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둑카(괴로움)를 기반으로 한 사성제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13. 17:04

 

왜 둑카(괴로움)를 기반으로 한 사성제인가

 

 

 

인터넷시대에 즐겨찾는 사이트가 있다. 주로 찾는 사이트는 즐겨찾기로 저장하여 보고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접속하면 마치 순례하듯이 들여다 본다. 그런 사이트 중에 초기불교사이트는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와 같다.

 

각묵스님의 행복론

 

초기불교카페에서 오랜만에 각묵스님의 글을 보았다. 전에는 카페활동과 오프라인 모임을 왕성히 하였으나 요즘은 뜸한데 오랜만에 올린 글을 보니 읽을 만 하였다. 올려진 글은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1. 본서 1편의 주제 -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이라는 글이다. 니까야강독 2판을 인쇄하면서 머리글을 소개한 것이다. 글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행복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러면 그분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본서는 이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은 행복을 가르치셨다.

 

(각묵스님,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1. 본서 1편의 주제 -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글에서 각묵스님은 놀라운 주장을 하였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편 것은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은 행복을 가르치셨다.”라고 단정한다. 이런 주장을 마하야나주의자들이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초기불교 전도사라 잘 알려져 있는 스님이 말한 것에 대해서 매우 의아하게 생각한다.

 

강원의 초기불교 교재 네 가지

 

니까야 강독은 초불연에서 출간된 책이다. 두 권으로 된 책으로서 사부 니까야를 요약한 책이라 볼 수 있다. 이유는 강원에서 스님들이 교재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 되었다고 한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강원에서 초기불교 교과목으로 1)초기불교 이해, 2)초기불전I, 3)초기불전 II, 4)아비달마의 이해 이렇게 네  가지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이중에  초기불교 이해과목의 경우 이미 초불연의 교재가 선택 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초기불전 I’ 과 ‘초기불전 II ‘ 과목용 교재로서 니까야 강독1과 니까야 강독 2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초불연의 교재가 강원의 교재로 채택되는 것은 기정사실화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각묵스님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림 스님과 편집자가 소속되어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도 총무원장 자승 스님께서 4부 니까야를 완역한 공로로 대림 스님과 편집자에게 표창장을 주셨다. 본서는 총무원장 스님께서 표창장과 함께 주신 포상금으로 출간한다. 역경불사의 중요성을 인정해주셔서 표창장과 상금을 주신 총무원장 스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따뜻한 관심으로 역경불사를 성원해주시고 지켜봐주시는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과 교육부장 법인 스님께도 감사드린다. 앞으로도 게으르지 않고 더 열심히 빠알리 삼장을 번역해서 성원에 보답하고자 한다.

 

( 각묵스님, 『니까야 강독I』들어가는 3. 4 니까야와『니까야 강독』|)

 

 

각묵스님은 자승스님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부니까야를 완역한 공로로 상도 주었고 더구나 강원교재를 만들기 위한 포상금도 주었다고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불연에서 출간된 번역서가 강원교재로 채택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두 종류의 번역물이 있다. 그런데 모두 초불연의 교재가 강원의 교재로 채택 된다면 매우 불공평한 것으로 본다. 똑 같은 빠알리 니까야를 번역하였음에도 재가자가 번역한 것은 교재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강원에서 스님들이 공부하는데 사용되는 교재는 모두 스님들이 번역한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법이 있을까?

 

조계종단에 소속된 스님이 강원교재 채택을 목적으로 만든 것이 니까야 강독1, 2이다. 따라서 강원에서의 초기불교 교재인 1)초기불교 이해, 2)초기불전I, 3)초기불전 II, 4)아비달마 는 모두 초불연 교재로 채워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두 개의 번역물이 있지만 초불연에서 강원교재를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각묵스님은 니까야강독 머리말에서 행복론을 이야기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은 행복을 가르치셨다.”라고 단언하였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처님은 행복만을 말씀 하신 것으로 되어 버린다. 물론 궁극적 목적이 행복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렇게 행복이라는 문구로 한정하면 가르침 역시 한정적으로 되어 버린다. 그래서 면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각묵스님은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 하였다. 이는 이어지는 글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각묵스님,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1. 본서 1편의 주제 -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Happy

 

 

스님은 행복에 대하여 세 가지로 구분하여 말한다. 각종기고문이나 강연에서 늘 하는 말인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렇게 세 가지 행복에 대한 것이다.

 

스님이 이렇게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보는 것은 두 가지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모든 사회 모든분야에서 행복을 추구 하기 때문이라 하고, 또 하나는 옛날부터 스님들이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하여 괴로움이 다하면 행복이 온다는 뜻으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매우 위험하다. 불교에 대하여 단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로 단정지어 버리기 때문이다.

 

매우 넓은 수카(행복) 스펙트럼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동서고금이래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랐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행복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이를 부정할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종교이든지 행복을 말한다. 이 지구상에 출현한 종교치고 행복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종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래서 믿는다.

 

이처럼 어는 시대나 어느 사회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은 적이 없고 사람들은 모두 행복을 추구한다. 따라서 불교에 대하여 굳이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라거나 이고득락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불교의 다른 종교와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열반이라는 불교만의 고유성이 있음에도 이를 대표로 내세우지 않고 누구나 바라는 행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불교에 대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로 한정지어 버린다면 불교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런 행복이라는 말도 오욕락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스펙트럼에 매우 넓음에도 단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한정해 버린다면 불교의 정체성은 크게 훼손 될 것이다. 이런 행복론이 강원의 교재에 실려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만일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굳이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고, 굳이 불교라는 종교를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불교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론 근거가 되는 게송을 보니

 

각묵스님은 행복론을 말하면서 근거가 되는 게송을 예로 들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믿음이 여기서 인간의 으뜸가는 재화이며

법을 잘 닦아야 행복을 가져오느니라.

진리가 참으로 가장 뛰어난 맛이며

통찰지를 [구족하여] 살아야 으뜸가는 삶이라 부르느니라.

 

 

(상윳따 니까야 제1, 알라와까 경, S10:12)

 

 

빠알리니까야 에서는 수 많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게송을 근거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설명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법을 잘 닦는다.’는 것은 보시와 지계와 수행(dāna-sīla- bhāvanā-dhamma)을 말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SA.i.329) 그리고 계속해서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은 이 법을 닦으면 인간의 행복(manussa-sukha = 금생의 행복)과 천상의 행복(dibba-sukha = 내생의 행복)과 궁극적으로는(pariyosāne) 열반의 행복(nibbāna-sukha = 궁극적 행복)을 가져온다는 뜻이다.(SA.i.329)라고 덧붙이고 있다. 이 가운데서 보시(dāna)와 지계(sīla)는 인간의 행복과 천상의 행복을 얻는 수단이며, 수행(bhāvanā)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되고 팔정도로 귀결되는 도닦음(paipadā)은 궁극적 행복을 얻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 셋은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에도 모두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각묵스님,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1. 본서 1편의 주제 -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위 게송은 야차 알라와까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송이다.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부처님은 네 가지 답을 하였는데, 이중 행복에 대한 것은 두 번째인 법을 잘 닦아야 행복을 가져오느니라.”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법을 잘 닦는다.’것에 대하여 보시와 지계와 수행(dāna-sīla- bhāvanā-dhamma)이라 하여 주석서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 가지에 대하여 금생의 행복(보시), 내생의 행복(지계), 궁극적 행복(수행) 이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이와 다르다.

 

똑 같은 게송이 숫따니빠따에도 있는데

 

각묵스님이 행복론의 근거로 삼은 알라와까경(S10.12)은 상윳따니까야에 있다. 그런데 이 경은 숫따니빠따에서도 발견된다. 숫따니빠다의 알라와까경(Sn1.10)에 동일한 내용의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Sadadhīdha vitta puesassa seṭṭha
Dhammo suci
ṇṇo sukhamāvahāti
Sacca
bhave sādutara rasāna
Paññ
ājīvi jīvitamāhu3 seṭṭha.

 

[세존]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람에게 으뜸가는 재산이고,

가르침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옵니다.

진실이 맛 중의 맛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Āavakasutta-알라바까의 경, 숫따니빠따 Sn1.10,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 게송에서 dhammo’가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가르침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Dhammo : 열 가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의 길에 대한 법(十善業道法 : dasakusalakammapathadhammo) : 1)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법, 2)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는 법, 3)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는 법, 4)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삼가는 법, 5) 중상을 하는 것을 삼가는 법, 6)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삼가는 법, 7) 꾸며대는 것을 삼가는 법, 8) 탐욕이 없는 것, 9) 분노가 없는 것, 10) 올바른 견해를 지니는 것.

 

(Dhammo 각주, 전재성님)

 

 

Dhammo에 대한 각주를 보면 십선업에 대한 것이다. 이는 각묵스님이 설명한 법을 잘 닦아야에 대한 것과 다르다. 각묵스님은 이 Dhammo에 대하여 주석을 근거로 하여  보시와 지계와 수행라 하였고, 이는 결국 금생, 내생, 궁극의 행복에 대한 것과 같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야차 알라와까의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지혜(paññā)로 포커스가 맞추어진 게송

 

야차 알라와까는 부처님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한다. 으뜸가는 재산은 무엇이고, 무엇을 추구하면 안락이 오는지, 그리고 맛중에 가장 맛있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삶인지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그런 두 번째 질문을 보면 무엇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 옵니까? (Ki sū suciṇṇa1 sukhamāvahāti)라고 질문한다.

 

여기서 전재성님은 수카(sukha)에 대하여 안락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수카의 뜻이 행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안락, 즐거움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카에 대하여 반드시 행복이라는 뜻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초기경전에서는 수카라는 용어가 행복이라는 뜻 보다 즐김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카의 뜻은 긍정적인 것에서부터 부정적인 것까지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따라서 수카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단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알라와까는 무엇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 오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 수준에 맞추어 답을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 추구하면 안락을 가져옵니다. (Dhammo suciṇṇo sukhamāvahāti)”라고 말씀 하신다. 이때 가르침이라는 것은 각주에 따르면 십선행을 말한다. 이렇게 십선행을 닦으면 안락한 생활을 할 것이라 한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이 Dhammo에 대하여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 하여 궁극적 행복까지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는 다음 구절에 해당하는 몫이다. 왜냐하면 알라와까가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입니까? (Katha jīvi jīvitamāhu seṭṭha)”라고 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Paññājīvi jīvitamāhu3 seṭṭha)”라고 답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지혜(paññā)’로 포커스가 맞추어진다.  이는 이어지는 게송에서도 이런 관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문답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문) 어떻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입니까?

답)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문) 그리고 어떻게 완전히 청정해질 수 있습니까?

답)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집니다.

 

3.

문) 또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서 슬픔을 여의겠습니까?

) 배우려는 열망을 통해 지혜를 얻습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시종일관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각묵스님이 근거로 든 게송으로 행복론을 언급하였으나 내용을 보면 불교의 목적은 차라리 지혜론에 더 가깝다.

 

알라와까경을 보면 불교는 지혜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행복(sukha)라는 것은 단지 지혜의 전단계로서 지혜를 추구하다 보면 얻게 되는 부산물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행복론의 또 하나의 근거, 망갈라경(Sn2.4)

 

이처럼 각묵스님은 행복론에 대한 근거로서 알라와까경(S10.12)를 들었다. 그런데 하나 더 근거로 든 경이 있다. 그것은 망갈라경(Sn2.4)이다. 이 경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큰 행복 경이라 하였다. 그리고 망갈라에 대한 뜻풀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초기불전에서 행복으로 옮겨지는 단어로는 즐거움을 뜻하는 sukha와 길상, 행복, 행운 등으로 옮기고 있는 망갈라(magala)라는 술어를 들수 있다. 이 망갈라라는 단어는 행복을 뜻하는 의미로 초기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베다 문헌이나 대승불교 문헌에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행복을 강조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으로는 본서에서 첫 번째 경으로 싣고 있는『숫따니빠따』의「큰 행복 경」(Mahā-magala Sutta, 大吉祥經, Sn2:4/4647)을 들 수 있다.

 

(각묵스님,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1. 본서 1편의 주제 -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각묵스님은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는 바른 번역이 아니다. 망갈라(magala)라는 말이 행복의 뜻이 있긴 하지만 주로 행운, 축복, 길상의 뜻으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길상경(吉祥經)이라 하였다. 이는 각묵스님도 한자어로 大吉祥經이라고 괄호치기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위대한 축복의 경이라는 제목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용어의 잘못 사용에 대하여 행복경은 길상경(吉祥經)으로 불러야, 망갈라숫따(Mangalasutta, Sn2.4)라는 제목으로 비판한 바 있다.

 

망갈라(magala)를 행복이라 번역한 이유는?

 

이렇게 망갈라는 말이 행운, 축복, 길상을 뜻하는 것임이 분명함에도 왜 초불연에서는 행복이라는 말을 고수하는 것일까? 이는 이어지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경에서 세존께서는 12개의 게송을 통해서 아주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시는데, 특히 금생의 행복을 여러 가지로 나열하신 뒤에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청정범행을 닦으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라고 강조하고 계신다. 열반의 실현이야말로 궁극적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러 경에서 인간의 행복, 천상의 행복, 열반의 행복, 혹은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은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불교는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각묵스님, 『니까야 강독 II 들어가는 1. 본서 1편의 주제 -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각묵스님은 망갈라경에서 열반과 관련된 게송(stn267)을 근거로 하여 행복론을 설명하고 있다. 열반의 실현이 궁극적인 행복이라는 것이다. 망갈라를 행운이나 축복, 길상이 아닌 행복으로 번역한 이유라 보여 진다.

 

이와 같은 열반행복론은 종종 게송으로도 보인다. 대표적으로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S1.11)” 문구를 들 수 있다. 이는 한역으로 생멸멸이 적멸위락(生滅滅已 寂滅爲樂)’이다. 열반과 동의어인 적멸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열반이 곧 행복이다라는 열반즉행복론은 빠알리니까야에서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는다. 법구경 등 에서와 같이 열반즉행복이라는 말이 간혹 보인다. 그럼에도 망갈라경에서 열반이 곧 행복이라 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 본다. 이는 빠알리 원문에서 Nibbānasacchikiriyā ca eta magalamuttama.” 인데, 여기서 망갈라(magala)에 대하여 행복이 아닌 축복으로 번역하면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전재성님역)”이 된다. 이렇게 망갈라는 말은 지금 현재와 미래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수카(행복)는 알아차려할 대상

 

그럼에도 행복으로 번역하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느낌으로 된다. 느낌이라는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알아차릴 대상이 될 뿐이다. 만을 느낌을 그대로 내 버려 둔다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연기의 회전이 시작된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로 가는 길이다. 따라서 모든 느낌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하나의 느낌이다. 무상하게 변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할 수 있다. 그래서 행복은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이다.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가?

 

 

Phassena phuṭṭho na sukhena majje

Dukkhena phuṭṭhopi na sampavedhe

Phassadvaya sukhadukkhe upekkhe

Anānuruddho aviruddhakenaci

 

즐거운 감촉에 접촉해도 취하지 않고

괴로운 것에 접촉해도 흔들리지 않으면

두가지 즐겁고 괴로운 감촉에서 평정하니

어떠한 유혹과 혐오를 떠났네. (S35:94)

 

 

Ya pare sukhato āhu

tadariyā āhu dukkhato

Ya pare dukkhato āhu

tadariyā sukhato vidū.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두 개의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즐거운 것을 취하거나 집착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빠알리 게송을 보면 즐거운 것이라고 번역된 것은 수카(sukha)’인데, 이 수카가 보통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행복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즐거은 느낌, 행복한 느낌에 대하여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금 행복한 느낌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릴 대상일 뿐이지 결코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각묵스님의 글에 따르면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가 되어 버린다. 이는 글에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은 행복을 가르치셨다.”라고 하여 불교가 행복의 종교임을 기정사실로 하였고,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라고 하여 대승기신론에서 유래된 용어를 사용하여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행복론을 말하였다. 더구나 망갈라경의 예를 들어 열반의 실현이야말로 궁극적 행복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행운, 축복, 길상의 뜻이 있는 망갈라를 ‘행복’이라고 왜곡 하였다.

 

이렇게 상락아정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적 관점에서 초기불교에 대한 정의를 내렸고 또 행복이라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하여 망갈라의 뜻을 왜곡 하였다. 그런데 이런 대승불교적 행복론이 들어가 있는 책이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원에서 교재로 사용될 것이라한다.

 

하지만 초기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행복론을 강조하는 것은 가르침을 크게 왜곡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수카(sukha)라는 용어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빠알리니까에서 오욕락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두루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수카에 대하여 불교의 목적이라거나 불교가 추구해야 되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오욕락 추구가 행복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해탈과 열반의 추구가 행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은 행복을 가르치셨다.”라고 선언하거나 불교는 이고득락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극단적 쾌락과 선정에서의 수카(행복)

 

그렇다면 불교의 목적을 무어라 해야 할까? 그 답을 초전법륜경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한 초전법륜경에는 팔만사천 법문의 대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요약된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이다. 팔만사천 법문이 사실상 사성제를 펼쳐 놓은 것에 지나지 않고 이런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팔정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로 귀결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사성제에서 무엇을 말씀 하셨을까?

 

만일 누군가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 한다면 사성제에서도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성제 그 어디에도 행복을 추구하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극단적인 행복추구에 대한 경계의 말이 있다. 그것은 양극단 중의 하나인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까마수칼리까누요고(kāmasukhallikānuyogo)’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바탕을 둔 행복(kāmasukha)’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수카라는 말이 극단에 쓰인 경우에 해당된다.

 

수카라는 말은 네 가지 선정에서도 사용된다. 팔정도에서 올바른 집중(sammāsamādhi)이 이에 해당 된다. 이 때 행복(sukha)은 세 번째 선정에서 희열이 사라진 뒤,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고 고귀한 님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세 번째 선정에 들고(S45:8)”라는 표현으로 정형화 된다. 하지만 세 번째 선정에서 맛 보는 행복이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궁국적 목적이 될 수 없다. 열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따라 오는 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 수카(행복)

 

그런데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종종 열반이 행복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이처럼 긍정적 의미에서 행복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vipula sukha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광대한 지복을 얻는다.(Dhp 27)

 

2.

cittassa damatho sādhu citta danta sukhāvaha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 온다.(Dhp 35)

 

3.

citta takketha medhāvī citta gutta sukhāvaha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 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Dhp 36)

 

4.

sukho puññassa uccayo.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Dhp 118)

 

5.

dhīro ca dānam anumodanāno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그것으로 실로 내세의 안락을 얻는다. (Dhp 177)

 

6.

sukhā saghassa sāmaggī samaggāna tapo sukho.

참모임의 화홥도 행복이고화합한 님들의 수행도 행복이다. (Dhp 194)

 

7.

natthi khandhasamā dukkhā natthi santipara sukha             

존재의 다발에 비길 고통은 없고 적정보다 나은 안락은 없다. (Dhp 202)

 

8.

eta ñatvā yathābhūta nibbāna parama sukha.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면, 열반 곧, 위없는 지복을 얻는다. (Dhp 203)

 

9.

vissāsaparamā ñāti nibbāna parama sukha        

신뢰가 최상의 친구이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 204)

 

10.

adassanena bālāna niccameva sukhī siyā.

어리석은 자들을 멀리 여의면, 언제나 행복을 여의리. (Dhp 206)

 

11.

puñña sukha jīvitasankhayamhi sabbassa dukkhassa sukha pahāna    

목숨이 다할 때에는 공덕이 행복이고 일체의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 행복이다. (Dhp 331)

 

12.

adhigacche pada santa sakhārūpasama sukha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Dhp 368)

 

 

이렇게 수 많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공통적으로 수카(sukha)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카라는 용어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기 때문에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열반까지 행복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의 행복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 세 가지로 나누어 행복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단지 여러 가지 다양한 행복스펙트럼을 표현 하다 보니 많아 졌고 후대에 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금생, 내생, 궁극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눈 것이다.

 

둑카(괴로움)를 기반으로 하는 사성제

 

수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극단적인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까마수카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그 범위가 너무 넓어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행복한 상태, 즐거운 상태, 안락한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이런 수카에 대하여 불교의 목적이라거나 불교가 추구하는 것이라거나 “부처님은 행복을 가르치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서 네 가지 진리는 모두 괴로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둑카(괴로움)를 기반으로 하는 사성제는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 ariyasacca),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dukkhasamudayo ariyasacca),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dukkhanirodho ariyasacca),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이렇게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이 네 가지 진리 그 어디에도 수카(행복)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모두 둑카(dukkha)’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을 펼치셨다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을 소멸하게 되면 행복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 오게 되어 있다. 마치 열심히 일하면 돈은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굳이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괴로움을 소멸하면 행복은 자동으로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몸부림 치면 칠수록

 

그런데 행복을 목적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 이는 집착이 된다.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돈을 버는 데 목적을 둔다면 그 돈은 멀리 달아 날 것이다. 그리고 있는 돈 마저 날리게 될지 모른다.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기 위하여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까지는 것과 같다.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행복해지기 위해서 몸부림친다면 그 행복은 더 멀리 달아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의 1 1절이라고 볼 수 있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S1.1)”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거센물결이란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이라 한다. 그런 거센물결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1) 감각적 쾌락의 거센 물결, 2)존재의 거센 물결, 3)견해의 거센 물결, 3)무지의 거센 물결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런 거센 물결에 휩쓸리면 윤회할 수 밖에 없는데, 열반은 이러한 거센 물결이 미치지 않는 해안을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 행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행복해지기 위하여 집착한다면 그 행복은 더 멀리 달아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왜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는가?

 

만일 불교의 목적이 행복에 있다면 사성제는 수카를 기반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행복의 거룩한 진리’, ‘행복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 ‘행복의 성취의 거룩한 진리’, ‘행복의 성취의 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라고 행복을 기반으로 한 진리를 선포했어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둑카를 기반으로 한 진리를 선포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을 소멸하면 행복은 자동적으로 얻어짐을 말한다. 마치 코끼리의 발바닥이 모든 동물의 발바닥을 모두 포섭하듯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든 행복을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행복을 목적으로 하였을 때 가르침이 한정 되어 버린다. 그 많은 행복 중에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인지 애매 모호하게 되어 버린다. 따라서 진리를 표현할 때는 긍정적 언표 보다 부정적 언표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누군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 사성제가 결국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다라거나 부처님은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예를 들어 열반에 대하여 행복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마하야나주의자들에게는 열반은 상락아정이 되어 버린다. 이렇게 행복만을 추구하다 보면 전도된 인식이 일어나기 쉽다. 이런 염려에서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하여 즐겁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실체없음에 대하여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더러운 것에 대하여 청정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Vipallāsasutta-전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4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전도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이와 같은 뒤집힌 생각이 일어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고, 더러운 것이라고 보아야 함에도 거꾸로 항상하고, 즐겁고, 실체가 있고, 깨끗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괴로움을 기반으로 한 사성제를 설하셨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오늘날 불교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어떤 이는 불교가 행복의 종교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명칭으로 한정한다면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표현한다고 볼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주장하였을 때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거나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누군가 불교는 행복의 종교라고 주장한다면 그 행복이라는 말에 갇혀 버릴 것이다. 불교에는 자비의 가르침도 있고, 지혜의 가르침도 있고, 평등의 가르침도 있고, 사띠 수행의 가르침도 있고 각종 가르침이 있음에도 누군가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한정해 버리면 눈먼 장님이 꼬끼리 뒷다리 만지기 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크게 왜곡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불법이 쇠퇴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불자라면 어떻게 말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경전에 기반하여 말하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의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에 포섭 되듯이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사성제에 포섭된다. 따라서 괴로움을 기반으로 한 네 가지 성스런 진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동시에 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초불연 니까야 강독에서 보는 행복론은 불자들에게 커다란 혼란을 야기 할 수 있다. 다만 상락아정의 마하야나주의자들에게는 예외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2013-12-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