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생명현상과 엔트로피법칙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9. 15:59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생명현상과 엔트로피법칙

 

 

 

중고교시절 물리과목에서

 

열역학 제1법칙이 있다. 닫혀진 계 내에서 에너지의 총화는 같은 것이라고 설명되는 것이 열역학 제1법칙이다. 이는 열의 특성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열은 높은 온도의 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한다. 이렇게 에너지의 변동이 있지만 닫혀진 계 내에서는 에너지의 합이 같기 때문에 에너지는 보존 된다. 그래서 열역학 제1법칙에 대하여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열역학 제2법칙이 있다. 이는 닫혀진 계 내에서 에너지는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하는데 그 역은 성립할 수 없다. 그래서 오로지 낮은 온도로 갈 수밖에 없는데 결국 열평형상태에 이르고 만다. 이를 열의 죽음(熱死)’이라고 한다. 이 모두가 중고교시절 물리과목에서 배운 것들이다.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는 이유

 

열역학 제2법칙의 속성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다. 마치 잉크 방울을 물이 담겨 있는 비이커에 떨어 뜨리면 잉크의 성질이 사라지고 말듯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 자연의 속성이자 근본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높은 열에서 낮은 열로 바뀌어 결국 열평형 상태에 이르고,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하는 현상에 대하여 엔트로피법칙이라도 한다.

 

엔트로피법칙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의 법칙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모든 것은 변하여 실체가 없다는 것이 제행무상이다. 마찬가지로 엔트로피 법칙 높은 열에서 낮은 열로 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질서에 무질서로 변하는 것이 자연의 근본법칙이라 한다. 그래서 아무리 질서가 잡힌 것도 세월이 흐르면 무질서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자연 뿐만 아니라 사회 전분야에서 목격할 수 있다.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으면 불량학생이 되고, 회사를 관리 하지 않으면 부도로 가게 된다. 관리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다.

 

부도난 회사에 가면 집기가 나뒹굴고 서류가 널려 있어서 엉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빈집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3년 이내에 허물어져 엉망이 된다. 이처럼 엉망으로 귀결 되고 마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모든 현상은 끊임 없이 변한다. 그것도 무질서로 변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사람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우주 역시 역시 엔트로피 법칙을 벗어 날 수 없다. 인생에 생노병사가 있듯이 우주에도 성주괴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엔트로피법칙에 거역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이다.

 

엔트로피 법칙을 거역하는 생명

 

오로지 생명만이 엔트로피 법칙을 거역한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것이 자연의 속성인데, 생명은 거꾸로 질서를 유지 하는 것이다. 단 살아 있을 때 한한다. 이렇게 열역학 제2법칙과 거꾸로 가는 것에 대하여 네겐트로피라 한다. 네겐트로피는 엔트로피의 반대 되는 개념이다.

 

KBS에서 다큐 프로를 보았다. ‘우주의 기적, 생명의 기적’이라는 프로이다. 이 프로에서 ‘제2화.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 ‘를 보면 열역학 제2법칙과 생명현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프로를 보니 매우 첨단 기법을 통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열감지 센서를 생명체에 부착하여 주변 온도와 다르게 표시 된 것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물체는 붉게 나오고 주변은 청색으로 표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생명이 있는 것들은 을 내고 있다는 말이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체온을 유지 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 다큐 프로에서는 이를 컬러풀하게 재현하고 있다. 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하여 시각적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기법은 마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열역학 제2법칙은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온도는 늘 36.9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변하지 않는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그 자체는 엔트로피법칙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현상은 사람 뿐만 아니라 생명이 모든 것들은 일정한 열을 유지하고 있어서 모두 엔트로피와 거꾸로 가는 네겐트로피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프로에 따르면 놀라운 말을 하였다. 사람이 체온을 유지 하고 있는 한 역시 엔트로피는 증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불가피 하게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고 싸는 일을 반복하는 신진대사 활동에 따라 주변의 엔트로피는 증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엔트로피가 증대 되면 결국 자연과 우주는 무질서로 향하게 될 것이다.

 

생명이 유지 하고 있는 한 질서는 유지된다. 그러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한다. 생명을 유지하는 필요한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 유지를 위하여 농사를 짓고 닭과 돼지 등 가축을 키우고 이를 산업화 한다면 결국 자연과 환경을 훼손 시키고 만다. 그래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대가로 주변이 희생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엔트로피는 증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생명이 있는 인간들은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이는 산에 올라가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 보면 알 수 있다. 아파트와 빌딩이 숲을 이루는 거대한 구조물들이 한눈에 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온을 유지 하는 인간들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만들어 내고 대양을 항해 할 수 있는 거대한 배도 만들어 낸다.

 

이뿐 만이 아니다. 자동차가 다니기 위하여 강에는 다리를 놓고 막힌 곳은 뚫어 터널을 만든다. 그래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거침이 없다.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보면 확실하게 질서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행기가 나는 것도 질서가 있기 때문이고, 배가 다니는 것,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 역시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비행기, ,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화석연료를 사용해야 하고, 이로 인한 환경오염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은 주변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주변의 희생에 의하여 유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엔트로피에 거역하여 거꾸로 가는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엔트로피가 증대되어 어느 것 하나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이제까지 인류는 잘먹고 잘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오늘날 보는 인류문명 자체가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대가를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다고 온갖 편리와 안락을 추구하는 인류문명은 엔트로피를 더욱 더 증대 시킬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빨리 종말로 이끌 것이다.

 

패닉상태에 빠졌는데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벅칙이 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몹시 비관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것은 엔트로피법칙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자연의 속성 때문에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도 죽게 마련이고,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태양도 식을 것이다. 이렇게 우주가 차갑게 식었을 때 그 상태는 엔트로피가 극대화 된 것이다. 이처럼 열사망에 이르면 다시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마치 비이커 속의 잉크방울처럼 한번 무질서로 향하게 되면 그 역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 엔트로피 법칙이다.

 

엔트로피법칙에 따르면 변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끊임 없이 변하는 것이 자연의 속성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과 유사하다.

 

무질서로 향하는 현상은 비가역적이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처럼 오로지 직진만 하는 비가역적 현상이 또한 엔트로피법칙이라 한다. 이런 현상에서 삼라만상 그 어느 것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 곳에도 안주 할 곳이 없음을 알았을 때 패닉에 빠진 듯하였다. 불교를 접하기 이전의 일이다.

 

삼법인과 유사한 엔트로피법칙

 

엔트로피법칙은 물리법칙이다. 물질의 현상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비록 물질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긴 하지만 불교적 가르침과 매우 유사함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엔트로피법칙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은 변하기 마련이고,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무상, , 무아의 가르침과 일부 맞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엔트로피 법칙은 물리적으로 삼법인을 설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엔트로피법칙은 정신현상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정신현상에 대한 것은 종교에 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막연한 두려움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엔트로피법칙으로부터 탈출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도 아니고, 몸과 마음이 무너져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연기법에 탈출구가 있는 것이다.

 

연기법은 부처님이 발견한 것이다. 이런 법칙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원래부터 있었기 때문에 원리로서 확정된 법이라 한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법이다. 이를 인과법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이를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설명한다. 그래서 연기법에 대하여 조건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철저하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름을 말한다. 이는 물리법칙과도 매우 유사하다. 물리법칙에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는 인과법이 있다. 이를 잘 설명한 것이 연기법이다.

 

십이연기에 따르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로 정형화 되어 있다. 여기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라고 하였을 때 이는 ‘Viññāapaccayā nāmarūpa이다. 의식(Viññāa)원인이고 이를 조건(paccayā)’으로 하여 명색(nāmarūpa)이라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이를 헤뚜빳자야팔라라 한다. 이를 또 다른 말로 (hetu)-(paccayā)(phala)’라 한다. 이렇게 원인조건결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인간의 죽음은 단멸한다거나 영원히 산다거나 하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인과 연에 따른 과보를 반드시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기법을 접하고 나서 엔트로피법칙에 따른 두려움은 사라졌다. 질서에서 무질서로 무지막지 하게 이동한다는 것은 거시적 세계에서 본 물리적 현상이지만 연기적으로 보았을 때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벗어나는 것일까?

 

생명력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엔트로피법칙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인정사정 없이 이동하는 것이다. 이 때 낮은 온도로 간다는 것은 결국 열이 식는다는 것을 말하고 이를 열평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열죽음이라 한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들은 체온을 유지한다.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한 엔트로피법칙을 적용받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체온은 언젠가 식고 만다. 이를 엔트로피법칙에 따르면 무질서가 극대화 되어 열평형에 도달하였다고 물리적으로 설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죽음이라 한다. 이처럼 온도 변화에 따른 죽음에 대한 묘사가 초기경에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Āyu panāvuso ki paicca tiṭṭhatīti.

 

[꼿띠따]

“벗이여, 이러한 생명력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

 

 

Āyu usma paicca tiṭṭhatīti

 

[싸리뿟따]

“벗이여, 이러한 생명력은 체열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

 

(Mahāvedalla sutta-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님 가운데 제일이라는 바라문 출신의 부처님의 제자 꼿띠따법의 장군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존자에게 묻고 있다.

 

꼿띠따는 생명력은 무엇을 조건으로 존재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체열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체열이라 번역한 것은 usma이다. 각주에 따르면 살아 있는 몸에 적용 되는 업에서 생겨난 열력을 말한다.(M43, 770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다음과 같이 체열에 대하여 비유를 들어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Tena hāvuso upama te karissāmi. Upamāyapidhekacce viññū purisā bhāsitassa attha ājānanti. Seyyathāpi āvuso telappadīpassa jhāyato acci paicca ābhā paññāyati, ābha paicca acci paññāyati, evameva kho āvuso āyu usma paicca tiṭṭhati. Usmā ca āyu paicca tiṭṭhatīti.

 

 

[싸리뿟따]

 

“벗이여, 그렇다면 그대에게 비유를 설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비유를 통해서 그 말한 바의 의미를 압니다. 예를 들어 등불이 불타오르면, 빛은 불꽃을 조건으로 알려지고, 불꽃은 빛을 조건으로 알려지듯이, 생명력은 체열을 조건으로 존재하고 체열은 생명력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

 

(Mahāvedalla sutta-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사리뿟따는 조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빛은 불꽃을 조건으로 하듯이, 생명력은 체열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체열이 없다면 생명력이 없음을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십이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고 하듯이, 사리뿟따 역시 체열을 조건으로 생명이 존재하고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리뿟따는 뜻하는 빠띠짜(paicca)라는 말을 사용하여 체열은 생명력을 조건으로 존재합니다.(Usmā ca āyu paicca tiṭṭhatīti)”라고 말한 것이다.

 

몸은 무정한 통나무처럼 버려지고

 

생명은 체열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체열이 식었을 때 이를 무어라 할까? 이에 대하여 꼿띠따는 벗이여, 얼마나 많은 상태가 이 몸을 떠나면, 여기 이 몸이 무정한 통나무처럼 버려지고, 던져져 누워있게 되는 것입니까?(M43)”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Yadā kho āvuso ima kāya tayo dhammā jahanti, āyu usmā ca viññāa, athāya kāyo ujjhito avakkhitto seti yathā kaṭṭha acetananti

 

[싸리뿟따]

 

“벗이여, 세 가지 상태 즉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이 이 몸을 떠나면, 여기 이 몸은 무정한통나무처럼 버려지고, 던져져 누워있게 됩니다.”

 

(Mahāvedalla sutta-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육체적 죽음에 대하여 통나무와 같은 것이라 하였다. 통나무는 열도 없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에게서 목숨이 끊어지면 마치 통나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대하여 생명력(jahanti)’체열 (usmā)’의식(viññāa)’이 몸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각주에 따르면 의식이 떠나는 것만으로는 죽음을 확정할 수 없다. 생명력과 활기가 모두 소멸되어야 한다. (M43, 772각주)”라고 설명 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게송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에서 알 수 있다.

 

 

마침내 목숨과 온기와 의식

그리고 몸을 버리면,

버려진 채 놓이니

무정하게 다른 것의 먹이가 되네. (S22.95)

 

 

목숨이 끊어진 다는 것은 온기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체열이 떨어져 차갑게 식었을 때 엔트로피가 극대화 된 것이다. 그 상태에서 의식마저 떠나 버렸을 때 마치 통나무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무정하게 다른 것의 먹이가 되네.”라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살코기를 제공해 주는 닭이나 돼지, 소를 연상하게 해준다.

 

육체적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력(jahanti)’과 ‘체열 (usmā)’과 ‘의식(viññāa)’이 몸을 떠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 만일 장기가 파괴되어 마치 통나무와 같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난다고 본다면 유물론에 입각한 단멸론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죽는 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죽는 것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어떤 입장일까? 이에 대하여 꼿띠따는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M43)”라고 묻는다. 이는 단멸론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한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Yvāya āvuso mato kālakato tassa kāyasakhārā niruddhā paippassaddhā. Vacīsakhārā niruddhā paippassaddhā. Cittasakhārā niruddhā paippassaddhā. Āyu parikkhīo. Usmā vūpasantā. Indriyāni viparibhinnāni. Yo cāya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nno, tassapi kāyasakhārā niruddhā paippassaddhā. Vacīsakhārā niruddhā paippassaddhā, cittasakhārā niruddhā paippassaddhā. Āyu aparikkhīo. Usmā avūpasantā. Indriyāni vippasannāni. Yvāya āvuso mato kālakato yo cāya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 samāpanno, ida tesa nānākaraanti.

 

[싸리뿟따]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에게는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생명력이 다하고, 체열이 소모되고, 감관들이 완전히 파괴됩니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도 신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언어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고, 정신적인 형성이 소멸하여 고요해지지만, 생명력이 다하지 않고, 체열이 다 소모되지 않고, 감관들은 아주 청정해집니다.

 

벗이여, 죽어서 목숨이 다한 자와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수행승이 있는데, 이들 사이에 이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Mahāvedalla sutta-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이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와 상수멸정에 든 자와의 차이에 대한 설명이다. 죽은 자의 특징은 생명, 체열이 파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에 따르면 의식 (viññāa) 이 파괴된다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이전의 구절에서 죽음이라는 것은 생명력(jahanti)’체열 (usmā)’의식(viññāa)’이 몸을 떠난 것이라 하였는데, 이 구절에서는 단지 생명과 체열만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체 의식은 어디로 간 것일까?

 

교리 문답의 큰 경에 있는 이 구절은 단멸론자들에게 악용 되고 있다. 몸이 파괴 되어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는 피할 수 없다. 이는 연기법에서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지 않은 자가 죽었을 때 필연적으로 연기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Viññāapaccayā nāmarūpa)”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따라서 생명력(jahanti)’체열 (usmā)’이 몸을 떠났다고 하여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경스님의 미안하지만 다음 생에 계속됩니다라는 책의 제목이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암시 하듯이 의식을 조건으로 하여 명색이 생겨 나기 때문에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지 않는 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엔트로피법칙과 상카라둑카(行苦)

 

제레미 리프킨 교수의 책 엔트로피법칙을 여러 번 읽었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이미 배운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것이지만 엔트로피법칙이라는 이름으로 접하게 되었을 때 패닉에 빠졌다고 하였다. 마치 인간이 태어나면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듯이 거시적인 물리 현상 역시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어디에도 안주 할 곳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책을 접하였을 때 불편한 마음이 든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렇게 무질서로 향하는 비가역적인 물리 현상은 다름 아닌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엔트로피법칙에 대하여 변한다는 측면에서 제행무상의 법칙을 적용하면 들어 맞지만 일체개고와 제법무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매칭시켜야 할까?

 

엔트로피법칙과 삼법인은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이는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가능하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내가 인식함으로써 세상이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loka)라는 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이처럼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바라 보았을 때 엔트로피법칙이 삼법인과 들어 맞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시적인 우주의 종말에 대하여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왜 그럴까? 이것 역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를 경전에서는 행고(상카라둑카)’라 하였다. 이는 오온에 대한 직접적인 괴로움을 뜻하는 고고(둑카둑카)와도 다른 것이고, 또 주변사람들과 자연의 변화에 따른 괴로움이라 부르는 괴고(위빠리나둑카)와도 다른 것이다.

 

우주의 운명이라는 것은 차갑게 식어 열평형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질서가 극에 달하여 되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행고라고 본다이렇게 엔트로피가 증대 되어 무질서로 치닫는 다는 것은 변할 수밖에 없어서 제행무상이고,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서 일체개고이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제법무아이다. 따라서 엔트로피법칙은 삼법인에 딱 들어 맞는다.

 

엔트로피를 낮추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는 엔트로피 증대에 참여 하고 있다. 그런데 탐욕을 내면 낼수록, 화를 내면 내면 낼수록 엔트로피 증대 속도는 가속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더 빨리 망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엔트로피를 낮출 수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통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멈춤(사마타)과 통찰(위빠사나)하였을 때 엔트로피는 덜 증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 어떤 존재로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체열이 있을 수 없어서 주변에 엔트로피를 유발하지 않을 것이다.

 

 

 

2014-02-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