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입처개진과 사띠마 삼빠잔노
누구나 가슴에 새겨 놓는 말이 있다. 어떤 상황에 부디쳤을 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좌우명이다. 선가에 좋은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수처작주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수처작주입처개진’이라는 말을 알게 된 것은 펜스에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두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지역의 불교문화원 건립을 위한 부지가 있었다. 이 문화원 건립에 대한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6년도이다. 그러나 2013년에 이르기 까지 무려 7년간 주유소 부지에는 펜스만 쳐져 있었다. 원래 2009년을 완공 목표로 하였지만 해가 지나도 언제나 그대로 이었다. 그러다 2013년 봄에 호텔신축부지로 변경 되었다. 이렇게 변경되고 난 후 건물은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무려 7년간 펜스만 쳐져 있었던 불교문화원 부지 펜스에는 항상 ‘수처작주입처개진’이라는 문구를 볼 수 있었다. 한글로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주인이다. 지금 있는 곳이 진정한 행복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졸개로 살지말고 주인으로 살라
수처작주입처개진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다음과 같은 법정스님의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
임제 선사는 어록에서 말하고 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부처로써 최고의 목표를 삼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한낱 똥단지와 같고,
보살과 아라한은 죄인의 목에 거는 형틀이요,
이 모두가 사람을 구속하는 물건이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단호히 벗어나라고 임제는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탈종교이다.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그 남는 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의 세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제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거죽의 세계에서, 껍데기에서 다 벗어나라. 왜
남에게 의지하고, 타인의 졸개가 되려 하는가.
부처라 하더라도,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는 타인일 뿐이다.
그 가르침을 통해서,
그 자취를 통해서 오직 내 길을 갈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이다.
새로운 부처,
새로운 예수가 필요한 것이지 이 인류에게 똑같은 존재는 필요없다.
따라서 진정 뛰어난 종교가나 사상가는 일인 일파一人一派일 수밖에 없다.
임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住 立處皆眞,
언제 어디서나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어디서나 주인 노릇을 하라는 것이다.
소도구로서, 부속품으로서 처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주체적일 수 있다면
그곳이 곧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 비구 법정
‘수처작주’라는 말은 어디서나 주인 노릇하라는 말이라 한다. 졸개로 살지말고 주인으로 살라는 것이다. 배역을 맡는다면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주인 또는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부처나 아라한, 또는 조사의 졸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도 한낱 똥단지와 같고”라는 표현을 하였을 것이다.
주인공으로 살라는 말에 호연지기가 느껴진다. 더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주인임을 잊지 말라는 말은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한다. 아직까지 주인으로, 또는 주인공으로 살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이 보다 더 매력적인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수처작주라는 말을 떠 올릴 때 마다 어떤 어려움이나 난관에 부딛쳐도 오롯이 일어 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 같디.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
수처작주입처개진은 참으로 멋진 말이다. 특히 수처작주라는 말은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이 주인임을 잊지 말라는 뜻인데. 이와 비슷한 용어가 빠알리어로 ‘사띠마 삼빠잔노(satimā sampajāno)’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처작주와 사띠마 삼빠잔노가 똑 같은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에 있어서는 같은 의미라 본다. 수처작주가 어느 상황에서든지 자신이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띠마 삼빠잔노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과 알아차림만 다를 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은 것으로 본다.
주인공과 알아차림은 다른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주인공은 본래불에 대한 것이지만 알아차림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수처작주라 하였을 때 주인공은 바로 본래불을 뜻한다. 자신이 주인공이라는 것인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본래 변화지 않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극과 극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언제 어디서나’ 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느 경우에서나 알아차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알아차림을 뜻하는 사띠마 삼빠잔노는 초기불교 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이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느 순간에서도 알아차림을 놓지 말라는 뜻이다. 즐거울 때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하고 괴로울 때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만일 알아차림을 놓쳐 버렸다면 졸개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따라서 주인으로 살려면 어떤 순간이라도 알아차려야 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수처작주에서 주(主)에 대하여 사띠마 삼빠잔노(알아차림, 念)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에 대하여 ‘수처작념입처개진(隨處作念立處皆眞)’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해석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지금 처한 곳이 모두 진리이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감기에 걸렸는데
요 몇 일 날씨가 매우 추웠다. 영하 10도 가까이 되는 날이 여러 날 있었다. 더구나 눈까지 와서 꽁꽁 얼어 붙었다. 도시에서 눈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거리는 미끄럽고 지저분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풀려 비가 오지 않는 한 거리는 지저분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꽁꽁 언 날에는 걱정스런 사람들이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날씨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눈이나 비가 와도 쉬어야 하고, 너무 추워도 쉬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늘 보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가게 모퉁이 한켠에 채소 등을 파는 할머니이다. 지나가는 길에 늘 보던 할머니인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인지 볼 수 없다.
날씨가 춥다 보니 우려하였던 상황이 발생하였다. 감기에 걸린 것이다. 일년에 한 번 정도 마치 연례행사처럼 감기가 걸리는데 이번 겨울 역시 피해 가지 못하였다. 목이 붙고 콧물이 나오고 오한이 드는 등 전형적인 감기 증세이다. 이럴 경우 병원에 직행하는 것이 상책이다. 평소에는 한 번도 가지 않은 병원이지만 감기에 걸릴 때 만큼은 한 번 간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의료보험내는 것이 아까울 정도이다. 십수만원에 달하는 의료보험비를 꼬박꼬박 지불하면서 혜택 보는 것은 매우 미미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왔다. 그러나 주사를 맞지 않았다. 주사를 맞지 않고 버텨 보기로 한 것이다. 다음 날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 하였다. 편두통을 말한다. 한번 편두통이 시작 되자 이전에 경험 하였던 콧물, 오한, 불쾌감 등은 사라진 듯하다. 사라졌다기 보다 더 큰 고통이 닥치자 잠복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편두통이 시작 되면 무척 고통스럽다.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것
고통은 주기를 띠고 있다. 아무리 심한 고통이라도 고통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이 영원히 계속 되지 않는다. 이때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고통이 밀어 닥칠 때 고통이 무상함을 아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밀려 오는 고통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통은 부처나 아라한도 느낀다. 그래서 부처님도 돌조각에 다리를 다쳤을 때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 (1. 38)라고 하셨다. 여기서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라는 말이’사또 삼빠잔노( sato sampajāno)’이다. 이렇게 고통이라는 대상을 포착하여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전이 되지 않아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는다.
감기로 인한 불쾌감과 편두통을 겪으면서 몹시 괴로웠다. 그럼에도 평상시와 똑같이 할 일을 다 한다. 육체적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깨끗이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괴로움은 괴로움이라고 볼 수 없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 되지 않는 괴로움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 되지 않는 괴로움이다. 생노병사 같은 것이다. 또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과 싫어 하는 것과 만나는 것 등 이 있어서 흔히 사고팔고라 한다. 그러나 누구나 근원적인 고통 한 가지 이상을 가지고 있다. 다만 말할 수 없는 것이어서 혼자만 앓고 있을 뿐이다. 그런 고통 역시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라 본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 되는 것이다.”라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문답식으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내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S22.59)
‘수처작주입처개진’이라는 말은 참으로 멋진 말이다. 특히 “어떤 곳에 있더라도 내가 주인이다”라는 말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수처작주 보다 더 매력적인 말이 ‘사띠마 삼빠잔노’이다. “올바로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뜻의 사띠마 삼빠잔노는 한마디로 말하면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현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가장 매력적인 문구는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 소멸 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이 문구 하나만 알고 있어도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 고통 뿐만 아니라 말못할 고통에 이르기 까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두려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설산동자의 투신설화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설산동자는 왜 몸을 날렸을까?
설산동자의 투신설화에서 핵심어는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다. 야차가 “諸行無常是生滅法”라 하여 “모든 것은 덧없이 흘러가니 태어나 죽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네”라고 읊자 동자는 크게 감명 받았다. 이는 다름 아닌 제행무상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이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구절을 들려 달라고 하자 야차는 동자에게 먹이가 되어 달라고 한다. 야차가 “生滅滅已 寂滅為楽”라고 읊자 동자는 절벽에서 몸을 날렸다.
야차가 읊은 후절은 “나고 죽는 그 일마저 사라져버리면 거기에 고요한 즐거움이 있네.”라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생멸에 대한 것일지라도 전절과 후절은 다르다. 전절은 자연이나 인생, 우주와 같은 커다란 스케일의 제행무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제행무상을 느낀다. 그러나 후절의 경우 오온에 있어서 제행무상이다. 그래서 누구나 제행무상을 느끼지 못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이거사는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래서 수행을 깊이있게 붓다(Buddha)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으신 분들은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이나 존재(存在)들의 생주이멸(生住離滅)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아 가려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대상이 커서 확실해서 보기는 쉽지만, 그러한 알음알이들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명상 속에서 보아가는 것이 수행이며 거기에서 얻어진 것을 지혜라고 가르치십니다.
(“붓다 명상기법은 미시적 관찰” 도이법사 위빠사나 수행기 Ⅱ-②, 미디어붓다 2014-01-20)
설산동자 투신설화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후절이다. 이는 오온의 생멸에 대한 것이다. 우주적 스케일의 ‘성주괴공’이나 봄여름 가을 겨울 순으로 변하는 자연의 제행무상, 그리고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무상에 대해서는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사항이다. 그러나 오온무상은 오로지 불교인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설산동자가 후절의 “生滅滅已 寂滅爲樂”를 듣고 몸을 날린 것도 오온 무상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본다. 오온생멸의 이치를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 하루를 사나 삽십년을 사나 마찬가지 일 것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몸을 날리지 않았을까?
‘법(dhamma)’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무엇이든지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라는 법의 눈이 열렸다고 하였다. 이는 제행무상을 말한다. 이는 우주나 자연, 인생의 제행무상이라기 보다 오온에 일어나는 제행무상에 가깝다고 본다. 설산동자가 투신한 것도 전절의 우주적 스케일의 제행무상이 아니라 후절에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행무상을 통찰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마찬가지로 지금 병이 나서 고통 받고 있다면 좋은 관찰 대상이 된다. 머리가 지끈 거리며 아플 때 이는 다름 아닌 ‘법(dhamma)’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2014-01-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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