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천상에서 왜 깨닫기 힘들까? 낙성제(樂聖諦)가 아닌 고성제(苦聖諦)인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1. 13:01

 

천상에서 왜 깨닫기 힘들까? 낙성제(樂聖諦)가 아닌 고성제(苦聖諦)인 이유

 

 

 

명절날에 본 것들

 

평온한 아침이다. 명절 다음 날 이른 아침 아파트 창문에 불빛이 보이는 집이 드물다. 전날 명절의 피로감이어서일까 사람들은 해가 떳음에도 아직까지 달콤한 잠에 빠져 있는 듯 하다.

 

명절날 늘 보는 얼굴들이지만 어느 날 보았을 때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항상 지금 여기 현재를 산다고 하지만 몇 달 만에 보는 얼굴들을 보았을 때 변화는 감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또는 수십년간을 뒤돌아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모든 것은 서서히 진행 된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급작스럽게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늙음과 질병이 대표적인 예이다. 늙어 간다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폭삭 늙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변화가 누적 되어 어느 날 다시 보니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질병도 마찬가지이다. 기억력이 상실 되는 질병을 가졌다면 처음에는 잘 감지 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상황이 악화 되다가 몇 년 지난 후에는 눈에 띄게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식도 알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비참함을 느낀다. 늙어 가는 것도 서러운데 더구나 사람을 알아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질병이 악화 되었을 때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어느 집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먼저 아들을 보낸 어느 노모가 있다. 그런데 먼저 간 아들에게 빚이 있었다. 이를 나중에 안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들을 잃은 슬픔 보다 남기고 간 빚에 더 고통스러워 한다. 그래서 더 이상 사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을 때 슬픔을 넘어 절망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이 명절날에 본 것들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적 파탄

 

모든 존재의 삶이라는 것은 결국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긴 단어로 귀결 된다. 이는 Soka+ parideva+ dukkha+ domanassa+ upāyāsā의 복합어로서 슬픔-비탄-고통-근심-절망으로 번역 된다. 십이연기에 있어서 마지막 구절이다.

 

무명으로 시작된 삶의 종착지는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모든 존재에게 직면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 파탄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 있다.

 

 

나기따여, 먹고 마시고 씹고 맛 본 것이야말로 똥과 오줌으로 끝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나기따여, 사랑스러운 것이 변화되고 다른 것이 되는 것 때문에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그 결과이다.

 

(나기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30, 전재성님역)

 

 

모든 음식이든지 침이 발라지면 부패 하기 시작한다. 또 먹어도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순간 똥과 오줌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예술품과도 같은 사랑스런 음식을 먹어도 또 황제와 같은 식사를 하여도 결국 똥과 오줌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원인과 결과라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사랑스런 것이 있다면 이는 결국 슬픔과 비탄과 고통과 고뇌와 절망이 생겨 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고성제를 설하셨다.

 

이고득락이 아니라 이고득열반

 

부처님이 괴로움에 대하여만 이야기 하였다면 염세주의자라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성제를 설하신 것은 집성제와 멸성제와 도성제를 설하기 위한 것이다. 마치 문제를 풀려면 문제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되듯이, 지금 당면한 괴로움, 슬픔, 비탄, 절망에서 헤어 나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 필요가 있기 때문에 가장 먼저 괴로움이란 무엇인가?”라고 괴로움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설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오로지 ‘행복’만을 설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하였지 오로지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고득락을 설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이고득락이 아니라 이고득열반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한역경전과 초기경전의 차이

 

한역경전에서 십이연기를 보면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老死)’로 끝난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여 무노사진이라 하였다. 이렇게 열 두 번째 단계에 대하여 단지 늙어 죽는 다는 의미로 노사로만 규정하였을 때 그다지 절절히 마음에 다가 오지 않는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sambhavanti. S12.2)”라는 구절을 접하였을 때 구구절절하게 느낀다. 이것이 한역경전과 빠알리니까야의 차이라 본다.

 

더구나 한역경전에서는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여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라 하여 당면한 슬픔과 비탄과 고통 그리고 절망을 애써 외면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겪는 슬픔, 비탄, 고통, 절망은 현실이다. 지금 여기에서 늘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그것에 대하여 부처님이 해법을 제시하였다.

 

일반적으로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이렇게 세 가지를 알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따르면 여기에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추가 되어 있다. 이는 괴로움을 말한다. 그래서 늙음과 죽음과 함께 동급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런데 고성제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이는 오취온이 괴로움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즉 색수상행식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에서부터 괴로움이 시작 되었음을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온이 내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마음이라고 하였을 때 괴로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런 괴로움은 슬픔, 비탄, 절망 등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이 용어 중에 슬픔이 있다. 어떻게 하면 슬픔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을까?

 

깨달음을 위해 천상이 더 낫다고?

 

천상에는 항상 행복만이 있다고 한다. 반대로 지옥에는 항상 고통만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로지 행복만이 있는 천상에서는 고통이나 슬픔, 비탄, 절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또 오로지 괴로움만 있는 지옥에서는 행복,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기나 할까?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본문중에서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이 적합하다고 한다   -------------그래서   천상에 나는 것보다   인간으로 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저도 불교방송의 어느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런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가르침은 천상의존재가 인간보다   깨달음의 기회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생에 깨닫지 못하면 천상에 날수 있도록 공덕을 쌓고 수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천상이 기회가 더많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지혜있는 도반님들의 보충설명   부탁합니다   __()__

 

(H법우님, 불교의 세계관과 세상도표)

 

 

법우님이 남겨 주신 글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천상에 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 기회가 더 많다는 이야기에 공감한다고 하였다.

 

행복이 행복인줄 모르고, 괴로움이 괴로움인줄 모르고

 

경전에 따르면 천상에 태어나는 조건이 있다. 인간과 똑같이 남녀 구별이 있는 욕계천상에 태어나려면 믿음보시지계의 삶을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삶의 공덕에 대한 과보로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라 한다. 그런 천상은 인간과 달리 엄청난 수명이 보장 되어 즐거움이 가득한 곳이라 한다.

 

경에서도 삼십삼천의 경우 환희의 정원(nandana)으로 묘사 되어 있다. 난다나경(S1.11)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옛날 서른 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한 하늘사람이 환희의 동산에서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늘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소유하여 갖가지를 구족하고 즐기면서…(S1.11)”라는 대목이 나온다.

 

욕계의 두 번째 천상, 즉 사대왕천 바로 위에 있는 삼십삼천의 천상이 이정도로 즐거움과 행복과 오욕락을 마음껏 향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 하늘사람은 하늘사람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S1.11)”라고 게송으로 노래 하였다. 천상락을 겪어 보지 못한 자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천상에서는 오로지 행복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런데 행복만 가득할 뿐 괴로움이란 없다. 그래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괴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일상이 행복이기 때문에 지금 천상락을 누리고 있는 자에게 있어서 천상의 행복이 행복인줄 모르는 것이다.

 

지옥에는 오로지 괴로움만이 있을 것이다. 이는 경에서 그렇게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 다음에 옥졸들은 그를 눕혀 놓고 도끼로 내려친다.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M129)”라고 표현 되어 있다.

 

지옥에서는 너무 괴로워도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지옥에서 과연 행복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오로지 괴로움만 있고 행복이 없다면 행복에 대하여 모를 것이다. 또 괴로움 그 자체만 있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천상과 지옥은 극과 극이다. 오로지 행복만 있는 천상에서는 괴로움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이 행복인줄 모르고 당연시 한다. 오로지 고통만 있는 지옥에서는 한번도 행복을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움이 괴로움인줄 모르고 역시 당연시 한다. 그러나 인간만은 행복과 괴로움을 골고루 맛본다. 그래서 행복이 행복인줄 알고 괴로움이 괴로움인줄 안다.

 

왜 천상에서 깨닫기 힘든가?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는다. 사람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지 감정.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아울러 이르는 이다. 이런 감정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자는 더욱더 행복하고자 하며, 지금 괴로운 자는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행복과 괴로움을 맛 본다. 바로 이런 조건이 부처님이 깨달은 조건에 가장 맞는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괴로움을 기반으로 하는 사성제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천상에서의 행복이 깨달음에 더 유리한 조건이라면 행복을 조건으로 한 사성제를 설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고성제가 아니라 낙성제(樂聖諦)’를 설하였을지 모른다. 그럴 경우 즐거움의 뿌리를 기반으로 한 네 가지 또는 여덟 가지로 된 행복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였을 지 모른다.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행복이다라 하여 오취온을 설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행복을 기반으로 한 진리를 설한 적이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천상락을 누리자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고득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괴로움에 대하여 철저하게 알아 그 소멸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고득락이 아니라 이고득열반이라 본다.

 

천상에서는 괴로움을 느낄 수 없다. 설령 괴로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약간 불편한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들이 느끼는 삶의 과정에서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즉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행복만이 있는 곳에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성제의 진리를 깨우치기 힘들 것이다.

 

온갖 감각적 욕망이 투영된 욕계천상이나 선정수행의 과보로 태어난 색계와 무색계 천상 역시 사성제의 진리를 깨우치기 힘든 곳이라 본다. 다만 불환자들이 간다는 색계4선천인 정거천만 예외 일 것이다. 정거천의 경우 그곳에서 태어나 바로 열반에 들기 때문이다.

 

어느 테라와다 빅쿠가 이생에 깨닫지 못하면 천상에 날수 있도록 공덕을 쌓고 수행하라라고 말하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정거천을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보인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질 때

 

인간이 사는 어느 곳이든지 괴로움과 행복이 늘 교차 한다. 이는 느낌이다. 마음이라는 것이 수시로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무덤덤한 느낌이 교차하듯이 인간의 삶 역시 괴로움과 행복이 교차한다. 그래서 지금 괴로운 자는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더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괴로움과 행복이 교차 하는 인간 세계에서 괴로움은 참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 괴로움은 때로 슬픔, 비탄, 절망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났을 때는 괴로움으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질 때는 슬픔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 괴로움 보다 더 괴로운 것이 슬픔일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슬픔에서 벗어 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이렇듯 세상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stn581)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monk

 

 

세상의 이치를 알면 슬퍼 하지 않는 다고 하였다. 여기서 ‘세상의 이치’는 lokapariyāya의 번역인데, 주석에 따르면 ‘세상의 본성(lokasabhavam)’이라 한다. 게송에 따르면 현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누가 슬퍼 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슬퍼 하는가? 이어지는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끝을 통찰해 보지 않고

부질 없이 슬피 웁니다. (stn582)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오거나 가는 사람āgatassa gatassa의 번역어이다. 오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오는 것을 말하고, 가는 것은 이곳에서 죽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을 말한다. 그래서 오는 것과 가는 것의 양끝을 모르는 자들이 슬피운다고 하였다.

 

운다고 문제가 다 해결될까?

 

운다고 문제가 다 해결될까? 우는 행위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stn583)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울다 보면 슬퍼서 울기 보다는 우는 것 차체 때문에 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 경우 우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운다고 해결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슬픔의 화살을 뽑아 버릴것인가?

 

만일 울어서 해결되는 일이라면 현자도 그렇게 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울고 슬퍼 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stn584)”라 하였다. 그래서 죽은 사람에 울부짓는 자들에 대하여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stn586)”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과 슬픔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님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애착과

근심과 자기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stn592)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슬픔, 비탄, 절망이 생겨 나는 것은 마음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다름 아닌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본다.

 

흔히 육체적 고통에 대한 것을 제1의 화살이라 한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으로 발전되지 않기 위해서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제2의 화살에 대하여 정신적 고통이라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고 헤어짐에 따라 슬픔, 비탄, 절망이 생겼다면 제2화살을 곧바로 맞은 것이다.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그런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어지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님으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stn593)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번뇌의 화살이라는 것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것이다. 이는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에서 도마낫사(domanassa)에 해당된다. 이 도마낫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근심’이라 번역하였고, 초불연에서는 ‘정신적 괴로움’이라고 번역하였다. 따라서 슬픔, 비탄, 절망이라는 번뇌의 화살은 정신적 괴로움, 즉 도마낫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정신적 화살은 결국 집착에서 비롯 된 것이다.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그래서 슬픔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바로 그 슬픔 없는 상태가 열반이라 하였다.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 하였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큰 빚을 남겨 놓고 떠났지만 그 빚으로 인하여 산 자들은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머리가 백발이 다 된 어느 어머니는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라고 말하며 자식 잃은 것 보다 지금 당면한 괴로운 마음에 더 고통스러워 한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참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 온 어느 어머니의 한숨에 부처님이 말씀 하신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긴 용어가 가슴에 절절하게 와 닿는다. 왜 부처님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라고 말씀 하였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2014-02-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