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어도 아무나 빅쿠가 될 수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 19:29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어도 아무나 빅쿠가 될 수 없다!

 

 

 

스님과 비구

 

우리나라에서 출가수행자를 스님이라 부른다. 스님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만 불리우는 독특한 말이다. 어떤 경로로 스님이라는 말이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에다 자를 붙여서 승님스님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스승님에서 가운데 자가 빠져 스님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에서는 출가수행자를 스님이라고 부르지만 그렇다고 하여 비구라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입적하신 법정스님의 경우 비구 법정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으나 자신의 법명 앞에 비구자를 붙인 경우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직까지 스님과 비구를 동일시 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신도들이나 스님들이나 모두 스님이라고 부르지 비구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승이면서 동시에 비구승

 

우리나라 스님들은 대승보살계비구계를 동시에 받는다. 그래서 보살승이면서 동시에 비구승이다. 하지만 비구계를 지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스님이 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스님들이 보살계만 받는다면 이는 재가의 신도들과 똑 같이 된다. 왜 그럴까? 재가불자들도 대승보살계를 받기 때문이다. 소정의 교육을 마친 재가불자들에게 연비의식과 함께 대승보살계를 주기 때문이다. 이로 본다면 스님이나 재가자나 모두 똑 같은 보살승이 된다. 그러나 스님들은 소위 소승계라 불리우는 비구계를 한번 더 받는다. 그래서 재가자와 차별된다. 그러나 비구계를 지키는 스님들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소승 비구계는 그저 스님이 되기 의한 하나의 통과과정으로 보인다.

 

상가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율장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오로지 하나의 계만 받는다. 그것이 비구계이다. 그래서 오로지 비구계대로 살아 간다. 대승불교 스님들처럼 비구계를 받았지만 보살승으로 사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렇게 비구계를 받음으로서 상가의 일원이 된다. 그렇다면 상가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경장에서 초전법륜경에서는 부처님이 감흥어린 말로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S56.11)”라고 경전이 끝나지만 율장에서는 이어지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진실로 아냐시 꼰단냐는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無畏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찬탄의 말씀을 하시자, 꼰단냐 존자는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율장 마하왁가,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이부분은 경장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율장에만 있기 때문이다. 율장에서 이 문장이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상가의 형성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최초로 진리의 눈이 생겨난 꼰단냐가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로 표현 되는 수다원의 깨달음이다.

 

“오너라, 비구여” 득도한 자에게 구족계를

 

이렇게 깨닫게 되었을 때 꼰단냐는 부처님에게 구족계를 받고자 요청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구족계라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득도한 자에게 구족계를 주는 것이다. 그 득도는 다름 아닌 수다원 단계이다. 따라서 수다원이 되어야 구족계를 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그때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 승가에 입문, 허락을 요청했을까요? 그 해답은, 꼰단냐 존자가 소위 현법(現法, 법을 봄, diṭṭha-dhamma)이라고 통칭되는 공덕과 자질들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현법現法 등의 공덕을 완전히 구비한 꼰단냐 존자는 법을 보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구족계를 청했습니다. 그는 네 가지 진리의 멸제滅諦 보았습니다. 다른 말로, 열반을 실현하였습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제8)

 

 

마하시사야도의 설명에 따르면 꼰단냐가 법을 보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사성제를 이해하고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루었기 때문에 구족계의 자격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구족계를 받기 이전까지가 사미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꼰단냐가 구족계를 받기 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오너라, 비구여” “법은 잘 설해졌다. 와서 괴로움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 계율 집중, 지혜의 출세간의 수행을 닦도록 하여라.

 

(율장 마하왁가, 마하시사야도의 초전법륜경 법문집에서)

 

 

율장 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오너라, 비구여”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초대함으로서 꼰단냐는 구족계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수 백개에 달하는 별도의 계목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정식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을 말한다.

 

여섯 명의 아라한 출현의 의미는?

 

이렇게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와 똑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이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수행을 해야 함을 말한다. 율장에서는 꼰단냐를 비롯하여 오비구 모두 구족계를 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비구 모두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하였음을  뜻한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난 것이다.

 

이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부처님은 오비구를 모아 놓고 무아상경을 설하게 된다. 무아상경은 초전법륜경에 이어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무아상경을 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비구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율장에 따르면 이세상에는 여섯 명의 아라한 출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오른 자가 부처님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명이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섯 명의 아라한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되었음을 말한다. 마치 물리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발표 하였을 때 이를 이해한 사람이 생겨 났을 때 그 이론이 검증된 것처럼, 부처님이 최초로 오비구에게 자신의 깨달은 것을 설명하였을 오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이 틀림 없다는 것과 같다.

 

기차타고 가다 준 구족계

 

율장에 따르면 구족계는 깨달은 자에게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최소한 수다원의 깨달음을 말한다. 이는 수다원의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하면 구족계를 받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구족계를 아무에게나 주었던 것 같다. 특히 1981년 단일계단이 성립 되기 이전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신문에 연재된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하지만 첫 발을 내딛은 단일계단은 우여곡절 끝에 끝까지 살아남아 한국불교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 단일계단 설립 전까지 조계종 스님들은 출가 본사에서 계를 수지했다. 그 방식은 본사마다 제각각이었다. 운허스님은 조계종의 각양각색의 수계 풍토를 일컬어 ‘기차 타고 가다가도 계를 주었다’고 표현 했었다.

 

( 1981년 2 통도사에서 종단차원 수계, 불교신문 20111-10-04)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1981년 단일계단이 성립하기 이전에는 교구본사에서 비구계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수계과정이 율장정신에도 맞지 않고 또한 관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기차 타고 가다가도 계를 주었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건을 갖추지 않은 구족계로 인하여 저질승려의 양산으로 이어져서 크고 작은 종단분규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구족계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구족계란 어떤 것일까?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각주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구족계(具足戒)’라 번역한 우빠삼빠다(upasampada) upa(위로)+sa(함께)+pad(가다)의 합성어이다. PED에서는 ‘(in special sense) taking up the bhikkhuship, higher ordination, admission to the privileges of recognized bhikkhus.’라고 설명되듯이, 승가에 입문하여 비구(bhikkhu) 또는 비구니(bhikkun)가 되고자 할 때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하는 계율이다.

 

상좌부의 비구계는 227가지, 비구니계는 311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미 또는 사미니가 받는 10계와 비교하여 계품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중국에서 구족계(具足戒)라고 번역한 듯하다.

 

현재 상좌부 전통에서 행하고 있는 이 구족계 수계의식은 부처님 당시와 거의 같다. 구족계를 받으려면 일정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즉 나이는 20세가 넘어야 하고,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하며, 병역에서 면제되어야 하고, 부채가 없고 전염병에 걸리지 않아야 하는 것 등이다.

 

구족계 수계의식은 우기(雨期)의 하안거 기간(vassa)을 제외하고는 길일(吉日)이라고 생각되는 어느 때라도, 그리고 이미 구족계를 수지한 승려가 참석한 신성한 장소라면 어느 곳에서라도 행할 수 있다.

 

다만 구족계를 받을 때에는 특별한 수계작법이 있다. , 삼사칠증(三師七證:삼사는 계율을 직접 설하는 수계아사리, 계율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교수아사리 그리고 갈마아사리를 말하는 것이며, 칠증은 수계의식이 원만히 이루어졌는가에 대하여 증명해주는 법사 7)을 모시고 위의를 갖추어 설하게 되어 있다.

 

(구족계 <초전법륜경> 3,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 주석)

 

 

구족계를 빠알리어로 우빠삼빠다(upasampada)’라 한다. 이를 중국에서는 구족계(具足戒)’라 번역하였는데 이는 비구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수다원에게 구족계를

 

율장정신에 따르면 수다원이 된 자가 아라한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기 이전의 예비단계를 사미단계로 본다. 예비단계에서 도를 닦아 수다원 단계에 이르면 구족계를 주는 것으로 본다.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이 보장 되어 있으므로 죽 그 길로 나아 가면 된다. 그래서 구족계를 주는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수다원이 되면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악처에 악처에 떨어질 염려는 없다. 이에 대하여 라따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10.

Sahāvassa dassanasampadāya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
Tayassu dhamm
ā jahitā bhavanti,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Sakk
āyadiṭṭhi vicikicchitañca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S
īlabbata vāpi yadatthi kiñci,        -랍바땅 와-삐 야닷티 낀찌
Cat
ūhapāyehi ca vippamutto              짜뚜-하빠-예히 짜 윕빠뭇또
Cha c
ābhihānāni abhabbo kātu         차 짜-비타--니 아밥보 까-
Idampi sa
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에 실체라는 견해

매사의 의심, 계행과 맹세에 대한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

그 세 가지의 상태는 즉시 소멸되고,

네 가지의 악한 운명을 벗어나고,

또한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11.

Kiñcāpi so kamma karoti pāpaka      낀짜-삐 소 깜망 까로띠 빠-빠깡
K
āyena vācā uda cetasā vā               -예나 와-- 우다 쩨따사- -
Abhabbo so tassa pa
icchādāya           아밥바 소 땃사 빠띳차--
Abhabbat
ā diṭṭhapadassa vuttā,           아밥바따- 딧타빠닷사 웃따-

Idampi saghe ratana paīta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신체와 언어와 정신으로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감추지 못하니,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Ratanasutta-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에 따르면 수다원이 되면 유신견, 계금취견, 법에 대한 의심이 타파 되었으므로 네가지 악한 운명과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을 저지를 일이 없을 것이라 한다.

 

여기서 네  가지 악한 운명은 지옥, 축생, 아귀계, 아수라를 말한다. 따라서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악처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그리고 여섯 가지의 큰 죄악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라한을 살해하고, 승단의 화합을 깨고, 이교의 교리를 추종하는 것을 말한다. 어지간한 번뇌가 거의 소멸된 수다원에게 있어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무간지옥에 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설령 수다원이 다음 생에 자신이 이전에 수다원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교도를 신봉하고 있을 지라도 도중에 이를 알아챈다고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은 그것을 감출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인 길은 무엇일까? ‘열반체험을 말한다. 한 번 열반 체험 한자는 수다원이 되었으므로 아무리 잘못을 저질로도 악처로 떨어질 정도는 아니고, 또한 일시적으로 이교도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궁극적 진리를 체험한 과보로 인하여 알아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곱생 이내에 죽는 일이 없는 열반에 들것이라 한다. 이것이 테라와다불교 국가의 불자들이 조석으로 독송하는 수호경인 라따나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수다원이 되면 어지간한 번뇌는 소멸되어 절대로 악처에 떨어질 일이 없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어느 정도일까?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큰 대지와 내가 손톱 끝에 집어든 이 흙먼지와 어느 쪽이 더 큰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이 큰 대지가 훨씬 크고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는 아주 작습니다. 세존께서 손톱 끝에 집어든 흙먼지를 큰 대지와 비교한다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갖추고 진리에 대한 올바른 꿰뚫음에 도달한 고귀한 제자들에게는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 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환생한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 있는 괴로움을 이미 파괴되어 끝나 버린 괴로움과 비교하면 백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천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하며 또한 그 십만 배도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까시카경-Nakhasikhāsutta-손톱 끝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1,전재성님역)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번뇌에 대하여 대지와 손톱 끝에 있는 흙먼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한 자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거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도둑질을 한다든가 등의 오계를 어겨 악처에 떨어질 일이 없고, 또한 부모를 살해 하는 등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무간지옥에 떨어질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다원의 지위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청정한 것이다. 그래서 남아 있는 번뇌는 불과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런 자에게 구족계를 주었다고 율장에서 표현 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는 수다원이 된 자에게 구족계를 주고 있는 것일까?

 

삼사칠증(三師七證)제란?

 

1981년 이후 한국불교에서는 단일계단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집단적으로 비구계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율장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족계는 삼사칠증제에 따라 부여 하기 때문이다.

 

 삼사칠증(三師七證)’이란 정식비구가 되려면 3명의 스승과 7명의 증인을 말한다. 정식비구가 되려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계를 주는 계화상(戒和尙), 청결을 증명하는 갈마사(葛磨師), 의식을 가르쳐 주는 교수사(敎授師)를 말하고 칠증은 입회인을 말한다. 이렇게 열 명의 입회인 있어야 구족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의 단일계단에서 한꺼번에 집단으로 수계 의식을 행하는 것은 율장정신에 따르면 위배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기차타고 가다 구족계를 주었다는 것에 비교하면 놀라운 발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누구나 스님이 될 수 있어도 누구나 빅쿠가 될 수 없다!

 

율장정신에 따라 구족계를 받았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열반을 체험하여 수다원이 된 자이어야 하고, 삼사칠증제에 따라 열명 이상의 빅쿠가 증명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비구계가 하나의 요식행위로 그치는 것 같다. 비구계라는 구족계를 받았음에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구족계를 요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구족계를 받으면 남아 있는 번뇌는 몇 개 되지 않아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구족계를 받았음에도 번뇌에서 헤어 나지 못한다면 구족계를 받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구족계도 받지 않은 자가 스스로 스님이라 칭하는 경우도 있다. 스승 없이 혼자 깨달았다고 자처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스스로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입고 다닌다. 스승도 없고 법맥도 없어서 자신이 스승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정법 살아 있는 시대에서는 율장정신에 따라 구족계를 받은 자만이 빅쿠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스님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누구나 빅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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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