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때문이라고? 느낌이 발생하는 여덟 가지 요인과 접촉(phassa)
일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모른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전까지는 ‘희희낙낙’하며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일이 터졌다. 작업한 일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잘못 입력된 정보에 따라 잘못된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모든 것이 잘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전화 한통 받고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일을 다시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로 인하여 금전적 손실은 물론 신용까지 잃게 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 하였다.
일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부주의로 첵크 되지 않아 발생된 것임에도 나중에 결과가 잘못 나오게 되자 마치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처럼 보였다. 만일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일이 잘 된 것일까? 하지만 처음부터 잘못 입력된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다. 다만 빨리 터지느냐 늦게 터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지 추측은 가능하지만 확신할 수 없다. 특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고를 당했을 때가 그렇다. 그래서 그때 가 보아야 한다. 그때 가서 눈으로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 나면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였을 때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조건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숙명론자 또는 운명론자가 되는가 보다.
모두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숙명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씨바까]
“존자 고따마여, 어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렇다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것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Moḷiyasīvakasutta-몰리야 씨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1, 전재성님역)
질문자 몰리야는 왕족이다. 몰리야 씨바까는 부처님에게 운명에 대하여 물었다. 그래서 느낌은 과거의 원인에 의하여 만들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부처님에게 묻는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각주에 따르면 ‘자이나교의 숙명론’이라 한다.
반드시 업 때문만은 아니다
부처님은 현재의 느낌이 과거의 업에 의해 전적으로 또는 배타적으로 유일하고 충분하게 결정된다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대신 부처님은 느낌에 따른 고통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온다는 것을 말씀 하셨다. 반드시 업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담즙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Moḷiyasīvakasutta-몰리야 씨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느낌들이 담즙에서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담즙 하나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후 전개 되는 이야기를 보면 담즙 뿐만 아니라 점액, 바람, 체질, 계절의 변화, 불운한 사건, 우연한 피습, 업보의 성숙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업의 원인만으로 느낌들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으로 느낌이 발생됨을 설명하고 있다.
느낌이 발생하는 여덟 가지 요인
이와 같은 다양한 여러 가지 원인에 따라 느낌이 발생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느낌이 발생하는 다양한 요인
No |
구분 |
느낌의 발생 |
1 |
담즙 Pitta |
담즙. 점액, 바람은 인도의 의학서인 아유르-베다에서 인간의 세가지 체질을 나타낸다. |
2 |
점액 Semha | |
3 |
바람 Vāta | |
4 |
체질 Sannipātikāni |
담즙. 점액, 바람 세 가지 체질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Srp.III.81) |
5 |
계절의 변화 Sannipātikāni |
|
6 |
불운한 사건 Visamaparihārajāni |
‘많은 짐을 실어 나르는데 갑자기 째찍질 당하거나 갑자기 우물가에서 뱀에 물리거나 역경에 둘러 쌓여 생기는 일’을 말한다.(Srp.III.81) |
7 |
우연한 피습 Opakkamikāni |
1) 예를 들어 ‘ 이 자가 도둑이나 간통자라고 하면 체포해서 무릎이나 팔꿈치 곤봉등으로 때리고 공격하여 발생된 것’을 두고 말한다. 또는 부처님께서 돌조각에 우연히 발을 다친 것을 여기에 귀속시키기도 한다. (Srp.III.81)
2) 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타고, 익사하고, 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것은 업의 성숙과는 달리 의학적으로 처리 될 수 있는 것이다. (Milp.302) |
8 |
업보의 성숙 Kammavipākajāni |
Srp.III.82에 따르면, ‘어떠한 의약도 어떠한 주문도 업의 성숙을 막을 수 없다.’ |
느낌은 접촉에 따른 것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나는데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거나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이다.
지금 내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전화를 받게 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이런 느낌은 위 여덟 가지 사항중에 어디에 속할까? 따져 보니 여덟 번째 항목인 ‘업보의 성숙 (Kammavipākajāni)’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비록 잘못된 정보임을 꿈에도 모르고 작업을 하였을지라도 나중에 다른 사람에 의하여 발견되었을 때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부주의한 결과가 과보로 나타나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모두 전생에 지은 업보때문이라고?
살다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된다. 평소 건강하던 몸도 어느 순간 아파서 드러눕게 된다. 이런 경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마도 체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체질적으로 그렇게 타고 났다면 그런 병이 어느 순간에 발병할 지 모른다. 그래서 암이나 치매와 같은 중병에 걸릴지 모른다. 이런 경우 모두 자신이 과거 전생에 지은 업보라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이 경에서 담즙(Pitta), 점액(Semha), 바람(Vāta)과 같은 세 가지 체질을 언급한 것은 고대 인도의 의학서인 아유르베다에 근거한다. 이외에도 수 많은 체질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체질에 따라 (Sannipātikāni)’ 느낌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런 느낌은 괴로운 느낌이다. 일체개고이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으로 본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느끼는 것은 반드시 업의 성숙에 따른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래서 부처님이 담즙(Pitta), 점액(Semha), 바람(Vāta)과 같은 세 가지 체질과 ‘체질 (Sannipātikāni)’에 따라서 느낌이 일어난다고 말한 것은 현재의 느낌이 과거의 업에 의해 전적으로 배타적으로 유일하고 충분하게 결정된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연기법에서는 인과의 동시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과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숙명론적 결정론은 오히려 인과를 성립시키지 못한다.
(담즙(Pitta), 점액(Semha), 바람(Vāta) 각주, 전재성님역)
전재성님은 인과의 동시성을 말하고 있다. 인과라는 것이 반드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반드시 과거전생이 지은 업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접촉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은 원인과 결과가 순차적으로 또는 업의 과보 성숙하여 받는 것이라기 보다 동시적 인과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병이나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자신의 체질로 인한 것인데, 이를 과거 전생에 지은 업보탓으로 돌린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음을 말한다.
추위나 더위 등으로 인하여
다섯 번째 항 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추위나 더위 등으로 인하여 괴로운 느낌을 받는 것을 뜻한다고 보여진다. 이런 고통도 과거에 지은 업보는 아닐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불운과 행운
여섯 번째 항을 보면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이 있다. 이에 대하여 ‘역경에 둘러 쌓여 생기는 일’이라 하였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운이 따라 주지 않아 겪게 되는 고통 같은 것이다.
일을 하였는데 한번만 더 확인하였더라면 실수가 없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불운한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던 중에 실수가 눈에 띄여 바로 잡았다면 행운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삶의 과정에서 불운과 행운은 항상 따라 다닌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운이 닥쳤을 때 “재수없다”라고 말한다. 행운이 닥쳤을 때는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의 일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확인하고 또 확인 하는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불운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다 뱀에 물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의 과보로 본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그래서 경에서 부처님은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 하였다. 사주나 팔자, 업보로 돌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연하게 다리에 맞은 돌조각
일곱번째 항에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는 우연히 발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돌조각에 발을 다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돌조각 사건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돌 조각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다. 세존께서는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
(돌조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8,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부처님도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범부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돌조각으로 인하여 비록 육체적 고통은 느낄지라도 정신적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처님도 “아프다”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더 발전하여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하여 육체적 고통을 정신적 괴로움으로 발전시키지 않음을 말한다. 초기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제일의 화살(육체적 고통)’은 맞을 지언정 ‘제이의 화살(정신적 괴로움)’을 맞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우연히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사건
부처님이 다리에 돌조각을 맞은 것은 각주에 따르면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깃자꾸따 산에서 바위를 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바위는 다른 바위에 부딪쳐 멈추었다. 그러나 그 충격으로 작은 돌조각이 부처님에 발에 날아 든 것이다. 그렇다면 돌조각은 이미 예견된 것일까? 과거 전생에 지은 행위에 따른 과보로 돌조각을 맞은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우연히 발생되어 당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우연한 피습’이라 하였다.
뉴스에서 우연한 피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어떤 여대생이 길을 걷다가 납치 되어 성폭행 당한 후 고속도로에서 치어 죽었다든가 또 어느 보험설계사가 성폭행을 당해 살해 되었다든가 하는 끔찍한 뉴스를 듣는다. 또 차를 타고 가다가 운전자의 실수로 사고가 나서 전원 사망하였다는 뉴스를 듣는다. 이런 뉴스를 들을 때 마다 사고를 당한 자에 대하여 과거에 지은 업보 때문이라 볼 수 있을까?
우연히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사건에 대하여 모두 과거 전생의 행위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진실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 고 말씀 하셨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의 동시성이다. 연기법에서는 순차적 인과 뿐만 아니라 동시적 인과도 인정되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을 업보로 돌리면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항목이 불자들에게 익숙한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이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어떠한 의약도 어떠한 주문도 업의 성숙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모든 현상을 업보로 돌리면 숙명론자가 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사주나 팔자 탓이라 말하는가 하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액땜 하였다”라고 하여 오로지 과거에 지은 업의 탓으로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반드시 과거의 업보탓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원인들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비담마에서는 업의 이론을 정교화 하다 보니 모든 신체적인 고통은 업의 성숙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업의 이론을 정교화 하다 보니
그래서일까 아비담마 논장을 설명하는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Kammà vipàkà vattanti, vipàko kammasambhavo;
Kammà punabbhavo hoti, evaü loko pavattatãti. –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업으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있고
이렇게 해서 세상은 계속된다.
(청정도론, 제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대림스님역)
Kamma-result proceeds from kamma,
Result has kamma for its source,
Future becoming springs from kamma,
And this is how the world goes round.
(Bhikkhu Ñáṇamoli, The Path of Purification)
아비담마나 청정도론에서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설명만 보인다. 몰리야 씨바까의 경(S36.21)에서와 같이 체질이나 우연한 피습 등 느낌(고통)이 발생하는 다양한 요인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이로서 알 수 있는 것은 초기불교를 공부할 때 논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보다 경전 위주로 공부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경전위주로 하되 논서는 참고만 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금생에 받는 업, 다음생에 받는 업 등 정교한 업과 과보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기며 과보는 업이 그것의 근원이다 (Kammà vipàkà vattanti, vipàko kammasambhavo)”라 하였다.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
그런데 이어지는 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Kammassa kàrako natthi, vipàkassa ca vedako;
Suddhadhammà pavattanti, evetaü sammadassanaü.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 이것이 바르게 봄이다.
(청정도론, 제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대림스님역)
There is no doer of a deed
Or one who reaps the deed’s result;
Phenomena alone flow on—
No other view than this is right.
(Bhikkhu Ñáṇamoli, The Path of Purification)
청정도론 게송에 따르면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다.(Kammassa kàrako natthi, vipàkassa ca vedako)”라고 하였다. 빠알리어 kàrako는 ‘Making, doing, causing’의 뜻이다. 그래서 ‘Kammassa kàrako natthi’는 ‘업을 만드는 자가 없다’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업을 짓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다. 빅쿠 냐나몰리의 영역 ‘There is no doer of a deed(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누가 행위르 한 것일까? 이어지는 게송에 따르면 “순수한 법에 의해 이끌린다(Suddhadhammà pavattanti)”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봄 (sammadassanaü)’이라 한다.
네 가지 업설이 있는데
연기법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그리고 조건에 따라 상속된다. 그렇다고 하여 행위를 경험하는 자를 인정하면 영원론이 되고 행위하는 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단멸론이 된다. 연기를 설한 상윳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행자]
"벗이여, 싸리뿟따여,
1)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2)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싸리뿟따여,
3)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4)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ṃ-이교도경, 상윳따니까야S12:24, 전재성님역)
경에서 ‘업보를 믿는 자(kammavada)’가 있다.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업설의 신봉자는 모든 행위, 즉 업은 좋건 나쁘건 그것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으로 현세에 영향을 끼치거나 내세에 그 영향을 끼친다고 하며 우리의 현세의 존재는 과거의 행위의 결과라고 본다.
(업보를 믿는 자(kammavada) 각주, 전재성님)
이와 같은 업설의 신봉자는 경에 따르면 네 부류가 있다. 하지만 사리뿟따는 네 가지 모두 삿된견해라고 하였다.
왜 사견(邪見)인가? 각주에 따르면 1번항의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다는 견해는 자기원인설로 영원불변의 자아(atman)을 가정한 것이다. 힌두교적 견해라 볼 수 있다. 2번항의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는 견해는 타자원인설로 시간, 신, 자성, 업 또는 운명 등 타자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고 보는 것이다. 3번 항의 경우 내적외적인과론에 소속되며 자이나교에서 취하는 입장이라 한다. 몰리야 씨바까의 경에서 씨바까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론이다. 1번과 2번항의 입장이 모두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4번항의 경우 어떠한 인과도 철저하게 부정하는 유물론적 견해이다.
접촉을 연유하여(Phassaṃ paṭicca)
청정도론에서는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은 네 가지 중에 어디에 속할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멸론으로 오해 될 수 있다. 거두절미하여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라는 부분만 강조하면 단멸론이 된다. 그러나 뒤이어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 이것이 바르게 봄이다.”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 단멸론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확하게 업설을 표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경전에서 찾아야 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싸리뿟따]
벗이여, 세존께서는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면, 세존께서 말씀대로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세존을 잘못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는 대로 설명하는 것이고, 그대들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냐띳티야경-Aññatitthiyasuttaṃ-이교도경, 상윳따니까야S12:24, 전재성님역)
네 가지 업설을 부정한 사리뿟따 존자는 참으로 놀라운 말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접촉을 연유하여(Phassaṃ paṭicca)’ 생겨나는 것이라 하였다. 자아원인설, 타자원인설, 내적외적원인설, 원인부정론 네 가지를 모두 부정하고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이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연기적으로 고통이 발생함을 설명한 것이다. 업과 업보 역시 연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접촉을 해야 한다. 십이연기에 있어서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의 그 접촉(phassa)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고통이나 업보는 연기적으로 조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존재론적으로 표현된 청정도론
그렇다면 청정도론에서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라는 말이 이어지는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라는 말이 있음에도 단멸론으로 오해 받을까? 이는 ‘존재론적’으로 표현 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존재론은 ‘있다(atthi)’ 와 ‘없다(natthi)’로 표현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다’라고 하면 영원론이 되고 ‘없다’라고 말하면 단멸론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표현일까? 인식론적으로 표현 해야 한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앗티(atthi)에 대하여 ‘이다’라고 표현하고, 낫티(natthi)에 대하여 ‘아니다’라고 말하면 인식론이 된다.
그런데 청정도론의 번역자는 ‘있다’와 ‘없다’라는 뜻의 존재론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서양번역자의 영향을 받아서라고 보여진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에 바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Kammassa kàrako natthi, vipàkassa ca vedako; Suddhadhammà pavattanti, evetaü sammadassanaü.”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번역하면“업을 짓는 자도 아니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아닌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날 뿐이니 이것이 바르게 봄이다.”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불교가 왜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일까?
불교가 왜 인식론일까?
EBS에서 다큐에서 빛의 물리학을 보았다. 4부에서 ‘빛과 원자’를 보았는데 놀랍게도 불교적 사유와 유사하였다. 특히 전자에 대한 설명에서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이에 대하여 대승론자들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확률로 설명되는 양자론을 보면 부처님의 인식론과 매우 유사하였다.
원자 핵 주위를 돌고 있다는 전자는 관찰할 때만 보여진다. 인식할 때만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관찰하지 않으면 실재할 가능성만 있다. 그래서 관찰할 때는 실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입자로 보이는 것이고, 관찰하지 않을 때는 실재할 가능성만 있기 때문에 파동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에 대하여 때로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런 전자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관찰하면 실재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관찰하지 않으면 실재할 가능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른 말로 ‘인식한다’고 표현 할 수 있다. 관찰함으로서 실재하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찰에 의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가능성 중에 한 가지만 선택 되는 것이다. 선택되지 않은 것들은 실재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인식되는 순간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꿀과자의 경(M17)’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꿀과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7, 성전협 전재성님역)
욕망을 조건으로 시간과 존재가 생겨난다는 인식론적인 과정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즉 시각과 형상을 통하여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접촉을 조건으러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함으로서 관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이고, 이것이 일체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불교가 인식론임에 틀림 없다.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내가 태어 나기 이전에도 세상이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세상은 계속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존재론이다. 창조주가 있어서 창조주가 만든 세상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 객관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내가 인식함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세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마치 양자론에서 관찰에 따라 입자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주관적 존재이다. 그래서 불교는 인식론이다.
불교는 존재론이 아닌 인식론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일체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잘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이것을 바로 일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누군가 ‘나는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알려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만약 질문을 받으면 그는 대답할 수 없고, 더 나아가 곤혹스러움에 쩔쩔 맬 것이다.
(삽바경-Sabbasutta-일체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역을 제외하고 다른 것이 고려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존재론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로지 관찰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인식론적 세계를 말한다. 이것이 존재론에 기반을 둔 서양철학과 다른 것이다. 그래서 ‘있다’ 거나 ‘없다’거나라고 말한다면 이는 존재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아쉽게도 청정도론의 역자는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은 영문번역을 그대로 답습하여 “업을 짓는 자도 없고 과보를 경험하는 자도 없고”라고 하여 존재론적으로 번역하였다. 비록 뒤에 따라 붙는 연기에 대한 문구가 있지만 이런 존재론적 번역으로 인하여 단멸론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2013-10-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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