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걸인과 걸사는 어떻게 다른가? 브라흐마짜리야(梵行)와 견해청정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8. 15:35

 

 

걸인과 걸사는 어떻게 다른가? 브라흐마짜리야(梵行)와 견해청정

 

 

 

산에서 사는 자연인

 

요즘 TV에서 흥미 있게 보는 것은 자연인이다. 방송사 마다 경쟁적으로 산속이나 오지에 사는 사람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자연인을 보면 크게 두 가지 부류이다. 한 부류는 여유가 있어서 산중에다 그림 같은 지어 놓고 사는 케이스이다. 대게 나이가 든 노부부가 등장한다. 또 한 부류는 나홀로 사는 경우이다. 이 경우 사업을 하다 망한 케이스가 많다. 그래서 산에서 숨어 지내다 시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극과 극의 자연인이 있지만 관심있게 보는 것은 나홀로 사는 자연인이다.

 

깊은 산중에서 나홀로 사는 자연인의 경우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허름하고 누추한 곳에서 산다. 그리고 특별한 직업이 없기 때문에 주로 약초, 버섯, 나물 등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가져 간다. 그래서 하늘을 이불삼아 땅을 베개삼아유유자적하게 사는 살아 가는 듯한 도인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

 

마치 도인처럼 살아 가는 자연인을 보면 스님이나 수행자를 연상시킨다. 머리만 깍지 않았을 뿐이지 소욕지족의 수행자와 다름 없다. 그러나 아무도 생계를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산 저산 다니면서  버섯, 약초 등을 채취하고 쌀과 바꾸어 먹는다.

 

자연인을 보면 출가수행자가 연상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겉 모습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출가자의 경우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는 이유 하나로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없는 듯 해 보인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깊은 산중에서 도를 닦는 출가수행자만한 자연인이 없을 듯 하다.

 

인적이 끊어진 심산유곡에서 도를 닦고 있는 수행자가 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 알았는지 쌀을 짊어 지고 오는 신도들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도를 닦거나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공부하는 사람이나 도를 닦는 사람에게 보시하고 공양하는 전통은 동서양을 막론 하고 있다고 한다. 농촌에서 명문대학에 합격하면 주민들이 돈을 모아 장학금을 주는 것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관대한 면을 보여 주는 대표적 예라 볼 수 있다.

 

심산유곡 동굴 속에서 오로지 도만 닦는 수행자가 있다면 역시 쌀을 짊어 지고 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달리 일을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도와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자연인과 출가자는 다르다.

 

걸인과 걸사는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 당시 출가수행자들은 걸식에 의존하였다. 이는 출가수행자들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은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서 삶을 유지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출가수행자들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걸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경에 따르면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과 와좌구와 필수의약품을 보시 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은 일하지 않아도 생계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같은 걸식에 의존하는 걸인과 출가자인 걸사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빅칵카경에서 어떤 바라문 걸식자가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Na tena bhikkhak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
dhamma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Yodha puññañca p
āpañca bāhitvā brahmacariyavā,
Sa
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i.

 

[세존]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Bhikkhakasutta-걸식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0,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수많은 출가수행자들이 있었다. 이를 일반적으로 사만냐라 부른다. 한자어로 사문이라 한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이를 수행자라 번역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사만냐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역시 사만냐라 불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행자와 성직자는 어떻게 다를까?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세가지로 굴린 열두 가지 형태(삼전십이행상)’로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아 청정하게 되었을때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라고 하였다. 이때 성직자들과 수행자들이라는 말이 sassamaabrāhmaiyā’이다. 이는 사만냐와 브라흐마나에 대한 것이다.

 

sassamaabrāhmaiyā’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수행자와 성직자로 번역하였다. 여기서 성직자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 브라흐마나를 성직자라 한 것이다.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상운동을 펼친 그룹에 대하여 사만냐라 하는데 이를 수행자라 하였다. 이렇게 수행자와 성직자는 서로 다른 말이다. 그런데 같은 수행자라도 부처님의 제자에 대하여 빅쿠라 하였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사만냐와 빅쿠는 다른 것이다. 그런 사만냐에 브라만 출신도 있다. 경에서 언급된 브라만 결식자를 말한다.

 

바라문 출신 걸식자의 질문에 부처님은 같은 걸식자라 하여 모두 같지 않음을 말하였다. 마치 빛난다고 하여 모두 금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고, ‘유명하다고 하여 모두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밥을 빌어 먹는 다고 하여 모두 다 똑 같은 거지가 아니다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바라문 걸식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S7:20)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사만냐와 빅쿠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악취가 나는 가르침이라 하였다. 이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 허무주의로 대표되는 육사외도나 영원주의의 브라만교를 말한다. 그래서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S7:20)”라 하였다. 그렇다면 진짜 걸식수행자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사는 자를 말한다. 이는 생계청정 등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게송에서는 견해청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허무주의나 영원주의가 아닌 견해청정을 추구하는 자에 대하여 진정한 걸식자, 빅쿠라 한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진짜 밥빌어 먹는 걸식수행자는 그 어떤 공덕도 짓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puññañca pāpañca)”라 하였다. 이는 악행(pāpa)’뿐만 아니라 선업공덕(puñña)’도 짓지 않음을 말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단지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만일 천상에 태어나고자 한다면 굳이 출가하지 않고 재가로 살며 선업공덕을 지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출가하여 마치 걸인처럼 구걸하며 살아 가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청정한 삶을 실현 하기 위해서라 하였다. 바로 이점이 악취나는 견해를 가진 걸식자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같은 걸식자라도 청정한 삶을 사는 부처님의 제자는 걸사(乞士, bhikkhu)라 볼 수 있고, 반면 악취나는 삿된 견해를 가진 걸식자는 거지와 다름 없기 때문에 걸인(乞人, bhikkhaka)과 같은 것으로 본다. 

 

청정한 삶,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청정한 삶이라는 말은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의 번역어이다. 이를 한자어로 범행(梵行)’이라 한다. 이 단어는 brahma()cariya()의 복합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으로 번역하였다.

 

청정한 삶또는 청정범행으로 번역되는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라는 단어는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아라한선언에서도 나온다.

 

아라한 선언에서 Khīā jāti, vusita brahmacariya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라고 번역된다. 이때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가 들어 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청정한 삶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아라한 선언에서 보는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만 각묵스님은 좀 색다른 견해를 내 놓았다. 각묵스님은 주석을 근거로 하여 브라흐마짜리야에 대하여 이는 성행위를 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M4, 179번 각주)”라고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청정한 삶을 실현 하는데 있어서 성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청정한 삶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브라흐마짜리야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하필이면 브라흐마라는 말을 사용 하였을? 이는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봅니까?(Sn2.7)”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는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들은 옛날의 바라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부처님당시의 바라문들에 대하여 타락한 바라문들로 본 것이다.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 제사를 주관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온갖 향락을 일삼는 타락한 제관으로서의 바라문들이다. 그러나 옛날의 바라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옛날 바라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는 바라문의 인생 사주기로 설명될 수 있다. 각주에 따르면 청정한 삶(brahmacariya)이라는 것은 네 가지가 있는데, 1) 베다를 학습하는 청년기의 삶(범행기), 2) 집에서 세속적인 가정의 삶을 사는 재가의 삶(가주기), 3) 세속을 떠나 숲속에서 사는 삶(임서기), 4) 유행의 삶(유행기) 이렇게 네 가지 삶의 방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 바라문은 모두 타락하여 네 가지 삶의 방식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브라흐마짜리야는 원래 바라문의 삶의 방식을 재해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재해석한 브라흐마짜리야는 다름 아닌 아라한의 삶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재해석하였기 때문에 법구경에서도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 brūmi brāhma a )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이때 바라문이라는 것은 바로 청정한 삶을 완성한 아라한을 뜻한다.

 

“우리로 하여금 괴로움을 끝내게 하소서”

 

부처님에 의하여 재해석된 브라흐마짜리야라는 말은 출가한 빅쿠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다음과 같은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Lābho vata no anappako
Ye maya
bhagavanta addasāma,
Sara
a ta upema cakkhuma
Satthā no hohi tuva
mahāmuni.

Gopī ca ahañca assavā
Brahmacariya
sugate carāmase,
Jātimara
assa pāragā
Dukkhassantakarā bhavāmase.

 

[소치는 다니야]

“우리는 거룩한 스승을 만나

얻은 바가 참으로 큽니다.

 

눈을 갖춘 님이시여,

당신께 귀의하오니,

우리의 스승이 되어 주소서,

위대한 성자시여. (stn31)

 

아내도 저도 순종하면서

바른 길로 잘 가신 님 곁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으니

태어남과 죽음의 피안에 이르러

우리로 하여금 괴로움을 끝내게 하소서.(stn32)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전재성님역)

 

 

 

Brahmacariya

 

 

 

부처님과 소치는 다니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경을 보면 모든 것을 갖춘 자신만만한 다니야의 삶이 소개 되어 있다. 그래서 다니야는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라고 말한다. 아무리 번개와 천둥이 쳐도 자신이 이룩해 놓은 행복은 안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세속적인 행복에 만족해 하는 다니야에 대하여 부처님은 출세간적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그래서 소치는 자의 행복보다 더 탁월한 것이 있음을 알려 주면서 역시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라고 말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갖추고 자신만만한 다니야는 부처님의 탁월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귀의한다. 이때 다니야는 청정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때 청정한 삶이라 번역된 말이 바로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이다. 그래서 다니야는 아내와 함께 청정한 삶을 살겠다고 말한다. 이때 청정한 삶은 다름 아닌 피안에 이르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괴로움을 끝내게 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열반의 실현이다.

 

걸식이 없는 선방

 

무관관수행이 있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무문관을 보면 마치 감옥을 연상시킨다. 외딴 곳에 있는 출입금지 지역이 있는데 이곳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그런데 방마다 모두 문이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무문관수행자들이 방에 들어가 스스로 잠근 것이다. 그래서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년넘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다고 한다.

 

무문관 수행자들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오로지 하루 한끼 배달 되어 오는 식사만 한 채 마치 독방에 갇힌 감옥처럼 산다. 그곳에서 이뭐꼬?’등 의 화두를 들며 나를 찾는 수행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무문관 수행이다.

 

무문관 수행을 하면 과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청정해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부처님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탁발이 없다는 것이다. 걸식하지 않고 절에서 배달된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 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대단히 편리한 방식이다.

 

스님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선방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세상에서 최고로 편한 곳이 마치 선방처럼 들린다. 아침부터 저녁 까지 하는 것이라고는 수행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논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선방에서는 기본적으로 먹고 자는 문제가 모두 해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선방에서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 된다. 이는 출가하면 자동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부처님 당시는 이와 달랐다.

 

왜 사문운동이 일어났을까?

 

부처님 당시 출가는 어떤 개념이었을까? 이는 초기경전에 상세하게 표현 되어 있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을 때 일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걸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출가라는 것은 걸식생활을 한다는 의미이었다고 본다. 이렇게 스스로 빌어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소유와 욕망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빌어 먹는 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의 타락은 극에 달하였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상세히 표현 되어 있다. 제사를 주관하는 성직자로서 바라문의 타락이 극에 이르자 사문운동이 일어 났다. 이는 예전의 바라문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성계급과 관계없이 출가하여 걸식하며 사는 수행자 그룹이 생겨났다. 이를 성직자를 뜻하는 브라흐마나와 구별하여 사만냐라 한다.

 

그런데 사문을 보면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브라만 들은 사주기라 하여 가주기와 임서기가 지난 다음에 말년에 유행을 하였으나 새로운 사문운동이 일어나자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출가 하였다. 그래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출가하고 심지어 배우는 학습단계의 젊은 사람도 출가하였다.

 

이렇게 나이와 관계 없이 누구나 출가 하여 수행자로 살아 가려 하는 것은 예전의 브라만이 그랬던 것처럼 청정한 삶(브라흐마짜리야)’을 살기 위해서 이었다고 보여 진다. 그래서 계급과 관계 없이 출가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바쎗타여, 왕족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바라문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평민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바쎗타여, 노예도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수행자가 되리라.’라고 출가 하는 때가 있었다.”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D27, 전재성님역)

 

 

이렇게 자신의 속성을 경멸하면서 출가한 자들을 사만냐(사문, 수행자)라 부른다. 그래서 나이와 출신과 관계없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 바로 출가이다. 그런데 이 출가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재산도, 아내도, 자식도, 가정도 포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가 되었을 때 결국 걸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 당시 출가라는 것은 곧 걸식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걸식한다는 것은 청정에 이르는 길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유하면서 청정에 이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청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빌어 먹는 것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 옛날 바라문 들이 모든 것을 다 해 마치고 남은 생애에 대하여 출가하여 유행하며 보냈던 것처럼 나이와 계급과 관계없이 사문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출가한 사문들은 실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외도들은 자신들의 사상이 모두 청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 하였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육사외도의 방식이나 바라문교 방식으로는 청정에 이를 수 없다고 하였다. 바로 그것이 걸식자의 경에 나오는 게송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S7.20)?”일 것이다. 같은 수행자라고 하더라도 견해가 청정하지 않으면 결코 청정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적 견해를 가진 외도의 걸식수행자에 대하여 비칵까(bhikkhaka)’라 하였고, 바른 견해의 부처님 제자들에 대해서는 빅쿠(bhikkhu)’라 하여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빅칵까(bhikkhaka)’빅쿠(bhikkhu)’의 차이는?

 

같은 걸식수행자라 하더라도 ‘빅칵까(bhikkhaka)’빅쿠(bhikkhu)’는 다른 것이다. 마치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이 아니듯이, 같은 걸식자라 하여 모두 같은 빅쿠가 아닌 것과 같다. 이는 견해청정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삭발한 자가 영혼장사를 한다면 이는 ‘빅칵까(bhikkhaka)’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빅쿠는 견해가 청정한 자를 말한다.

 

진정한 출가수행자의 조건은 무엇일까? 첫번째로 탁발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이는 출가라는 말 자체가 바로 걸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걸식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는 다면 이는 출가수행자라 볼 수 없다. 두번째로 견해가 청정해야 한다고 본다. 비록 문을 걸어 잠그고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으면 청정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견해가 청정하지 않으면 그는 단지 ‘빅칵까(bhikkhaka)’일뿐 결코 빅쿠(bhikkhu)’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재가불자의 견해청정

 

부처님이 말씀 하신 청정한 삶(브라흐마짜리야)의 핵심은 견해청정이라 볼 수 있다. 비록 머리를 깍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걸식하며 청정하게 사는 수행자일지라도 견해가 바르지 않다면 결코 청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출가하지 않고도 청정해질 수 있을까? 머리를 깍지 않고 탁발에 의존하지 않고 가정생활을 유지하고서도 청정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경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경에서 아내도 저도 순종하면서 바른 길로 잘 가신 님 곁에서 청정한 삶을 살겠으니(S1.2)”라고 말한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비록 아내와 자식,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재가자일지라도 견해가 바르면 청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견해가 청정하면

 

산에서 산다고 하여 모두 같은 자연인이 아니다. 모든 조건을 갖춘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놓고 부부와 함께 사는 사람도 자연인이라 하고, 약초 등을 채취하며 허름한 곳에서 홀로 살아 가는 사람 역시 자연인이라 한다. 그러나 TV에서 보는 자연인은 나홀로 살아 가는 자가 진짜 자연인같다.

 

출가자라 하여 모두 같은 출가자자 아니다. 빅카까(bhikkhaka)도 걸식자로 하고. 빅쿠(bhikkhu)도 걸식자라 한다. 그러나 걸식자라 하여 똑 같은 걸식자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청정함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청정한 견해를 가진 자가 진짜 걸식자라 하였다.

 

반짝인다고 하여 모두 금이 아니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머리를 깍았다고 하여 모두 스님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치 부처님 당시 제사를 주관하며 성직자로 삶을 산 바라문처럼, 천도재를 주관하며 영혼장사를 하는 출가자에 대하여 스님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르침대로 사는 출가자가 진짜 스님이라 볼 수 있다.

 

재가불자로 하여 모두 같은 재가불자 아니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비는 재가자도 있지만 그는 기복만을 바라는 재가불자이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재가불자가 있다면 그가 진짜 재가불자라 볼 수 있다.

 

진짜 자연인, 진짜 걸식자, 진짜 스님, 진짜 재가불자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청정이라 본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견해가 청정한 자들이다.

 

견해가 청정하면 굶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공부 잘하는 학생이 어떤 식으로든지 도움을 받는 것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자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지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한 삶(브라흐마짜리야)을 살아 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커다란 공덕을 쌓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견해가 청정한 자는 굶지 않는다!”

 

 

 

 

2014-02-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