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하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4. 23:00

 

왜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하나

 

 

 

하루 해가 무척 짧다. 일년 중 가장 해가 짧은 때가 지금 이맘때 쯤이다. 동지에서 피크를 이루고 점차 해가 길어지는 방향으로 가지만 아침은 너무 늦게 오고 저녁은 너무 일찍 온다. 더구나 날씨까지 추워 게을러지기 쉽다. 그리고 늦잠자기 쉽다.

 

게으름을 경책하는 글

 

게으름을 경책하는 글을 발견하였다. 마성스님의 게으름은 죽음의 이라는 글이다. 법구경 21번 게송에 대한 글이다. 글에서 인용된 법구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게으르지 않음은 불사의 길이요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다.

게으르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으며

게으른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법구경 제21)

 

 

글에서 스님은 게으른 자의 특징에 대하여 말하였다. 게으른 자는 항상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갈라와다경에 따르면 게으름에는 여섯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다. 너무 추워서, 너무 더워서, 너무 일러서, 너무 늦어서, 너무 배고파서, 너무 배불러서 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게으름만 피우다 보면 가난뱅이가 되기 쉽상이라 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비가 온다고 일을 안하고, 바람 분다고 일을 안하고, 눈이 온다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 일을 할까? 그래서 게으름은 가난뱅이가 되는 지름길이고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서 게으름은 죽은 자와 같다고 하였다.

 

Appamādo(불방일)pamādo(방일)

 

법구경 21번 게송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 원문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Appamādo amatapada,

pamādo Maccuno pada,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527)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528).

 

(Dhp21, 전재성님역)

 

 

번역을 보면 appamādo 에 대하여 방일하지 않음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마성스님이 언급한 게송에서 게으르지 않음에 해당된다. pamādo방일이고 게으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방일과 죽음을 대비 시켜 놓았다. 그래서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amatapada)’이라 하였고, 방일하는 것이 죽음의 길(Maccuno pada)’이라 하였다. 불사(amata)와 죽음(Maccu)에 대하여 불방일과 방일로 대비하여 읊은 것이다.

 

불사의 길과 죽음의 길

 

게송에서 첫번째 구절과 두번째 구절을 보면 불방일과 방일에 대하여 불사와 죽음으로 대비 하여 놓았다. 이에 대하여 각주를 참고 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비유

상태

  

appamādo

불방일

Amatapada

불사의 길

항상 일어나는 알아차림의  상태

열반의 생겨나지 않음(불생) 때문에 늙음과 죽음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불사라 불리우는 길로 여행하기 때문이다.

pamādo

방일

Maccuno pada

죽음의 길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

태어남을 뛰어 넘지 못하고 태어나서 늙음과 죽음에 종속된다.

죽음은 방일한 자에게 찾아 온다.

 

 

게송에서 첫 번째 구절과 두 번째 구절에 대한 것이다. 불방일은 불사의 길이고, 방일은 죽음의 길이라 하였다. 이는 윤회의 종식과 윤회의 길로도 설명된다. 그래서 방일하는 자는 죽음을 뛰어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불방일과 방일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발자국의 경(S45.140)에서

 

각주에 따르면 불방일에 대해서는 SN.V.43의 예를 들었다. PTS본 상윳따니까야 5 43페이지라는 뜻이다. 찾아 보면 S45.140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발자국의 경(S45.140)’이다. 불방일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걸어 다니는 뭇삶의 발자국이든지 그 모든 것들은 코끼리의 발자국에 들어가므로 그들 가운데 그 크기에 관한 한 코끼리의 발자국을 최상이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착하고 건건한 것들이 있든지 그 모든 것들은 방일하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고 방일하지 않음을 귀결로 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 가운데 방일하지 않음을 최상이라고 한다.”

 

(padasutta- 발자국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140, 전재성님역)

 

 

이 세상의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발바닥은 코끼리발바닥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착하고 건전한 것들 가운데 불방일이 최상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다름 아닌 알아차림(sati)’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방일하지 않음은 본질적으로 알아차림을 잃은 상태가 아닌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항상 일어나는 알아차림의 상태를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착하고 건전한 법들 가운데 알아차림이 최상인 이유는 마치 코끼리 발바닥이 모든 동물의 발바닥을 포섭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불방일의 동의어는 알아차림이라 볼 수 있다.

 

방일하지 않음의 경(S45.54)에서

 

그런데 각주에서는 불방일에 대하여 또 하나의 경을 예로 들었다. 그것은 SN.V.30이다. 이는 이는 상윳따니까야 방일하지 않음의 경(S45.54)’에 대한 것이다. 불방일과 관련된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태양이 떠 오를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바로 새벽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 생겨날 때 그 선구이자 전조가 되는 것은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Appamādasutta- 방일하지 않음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54, 전재성님역)

 

 

 

 

 

Dawn

 

 

 

경을 보면 불사의 길에 대하여 팔정도로 하였다. 팔정도를 닦으면 다시는 태어남이 없는 불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부지런해야 팔정도를 닦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불방일은 항상 팔정도를 닦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데 이는 해가 뜨기 전에 동녘이 훤해 지는 새벽과도 같은 것이라 본다. 이는 앞서 언급된 알아차림 보다 좀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부지런한 자가 새벽 같이 일어나듯이 불방일은 해가 뜨기 전에 새벽과도 같은 것이다. 새벽이 해가 뜨기 전의 전조에 해당되는 것이라면, 불방일은 팔정도를 닦는 전제 조건이 된다. 이렇게 각주에서는 상윳따니까야의 두 개의 경을 예로 들어 불방일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이미 죽은 자란?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을 보면 사람과 죽음으로 대비 하여 놓았다. 그래서 불방일자는 죽지 않는 자라 하였고, 방일자는 죽은 자(matā)’라 하였다. 죽은 자라는 뜻의 matā는 과거분사(pp) 형으로 이미 죽은 자(dead)’를 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528) ye pamattā yathā matā : DhpA.I.229에 따르면, 방일한 자들은 방일을 뜻하는 죽음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들이다. 나무처럼 의식의 결여로 삶의 기관의 중지에 의해서 죽은 자와 같다. 그러한 장자에게는 우리가 음식을 보시하겠다. 우리가 계행을 지키겠다. 우리가 보살을 지키겠다.’라는 정도로 그에게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가 교단에 속한 자라면, ‘우리는 스승과 친교사에게 의무를 다 하겠다. 우리는 명상을 닦겠다.’라는 정도로 그에게 의식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은 자와 같다.

 

(528 번 각주, 전재성님)

 

 

게으른 자는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말이다. 그 어떤 의욕도 일어 나지 않기 때문에 마치 정신기능이 없는 나무토막과 다름 없다는 말이다.

 

죽지 않는 자란?

 

그렇다면 죽지 않는 자는 어떤 상태를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527) Appamattā na mīyanti  : 알아차림을 계발시켜 알아차리는 자는 단시간에 길과 경지를 깨닫고 두 번째나 세 번째의 삶에서 태어남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간에 결코 죽지 않는다.

 

(527 번 각주, 전재성님)

 

 

깨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알아차림을 계발하여 도와 과를 이루었을 때 최소한 일곱생 이내에 불사의 경지가 되기 때문에 죽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주에서는 그들은 살든지 죽든지 간에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왜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하나

 

법구경 21번 게송은 불방일(Appamādo)’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불방일과 동의어는 알아차림(sati)이다. 그래서 항상 깨어 있음은 죽지 않는 길, 즉 불사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방일자는 결코 죽지 않는 다고 하였다. 이는 불사를 말한다.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죽을 일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방일자, 즉 게으른 자는 이미 죽은 자와 같다고 하였다. 마치 나무토막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자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알아차림이 없는 자이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유지 하는 자는 죽지 않는 자와 같고, 알아차림이 없는 자는 죽은 자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지런 한 자는 마치 해뜨기 전의 새벽과도 같고 항상 깨어 있는 자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서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h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handa'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

Aya tathāgatassa pacchimā vācā

 

 그리고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지금 그대들에게 당부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었다. (D16)

 

 

 

2014-01-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