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1. 19:34

 

 

대승불교의 깨달음과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도 하는데 불자들은 깨달음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래서일까 잊을만 하면 깨달음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 그래서 스님이나 학자들의 글을 보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쓴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타종교인도 깨달았다고 하는데

 

불자들은 깨달음에 대하여 종종 말을 한다. 그런데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깨달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TV를 보았는데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이 깨달았다라고 하였다. 깨달음이 불교전용용어인줄 알았는데 타종교인들도 깨달음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타종교인이 말하는 깨달음은 몰랐던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크게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뜻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타종교인의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깨달음으로 인하여 인격적 변화를 가져 왔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못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불자가 아닌 일반사람들도 깨달음이라는 말을 종종사용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불자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강좌를 듣고

 

불자이었으면서도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었다. 깨닫기 위하여 수행한다고들 하는데 대체 무엇을 깨닫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스님들이 결제철이 되면 깨닫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 한다고 하는데 대체 어떤 깨달음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불교TV에서 로버트 버스웰 교수의 강좌를 듣고서 한국불교에서 추구하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 깨달음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깨달음과 다른 것이었다. 놀랍게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절대적인 진여의 관점에서 볼 때,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이다. 이를 ‘본각(本覺,original enlightment)’이라 한다.

(버스웰 교수, 원효의 화쟁사상, 아시아에서 한국불교의 세계화 11회, 12회, 불교tv)

 

 

이 말 한마디에 한국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말을 선사들이 수 없이 하였음에도 버스웰 교수의 인터넷영상강의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고

 

버스웰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고 하였다. 참으로 파격적인 말이다. 깨닫기 위하여 수행을 한다는데 이미 깨달은 존재라니!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말은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확인과정, 증명과정이 바로 수행이라 한다. 참으로 명쾌한 말이다. 우리가 이미 깨달은 존재, 즉 우리가 본래부처라는 말도 놀라운 말인데, 거기에다 우리가 부처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 수행이라니! 버스웰 교수는 이렇게 깨달음과 수행에 대하여 정의 하였다. 선불교다운 파격이다.

 

선종에서는 왜 믿음()을 강조할까?

 

선종에서는 우리가 본래부처라고 믿는 것부터 수행은 시작된다고 한다. ‘믿음’이 가장 선행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본래 깨달은 자이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결코 선불교식 깨달음, 즉 ‘견성성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사실,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간화선 삼요체 중에 ‘대신심’이 가장 먼저 나온다. 또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단계인 ‘신해행증’에서도 역시 믿음이 가장 앞선다. 이렇게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굳게 믿은 다음, 그 다음 단계는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증명해 과는 과정만이 남은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식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이는 어떤 것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대승기신론에서 정의된 깨달음

 

버스웰 교수나 선사들이 말하는 본래불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 있다. 대승기신론이다. 대승불교 교학체계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는 대승기신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所言覺義者(소언각의자)  謂心體離念(위심체이념)  離念相者(이념상자)

等虛空界(등허공계)  無所不徧(무소불변)  法界一相( 법계일상)
卽是如來(즉시여래  平等法身(평등법신)  依此法身(의차법신)  說名本覺(설명본각)

 

깨달음은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 그릇된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은 허공처럼 온 우주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우주와 한몸이다. 깨달은 마음은 바로 여래의 절대평등한 진리의 몸이다. 또 그와 같은 진리의 몸을 본각이라고 한다.

 

(대승기신론, 깨달음과 무지, 서광스님역)

 

 

대승기신론에서 처음 나오는 구절이다. 깨달음에 대하여 생각과 관념이 사라진 마음의 본체라 하였다. 그래서 ‘우주와 한몸이 되는 것 (法界一相)’ 이라 하였다. 이것이 대승불교식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大疑心), “오직 할 뿐(Only doing it, 大憤心)

 

진리의 몸과 합일 하는 것, 즉 존재의 근원과 합일하는 대승불교식 깨달음을 얻으려면 먼저 믿어야 한다. 자신이 본래 부처이었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간화선 수행에서 가장 먼저 요청되는 대신근이다. 이와 같은 본래불이라는 믿음의 바탕하에 자신이 부처임을 증명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수행을 하는데 “오직 모를 뿐(Only dont  know, 大疑心)” 하며 의정을 키워나가고,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오직 할 뿐(Only doing it, 大憤心)”하며 용맹정진하다 보면 본래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렇게 선사들은 본래 자기가 부처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정진한다.

 

그러나 자신이 본래부처임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은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을 선방에서 보낸다. 이렇게 깨달음을 위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은채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마치 도인처럼 평생을 보낸다.

 

초전법륜경에서

 

대승불교의 깨달음이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초기불교의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다. 그래서 붓다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해서 깨달은 자가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최초 설법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초전법륜경을 보면 된다.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 tiparivaṭṭa dvādasākāra yathābhūta ñāadassana suvisuddha ahosi, athāha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abrāhma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ddho paccaññāsi.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방대한 빠알리니까야에서 가장 중요한 경은 무엇일까?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도 특히 중요한 경이 바로 초전법륜경이다. 부처님이 최초로 담마의 바퀴를 굴리신 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경에서는 불교의 근간이 되는 근본교리에 대한 것이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팔정도이다.

 

초전법륜경에서는 깨달음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바로 이 구절이 부처님이 깨닫고 난뒤에 깨달음을 선포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 (anuttara sammāsambodhi abhisambuddho paccaññāsi, S56.11)”라고 하였다.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인가?

 

여기서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라는 말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자신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등각正等覺 의미하는 삼마쌈보디(sammā-sambodhi)는 오직 부처님들만 얻을 수 있는 아라한 도의 지혜입니다. 부처님들은 이 아라한 도의 지혜를 어떠한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과 직관력으로 얻으셨습니다. 이 아라한 도과의 지혜로 부처님들은 모든 것을 바르고 완벽하게 알게 됩니다. 이는 이 지혜와 더불어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 삽반누따 냐나. sabbaññuta ñāa)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들만 지닐 수 있는 이 아라한 도의 지혜를 삼마삼보디라고 합니다. 삼마(sammā)는 바르게(), 쌈(sam)은 스스로,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삼마삼보디는 혼자 힘으로 바르게 증득한 정등각(正等覺)을 뜻합니다. 벽지불이 얻는 아라한 도의 지혜는, 스스로 혼자 깨닫는 쌈보디(sambodhi)는 있는데 바르게 깨닫는 삼마(sammā)의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스스로 증득한 지혜인 정각(正覺)이라고 합니다. 성문(聲聞)이 얻는 아라한 도의 지혜는, 혼자 힘으로(無上, sam), 바른(sammā) 깨달음을 얻는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그냥 간단히 깨달음(, bodhi)이라고 합니다.

 

부처님들에게 일어난 아라한 도의 지혜는, 부처 스스로가 바르게 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일러 정등각(正等覺)이라고 합니다. 이 지혜와 함께 일체를 아는 지혜가 동시에 일어납니다. 이 일체지(一切智)를 얻고 나면 모든 법을 두루 아는 정등각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이 정등각의 지혜를 부처님만이 얻을 수 있는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의 장에서는, 부처님께서 부처에게만 일어나는 정등각의 지혜를 얻으셨음을 아직 선포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행복한 숲)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각이라 이라 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 그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이는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열반을 성취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번뇌가 소멸됨에 따라 괴로움 역시 소멸 되어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부처님이 출현하기 이전에 과거 모든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원리로서 확정된 담마를 깨달은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에 대하여 특별히 삼마삼보디(sammā-sambodhi)’라 하였다. 이를 우리말로 하면 지극히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만 특별하게 삼마삼붓다(정득각자)라 호칭한다.

 

전세계불자들이 법회의식할 때

 

이런 호칭은 전세계불자들이 법회의식할 때 반드시 낭송되는 예경문에도 쓰인다. 다음과 같은 예경문이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초불연)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성전협)

 

 

예경문에서 삼마삼붓닷사 (sammāsambuddhassa)’에 대하여 바르게 깨달으신 분(초불연)’ 또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성전협)’이라고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삼마삼보디라는 칭호는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게만 붙여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 벽지불, 성문의 깨달음

 

마하시 사야도도는 깨달음 용어에 대하여, 성문, 벽지불, 부처님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글을 근거로 하여 깨달음의 종류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구분

깨달음

  

부처님

삼마삼보디

(sammā-sambodhi, 正等覺)

1)어떠한 누구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과 직관력으로 얻는 아라한도의 지혜.

2)이 지혜와 더불어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智, 삽반누따 냐나. sabbaññu

-ta ñāa)가 동시에 일어남

3)법을 펼 수 있음

벽지불

삼보디

(sambodhi, 正覺)

1)바르게 깨닫는 삼마(sammā)의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스스로 증득한 지혜인 정각(正覺)을 의미함.

2)법을 펼 수 없음

성문

보디

(bodhi, )

1)혼자 힘으로(無上, sam), 바른(sammā) 깨달음을 얻는 자격을 갖추지 못해서 그냥 간단히 깨달음()이라 함.

2)부처님의 담마를 실천하여 아라한이 됨

근거: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표를 보면 깨달음(보디)에 대하여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삼마삼보디 (sammā-sambodhi, 正等覺)’ 호칭은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게만 붙여 주고 있다. 그런데 표를 보면 벽지불과 부처님의 차이가 두 가지로 드러난다. 그것은 ‘삼마(sammā)’와 ‘법의 펼침’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과 벽지불의 깨달음은 어떻게 다른가?

 

벽지불은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있을 때는 출현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벽지불이 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벽지불은 법을 펼칠 수 없다. 그것은 벽지불의 깨달음이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벽지불의 깨달음에 대하여 삼마삼보디라 하지 않고 삼보디(sambodhi, 正覺)’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스스로의 힘으로 과거 불이 깨달았던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을 올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삼마라는 호칭을 붙여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라는 뜻으로 ‘삼마삼붓다’라 한다. 이렇게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가 법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출현하여 정법이 살아 있을 때는 또 다른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표를 보면 보디(bodhi, )’가 있다.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은 부처님이 깨달았던 그 경지를 말한다. 모든 번뇌가 소멸되어 괴로움이 종식 되고 윤회가 끝나는 그런 깨달음을 말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깨달음이라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여 증득한 깨달음을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은 깨달음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라한이 되았다는 것은 번뇌가 소멸되어 다시는 윤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이 꺼진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자가발전하는 탐진치라는 연료

 

불은 연료가 있으면 계속 타오른다. 그래서 땔감을 공급해 주면 꺼지지 않고 계속 타오른다. 불이 계속 타오른다는 것에 대하여 윤회로 설명할 수 있다. 연료를 계속 공급해주면 불은 계속 타오르듯이 탐진치라는 연료를 계속 공급해주면 존재는 계속 윤회하게 된다. 그런 탐진치라는 땔감은 스스로 만들어 낸다. 마치 태양열로 자가발전하여 불을 밝히는 가로등 처럼, 탐진치라는 연료를 자가발전하듯이 만들어 내어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탐진치는 윤회의 동력이 된다.

 

윤회를 멈추게 하려면

 

윤회를 멈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회의 동력이 되는 연료를 차단하면 될 것이다. 마치 땔감이 공급 되지 않으면 불이 꺼지고 말듯이, 탐진치라는 연료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열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열반이라고 한다.

 

(Nibbānasuttā-열반의 경, 상윳따니까야 S43:34, 전재성님역)

 

 

 

 

 

Oil lamp

 

 

 

부처님은 탐욕(rāga)과 성냄(dosa)과 어리석음(moha)이 소멸하면 열반이라 하였다. 이는 무위상윳따에 나오는 정형구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자가발전하여 윤회 하게 하는  연료가 공급이 되지 않았을 때 마침내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Sn2.1)”라고 하여 열반에 대하여 꺼진 등불로 묘사 하고 있다.

 

부처님이 닦아 놓은 길, 그 길로 가기만 하면

 

연료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 때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부처님도 아라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아라한이 되어서 깨달은 것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닦아 놓은 길, 그 길로 가기만 하면 괴로움과 윤회가 종식되는 그런 깨달음을 보디(bodhi, )라 한다.

 

 

 

2013-11-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