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이동중지 명령
심야시간에 ‘뉴스속보’가 떳다. 전북고창에서 발생한 조류 인풀루엔자(AI)발생에 따라 통행을 제한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동중지 명령’이다. AI확산을 막기 위하여 농가에서 일하는 사람과 차량에 대하여 이동을 금지 하는 조치이다. 마치 전염병이 돌았을 때 금지구역을 설정하여 세상과 격리 시키는 조치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철새들로 인하여 AI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그래서 조류독감에 감염된 수 만마리의 오리에 대하여 집단 살처분하였다고 한다. 또 다시 몇 년 년만에 ‘살처분’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산채로 생매장하는 살처분
살처분은 아직까지 국어사전에도 등재 되지 않는 말이다. 인터넷국어사전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죽여서 처분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화면을 보면 안락사 시켜 땅속에 파묻는 것이 아니라 ‘산채로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트럭에 가득 실은 오리를 미리 파 놓은 커다란 구덩이에다 쏟아 붓는 것이다.
이런 살처분 방식은 몇 해 전 돼지를 산채로 생매장 시킨 장면을 떠 올리게 한다. 그 때 당시 어느 단체에서 생매장 된 돼지의 끔찍한 울음소리를 동영상에 담아 고발한 적이 있었는데 만일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 ‘생지옥’이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글을 ‘“나는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살처분과 공범자(2010-12-24)’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먹고 먹히는 비정한 세계
자연 다큐 프로를 보면 동물의 세계를 자주 보여 준다. 특히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에 대한 세계를 보면 ‘비정’하다. 사자는 새끼를 위하여 필사적으로 사냥을 해야 하고, 사냥의 대상이 되는 동물은 살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쫒고 쫒기는 장면을 두둥 거리는 북소리 음악과 함께 곁들여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런 동물계의 약육강식 장면은 그래도 신사적이다. 동물보다 더 작은 세계인 조류의 세계, 수중의 세계, 곤충이나 벌레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 장면을 보면 더 끔찍하다. 화면을 보면 대량으로 태어나서 대량으로 잡아 먹히는 먹이 사슬 구조를 보여 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말은 마치 난생에서나 쓰여지는 말처럼 보여 진다.
대량으로 태어나 매우 짧은 기간을 살다가 대량으로 죽기 때문에 생명이 그다지 가치가 없어 보인다. 육지에서 자라는 동물 보다 물속에서 자라는 어류의 생명이 더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크게 게의치 않는 것 같다.
생명도 몸체의 크기에 따라
몸집이 큰 소나 말 등과 같은 생명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다큐 프로를 보면 어떤 의식을 치루는 것을 본다. 될 수 있으면 고통없이 빨리 보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죽은 동물에 대하여 간단한 의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낚시를 즐기고, 물고기 잡는 장면을 아무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심지어 꿈뜰 거리는 문어를 펄펄 끓는 물속에 집어 넣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가 하면, 산낙지를 통째로 먹는 장면도 보여 준다.
이렇게 살아 있는 생명도 몸체의 크기에 따라 달리 대우 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코끼리 처럼 몸체가 큰 생물은 좀 더 정신적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고 죽이는 것에도 신중하지만 물고기처럼 정신능력이 현저 하게 떨어지는 생물은 죽여도 아무런 느낌이 일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논리로 본다면 생명이 있는 매우 작은 미생물을 죽여도 역시 마음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생명은 있지만 정신기능이 없는 식물의 경우 베어 버려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몸체에 따라 정신능력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태란습화도 중생인데
금강경에서 부처님을 사생자부라 하였다. 이는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이렇게 사생에 대한 자애로운 아버지와 같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란습화 이렇게 사생은 모두 중생에 해당된다. 공통적으로 정신기능이 있는 것을 말한다.
모기와 같은 습생도 미약하나마 정신 기능이 있기 때문에 뭇삶(중생)으로 보는 것이고, 천상에 태어나는 존재인 화생은 고도의 정신기능이 있지만 똑같이 뭇삶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모기와 같은 뭇삶이나 사람과 같은 뭇삶이나 정신기능을 가진 유정이라면 모두 생명을 가진 귀중한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벌레 하나 죽이는 것도 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살생에 해당된다. 그래서일까 남방불교에서는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기에 안거를 하고 있고, 또 파리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모기를 잡아 죽이지 않고 밖으로 내 보내 주고 있다고 한다.
살인금지가 아니라 살생금지
불교는 살생을 금지 하고 있다. 살인금지가 아니라 ‘살생금지’이다. 사람만 죽이는 것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이는 것을 금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논리에 따른다면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물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어부가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자꾸 죽여서 팔면, 그 행위로 인하여 그 생활로 인하여 코끼를 타거나, 수레를 타거나, 가마를 타거나, 재산을 향유하고, 많은 재산을 영위한다고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Macchika sutta-어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8, 전재성님역)
살아 있는 생물인 물고기를 잡아서 팔았을 때 과연 잘 살 수 있겠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제자들은 “세존이시여,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닭모가지를 비틀 때
이어서 부처님은 물고기를 자꾸 죽여서 팔고 생활을 여기하는 자들이 많은 재산을 가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신다.
“수행승들이여, 그가 죽음에 쫒기는 물고기를 살해할 때 악한 정신으로 그 동정을 살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코끼를 타지 못하고, 수레를 타지 못하고, 가마를 타지 못하고, 재산을 향유하지 못하고, 많은 재산을 영위하지 못한다.”
(Macchika sutta-어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8, 전재성님역)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일 때 그 마음은 ‘악한 상태’라는 것이다. 시골에서 닭을 잡을 때 닭모가지를 비틀어 잡는데, 이때 악한 마음상태가 된다. 그런 악한 마음을 가졌다면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물고기에 대한 살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소도살자, 양도살자, 돼지도살자, 새나냥꾼, 사슴사냥꾼 까지 이야기 하신다.
가져서는 안될 네 가지 직업
물에서 사는 어류에서부터 육지사는 축생과 동물에 이르기 까지 살생하여 생업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가지지 말아야할 직업으로서 1) 무기와 관련된 직업, 2.) 노예나 매춘에 관련된 직업, 3) 동물을 도살하는 직업, 4). 독약이나 술이나 마약을 거래하는 직업 이렇게 네 가지 종류를 들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동물을 죽이는 직업이 있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불살생계’에 따른 것이다.
개차법(開遮法)이 있는데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불살생계는 오로지 불교에만 있는 것이다. 타종교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있어도 살생하지 말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 살생을 금하다 보니 살생을 할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교의 실천윤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가 커다란 문제로 대두된다. 이에 관하여 직업에 따라 차별적으로 오계를 적용해야 됨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를 개차법(開遮法)이라 한다.
개차법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열렸다 닫혔다 하는 법’을 말한다. 계는 목숨을 다하여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계차법에 따르면 계란 올바른 정신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계는 그 우열이 있으니 절대계에 비추어 나머지 계의 파계는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차법에 따르면 모든 계는 자신의 올바른 삶을 위하여 또 타인의 행복을 위하여 실천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대승의 계차법에 따르면 “계는 지킴으로서 지키며, 파함으로써 지킨다. 계는 파함으로써 파하며, 지킴으로써 파한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개차법을 적용하면 어떤 것이든지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하여 개차법을 적용하면 오계 중에 ‘불음주계’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한해서 개차법을 적용하면 ‘불살생계’는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살아 있는 것 생류에 대해서는 ‘자애심’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Theyyaṃ na kareyya na musā bhaṇeyya
Mettāya phasse tasathāvarāni,
Yadā vilattaṃ manaso vijaññā
Kaṇhassa pakkhoti vinodayeyya.
도둑질을 하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
마음의 혼란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이 곧 악마의 동반자라 생각하여,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stn967)
(Sāriputta sutta-사리뿟따의 경, 숫따니빠따 Sn4.16,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사리뿟따존자가 읊은 것이다. 이 경은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천상세계의 신들에게, 간담바 나무 밑에서 한쌍의 신통력을 행사하여 아비달마를 설하고 지상에 내려올 때의 사건과 관련된 것이다. 게송에서 불살생에 대하여 “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살생에 대하여 정신 기능이 있는 유정체에 대하여 적용 되는 것이라 알고 있다. 따라서 식물처럼 정신기능이 없는 무정체에 대해서는 살생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물은 베어도 또 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기능이 있는 생명체는 베면 죽는다. 그래서 다음 생에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유정물과 무정물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시리뿟따존자는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자애의 대상이 됨을 말한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역을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식물과 동물에도 자애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번역은 이와 다르다. 나까무라 하지메역과 이를 중역한 법정스님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盗みを行なってはならぬ。虚言を語ってはならぬ。弱いものでも強いものでも(あらゆる生きものに)慈しみを以て接せよ。心の乱れを感ずるときには、「悪魔の仲間」であると思って、これを除き去れ。
(stn967, 中村元訳)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라. 마음의 혼란을 느꼈을 때는 <악마의 무리>라 생각하고 이것을 제거하라.
(stn967, 법정스님역)
나까무라 하지메는 ‘弱いものでも強いものでも’라 하여 ‘약한 것이나 강한 것도’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괄호를 이용하여 ‘소위 살아 있는 것’즉, ‘생류(生類)’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 생류라는 것은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해당될 것이다. 따라서 힘이 센 동물이건 약한 식물이건 간에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고 죽이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다.
불살생이 아니라 자애의 마음을
죽이는 것과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의 차이는 매우 크다. 살생한다는 것은 살인 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큰 죄업에 속한다. 그런데 정신적 능력이 뛰어난 존재를 살생하였을 때 역시 과보도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과 같은 성자를 살해 하는 과보는 매우 크다고 하였다.
동물의 경우도 지적 능력이 있고 몸체가 큰 동물의 경우 살생과보 역시 크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신기능이 떨어지고 몸체가 작은 동물이나 어류, 곤충의 경우 비록 살생을 하더라도 그 과보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신기능이 없는 식물 역시 그 과보는 미미하거나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 하기 위해서는 정신기능이 없는 것 또는 약한 것은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 다만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물이나 동물 또는 약한것이나 강한 것에 대하여 불살생이 아니라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고 하였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애나 자비에 대하여 주로 인간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자비사상은 인간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자애사상을 표현한 대표적 경이라 볼 수 있는 멧따경(자애경, Sn1.8)에서는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
길다랗거나 커다란 것이거나,
중간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미세하거나 거친 것이거나,(stn146)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거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stn147)
라 하여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자애의 대상이 됨을 노래 하였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경의 후반부에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실천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애의 마음을 냄으로 인하여 자신의 마음이 청정해짐을 말한다. 그래서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내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무엇일까? 무조건 상대방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만 내면 되는 것일까? 그러면 상대방이 이를 감지하여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먼저 ‘자신의 변화’부터 촉구한다. 자신의 마음이 ‘온화’해졌을 때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상대방에 대하여 미움과 원한과 적대담으로 가득찬 상태에서는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없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분노, 적의, 원한 맺힌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조절하여 심신의 안정을 이루었을 때 상대방에 대한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부터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으로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 수 없음을 말한다.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타인에게 절대로 해를 끼칠 수 없다.
Sabbā disā anuparigamma cetasā
Nevajjhagā piyataramattanā kvaci,
Evaṃ piyo puthu attā paresaṃ
Tasmā na hiṃse paraṃ attakāmoti.
[세존]
“마음이 어느 곳으로 돌아다녀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런 님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신을 위해 남을 헤쳐서는 안되리.”
(말리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8, 전재성님역)
2014-01-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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