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계급의 불평등, 부처님의 평등사상 여섯 가지
이슈에 민감한 글
몇 주전 종편채널에서 공무원연금 관련 뉴스를 보았다. ‘채널A’의 심야뉴스인데 중국전문기자로 불리우는 하종대 기자가 설명하는 형식이었다. 뉴스를 들어 보니 이전에 글을 올렸던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다만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방송이다 보니 심층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핵심적인 것은 모두 말한 듯 하다. 똑 같은 조건에서 공무원연금이 국민연금 보다 2.5배 많다든가, 또 공무원 연금 수령자가 증가하면 할수록 혈세로 주는 금액이 눈덩이처럼 늘어 난다는 이야기 등이다. 그래서 공무원연금개혁의 당위성을 이야기 하고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실행할 것을 촉구 하였다.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하여 수 차례 글을 올렸다. 그중에 하나의 글은 이제 가장 많이 보는 글로 자리 잡은 것 같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면 ‘많이 본글’이라 하여 첫 페이지에 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글은 다름 아닌 ‘한국의 새로운 카스트제도, 공무원 연금 귀족’라는 글이다. 그런데 이글은 늘 논쟁중이다. 댓글 공방을 보면 지켜 내려는 사람과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에 대한 글을 종종 올린다. 그리고 종종 정치적인 견해도 밝힌다. 불교블로그이지만 이렇게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민감한 주제를 거론 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특히 이땅의 기득권과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그 가족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이와 같은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무기력한 한국불교
마하야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불자들의 신행생활은 매우 단순하다. 그저 자신과 가족의 안위에 대한 소박한 바램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업, 사업, 건강, 치유 등에 대하여 기도한다. 그래서 절에서도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늘 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이다. 이렇게 한국불교는 개인적은 기복만을 추구하는 불교로 전락한 듯 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었다.
최근 종교조사가 발표 되었다. 기독교에서 발표된 ‘기독교윤리실천운동 ‘2013한국교회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 자료에 따르면 불교의 신뢰도는 2위라 한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천주교이고 그 다음이 불교이고 3위는 개신교라 한다.
그런데 사회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종교는 개신교가 1위(41.3%)라 한다. 2위는 천주교(32.1%)이고 3위는 불교(6.8%)이다. 신뢰도나 봉사에서나 불교는 어느 것 하나 1위가 없다. 더구나 사회봉사에 대한 것을 보면 1위와 2위와의 격차가 너무 커서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불교가 왜 이렇게 무기력하게 되었을까?
계급에 대한 불평등
초기불교경전을 보면 우리나라 불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부처님과 다르다. 초월적이고 신격화된 마하야나의 부처님상이 아닌 것이다.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이 있지만 평등의 가르침 측면에서 본다면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은 ‘사회개혁가’ 또는 ‘혁명가’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불평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특히 계급에 대한 불평등 문제를 제기 하였는데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을 다룬 책이 있다. 전재성님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이 그것이다. 이 책에서 부처님의 ‘사회현상의 연기’에 대한 항목이 있다.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의 불평등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들어 설명한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여섯 가지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인도라는 환경에서 탄생하였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인도는 철저하게 네 개의 계급으로 구분 되어 있었다. 이렇게 사성계급이 확립 된 것은 사회기원을 창조신에게 두는 범신론적 자연법 사상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바라문교에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리그 베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한다.
그 [절대신]의 입이 성직자계급(바라문)이고 두 팔은 귀족계급(끄샤뜨리야)이고 두 다리는 평민계급(바이샤)이고 두 발은 노예계급(수드라)이네.
(리그 베다의 뿌루샤 찬가)
이것이 고대인도에 있어서 명문화 된 계급의 서열이다. 여기서 절대신은 범신론적인 신인 ‘뿌루샤’를 말하는데, 이 신은 과거에 존재하였고 또 앞으로 존재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창조신이 존재하는 한 계급은 계속 유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는 아간냐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에 상세히 설명 되어 있다.
사성계급의 발생 원인
아간냐경에 따르면 창조신의 의힌 사성계급은 부정된다. 그 대신 연기법에 따른 사성계급이 성립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계급이 생겨 난 원인에 대하여 인간의 ‘탐욕’을 들어 연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인간의 타락과 계급발생의 원리, 아간냐경(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사성계급이 생겨 나게 되었을까? 책에서는 아간냐경을 근거로 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인간은 처자식을 거느리고 함께 살면서부터 초원에서 모아온 쌀을 저장하여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러다가 여러 사람이 협동해서 쌀을 수집해서 저장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초원을 농지로 분할해서 소유하면 각자에게 편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동소유의 초원이 구역이 나뉘어져서 사적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욕심 많은 자가 자기 구역의 쌀 뿐만 아니라 다른 구역의 경작지를 침범하는 사회악이 발생했다. 이렇게 해서 도덕적 기준을 세울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마침내 도덕의 수호자가 된 왕과 [귀족을] 선출하여 자신들의 생산물의 일부를 세금으로 냈다. 이렇게 해서 권력이 성립했다.
한편 점점 증대하는 사회악을 단절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집을 떠나 숲속으로 들어가 명상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곧 성직자 계급이다. 그리고 재가생활을 영위하면서 상업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평민계급을 구성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사냥이나 거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는데 그들은 노예계급이라고 불리우게 됨으로써 계급제도가 형상되었고 세습되었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326쪽)
이것이 사성계급의 발생 원인이다. 아간냐경을 근거로 하여 작성된 글을 보면 계급이 발생된 원인은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원시공동체에서 누군가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등의 오계를 범하였을 때 이를 규제하고 처벌할 장치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세금을 주면서 관리자로 뽑은 것이 끄샤뜨리아 계급의 시초라 한다.
경에 실려 있는 사회현상의 시초에 대하여 잘 설명되어 있다. 이는 사회현상의 인과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인간의 생존à 2)공동소유à 3)사적소유à 4)사회악의 발생à 5)지배, 피지배 계급의 형성à 6)사성계급의 형성
이런 사회제도는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사회제도를 구성하는 계급이나 우열은 원천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기득권 집단들이 자신들의 계급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성전에서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런 계급 제도가 세습이 되었고 더 후대에 가서는 창조신이 이런 계급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변질된 계급 발생에 대하여 부처님은 ‘연기’에 의하여 발생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 내용이 초기경전에 고스란히 기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생물학적 평등
첫째, 인간은 계급이 아니라 생물학적 조건으로 태어 났다. 이 말은 절대신이나 운명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결정되어 태어난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아간냐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그러나 그 바라문들의 바라문 아내에게도 월경, 임신, 출산 수유가 존재한다.” (D27)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바라문의 여인들도 아들을 얻기 위해서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적자이고, 그의 입에서 태어난 자이고(D27)”라는 말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성계급 누구든지 여인에게 태어난다. 이를 생물학적 평등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바라문교의 정(淨)-부정(不淨) 사상의 부당성을 지적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어느 계급이건 간에 여인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조건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계급
둘째, 사회적 계급은 조건에 따라 변한다. 이 말은 계급이 고정 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임을 말한다.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고 있다.
[세존]
“아쌀라야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요나, 깜보자, 그리고 다른 변경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귀족과 노예란 두 계급이 있는데, 귀족으로 있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로 있다가 귀족이 되기도 한다.’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Assalāyanasutta-앗살라야나의 경, 맛지마니까야 M93, 전재성님역)
요나 지방은 그리스의 박트리아와 관련된 ‘이오니아’ 지방이라 한다. 그리고 깜보자는 부처님 당시 16대국의 하나로서 인도의 북쪽에 있는 나라라고 한다. 그런 나라에서는 계급간의 이동이 빈번함을 말한다. 그래서 귀족이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가 귀족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인도와 다른 계급제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음을 말한다.
아는 무엇을 말할까? 책에 따르면 “계급의 명칭은 단지 사회적인 기능개념 내지는 관계개념일 뿐 계급자체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화 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고대인도에서는 계급이 고정 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계급을 고착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브라만 등 기득권층의 특권의식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삼법인’이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무상하고, 고이고, 무아이다’라는 ‘제법실상’의 가르침으로 사회평등론을 말씀 하신 것이다. 계급도 사회적 조건 속에서만 성립하는 것으로 영구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조건에 따라 끊임 없이 변화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휴머니즘’ 입장에서
셋째, 자유의지로 계급이 바뀔 수 있다. 모든 계급은 윤리적으로 기회균등함을 말한다. 그래서 상층계급이라도 도덕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고, 반면 하층일지라도 도덕적으로 탁월하다면 선처에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을 근거로 들었다.
[세존]
바라문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않고, 어리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고, 탐욕을 부리지 않고, 분노하는 마음을 품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갖는다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왕족들이나 평민들이나 노예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Assalāyanasutta-앗살라야나의 경, 맛지마니까야 M93 21절,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모든 계급이 평등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누구라도 선업을 지으면 하늘나라에 태어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는 모든 계급이 평등하다는 ‘휴머니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도덕적인 삶을 살면 기회가 균등하게 찾아 옴을 말한다.
아무리 상층 카스트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계급이 태어날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라문교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성계급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불꽃에는 특징이 있는데
넷째, 계급에는 동일성의 원리가 적용된다. 이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조건이 주어지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결과가 생성되다는 원리를 말한다.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었다.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
(Assalāyanasutta-앗살라야나의 경, 맛지마니까야 M93 33절, 전재성님역)
불꽃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화염’과 ‘광채’와 ‘광명’ 이렇게 세 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 특징은 ‘전단향’과 같은 고급목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돼지 먹이통’용으로 만든 목재에서도 역시 화염과 광채와 광명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티벳과 같은 극한 지역에서의 야크 똥은 훌륭한 연료가 된다. 이때 야크 똥을 연료로 하여 타오르는 불꽃 역시 화염과 광채와 광명 이렇게 세 가지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책에 따르면 계급이 기능적으로 분화 될 수 있으나 동일한 수단이 주어지면 계급간의 차별은 소멸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전단향나무나 돼지 먹이통 나무나 야크 똥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특징은 모두 ‘같음’을 말한다. 또 하나는 어떤 계급이든지 정(淨)과 부정(不淨)이 차별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순다리까경에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Mā jātiṃ puccha caraṇañca puccha
kaṭṭhā have jāyati jātavedo,
Nīcā kulīnopi munī dhitīmā
ājāniyo hoti hirīnisedho.
[세존]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순다리까경-Sundarikasutta, 상윳따니까야 S7:9,전재성님역)
피 한방울의 법칙
다섯째, 생물학적 유전형질로 계급이 결정 되지 않는다. 이는 사회현상의 인과관계는 생물학적 유전형질에 의하여 단독으로 결정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었다.
“아쌀라야나여, 또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귀족의 아들이 바라문의 딸과 동거하는데, 그 동거의 결과로 한 아들을 낳았다고 합시다. 귀족의 아들과 바라문의 딸 사이에 태어난 바로 그 아들은 어머니도 닮고 아버지도 닮았을 텐데, 귀족이라고 불리겠습니까, 바라문라고 불리겠습니까?”
(Assalāyanasutta-앗살라야나의 경, 맛지마니까야 M93 37절, 전재성님역)
‘피 한방울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흑인 피가 단 한방울만 들어 가도 흑인 취급 한다고 한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모두 흑인으로 간주 된다.
흑백차별에 대하여 미국에서 데모하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간혹 백인의 모습도 보인다고 한다. 왜 백인이 흑인들 시위대열에 참여 하는 것일까? 이는 피 한방울의 법칙으로 설명 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금발에 파란 눈에 틀림 없는 백인 모습인데 열심히 흑백차별 데모에 열중하는 백인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백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흑인에 속한다고 한다.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흑인의 피가 한방울만 섞여도 모두 흑인 취급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화는 ‘피 한방울의 법칙’이라 한다.
다문화사회에서
부처님은 경에서 ‘혼혈’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바라문계급과 귀족의 자제가 결혼하였을 때 에 대한 이야기이다. 카스트간 통혼이 금지 되어 있던 시기에 태어난 자녀들은 어디에 속할까? 이는 피 한방울의 법칙과 유사하다.
서로 다른 카스트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을 때 그 자녀는 하위 카스트를 따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 양반가문에 태어난 ‘서자’와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사회적 차별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계급은 전혀 생물학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으며, 또한 출생에 따라 규정 되어 질 수 없음을 말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다문화사회’로 진입하였다. TV에서는 ‘러브인 아시아’라 하여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 아시아 등에서 시집온 가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한민족 순수 혈통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다문화 시대에 피 한방울의 법칙이 적용 된다면 이는 불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다. 따라서 다문화 시대에 적합한 가르침은 “생물학적 유전형질로 계급이 결정 되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안양시민축제(평촌중앙공원, 2013년 10월)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여섯째, 사회현상은 계급이 아니라 인과적으로 결정된다. 이는 유전형질 보다는 사회적인 역할과 사회적 평가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었다.
“아쌀라야나여, 또한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바라문 형제가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성전에 숙달하고 통달했으나 한 사람은 성전에 숙달하지 못하고 통달하지도 못했다면, 바라문들은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 먼저 사자의 공물, 제사의 음식, 공희물, 손님을 위한 향응물을 바칠 것입니까?”
(Assalāyanasutta-앗살라야나의 경, 맛지마니까야 M93 37절,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는 다른 바라문 형제’라 하였는데 이는 문맥상으로 다른 계급의 아버지와 동일한 계급의 어머니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라문 계급의 어버지 와 노예계급의 아버지가 있지만 동일한 어머니가 있을 때 그 어머니에게 난 두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바라문 아버지에게서 난 아들은 혈통적으로 태어나면서 바라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예 아버지에게서 난 아들은 피 한방울의 법칙에 따른다면 아무리 잘 나고 똑똑 해도 노예카스트로 분류 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와 같은 혈통이나 사회제도에 따른 카스트에 대하여 부정하였다. 그래서 앗살라야냐에게 “존자 고따마여, 한 청년 바라문이 성전에 숙달하지 못하고 통달하지도 못했으나 계행을 지키고 행실이 바르다면, 바로 그에게 먼저 사자의 공물, 제사의 음식, 공희물, 손님을 위한 향응물을 대접할 것입니다.(M93)”라고 대답을 유도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은 태생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도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바라문인 것도 아니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stn136)”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표로 정리해 보면
이와 같이 부처님은 여섯 가지로 부처님 당시 사회불평등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았다.
부처님의 평등사상
No |
내 용 |
경전적 근거 |
1 |
생물학적으로 모든 계급은 평등함 |
“그러나 그 바라문들의 바라문 아내에게도 월경, 임신, 출산 수유가 존재한다.” (D27) |
2 |
사회적 계급은 조건에 따라 변함 |
“귀족으로 있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로 있다가 귀족이 되기도 한다.” (M93) |
3 |
자유의지로 계급이 바뀔 수 있음 |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M93) |
4 |
계급에는 동일성의 원리가 적용됨 |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S7.9)
|
5 |
유전형질로 계급이 결정 되지 않음 |
“귀족의 아들과 바라문의 딸 사이에 태어난 바로 그 아들은 어머니도 닮고 아버지도 닮았을 텐데, 귀족이라고 불리겠습니까, 바라문라고 불리겠습니까?” (M93) |
6 |
사회현상은 인과적으로 결정됨 |
한 사람은 성전에 숙달하고 통달했으나 한 사람은 성전에 숙달하지 못하고 통달하지도 못했다면, 바라문들은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 먼저 사자의 공물, 제사의 음식, 공희물, 손님을 위한 향응물을 바칠 것입니까?” (M93) |
이런 내용이 초기경전 도처에 있는데 여기서 예로 든 것은 디가니까야의 ‘아간냐경(D27)’과 맛지마니까야의 ‘앗살라야나경(M93)’이다.
승가공동체에서는
이렇게 부처님은 카스트가 생겨 난 이유를 밝히고 혈통이 아니라 행위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카스트를 타파 하기 힘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불교의 승가공동체는 바로 부처님의 평등사상의 바탕하에서 세워 졌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승가공동체에서는 카스트가 없다. 이는 계급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보다 높은 도덕적 가치를 더 높게 평가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등한 사회는 도덕적 행위로 달성된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를 우선하는 승가공동체는 평등한 것이다.
부의 불평등과 악순환
이처럼 승가공동체에서는 평등사회가 구현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이런 불평등은 고대인도나 현대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불평등 사회의 일차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부의 불평등’이라 볼 수 있다. 부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모든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부의 불평등은 만악의 근원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초기경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하면서 재물 없는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자, 빈곤이 늘어 났다. 빈곤이 늘어나자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늘어났다.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늘어나자 무기가 늘어났다. 무기가 늘어나자 살아 있는 생명을 빼앗는 것이 늘어 났다. 살아 있는 것을 빼앗는 것이 늘어나자 뭇삶들의 수명도 줄어 들고, 용모도 퇴락했다.”
(Cakkavattisutta-전륜왕 사자후의 경, 디가니까야 D26 20절, 전재성님역)
빈곤의 악순환에 대한 것이다. 특정한 계층이 부를 독차지 하고 있었을 때 빈부 격차는 심화 될 것이다. 그래서 잘사는 자는 더욱 더 잘 살게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더 가난하게 된다. 이렇게 양극화 현상이 심화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속담에 “사흘을 굶으면 담을 넘는다”고 하였다. 배가 고파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될 때 도둑질을 하게 될 것이다. 더욱 더 배가 고파지면 이제 무기를 든 강도로 돌변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과정을 경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한다. 승가공동체나 불교공동체가 아닌 집단에서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담을 넘어 갈 수 밖에 없고 무기를 들게 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표현 하였다.
1)궁핍à 2)도둑à 3)폭력à 4)살생à 5)거짓à 6)비방à 7)사음à 8)욕지거리à 9)꾸며 대는 말à 10)탐욕과 진애à 11)사견à 12)비법à 13)비리à 14)사견법à 15)불효à 16)불경à 17)단명
17단계의 시발을 보면 궁핍으로부터 시작 된다. 이는 부가 제대로 분배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위 몇 프로가 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국민 대다수가 극빈층으로 전락 하였을 때 그 사회는 매우 불안정하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기득권자들은 변화를 두려워 하고 불온시한다. 그래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변화의 요구를 봉쇄한다. 그러나 배가 고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민란이나 민중혁명의 발생 요인이었다. 이는 부의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교가 널리 전파 된다면
도둑, 폭력, 살생등 이 난무 하는 사회는 오계가 무너진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을 보면 ‘궁핍’에서 시작 된다. 소위 ‘목구멍 포도청론’이 먹혀 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궁핍의 악순환에 대하여 부처님은 경에서 말씀 하였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기경전에서 가난과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사회악의 원천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사실과 안간의 단명함은 사회악의 결과로도 연유한다는 지적이다.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338쪽, 전재성님)
초기경전에서는 사성계급의 발생과 불평등에 대하여 기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이 있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평등한 사회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것이 일차적으로 승가공동체라 볼 수 있다. 이를 확장한다면 재가불자의 불교공동체도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널리 전파 된다면 사회의 불평등은 해소 될 것이다.
양당제 구도를 깨야
책에 따르면 사회악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라 하였다.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재물 없는 자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자, 빈곤이 늘어 났다. 빈곤이 늘어나자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이 늘어났다. (D26)”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은 부의 분배를 주장하였고 사회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에서는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 되는 양상이다. 그래서 잘사는 사람은 더욱 더 잘 살게 되고 못사는 사람은 갈수록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바꾸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양당제 구도를 깨는 것이라 본다. 양당제가 존속하는 한 보수나 진보 역시 기득권 세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나라 과거 수십년간의 정치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제 3세력이 태동하여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되었을 때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다수당이 출현 하여 어느 한편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게 하였을 때 빈곤하고 소외 된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지 모른다.
부처님은 현실주의자
공무원 연금 개혁 관련을 글을 쓰고 또한 공무원의 선거 개입에 대한 부당성을 고발하는 글을 다수 썼다. 이런 글쓰기를 할 때 마다 일부 법우님들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불교 블로그에서 너무 현실에 참여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또 너무 정치적 소신을 밝힌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은 철저한 ‘현실주의자’ 이었다. 그리고 ‘사회개혁가’ 이었다. 그래서 경을 보면 카스트와 ‘부의 불평등문제’를 제기 한다. 바로 이런 점이 개혁을 넘어 혁명적인 주장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이 있지만 특히 평등의 가르침에 있어서 부처님에 대하여 ‘혁명가’로 본다.
2014-02-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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