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그 분께 귀의합니다
다작가 경에서
빠알리니까야에 ‘수호경’이 있다. 대표적으로 ‘라따나경(Sn2.1)’을 들 수 있다. 이런 수호경은 청정도론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빅쿠 냐나몰리의 The Path of Puripication에 따르면 Ratana Sutta (Sn p.39), the Khandha Paritta (Vin II 109; A II 72), the Dhajagga Paritta (S I 218) 등이 소개 되어 있다.
수호경중에 ‘다작가경(S11.3)’이 있다. 이를 ‘깃발경’이라 한다. 이 다작가 경 불법승 삼보에 대한 찬탄과 귀의에 대한 것이다. 붓다에 대한 것을 보면 “이처럼 세존께서는 1)거룩한 님, 2)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3)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4)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5)세상을 아는 님, 6)위없이 높으신 님, 7)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8)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9)깨달은 님, 10)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S11.3)”라고 되어 있다. 이를 부처님의 열가지 별칭이라 하여 이 열가지를 외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라도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질 것이라 한다. 불방불교에서는 여래십호라 하여 불과 세존을 합하여 ‘불세존’이라 하고 부처님이 스스로 지칭하는 말인 ‘여래’를 집어 넣어 ‘여래십호’라 하였다.
대승불교에서는 여래십호라고 하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Nava Guṇa Gāthā라 하여 ‘구공덕게’라 한다. 다작가경에서 붓다가 삭제 되어 부처님의 아홉가지 덕성에 대하여 찬탄한 게송이다.
부처님의 별칭에 대한 것이 대승에서는 열 가지이지만 테라와다에서는 아홉 가지이다. 그러나 대승에서 열 가지 중에 여래를 집어 넣은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말은 부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짐”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자들이 수호경으로 부처님의 별칭을 부를 때 여래를 뜻하는 ‘따타가따’라는 말은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빠져 있다.
세 가지 명지가 있는데
다작가경에서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이라는 칭호가 있다. 이는 vijjācaraṇasampanna의 번역어이다. 여기서 명지를 뜻하는 말이‘윗자(vijjā)’이다. 이는 ‘higher knowledge’로 영역되고 한자어로 ‘明, 智’ 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에 대하여 왜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즉 명행족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을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두려움과 공포의 경(M4)’을 보면 알 수 있다.
‘두려움과 공포의 경’에서는 부처님이 특별한 지혜를 증득하는 장면이 묘사 되어 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초야, 중야, 후야에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단계적인 ‘윗자(명지)’가 일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세가지가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다.
첫 번째 명지, 초야의 숙명통
먼저 숙명통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9,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siṃ.
So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āmi. Seyyathīdaṃ: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tissopi jātiyo, catassopi jātiyo, pañcapi jātiyo, dasapi jātiyo, vīsampi jātiyo, tiṃsampi jātiyo, cattārīsampi jātiyo, paññāsampi jātiyo, jātisatampi jātisahassampi, jātisatasahassampi, anekepi saṃvaṭṭakappe, anekepi vivaṭṭakappe, anekepi saṃvaṭṭavivaṭṭakappe, 'amutrāsiṃ evannāmo evaṃ gotto evaṃ vaṇṇo evamāhāro evaṃ sukhadukkha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amutra udapādiṃ. Tatrāpāsiṃ evannāmo evaṃ gotto evaṃ vaṇṇo evamāhāro evaṃ sukhadukkhapaṭisaṃvedī evamāyupariyanto. So tato cuto idhūpapanno'ti.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āmi.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법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고, 나는 그 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 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합니다.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숙명통(pubbenivāsānussatiñāṇā)’에 대한 것이다. 이런 숙명통은 경에 따르면 네 번째 선정에서 성취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 네번째 선정단계에 대하여 성전협에서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것이라 묘사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것이라 번역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자어로 捨念淸淨(사념청청, upekhāsatipārisuddhiṃ)이라 한다.
첫 번째 명지가 일어난 것은 초야때이다. 이를 초경이라고도 한다. 초야때 일어난 특별한 앎이라는 것이 숙명통이다.
숙명통이란 무엇인가?
이 숙명통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숙명통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무한대이지만 특정한 시간에 한정되어 소급되는 자신의 전생에 대한 곧바른 앎이다. 그러나 윤회의 시간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시간적 계기에 따라 조건지어진 존재의 계기가 흔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조건의 소멸에 수반되는 여실지견에 의해 전생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전생에 대한 인과론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직접지각이 아니며 다중적인 전생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Vism13~71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숙명통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전생을 볼 수 있는 숙명통은 직접지각이 아니라 전생을 회상할 수 있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청정도론 Vism13~71에 상세히 설명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전생을 기억하는 숙명통에 대하여 초불연의 ‘맛지마니까야 중간길이로 설하신 경’에 따르면 ‘청정도론 XIII.13~71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조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빅쿠 냐마몰리와 빅쿠 보디의 공저인 MDB에서도 ‘knowledge of the recollection of past lives.(숙명통)’에 대하여 ‘Explained in detail at Vsm XIII, 13-71.’라고 되어 있어서 청정도론을 참고하라고 되어 있다.
청정도론을 보니
청정도론 Vsm XIII, 13-71에 어떤 내용이 있을까? 초불연의 대림스님이 번역한 13장 초월지의 71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이와 같이.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이름과 종족 등이 특색이고, 용모 등이 갖가지 모습니다. 왜냐하면 이름과 종족을 통해 중생들은 띳사 혹은 깟사빠라고 알려진다. 용모 등을 통해 갈색, 흰색 등 다양함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름과 종족은 특색이고, 다른 것들은 갖가지 모습들이다. 상세하게 기억한다: 이것은 이미 설명되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의 주석이 끝났다 .
(청정도론 13장 초월지, 71절)
청정도론 71절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럼에도 각번역서의 각주에는 공통적으로 Vsm XIII, 13-71라는 내용이 보인다. 아마도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관행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나 여겨 진다.
청정도론에서 숙명통에 대한 설명은 71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파멸하는 원인’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64절부터 71절까지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경에 언급되어 있는 ‘어느 곳에 나는’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고, 이후 ‘이런 이름을 가졌고’와 ‘이런 용모를 가졌고’와 ‘그곳에서 죽어 여기 다시 태어났다’ 등 경에 실려 있는 문장을 설명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 번역서에 실려 있는 Vism13~71(성전협) 또는 XIII.13~7(초불연), Vsm XIII, 13-71(MDB)은 잘못 표기 된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Vsm XIII, 66-71’라고 해야 될 것이다.
마음이 집중 되어 있을 때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숙명통(宿命通)’이라 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뿝베 니와사 아눗사띠 냐나(pubbenivāsānussatiñāṇā)’라 하고, 영역으로 ‘knowledge of the recollection of past lives’라 되어 있다.
이러한 숙명통에 대하여 보통사람들은 이해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경에서는 한 생 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것도 우주의 성주괴공에 이르기 까지 거의 무한정 언급 되어 있다. 이런 숙명통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일체지자로서 부처님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묘사 하고 있다.
하지만 단멸론자들이나 회의론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의 깜냥에 비추어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오감에 따른 잣대로 판단하려 하고, 또 과학이라는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려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유물론’에 근거를 둔 ‘존재론’적 사고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능력에 대해서는 함부로 자신의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검증주의의 잣대를 들이밀 수 없다. 인간의 정신능력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도 한 존재의 알 수 없는 정신능력에 속한다. 이런 정신능력은 어떻게 계발되는 것일까? 근거 없이 과거전생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경에서는 숙명통을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선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어 있어(M4)”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선정에 이르기 위한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마음이 집중 되어 있을 때 어마어마한 능력이 발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돋보기로 햇볕을 모으면 종이가 타버리듯이 집중된 마음에서는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능력과 지혜가 생겨남을 말한다. 경에 따르면 이런 능력과 지혜는 네 번째 선정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의 경(M4)’에서 언급된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은 모두 사선정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다.
전생과 윤회를 아는 것부터
이처럼 네 번째 선정(사선정)상태에서는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Ayaṃ kho me brāhmaṇa rattiyā paṭhame yāme paṭhamā vijjā adhigatā
“바라문이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初更)에 증득한 첫 번째 명지(明知)입니다.”(M4, 대림스님역)
“바라문이여, 이것이 내가 밤의 초야에 도달한 첫 번째 앎입니다.” (M4, 전재성님역)
“This was the first true knowledge attained by me in the first watch of the night.”(M4, MDB)
경에서는 부처님이 초야에 도달한 숙명통에 대하여 ‘paṭhamā vijjā’라 하였다. 이를 전재성님은 ‘첫 번째 앎’이라 하였고, 대림스님은 ‘첫 번째 명지(明知)’라 하였고, MDB에서는 ‘the first true knowledge’라 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윤회가 확실하게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을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는 깨달음으로 인도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전생과 윤회를 아는 것부터 시작 되었음을 말한다. 이로써 단멸론자들이나 회의론자들이 말하는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와 윤회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으셨다.”라는 말은 무너진다.
두 번째 명지, 중야의 천안통
이렇게 초야에 부처님은 숙명통이 열려서 과거 전생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첫 번째 명지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명지는 초월적 지혜라 볼 수 있다. 마음을 집중하여 특수한 경계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어서 부처님은 두 번째 명지를 증득하게 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sattānaṃ cutūpapāt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siṃ, so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āmi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96)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전재성님역)
경에서 cutūpapātañāṇā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뭇 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이라 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이라 하였다. MDB에서는 ‘knowledge of the passing away and reappearance of beings’라 하였다. 이는 천안통을 말한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天眼通]’이라 하였다. 또 ‘[아는]’이라는 말을 추가 하였다. 만일 대괄호치기를 무시한다면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지혜’가 될 것이다. 이는 매우 어색한 말이다.
천안통이란?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천안통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여기서는 천안통(dibbacakku, 天眼通)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천안통은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미루어 타자의 행위와 업보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다. 천이통처럼 천안통이 멀고 가까운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현재의 뭇삶들의 다양성을 그들의 업보의 다양성에 따른 인과응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앞서의 숙명통은 자신에 관련된 것이고 지금 논의 되고 있는 천안통은 타자의 다양한 업보에 따라 등장하는 운명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타자의 현재적 사건을 일반적인 시각능력의 범주를 넘어서 지각하는 것이다. 또한 타심통이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타자의 마음을 알듯이 천안통은 자신의 숙명을 미루어 타자의 숙명에 관해 아는 것이다.
천안의 계발은 초감각적 초시간적 실재를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을 토대로 한다. 따라서 천안통은 현재적 사건을 보는 목적을 위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Vsm72-101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96번 천안통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96번 각주를 보면 주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견해를 나타낸 것이다. 첫 번째 명지라 일컬어지는 숙명통이라는 것이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두 번째 명지라 불리우는 천안통은 ‘타자’에 대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타자의 다양한 뭇삶들의 행태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모두 업보에 따른 것
뭇삶들의 행태에 대하여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어떤 뭇 삶들은 신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고 잘못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뭇 삶들은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님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 것이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청정한 하늘눈으로 뭇 삶들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등장하는 뭇 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습니다.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타자, 즉 뭇삶들의 삶의 행태를 보고서 모두 업보에 따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 또는 전생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의 과보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응보에 대한 것이고 또한 연기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타자의 현재 모습을 보고서 과거를 알 수 있는 것은 각주에 따르면 “타심통이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타자의 마음을 알듯이 천안통은 자신의 숙명을 미루어 타자의 숙명에 관해 아는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부처님의 두 번째 명지에 해당되는 천안통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정도론 XIII.72~101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라고 언급 되어 있을 뿐이다. MDB에서도 역시 ‘Explained in detail at Vsm XIII, 72-101’라고 설명 되어 있을 뿐이다.
세 번째 명지, 후야의 누진통
후야에 부처님의 세 번째 명지가 열렸다. 세 번째 명지는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innāmesiṃ.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세 번째 명지에 대한 것이 ‘āsavānaṃ khayañāṇā’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이라 하였고, 초불연의 대림스님은 번뇌를 소멸하는 하는 지혜[漏盡通]’이라 하였다. MDB에서는 ‘knowledge of the destruction of the taints’라 하였다.
누진통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세 번째 명지는 누진통에 대한 것이다.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 또는 지혜라 하는 누진통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세 번역서는 특별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경에서 이어지는 문구가 누진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ime āsavā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Ayaṃ āsavasamudayo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Ayaṃ āsavanirodho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Ayaṃ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abbhaññāsiṃ.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습니다.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전재성님역)
누진통에 대한 설명을 보면 사성제임을 알 수 있다. 편의상 나눈 첫 번째 문단에서는 괴로움(dukkha)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 문단에서는 번뇌(āsavā)에 대한 것이다.
당당한 사자후
이렇게 모든 괴로움과 번뇌에서 벗어 났을 때 부처님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ssa me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ittha.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ittha.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ittha.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ahos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abbhaññāsiṃ.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습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일어났으며, 나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습니다.
(Bhayabheravasutta- 두려움과 공포의 경, 맛지마니까야 M4, 전재성님역)
이는 아라한 선언을 말한다. 모든 번뇌가 소멸 되어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외치는 당당한 ‘사자후’를 말한다. 이와 같은 아라한 선언이 있기 까지 초전법륜경에서는 세 가지로 굴린 열두가지 형태, 즉 삼전십이행상이 설명되어 있다.
아라한 선언에 대한 번역을 보면
경에서 언급된 아라한 선언에 대하여 각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전재성님역)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대림스님역)
Birth is destroyed,
the holy life has been liv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more coming to any state of being. (*57) (MDB)
왜 ‘태어남은 부수어졌다’라고 하였을까?
게송에서 Khīṇā jāti가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태어남은 부수어지고’라고 번역하였다. MDB에서는 ‘Birth is destroyed’라 하였다. 왜 이런 표현을 하였을까? 전재성님의 각주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Pps.I.128에 따르면, ‘태어남은 부수어 졌다.’에서 ‘태어남’은 성스런 길이 닦여지지 않았을 때 생겨나는 형태의 태어남이므로 성스런 길을 닦았을 때 ‘태어남’이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주, 전재성님)
태어남을 뜻하는 자띠(jāti)는 세간적 용어이다. 그러나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 있어서는 새롭게 태어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Khīṇā jāti라 하여 “태어남은 부수어졌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의 뜻은?
게송에서 kataṃ karaṇīyaṃ가 있다. 이에 대하여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성전협)” “할 일을 다 해 마쳤다(초불연)”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MDB)” 라고 번역되었다. 어떤 것을 다해 마친 것일까? 각주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친 것’은 거룩한 진리에 대한 네 가지 과업 – 괴로움에 대한 완전한 앎, 괴로움의 원인의 제거, 괴로움의 소멸의 성취,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수행 – 이 네 가지 각각의 출세간적 길을 위해 완성된 것을 말한 것이다.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ataṃ karaṇīyaṃ’라는 문구는 사성제가 완성된 상태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도 괴로움과 번뇌가 모두 소멸 되었을 때 이를 세 번째 앎, 즉 누진통이라 하였다. 이렇게 누진통은 사성제가 완성되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 하였는데
아라한 선언문에서 마지막 구절을 보면 nāparaṃ itthattāyā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 하여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MDB에서는 “there is no more coming to any state of being”라고 되어 있어서 직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역자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 말의 원뜻은 ‘더 이상 이러한 상태는 없다. (nāparaṃ itthattāyā)’라는 뜻이다. 그 말은 ‘이러한 상태를 위해 즉, 길의 열 여섯 가지 기능을 위해, 번뇌의 파괴를 위해, 다시 길을 닦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거나 또는 달리 ‘이러한 상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존재의 다발(蘊)의 지속 이후에는 나에게 존재의 다발의 지속은 없다. 이러한 존재의 다발들(pancakkhanda:五蘊)은 완전히 이해 되면, 뿌리 잘린 나무처럼 되어버린다. 마지막 의식이 정지함으로써 그들은 연료 없는 불꽃처럼 사라질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각주, 전재성님)
빠알리어 ‘nāparaṃ itthattāyā’의 뜻은 ‘더 이상 이러한 상태는 없다’라는 뜻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MDB에서는 이를 직역하여 “there is no more coming to any state of being”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역시 직역과 의역의 중간 형태를 취하여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잭성님은 이를 의역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뿌리 잘린 나무처럼’과 ‘연료 없는 불꽃처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참고로 아라한 선언에 대한 MDB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This is the stock canonical announcement of final knowledge or arahantship. MA explains that the statement “Birth is destroyed” means that any type of birth that might have arisen if the path had not been developed has been rendered incapable of arising by the development of the path.
The “holy life” that has been lived is the holy life of the path (maggabrahmacariya). The phrase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katarim karantyam) indicates that the four tasks of the noble path - fully understanding suffering, abandoning its origin, realising its cessation, and developing the path - have now all been completed for each of the four supramundane paths. The fourth phrase, napararii itthattaya, is glossed by MA thus:
“Now there is no need for me to develop the path again for ‘such a state,’ i.e., for the sixteenfold function (of the path) or for the destruction of the defilements. Or alternatively: after ‘such a state,’ i.e., the continuum of aggregates now occurring, there is no further continuum of aggregates for me. These five aggregates, having been fully understood, stand like trees that are cut at the root. With the cessation of the last consciousness, they will be extinguished like a fire without fuel.” I have opted for the second of these interpretations, but take itthattaya as a dative. The word, which literally means “the state of this” or “the state of thus,” implies manifestation in a concrete state of existence. Nm had rendered: “There is no more of this beyond.”
(57번 각주, MDB)
삼명과 육신통을 갖춘 부처님
빠알리어 ‘nāparaṃ itthattāyā’의 뜻은 ‘더 이상 이러한 상태는 없다’라는 뜻이다. 이런 직역에 대하여 단멸론자들은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오로지 현세적인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는 말씀 하시지 않았다고 하여 내세와 윤회를 부정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내세와 윤회를 부정하는 가르침은 없다.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세 번의 명지가 일어나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 명 |
내 용 |
비 고 |
숙명통 pubbenivāsānussatiñāṇā |
전생의 기억에 대한 앎 |
윤회 |
천안통 cutūpapātañāṇā |
뭇삶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앎 |
업과 과보 |
누진통 āsavānaṃ khayañāṇā |
번뇌의 소멸에 대한 앎 |
사성제 |
두려움과 공포의 경(M4)에서는 세 가지 명지에 대하여 소개 되어 있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을 말한다. 이를 ‘삼명(三明, Te-vijja)’이라 한다. 이런 명지는 부처님을 깨달음으로 이르게 하였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도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S56.11)”라 하여 명지(vijjā) 가 언급되어 있다.
이런 명지는 전생에 대한 기억을 알기 때문에 윤회함을 알게 되었고, 뭇삶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업과 과보에 따른 인과응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런 사실을 알기에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사성제의 진리를 완성하였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vijjācaraṇasampanna라 하여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명행족)’이라는 칭호가 붙여진 것이다.
테라와다 예불문에도 사용 되는 열 가지 공덕
테라와다 예불문에는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게송이 있다. 이는 다작가경(S11.3, 깃발경)에서의 부처님에 대한 찬탄 게송과 동일하다.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S11.3, 전재성님역)
여기서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vijjācaraṇasampanna)’를 명행족이라 한다. 이는 삼명과 육신통을 갖춘 부처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지혜와 능력을 갖추신 분이 부처님이다.
경전을 대하는 태도
요즘 넷상에는 단멸론자와 회의론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오로지 자신의 깜냥으로 가르침을 재단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물론과 존재론에 바탕을 두어 자신의 감각적 인지주의 과학적 실증주의의 잣대를 들이 대려 한다. 그래서 그 잣대에 맞지 않으면 모조리 부정하고 만다. 삼명과 육신통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전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전승된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 없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불자의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부처님의 아홉 가지 공덕
부처님의 아홉 가지 공덕에 대하여 찬탄하는 노래가 있다. 이를 구공덕게라 한다. 이에 대하여 영문가사가 있는데 이를 우리말로 번역해 보았다.
구공덕게
(Nava Guṇa Gāthā , The Nine Virtues of The Buddha)
1. 거룩한 님(아라한, 응공)
Arahaṃ arahoti nāmena, 아라항 아라호띠 나-메나
arahaṃ pāpaṃ na kāraye, 아라항 빠-빵 나 까-라예
arahattapphalaṃ patto, 아라핫땁팔랑 빳또
arahaṃ namato namo. 아라항 나마또 나모
By name He is an Arahant as He is worthy
Even in secret He does no evil
He attained the fruit of Arahantship
To Thee, the Worthy one, my homage be.
공양을 받을만한 분이기에,
비밀이 없기에, 어떤 악의도 없기에,
그분을 거룩한 님이라 합니다.
거룩한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2.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삼마삼붓다, 정등각자 )
Sammāsambuddha-ñāṇena, 삼마-삼붓다 냐-네나
sammāsambuddha-desanā, 삼마-삼붓다 데사나-
sammāsambuddha-lokasmiṃ, 삼마-삼붓다 로까스밍
sammāsambuddha te namo. 삼마-삼붓다 떼 나모
By wisdom He is Sammasambuddha
By teaching He is Sammasambuddha
A fully Enlightened one is He in the world
To Thee, the fully Enlightened one, my homage be.
지혜로서 모든 법을 바르게 깨달으신 분,
바른 가르침을 주신 분,
이 세상에서 위 없는 완전한 깨달음을 이룩하신 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3.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윗자짜라나삼빤나, 명행족)
Vijjācaraṇasampanno, 윗자-짜라나삼빤노
tassa vijjā pakāsitā, 땃사 윗자- 빠까-시따-
atītānāgatuppanno, 아띠-따-나-가뚭빤노
vijjācaraṇa te namo. 윗자-짜라나 떼 나모
He is endowed with wisdom and knowledge
His wisdom is made known
The past, future and present He knows
To Thee who is endowed with wisdom and
knowledge, my homage be
지혜와 지식을 완전하게 갖추신분,
일체지를 원만하게 성취하신분,
삼세에 걸쳐 명지와 덕행을 구족하신 분,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4.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수가따, 선서)
Sugato sugatattānaṃ, 수가또 수가땃따-낭
sugato sundarampi ca, 수가또 순다람삐 짜
nibbānaṃ sugatiṃ yanti, 닙바-낭 수가띵 얀띠
sugato nāmato namo. 수가또 나-마또 나모
He is Sugata being self-disciplined
Being good He is Sugata
In the sense of going to the good state of Nibbāna
To Thee, the Sugata, my homage be.
오염원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는 분,
행함이 아름다워 피안으로 잘 가신 분,
닙바나라는 멋진 곳으로 가신 분,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5. 세상을 아는 님(로까위두, 세간해)
Lokavidūti nāmena, 로까위두-띠 나-메나
atītānāgate vidū, 아띠-따-나-가떼 위두-
saṅkhārā-sattamokāse, 상카-라- 삿따모까-세
lokavidū nāma te namo. 로까위두- 나-마 떼 나모
By name He is Lokavidu
He knows the past and future
Things, beings and space He knows
To Thee, the Knower of worlds, my homage be.
모든 방면에서 세상을 잘 아시는 분,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일을 아시는 분,
세상의 끝에 도달 하신 분,
세상을 아는 님, 오직 그 분께귀의합니다.
6. 위없이 높으신 님(아눗따라, 무상사)
Anuttaro ñāṇasīlena, 아눗따로 냐-나시-레나
yo lokassa anuttaro, 요 로깟사 아눗따로
anuttaro pūjalokasmiṃ, 아눗따로 뿌-자로까스밍
taṃ namassāmi anuttaro. 땅 나맛사-미 아눗따로
By wisdom and conduct unrivalled is He
Who is the Unrivalled of the world
In this world He is revered as an Incomparable one
That Incomparable one, I salute.
지혜와 공덕에 있어서 경쟁자가 없는 분,
이 보다 더 높은 자가 없는 분,
더 이상 대적할 자가 없는 가장 존경 받는 분,
위없이 높으신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7.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뿌리사담마사라티, 조어장부)
Sārathī sārathī devā, 사-라티- 사-라티- 데와-
yo lokassa susārathī, 요 로깟사 수사-라티-
sārathīpūjalokasmiṃ, 사-라티뿌-자로까스밍
taṃ namassāmi sārathī. 땅 나맛사-미 사-라티-
O Charioteer, the King Charioteer
A charioteer, a clever trainer is He of Deva
Who is a clever charioteer of the world
And is a respectful charioteer in this world,
That great trainer, I salute.
길들여야 할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
가르쳐야 할 사람을 잘 가르치는 분,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조련사, 가장 존경 받는 조련사,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8.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삿타데와마눗사남, 천인사)
Deva-yakkha-manussānaṃ, 데와 약카 마눗사-낭
loke aggaphalaṃ dadaṃ, 로께 악가팔랑 다당
adantaṃ damayantānaṃ, 아단땅 다마얀따-낭
purisājañña te namo. 뿌리사-잔냐 떼 나모
To Devas, Yakkhas and men in this world
He gives the highest fruits
Among those taming the untamed
To Thee, O Remarkable one, my homage be.
신들과 인간을 열반으로 인도 하는 최고의 스승,
길들여진 존재나 길들여지지 않은 존재에게도,
최고의 과를 주는 분,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9. 세상에 존귀하신 님(바가와, 세존)
Bhagavā bhagavā yutto, 바가와- 바가와- 윳또
bhaggaṃ kilesa-vāhato, 박강 낄레사 와-하또
bhaggaṃ saṃsāra-muttāro, 박강 상사-라 뭇따-로
bhagavā nāma te namo. 바가와- 나-마 떼 나모
The Bhagava is repleted with fortune
He has destroyed all passions
He has crossed the ocean of Saṃsāra
To that Blessed one, my homage be.
행운으로 충만하신 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 모든 감각적욕망을 부순 분,
삼사라의 대양을 건너신 분, 축복받은 분,
세상에 존귀하신 님, 오직 그 분께 귀의합니다.
1. Pali ;http://www.palipage.com/jm/index.php?option=com_content&view=article&id=112&Itemid=74&limitstart=3
2. 영어 ; http://www.buddhanet.net/audio-chant.htm
3. 한글 ; 진흙속의연꽃 번역(영어와 청정도론 참고번역)
2014-02-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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