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뜻도 모른 채 “나모라 다나다라…”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불편한 진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4. 10:29

 

 

뜻도 모른 채 “나모라 다나다라…”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불편한 진실

 

 

 

댓글을 받았는데

 

댓글을 받았다. 수 많은 댓글이 올라 오지만 답변을 못하고 있다. 글쓰기로 반나절을 보내고 나머지 반은 밀린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일이 답글을 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 대해서 항상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몇 일전 받은 글은 간곡하게 답변을 요청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연꽃님의 글을 우연찮게 접하게 되어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그런데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최종 가르침에 가는지 못가는지 못르겠으나,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겠지요....말세중생의 근기로 보아서는 어쩌면 이 수준도 높은 것이 아닐까...이렇게라도 기도하고 경전을 보는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가는길이 아닐까? 그리고 삼보님의 보살핌으로 갈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어느정도 수행과정이 지나면 초기경전의 인연이 되어 수행할 토대가 만들어지는 한 과정이 아닐까?
늘 이렇게 좋게 생각하면서 한 10년간 기존에 해오던 천수경과 나무대불정능엄신주 등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오고 있는데, 늘 궁금한것이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것인지 아닌지가 늘 알고 싶었습니다...초기경전 강독을 잃어보고 했습니다만, 직장 생활을 하느라 다 볼 시간이 없어 그러니.....꼭 대답을 부탁드립니다
...

, 삼보님의 보살핌이 없다면 이렇게 신심이 생기거나 꾸준히 밀고나갈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사회인이 이렇게 밀고 나갈힘은 삼보님의 보살핌이 반드시 있기때문일 것이다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초기경전 또한 시기가 되어 내게 접해지지 않아나 생각이 들고요....해서 앞으로도 기도는 꾸준히 하면서 초기경전의 사마따나 위빠사나 수행을 겸해서 하려고 합니다....이에 대하여해도 한 말씀 주시길 부탁드리고요
...
늘 행복하시고 만복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리며, 앞으로 자주들어와 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지금까지 한 300페이지 정도 보았는데.....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고맙습니다...

 

(B법우님, http://blog.daum.net/bolee591/16155787)

 

 

글의 요지는 이렇다.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것인지 아닌지가 늘 알고 싶다는 것과 기도와 위빠사나 수행을 겸해서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으로 난감하다. 학자도 아니고 스님도 아닌 보통불자가 답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블로그라는 것이 있어서 매일 일상적 글쓰기하는 것에 불과한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물어 보았을 때 당혹스럽다.  그럼에도 간곡한 요청이라 알고 있는 상식을 동원하고 경전을 근거로 답할 수 밖에 없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부처님이 설하지 않았다

 

먼저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한 것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다. 이는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동안 학자들의 논문으로도 발표 된 바 있고 책으로도 밝혀진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묘장구대다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대하여 시바신(神) 성관자재(聖觀自在), 인도신화로 신묘장구대다라니(천수다라니), 2010-09-0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올린 글은 동국대 正覺(문상련)님의 논문 ‘천수다라니의 인도신화학적 고찰’을  근거로 한 것이다.

 

 

천수다라니의_인도신화학적_고찰.hwp

 

 

논문에 따르면 신묘장구대다라니는 힌두교의 시바신앙이 불교에 전이 되어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신묘장구대다라니는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라 인도의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힌두교의 ‘시바신을 찬탄’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시바신의 중생구원에 대한 찬탄이다. 인도신화에 따르면 ‘시바(śiva)’가 독을 기꺼이 마심으로써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자비의 위신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중생을 위하여 기꺼이 독을 마심에 따라 푸른 목을 가진 시바신에 대한 찬탄이 신묘장구대다리니라는 것이다.

 

시바신에 대한 찬탄

 

신묘장구대라니가 시바신에 대한 찬탄 이라는 증거는 ‘푸른 목’을 뜻하는 ‘니라간타’에서 찾을 수 있다. 다라니를 보면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푸른 목을 가진 분의 본심으로 귀의하옵니다.”라는 뜻이다. 이때 니라간타가 ‘푸른 목’이라는 뜻인데 이를 한자어로 ‘청경 (靑頸)’이라 한다. 그래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또 다른 이름을 ‘청경다라니’라고도 한다. 이처럼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성관자재를 공덕을 찬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독을 마셔서 푸른 목이 된 힌두교의 시바신에 대한 찬탄인 것이다.

 

 

Shiva drinking of the Hala hala

 

 

 

불편함을 넘어 배신감으로

 

‘불편한 진실’이라는 말이 있다. 진실을 알고 나면 불편하다는 뜻이다. 바로 신묘장구대다리니가 그렇다. 불자들의 생활경전인 천수경에 실려 있고 모든 법회의식에서 독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심있는 불자라면 늘 암송하고 있는 신묘장구대라니가 시바신에 대한 찬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불편하다는 것이다. 아니 불편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절에서 스님들이나 법사들이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대하여 접근하는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번역을 하지를 않고 산스크리트어 원문대로 소리를 내어 주문 외우듯이 독송을 하게된 전통이 생기게 된 이유는, 이 불경의 내용이 너무 깊고 묘한 것이어서 다른 언어로 그 뜻을 번역하면 본래의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가 너무 편협하고 잘못된 의미로 훼손되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래서 번역을 하지 않고 원문대로 독송하는 전통이 생겼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엔하워키 미러)

 

 

일반적으로 진언에 대하여 해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한다. 만일 해석하면 깊고 묘한 뜻이 훼손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번역 없이 산스크리트어 그대로 독송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뜻도 모른 채 낭송한다.

 

뜻도 모른 채 “나모라 다나다라…”

 

수계받을 때 참회진언을 보면 “옴살바못자모지사다야사바하”라 하는데 이에 대한 뜻은 알 수 없다. 이처럼 짧은 진언도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보다 수십배 긴 신묘장구대다라니 역시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불자들은 뜻도 모른 채 “나모라 다나다라…”하며 합창하듯이 독송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많이 외면 좋다고 하더라’는 말을 믿고 열심히 독송한다. 그래서일까 사찰에서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독송 기도회가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독송 기도회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독송 기도회에서는 보통 108독을 한다. 10시에 시작 하여 새벽 2시나 3시에 끝난다. 기도회를 하는 방법은 이렇다. 저녁 10시에 기도회가 시작 되면 가장 먼저 108배를 한다. 108참회문에 맞추어 108배를 하고 나면 한시간 가량 소요 된다. 그 다음에 천수경 독송에 들어 간다.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전송과 후송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송이 끝나고 신묘장구대다라니에 들어 가면 108독을 하게 된다. 그런데 독송을 하다 보면 점점 빨라진다. 나중에는 너무 빨라져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지경이 된다. 물론 뜻을 알고 독송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함께 모여서 독송하다 보면 출출해진다. 도중에 팥죽 먹는 시간이 있다. 팥죽을 먹고 난 다음 다시 독송으로 들어 간다. 마침내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이 끝나면 “일쇄동방결도량”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신호탄이다. ‘일쇄(一灑)’라는 말이 의미 하듯이 마치 물을 뿌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다음에 이어서 “일쇄동방결도량”으로 시작 되는 후송이 나오면 마치 찬 대야물에 머리를 담구는 것처럼 잠이 확 달아남을 느낀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갈 수 있는 시간이 왔음을 알게 되고 오늘도 끝까지 참고 견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

 

이렇게 밤 10시에 시작된 기도회는 중간의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새벽 두시나 세시에 끝나게 되는데 그 충만되고 성취한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도 한다. 아마 이런 방법이 대부분 사찰에서 행하고 있는 신묘장구대다라니 철야 기도회 일 것이다.

 

이 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중생을 구원하는 성관자재의 자비행에 대하여 찬탄하고 또한 구원을 바라는 것이 천수다라니의 주된 내용인데 ‘유신론적’이며 ‘타력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른 영향이다.

 

기도를 그만 둔 이유

 

한 때 열심히 기도하였다. 다른 것 보다 신묘장구대다리니 108독 철야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수 차례 가량 참석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도 하지 않는다.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실체를 알고 나서부터 더 이상 기도할 필요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참으로 입으로 발설하기 민망한 불편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또 기도를 그만 둔 이유는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부터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도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처님은 기도를 부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처님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2013-05-2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기도는 왜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것은 안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천도기도와 저주기도를 들 수 있다.

 

천도기도의 경우

 

천도기도가 있다. 누군가 악하고 불건전한 산 자가 있다. 그 자가 죽어 유족이 천도기도를 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경에 따르면 천도기도에 대하여 ‘호수와 돌덩이 비유’를 들고 있다. 누군가 호수에 돌덩이를 던져 놓고 “돌덩이야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기도 하여 보았자 돌덩이는 떠 오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삿된 견해에 사로잡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지어다’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습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누군가 죽었는데 유족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천도기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거금을 내어 천도기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조건이 있다. 그것은 믿음과 지계와 보시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지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오계도 지키지 않고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많이 하는 자에게 아무리 천도기도를 하여도 먹혀 들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계를 어기고 신구의로 악업을 지은 자는 천도기도와 관계 없이 악처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행위에 대한 과보로서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날 것임을 말한다. 따라서 아무리 돈을 들여 천도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음을 말한다. 다만 오계를 준수하고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자는 따로 천도기도를 해 주지 않아도 선처에 태어날 것이다.

 

저주기도의 경우

 

다음으로 저주기도가 있다. 저주기도란 무엇인가? 지금 착하고 건전하게 산 자가 있는데 누군가 저주의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호수와 기름의 비유’를 들고 있다. 기름은 가볍기 때문에 호수 표면에 뜰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기름아 가라 앉아라”라고 한다면 이런 기도는 먹혀 들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촌장이여,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꾸며 대는 말을 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지어다’ 라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하더라도 촌장이여, 그 때에 그 사람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오계를 준수하고 착하고 건전하게 산 자가 있다. 그 사람이 죽었는데 누군가 악처에 태어나길 바라면서 저주의 기도를 하였다고 하자. 그렇다고 하여 악처에 태어날까? 마치 호수에 기름이 떠 있듯이 기름은 호수의 바닥으로 결코 가라 앉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신구의 삼업이 청정한 자에게 아무리 저주의 기도를 하여 그 기도는 먹혀 들어 가지 않는다. 오히려 오계준수와 신구의 삼업의 청정에 따라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천도기도와 저주기도에 대하여 호수의 돌과 기름의 비유로 기도의 무의미함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루어질 수 없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금기시 하는 것

 

법우님은 두 번째 질문으로 기도와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이에 대하여 역시 답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아직 배우는 입장이고 아직까지 한번도 앞에 서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 경험을 이야기 한다면 기도와 위빠사나 수행은 양립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바라는 것과 알아차림은 극과 극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것이 바라는 것이 특징인데 위빠사나는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인 것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므로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처를 가 보면 알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금기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개념(관념)’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재 하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경행과 좌선이 끝난 다음에 인터뷰시간이 있는데 이때 각자 의견을 말한다. 그런데 누군가 자아나 참나, 불성. 기도 등에 이야기 하면 즉각 “개념(관념)을 이야기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세요!”라는 말을 듣는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관찰의 대상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딱딱하다든가 차갑다든가 등의 느낌을 말하라는 것이다. 느낌으로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 참나나 불성, 기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기도의 손을 내려 놓지 마라”

 

사무실이 있는 빌딩 옆에 중형급 교회가 있다. 늘 지나다니며 보는데 항상 플레카드가 걸려 있다. 때에 따라 철 따라 내용은 다르다. 어느 때 보니 “기도의 손을 내려 놓지 마라”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렇게 유일신교에서는 기도를 강조한다. 그래서 항상 기도해야 함을 말하고 실제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불공’이라는 좋은 말이 있음에도 유일신교에서나 사용하는 기도라는 말을 서슴없이 쓴다는 것이다.

 

자력의 종교이자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서 기도라는 말은 매우 어색하다. 그럼에도 기도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따라 하기도 있지만 ‘대승불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는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인

 

천수다라니가 성관자재의 보살행을 찬탄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시바신을 찬탄하는 것이다. 이는 시바신이 중생을 위하여 기꺼이 독을 마심에 따라 푸른 목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그런 시바신의 중생구원에 대한 자비행의 찬탄이 신묘장구대다라니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매우 ‘유신론적’이고 ‘타력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맞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끊임 없이 알아차릴 것(sati)을 말씀 하셨지 어떤 초월적 대상에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법회의식을 할 때 마다 “나모라 다나다라…”로 시작 되는 천수다라니가 울려 퍼진다.

 

 

 

 

2014-01-04

진흙속의연꽃

천수다라니의_인도신화학적_고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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