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깨진 종소리를 듣는 것처럼, 비난과 비방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2. 17:58

 

깨진 종소리를 듣는 것처럼, 비난과 비방에 대하여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종종 흘러간 영화를 보면 유심히 보는 것이 있다. 요즘의 생활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60년대나 70년대 영화를 보면 사무실 장면이 있는데 책상에 고작 전화한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이다. 요즘 볼 수 있는 PC라든가 프린터 등 각종 통신기기는 일체 보이지 않는다.

 

불과 삼사십년 전까지만 하여도  오로지 전화 한대에 의지 하여 일을 처리 하였다. 이렇게 PC도 없고 핸드폰이나 스마트폰도 없는 시대에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과 다른 것일까? 오로지 전화 한대에 의지하여 일을 하였다 하여 사유에 있어서 지금 보다 원시적이라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는 어땠을까?

 

초기경전을 통하여 부처님 당시와 접한다. 비록 2600년 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경전에서 전하는 메시지를 보면 시공간을 초월한다. 그래서 2600년전에 부처님이 설하였던 가그침이 현재 글로 전해진 경전을 보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마치 면전에서 본 것처럼,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들린다. 왜 그럴까?

 

2600년 사람들이 고민하였던 것과 지금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은 크게 차이가 없다.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한 시대나 이제 갓 철기시대를 맞이 하여 문명의 여명을 연 2600년전 사람들과 사유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해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들은 변함 이 없다. 2600년전 사람들이 부처님의 사성제를 듣고 크게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듯이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 먼 미래 사람들 역시 사성제를 듣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사람들은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 됨에 따라 누구나 2600년 부처님이 설하였던 가르침을 생생하게 접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과 10여년 만에 1700년 한국불교 역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밝힐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소모적인 논쟁을 유발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느 인터넷카페에서는 윤회가 있느니 없느니하여 거의 1년 가까이 토론하는 것을 보았다. 결국 단멸론자의 거친말과 욕설로 점철 되다 카페가 폐쇄 되는 것을 보았다.

 

토론하기 좋아하고 댓글놀이를 즐기는 네티즌들은 이곳 저곳 토론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런데 자신의 견해와 맞지 않으면 비방, 비난을 넘어 결국 인신공격으로 막을 내린다. 이런 과정을 지켜 보면 가상공간에서 토론 역시 현실공간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사람 얼굴 바뀌기 힘들듯이 한번 형성된 성향은 결코 바뀌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빠수라 경(Pasura sutta, Sn4.8)

 

초기경전을 보면 토론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보인다. 특히 가장 고층경전이라 알려져 있는 숫따니빠따에서도 토론하는 장면이 여럿 있다. 그 중에 빠수라 경(Pasura sutta, Sn4.8)’이 있다.

 

빠수라경은 부처님이 유행자 빠수라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다. 다른 경과 다른 점은 오로지 부처님만 말씀 하신 다는 것이다. 서로 상호 토론이 없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 경우 전부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말씀만 있는 것일까? 이는 경의 인연담에 해당되는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경이 설해진 동기

 

전재성님의 파수라경에서 경이 설해진 동기에 대한 것이 있다. 각주형식으로 설명되어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였다. 빠쑤라라는 유행자가 있었다. 그는 ‘나는 전 인도에서 논쟁의 일인자이다. 그러므로 인도의 표지로 장미사과나무가 있는 것처럼, 나의 표지도 장미사과나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머무는 곳에 장미사과나무를 꽂아놓았는데, 누군가가 그에게 도전하려면, 그것을 뽑아버리면 되었다. 그가 사왓티에 왔을 때에 싸리뿟타가 그 가지를 보고 치울 것을 명했다.

 

빠수라는 수행자 고따마의 제일 제자와 논쟁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쾌재를 부르며 많은 무리를 몰고 싸리뿟타의 처소를 찾아 논쟁을 걸었다.

 

[빠수라] ‘사람의 욕망은 무엇인가’

 

[싸리뿟타] ‘사유에 의한 탐욕이 욕망이다’

 

[빠수라] ‘여러 가지 대상을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는가?

 

[싸리뿟타]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빠수라] ‘청정 행을 하는 자들은 숲에 머무는가?

 

[싸리뿟타] ‘그렇다. 숲에 머문다.

 

[빠수라] ‘그들은 욕망에 대한 사념 등을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이 수행자인가? 그들이 재가의 욕망을 향수하는 자들이 아닌가?

 

[싸리뿟타] ‘세상의 다양한 것은 욕망이 아니다. 사유에 의한 탐욕이 욕망이다고 말했다. 불선한 사유를 할 때에 수행승들도 욕망을 사유하는 자일 것이다.

 

 

[싸리뿟타] ‘그대는 사유에 의한 욕망이 사람의 욕망이라고 하지 않고 다양한 대상이 사람의 욕망이라고 말하는가?

 

[빠수라] ‘그렇다.

 

[싸리뿟타] '빠수라여 그대는 스승이 있는가?

 

[빠수라]  ‘있다’

 

[싸리뿟타] ‘그는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이라는 대상을 보고 또는 소리라는 대상을 접촉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스승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재가의 욕망을 향수하는 자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반론할 수 없었던 빠쑤라는 논쟁에서 패하고 사리뿟따야말로 대논사라고 인정 했다.

 

그는 사리뿟따 장로 앞에 출가하여 논쟁술을 배우려고 싸바티로 들어가 발우와 가사를 구하기 위해 제따바나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랄루다인이라는 수행승의 황금색 신체를 보고는 ‘이 수행승이 대논사이다’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나 그를 논쟁에서 이기고는 기고만장하여 자신의 표지를 가지고 이교도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수행자 고따마와 논쟁을 해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세존은 만나러 제따바나로 들어올 때, 문 위의 하늘사람들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는 세존을 찾아뵈었으나 그 앞에 앉아서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그에게 이경을 설했다.

 

(경이 설해진 동기, Pasura sutta-빠수라의 경, 숫따니빠따 Sn4.8, 전재성님)

 

 

경이 설해진 동기에서 편의상 화자를 괄호치기를 하여 구분하였다. 경이 설해진 동기를 보면 토론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이자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존자와 당대의 논사 빠수라간의 대화를 보면 토론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논점은 무엇인가?

 

논점은 사람의 욕망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사유에 의한 탐욕이 욕망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경이 설해진 동기에 실려 있는 대화를 근거로 분석하면 사유에 의한 탐욕은 나쁜 뜻이 아니다. 좋은 뜻으로 본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욕망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리뿟따는 당대제일의 논사 빠수라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빠수라의 스승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사리뿟따가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이라는 대상을 보고 또는 소리라는 대상을 접촉하는 것은 재가의 욕망을 향수하는 것과 같다라는 취지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각, 청각 등을 향수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오욕락을 뜻한다. 오욕락을 추구하는 자는 결코 청정범행을 닦을 수 없기 때문에 빠수라의 스승은 청정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빠수라의 입을 묶어 놓고

 

경이 설해진 동기를 보면 빠수라경이 빠수라에 대한 것이지만 경에서 빠수라의 이야기는 단 한줄도 나오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부처님의 이야기만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것은 문 위의 하늘사람들이 그를 벙어리로 만들었다라고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빠수라의 입을 묶어 놓고 부처님이 설법한 것이다. 이런 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경에서는 나오지 않고 다만 인연담식으로 전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빠수라의 입을 봉한 것은 수행자 고따마와 논쟁을 해보자라며 불순한 의도를 간파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부처님과 논쟁하여 이기면 당대의 논사가 될 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논파하였다 하여 부처님과 동급 내지는 그 이상으로 올라 갈 수 있다는 불순한 의도를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경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논사들의 특징

 

부처님은 논쟁을 하는데 있어서 논사들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그들은 ‘이것만이 청정하다’고 고집하며,

‘다른 가르침은 청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만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진리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stn824)

 

그들은 토론을 좋아하여 집회에 뛰어들어

서로 상대방을 어리석은 자라고 여기며,

칭찬을 받기 위해 자신을 착하고 건전한 자라고 하면서,

다른 전제 위에 기초해서 논쟁을 일삼습니다. (stn825)

 

 집회에서 논쟁에 참가한 사람은

칭찬을 받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패배하면 수치스럽게 여기고,

공격할 것을 찾다가, 비난을 받으면 화를 냅니다. (stn826)

 

 논쟁의 심판자들이 그가 말한 바에 대해서

‘그대는 패배했다. 논파 당했다’고 하면,

논쟁에 패배한 자는 비탄해하고 슬퍼하며,

‘그가 나를 짓밟았다’고 울부짖습니다. (stn827)

 

(Pasura sutta-빠수라의 경, 숫따니빠따 Sn4.8, 전재성님)

 

 

 

dispute

 

 

경을 보면 논쟁만 일삼는 논사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열거 되어 있다. 자신들의 진리를 고집하고, 다른 전제 위에 기초해서 논쟁을 일삼고, 비난을 받으면 화를 내고, 논쟁에 패배하면 ‘그가 나를 짓밟았다’고 울부짖는 행태를 말한다.

 

사실 이런 행태는 오늘날이라 하여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와 의견이 다르다 하여, 나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비난과 비방을 일삼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없는 사실을 들여 중상모략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논쟁은 요즘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다.

 

소위 인터넷에서 글을 좀 쓴다고 하는 자들은 한마디씩 한다. 그런데 일부 논객들은 알량한 지식과 오물장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내 견해는 바르고 상대방의 견해는 틀렸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말꼬리를 잡아 온갖 비난과 비방을 늘어 놓는다. 이런 사실은 요즘 인터넷 시대나 부처님 시대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부처님이 신통으로 빠수라의 입을 봉해 놓고 설법을 하였을 것이다.

 

칭찬을 얻는 것 외에 어떤 이익도 없다

 

논쟁은 끝이 없다.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평행선이다. 그래서 최후로 써 먹는 것이 인신공격이다.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캐치해 낸다. 그리고 나이는 어떻게 쳐드셨어요?”와 같은 인신공격을 한다. 그래서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고 마치 승리한 듯이 득의의 미소를 짓는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이러한 논쟁이 수행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면,

이들 가운데에 득의와 실의가 엇갈립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논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칭찬을 얻는 것 외에 어떤 이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stn828)

 

대중 가운데 자신의 의견을 말하여 그로 인해 칭찬을 받고,

마음속으로 기대한 바대로 이익을 얻으면,

그 때문에 우쭐하여 기뻐합니다. (stn829)

 

우쭐 하다면, 파멸의 장에 들어선 것입니다.

자만하고 교만한 것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아 논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하고 건전한 님은 그것을 청정이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stn830)

 

용사여, 국왕의 녹을 먹고 사는 용사가 적의 용사를 찾아 포효하듯,

그가 어디에 있건 그곳으로 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싸울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stn831)

 

 (Pasura sutta-빠수라의 경, 숫따니빠따 Sn4.8, 전재성님)

 

 

논쟁에서 이겨 보았자 아무 의미도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마치 목숨 걸듯이 논쟁에 몰두 하여 이겼다고 생각하였을 때 칭찬을 얻는 것 외에 어떤 이익도 없다.(stn828)”라 하였다. 자신을 호응해 주는 이의 칭찬 외에 어떤 이득도 없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칭찬을 들었을 때 백만원군을 만난 듯할 것이다. 그래서 우쭐하며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우쭐 할 때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쭐 하다면, 파멸의 장에 들어선 것입니다. (stn830)”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논쟁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자만과 교만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만은 초기경전에 따르면 우월감, 동등감, 열등감으로 표현된다. 논쟁에 열중하는 자들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비난과 비방을 일삼으며 인신공격을 하는데 이는 엄밀히 따진다면 열등감에 따른 자만에 해당된다. 자만이라는 것이 반드시 우월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열등한 자의 자만도 있기 때문이다.

 

논쟁의 무익함

 

이렇게 부처님은 빠수라에게 논쟁의 무익함을 이야기 하면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견해를 가지고 논쟁하여 ‘이것이야말로 진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대는 그들에게

‘논쟁이 일어나면, 그대와 상대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십시오. (stn832)

 

 

그러나 한 견해로 다른 견해를 부수지 않고,

적의를 없애고, 유행한다면, 빠수라여,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것이라 집착한 것이 없는데,

그들에게서 그대는 무엇을 얻으려 합니까. (stn833)

 

 

그런데 그대가 정신적으로 견해들을 고집하며 논쟁하고 있으니

청정한 님과 어깨를 겨누지만, 그대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stn834)

 

 

(Pasura sutta-빠수라의 경, 숫따니빠따 Sn4.8, 전재성님)

 

 

빠수라의 입을 봉해 놓고 부처님은 왜 빠수라와 논쟁을 하지 않는지 말씀 하신다. 그것은 논쟁을 즐기는 자들의 특징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리다라고 말하는 자들이라 한다. 이말은 외도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sassato loko, idam-eva sacca mogham-aññan)”라고 정형화 되어 있다. 이렇게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은 자신의 말이 모두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자들을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것이야말로 진리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면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말해 보았자 쇠귀에 경읽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해법을 제시하였다. 경에서는 논쟁이 일어나면, 그대와 상대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라 한다. 혼자 떠 버리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논쟁을 하면 이기려 한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로 상대방의 견해를 꺽으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분노가 일어난다. 그래나 논쟁에 빠져 들지 않는 자가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한 견해로 다른 견해를 부수지 않고, 적의를 없애는 자라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견해가 최상의 것이라 집착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그런 자에게 시비를 하여 대체 무엇을 얻겠느냐는 것이다.

 

부처님은 빠수라가 정신적 견해에 집착한다고 하였다. 결국 집착이 문제이다. 빠수라가 부처님과 겨루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논파하고자 집착하였기 때문에 그런 불순한 의도를 간파하고 입을 봉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오로지 부처님의 이야기만 나온다.

 

해꼬지하고 중상모략하고

 

매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있다. 그리고 글로써 방문하는 이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인 견해가 들어 갈 수 있다. 그런 견해로 인하여 혹시라도 누군가 피해를 보았다면 죄송하게 생각하며 참회한다.

 

그런데 매우 악의적으로 비난과 비방을 일삼는 이들도 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나이는 어떻게 쳐드셨습니까?”와 같은 인신공격적 논쟁을 하지 않는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지금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자가 친구가 일 수 있고 직장 동료가 일 수 있고 친척이 일 수 있고 후배일 수 있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이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입에 칼을 물고 싸운 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 마치 원수처럼 입에 칼을 무는 자들을 보면 섬찟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과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마치 입에 도끼를 달고 태어난 듯, 취중 인터넷을 하는 듯, 입에 칼을 문 논객들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교의 실천수행 방법인 팔정도의 정어,정사유에 대한 것이다. ‘해꼬지 않는 사유(avihisāsakappo)’의 정사유와 ‘중상모략을 삼가는 것(pisunāya vācāya veramaī)’의 정어가 되어 있지 않은 불자들을 볼 때 그들이 아무리 경전을 들먹인다 하더라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참회를 기대한다는 것은 난망이다.

 

깨진 종소리를 듣는 것처럼

 

논쟁을 좋아하는 자들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미래나 언제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악의적인 비방과 비난을 일삼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만일 그들 방식대로 댓글놀이’한다면 이전투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은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S7:2)”라 하여 화내지 않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도무지 참회할 줄 모르고 악의적인 비방과 비난을 일삼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상대하지 않아야 할까? 그것은 깨진 종소리를 듣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묘원 법사의 비난이라는 잠언은 언제 보아도 공감한다.

 

 

비난

 

 

세상을 바르게 사는 방법 중의 하나가

비난을 감수하는 것이다.

 

누구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말이 없다고 비난받는다.

 

말을 하면

말이 많다고 비난받는다.

 

필요한 말을 하면

필요한 말만 한다고 비난받는다.

 

바른 행동을 하면

잘난체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

나쁘다고 비난을 받는다.

 

이름 없이 살아도 비난을 받고

이름이 나면 더 비난을 받는다.

 

살인을 한 범죄자도 비난을 받지만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는 더 많은 비난을 받는다.

 

비난을 받고 똑같이 상대를 비난하면

상대와 내가 같은 사람이다.

 

상대의 비난을 상대의 일로 두고

깨진 종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비난, 묘원법사)

 

 

 

2013-12-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