에 대하여 세 번 굴려서 열 두 가지 형태로 입증 되었기 때문에 깨달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 하고 ‘위없는 깨달음’이라 한다. 이를 ‘무상정등각’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별칭 중의 하나가 ‘정등각자’이다.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대승주의자들은 이런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불완전 것, 덜 완성된 것이라 하여 공사상, 유식사상, 여래장 사상 등 새로운 사상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내었다. 급기야는 근자에 이르러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불교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었다. 45년간 전법하는 도중에 새로운 깨달을 얻어 깨달음이 진화한 것은 아니다. 그런 깨달음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이미 원리로 확정되어 있는 ‘연기법’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 질 수 없듯이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고 완성된 가르침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고대인도에 있어서 극도의 사상적 혼란이 있었다. 마치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혼란상을 보는 듯하다.
부처님이 연기법을 발견하기 이전 까지 인도에서는 기존 지배계층의 종교인 브라만교와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신흥사조가 난립하였다. 그래서 제각각 자신의 종교, 자신의 사상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Ud6.4)”라고 주장하였다. 그것도 입에 칼을 물고 찔렀다. 이런 이야기가 우다나에 있다.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견해가 등장한다.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라고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었다.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세계는 영원하다(sassato loka)’는 영원론적 견해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지배계층인 브라만교의 사상이다.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 즉, 소우주인 자아와 대우주의 세계가 일치한다는 형이상학적 사상을 토대로 성립한 사상이다. 그래서 영원주의자들은 ‘이것은 영원하고 불사이고 항상하고 견고하다.’라는 네 가지 진술을 토대로 하는 상견을 가지고 있다.
세계는 영원하다 등으로 설명되는 이교도의 사상은 모두 열 가지로 설명된다. 이들 열가지에 대하여 부처님은 답을 하지 않았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희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열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
열가지 외도 사상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열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
No |
내 용 |
설 명 |
1 |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우빠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 |
2 |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유물론자의 허무주의적 견해 -뿌라나 깟사빠의 주장 |
3 |
세계는 유한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tavā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요가적 삼매에 들어 유한성에 관해 지각한 것에 근거를 둔 견해. |
4 |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nantavā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자이나교의 주장. |
5 |
영혼과 육체는 같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taṃ jīvaṃ taṃ sarīr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유물론의 중요이론. -사명외도인 막칼리 고쌀라의 숙명론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단멸론 |
6 |
영혼과 육체는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aññaṃ jīvaṃ aññaṃ sarīraṃ,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유물론에 바탕을 둔 허무주의 -빠꾸다 깟짜야나의 칠원소론. |
7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Tathāgato param-maran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우파니샤드의 일부학파에서 주장된 것 -브라흐만과 합일한다는 진아(眞我)론 |
8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a hoti Tathāgato param-maran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사후세계 부정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허무주의 |
9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hoti ca na hoti ca Tathāgato param-maran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존재와 비존재의 제3항목을 설정 -아지위까에 의해 천명됨. |
10 |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neva hoti ca, na na hoti ca Tathāgato param-maraṇā,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 |
-뱀장어를 잡듯이 혼란스런 회의주의이론. -산자야 벨랏티뿟따의 주장
|
열 가지 외도사상을 보면 공통적으로 외치는 구호가 있다.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라는 말이다.
자신의 사상을 진리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상은 거짓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구호를 오늘날에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하는 유일신교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대승주의자들의 주장에서도 목격된다. 대표적으로 행복론이다. 마치 “행복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우다나의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4)’에 따르면 열 가지 사상을 가진 사상가들에 대하여 섬찟한 표현을 하였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이교도들은 입에 칼을 물고 서로가 서로를 찌른다고 하였다. 논쟁이 벌어졌을 때 손에 칼만 들지 않을 뿐 사실상 전쟁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죽기살기로 싸우는 자들에 대하여 부처님은 ‘눈먼자들’로 비유하였다.
코끼리와 장님들
부처님은 입에 칼을 물고 싸우는 자들을 ‘눈먼자’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나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 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태어날부터 눈이 먼 사람들은 사물을 보지 못한다. 단지 들어서 추측할 뿐이다. 우다나 ‘다양한 이교도의 경(Ud6.4)’에서는 꼬끼리의 비유를 설명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장님들을 모아 놓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는 이야기이다.
코끼리 비유는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사부니까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쿳다까니까야에 소속된 우다나에서 보인다. 그러나 각주에 따르면 대승경전의 ‘장아함19(대정1.128-129)’에서는 볼 수 있다고 한다. 유명한 꼬끼리와 장님들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이야기한다. 옛날 사왓티 시에 한 왕이 있었는데 신하에게 알렸다. 사왓티 시에서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들을 모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코끼를 보여 주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수행승들이여, 그 부하는 그 왕에게 대답하고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에게 이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이여, 이것이 코끼리입니다.’라고 코끼리를 보여 주었다.
1) 그는 어떤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에게는 이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이여, 이것이 코끼리입니다.’라고 코끼리의 머리를 보여 주었다.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총 아홉 명의 장님들이 등장한다. 각각 코끼리의 다른 부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장님에게는 머리를 보여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봉사에게 코끼리 머리를 보여 주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떤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들은 코끼리의 머리를 보았는데, 그들은 ‘폐하, 코끼리는 물항아리와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첫 번째 장님에게 코끼리 머리를 보여 주었더니 ‘물항아리’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장님이 코끼리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이 아니다. 경에 따르면 왕이 보여 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눈이 보이지 않는 자에게 왕이 코끼리 머리를 보여 주면서 “무엇처럼 생겼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답변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곧 왕의 것인 고대왕권 국가에서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첫 번째 장님은 보이지 않는 코끼리 머리에 대하여 ‘물항아리’ 같다고 답변한 것으로 본다.
코끼리 아홉 부위와 장님들의 답변
이와 같은 아홉가지 보여 준것과 답변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코끼리 아홉 부위와 장님들의 답변
No |
보여 준 것 |
장님들의 답변 |
1 |
코끼리의 머리 |
물항아리 |
2 |
코끼리의 귀 |
키질하는 바구니 |
3 |
코끼리의 이빨 |
쟁기 |
4 |
코끼리의 코 |
쟁기막대 |
5 |
코끼리의 몸통 |
창고 |
6 |
코끼리의 다리 |
기둥 |
7 |
코끼리의 허벅지 |
절구 |
8 |
코끼리의 꼬리 |
곤봉 |
9 |
코끼리의 꼬리의 술 |
빗자루 |
아홉가지를 보면 하나도 맞는 것이 없다. 한 번도 꼬끼리를 보지 못한 장님의 대답은 모두 틀린 것이다. 그럼에도 장님들은 “코끼리는 이와 같고 이와 같지 않다. 코끼리는 이와 같지 않고 코끼리는 이와 같다.”라고 서로 싸운 것이다. 경에서는 장님들이 ‘주먹다짐’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런 장님들의 주장을 보고 ‘왕은 즐겼다’고 되어 있다.
한번도 보지 않았음에도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장님과 코끼리의 비유를 들었을까? 그것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와 육사로 대표 되는 외도의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Paṭhamanānātitthiyasutta-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교도의 사상에 대하여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설명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가 코끼리를 한번도 보지 않았음에도 나름 대로 추론하여 이야기 하였으나 모두 틀렸듯이,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희론에 불과한 이교도 사상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의 사상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닌 것처럼 입에 칼을 물고 싸운다는 것이다.
무명에 가려서
코끼리와 장님들 이야기가 사부 니까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청정도론에서는 ‘장님이야기’가 있다. 윤회하는 존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thāpi nāma jaccandho, 야타삐 나마 잣짠도
naro apariṇāyako; 나로 아빠리나야꼬
Ekadā yāti maggena, 에까다 야띠 막게나
ummaggenāpi ekadā. 움막게나삐 에까다
Saṃsāre saṃsaraṃ bālo, 삼사레 삼사람 발로
tathā apariṇāyako; 따타 아빠리나야꼬
Karoti ekadā puññaṃ, 까로띠 에까다 뿐냥
apuññamapi ekadā. 아뿐냐마삐 에까다
Yadā ca ñatvā so dhammaṃ, 야다 짜 나뜨와 소 담망
saccāni abhisamessati; 삿짜니 아비사멧사띠
Tadā avijjūpasamā, 따다 아윗주빠사마
upasanto carissatī ti. 우빠산또 짜릿사띠 띠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바른길로 어떤 때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가듯
윤회에 돌고 도는 어리석은 자는 인도해줄 사람이 없어
어떤 때는 공덕이 되는 행위를
어떤 때는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를 짓는다.
법을 알고서 진리들을 관찰할 때
무명은 가라앉고 고요하게 다닐 것이다.
(청정도론 제17장 119절, 대림스님역)
장님인자는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길을 가기가 힘들다. 홀로 길을 간다면 어떤 때는 평탄한 길도 가지만 또 어떤 때는 움푹 패인 길로 갈 것이다. 이렇게 존재를 장님으로 묘사한 것은 ‘무명’에 가렸기 때문이라 한다. 연기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불선업으로 인하여 악처에 태아나기도 한다. 이렇게 갈팡질팡 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눈먼 장님이 눈먼 장님들을 이끌 때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장님인 자가 길을 인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진리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육사외도의 단멸론자가 길을 인도하였을 때 그를 따라가는 사람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 경우 태어날부터 장님인자의 뒤를 역시 장님인자들이 따라 가는 것과 같다.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말하는 자들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와 같다. 그런 외도를 따라 갔을 때 때로는 공덕 짓는 행위를 할 수 있지만 대부분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가 되기 쉽다. 마찬가지로 “수행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지 않다. 수행의 목표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증진에 있다.”라고 말하는 자들 역시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장님과 같다. 그런 자들을 따라가는 자들 역시 눈먼 장님들과 같다. 눈먼 장님이 눈먼 장님들을 이끌고 갈 때 그 길은 어떤 것일까? 잘못된 견해로 인하여 대부분 악처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눈먼 자들은 자신의 견해가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 말한다.
불교에서 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이 진리이다. 연기의 설한 사성제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 수행법인 팔정도 수행이 불교의 진리이다. 그외 다른 것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린 게송을 읊었다.
Imesu kira sajjanti
eke samaṇabrāhmaṇā,
Viggayha naṃ vivadanti
janā ekaṅgadassino
[세존]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실로 이러한 견해들에 집착한다.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 (Ud6.4)
2013-11-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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