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른 아침 나팔꽃을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15. 13:08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른 아침 나팔꽃을 보며

 

 

 

이른아침에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보는 꽃이 있다. 나팔꽃이다. 아침햇살이 비칠 때 마치 부활하듯이 이곳 저곳에 피어 있는 나팔꽃은 사람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 중에 사는 곳 가까이 있는 유독 보라색의 나팔꽃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 디카를 대 본다.

 

 

 

 

 

 

하지만 디카에 담겨 있는 꽃의 색깔을 보면 만족스럽지 않다. 보라색이 완전하게 재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싸구려 휴대용 디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실은 지난 6월 실크로드 여행을 갔었을 때 화염산을 촬영하였을 때 여실히 드러났다. 휴대용 디카로 찍은 사진과 전문가용 고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비교해 보았더니 황토색의 모습이 확연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늘 휴대하고 다니는 디카가 있기에 그 동안 수 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물론 스마트폰에도 그러한 기능이 있긴 하지만 휴대용 디카가 나에게 있어서는 더 편리하다.

 

아침햇살이 반짝일 때

 

나팔꽃은 햇볕이 강렬한 낮이나 저녁에는 존재감이 없다. 오로지 아침햇살이 반짝일 때 팽창한다. 그런 나팔꽃의 색깔은 다양하다. 이번에는 빨간꽃을 보았다.

 

 

 

 

 

빨갛다고 표현 하였지만 이 역시 정확하지 않다. 약간 분홍빛깔이 감도는 옅은 빨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의 빨강색이 완전하게 표현 된 것은 아니다. 그저 유사하게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 주변에는 인위적으로 심어 놓은 나팔꽃을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꽃이 많이 피지 않는 9월에 피기 때문에 유난히 돋보인다.

 

일터는 걸어서 20여분 거리에 있다. 이른 아침에 운동삼아 걸어서 간다. 가는 도중에 하천이 있다. 쌍개울이라 최근 이름지어진 생태하천이다. 그 하천을 지날 때 마다 보는 꽃이 있다. 요즘 9월달에 볼 수 있는 나팔꽃이다. 그런데 하천에서 본 나팔꽃은 집근처에서 보는 꽃과 다르다. 하늘색으로 작고 수수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자연스럽게 핀 꽃이다.

 

 

 

 

 

디카로 촬영 된 것을 보면 옅은 하늘색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더 진하다. 청색에 가깝다. 이로 보았을 때 보라색이나 빨강색, 청색 등 오리지날 이미지의 색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디카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한껏 팽창된 나팔꽃을 보면

 

수 많은 종의 나팔꽃이 있다. 보라색, 빨강색, 하늘색, 흰색 그리고 복합된 색 등 많은 종류의 꽃들이다. 주로 9월에 돋보이고 특히 이른 아침에 눈길을 끈다. 이런 나팔꽃의 특징은 무엇일까?

 

나팔꽃을 유심히 쳐다 보고 있으면 하나의 특징을 발견한다. 그것은 매우 팽팽하다는 것이다. 마치 낙하산이 펼쳐진 것처럼 한껏 팽배해 있다. 마치 온힘을 다하여 팽팽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이른 아침에 그렇다.

 

그런데 너무 힘을 낭비해서일까 나팔꽃은 오후가 되면 축 쳐진다. 그러다 밤이 되면 오므려 버린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한껏 팽배해 있다.

 

한껏 팽창된 나팔꽃을 보고 있으면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더구나 이른 아침 햇살이 비칠 때 나팔꽃을 보면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아침이 생명의 시간인데 그 때 온힘을 다하여 마치 부르르 떨 듯 팽창된 나팔꽃을 보고 있으면 하루일과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활력소가 된다.

 

소중한 아침시간

 

모든 사람들에게 아침시간은 소중하다. 일터로 향하는 길에 보는 사람들은 활력에 넘친다. 아침에 감은 머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로 일터로 달려 가는 사람에게서 나팔꽃 같은 풋풋함을 느낀다.

 

오므렸던 나팔꽃이 아침햇살을 받으면 팽창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죽은 듯이 잠을 자다가 아침이 되면 부활하듯이 일어난다. 아침햇살과 함께 새로운 하루가 시작 되면 무엇이든지 의욕이 넘쳐 난다. 잠들기 이전에 일어 났었던 여려가지 혼탁하였던 것들은 이전에 있었던 일로 되어 버린다. 잠으로 인하여 깨끗하게 잊어 버리고 새로 출발하는 기분을 갖는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하루 일과에서 이른 아침에 잠이 깨는 것은 새로운 탄생과도 같다. 더구나 죽음과 같은 깊은 잠을 자고 났을 때 그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비록 아직 해결안된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마치 형벌처럼 안고 살고 있을지라도 잠을 자고 나면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노느니 글을 쓰며

 

일터에 도착하였다. 일터라고 하여 공사하는 현장이나 생산라인이 있는 곳이 아니다.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일터는 자그마한 사무실이다. 오래된 오피스텔의 작은 방이 일터이다.

 

하지만 매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는 날 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논다. 놀기가 뭐해서 글을 쓴다. 그래서 노느니 글을 쓴다. 그런 세월을 보낸지 7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통장에 잔고는 보잘 것 없지만 느는 것은 글이다. 그 동한 쓴 글이 2,300여개에 달하기 때문이다.

 

만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만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한다. 만시간을 하루 여덟시간 투자하는 것으로 하여 8시간으로 나누면 1,250일이 된다. 이를 년수로 환산하면 3 4개월이다. 6시간으로 나누면 4년 5개월이 된다. 4시간으로 나누면 6년8개월이 된다. 그래서 ‘무언가 했다’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최소 3년이상  투자해야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 되는 것도 3년을 필요로 하며 학위를 따는 것도 3년 이상 5년을 필요로 하는 것도 만시간의 법칙을 적용해서 일 것이다.

 

글을 쓰는 원동력은

 

일인사업자는 그때 벌어서 그때 먹고 산다. 그래서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놀게 된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이 있듯이 노는 시간에 글을 쓴다. 그렇다면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여러 시간에 걸쳐 돈도 안되는 글을 쓰는 원동력은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흔적을 남겨 보기 위해서이다.

 

마치 부활하듯이 일어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그리고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 간다. 마치 농부가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으로 나가 일을 하는 것과 같다. 낮에 날씨가 더우면 일하기 싫기 때문에 차라리 선선한 이른 아침에 논이나 밭으로 나가 그날 해야 할일을 미리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 가는 것은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남의 일을 하는 고용원이라면 그렇게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이 되면 늘 가슴이 설레인다. 마치 정주영이 아침이 되면 가슴이 설레인다고 하였듯이 아침이 되면 늘 희망과 기대에 차 있다.

 

그런 원동력은 주어진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삶에서 느꼈던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접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기 위하여 경전을 열어 볼 때 행복하다. 초기경전에는 삶에서 느꼈던 것에 대한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왜 삶의 방식은 다를까?

 

누구나 하루 24시간의 삶을 살아간다. 부자나 가난한 자가 귀한 자나 미천한 자나 나이든 자나 어린 아이나 할 것 없이 주어진 시간은 똑 같다. 그런 면에서 세상은 공평하다.

 

그러나 삶의 방식은 모두 다르다. 사람들 생긴 모습이 다 다르듯이 성향 또한 모두 다 다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경에 따르면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라고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 하셨다. 자신이 이전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있기 때문에 차별이 생긴다는 것이다.

 

업이 자신이 주인이고 우리는 업의 상속자라는 것은 정견이다. 삶에 있어서 받아 들여야 할 바른 견해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인과법이고 연기법칙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세속적 정견에 대하여 무지한 것 같다. 지금 발생하고 있는 모든 문제가 자신의 행위에 따라 발생하였음에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삶의 과정에서 수 많은 문제에 부딪친다. 그런 문제는 고통을 야기 하기 마련인데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몸에 상처가 나서 고통을 받고 있다면 이는 일시적이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가난한 자일지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이것 역시 시간이 해결해 준다. 지금 고민하는 젊은 청춘이 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젊은 사람 무시하지 말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젊은이 경(S3:1)에서 왕족, 뱀, 불, 수행승 이렇게 네가지의 예를 들어 작다고하여 깔보거나 없신여겨서는 안될 것이라 말씀 하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다 검은 숯을 남기는 불을 작다고 깔 보다가는 큰코 다친다는 것이다. 작은 불씨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태울 것을 만나면 다시 맹렬하게 타올라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보잘 것 없는 미천한 존재라 하여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노력하여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크고 작은 문제는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안되는 문제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나이 들어 늙어 가고, 병이 들어 고통 받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괴로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라 하였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면한 해결이 안되는 문제들도 많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단지 운명으로 받아 들여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신에게 의지할 수 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신에게 떠 넘겨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당면한 고통은 해결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설령 신에게 떠 넘겼다고 할지라도 이는 자신의 뜻대로 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뜻대로 안되었을 때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쳤을 때 사람들은 내 뜻대로 하고자 한다. 그런데 내 뜻대로 안되면 마구 화를 낸다. 화를 내서 내뜻대로 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내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자식이 말을 듣지 않아 마구 화를 내어 복종하게 만들었다면 내자식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비록 자신이 낳은 자식일지라도 내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난 자식에 대하여 더 이상 내자식이라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사장이 지시를 하면 명령이 먹혀 들어간다. 그래서 자신의 직원이라 본다. 그러나 사장이 명령해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자신의 직원이라 보지 않을 것이다.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내직원이 아닌 것이다.

 

군대에서 장군이 명령이 내리면 상명하달에 따라 신속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명령을 내려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배신을 하여 거꾸로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통제를 벗어 났기 때문에 내군대가 아니고 적군이 되는 것이다.

 

여기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늙음, 병듬, 죽음 같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이나 장애 같은 것이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화를 내서 내뜻대로 만들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화를 내서 내뜻대로 된다면 내것이라 볼 수 있다. 자식에게 화를 내어 말을 잘 듣게 만든다면 내자식이라 볼 수 있고, 부하에게 지시하여 먹혀 들어가면 내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화를 내어도, 지시를 하여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내것이라 볼 수 없다. 설령 친자식일지라도 가장 아끼는 부하일지라도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더 이상 내것이 아니다. 하물며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더더욱 내 것이라 볼 수 없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하려 한다. 하다 안되면 마구 화를 낸다. 그렇다면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은 나의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여기 초기경전이 있다. 상윳따니까야나 맛지마니까야 아무 곳이나 열어 보면 마주치는 정형구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M109)”로 시작 되는 정형구이다. 이런 문답식 정형구 말미에서 부처님은 항상 그러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이것은 내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옳은 것인가?”라고 하는 것으로 답을 유도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오온에 대하여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해주기 위한 법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몸에 병이 났을 때 알 수 있다.

 

언젠가 달리기를 한 적이 있다. 풀밭에서 여러 명이 백미터 달리기를 하였는데 거의 반이 넘어졌다. 학생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이가 들어 달리기를 하다 보니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마음과 몸이 따로 논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몸이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인 것이다.

 

무아에 대한 설법

 

감기가 들면 만사가 귀찮다. 지금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일이 태산처럼 쌓였는데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일을 해 보지만 마음 뿐이다. 몸이 따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Rūpa bhikkhave, anattā, rūpañca hida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 rūpa ābādhāya savatteyya, labbhetha ca rūpe eva me rūpa hotu, eva me rūpa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rūpa anattā, tasmā rūpa ābādhāya savattati. Na ca labbhati rūpe "eva me rūpa hotu, eva me rūpa mā ahos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Pañcavaggiya sutta- 다섯 명의 경, 상윳따니까야 22:59, 전재성님역)

 

 

다섯명의 경은 매우 유명한 설법이다.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후 두 번째로 설한 법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오비구에게 처음으로 초전법륜경을 설하였다. 최초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꼰단냐로 하여금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 S56:11)”라는 법의 눈이 생겨나게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게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두 번째 설법을 통하여 제자들을 모두 아라한으로 이끌었다. 그것이 바로 이 무아에 대한 설법이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경에서 물질은 내가 아니다 (Rūpa anattā)”라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물질은 물질로 구성된 몸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무아의 이론을 설하기 위하여 몸을 물질로 본 것이다.

 

만일 몸을 자아로 여긴다면 그 몸은 우리의 의도에 종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병이 났을 때 우리의 의도대로 통제 되지 않는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우리들이 내몸이라고 하는 것은 내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통제가 되지 않는 자식이나 부하를 내자식 또는 내부하라고 볼 수 없듯이 통제가 되지 않는 몸에 대하여 내 몸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기둥도 떨게 한다는데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불교만이 무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종교는 모두 자아를 기반으로 한 종교이다. 이처럼 자아를 기반으로 한 종교 중의 하나가 자이나교이다.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 부처님은 자이나교도인 삿짜까와 토론하고 있다. 그런 삿짜까는 스스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라고 인정되더라도 나와 토론하여 논쟁하면, 떨지 않고 전율하지 않고  크게 감동 받지 않고, 겨드랑이에 땀을 흘지지 않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M35)”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면 기둥도 떨고 전율하고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였다.

 

그렇다면 삿짜까는 자아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쌋짜까]

존자 고따마여, 마치 그들 성장, 번영, 성숙에 이르는 모든 종자류, 식물류가 땅에 의존하고 땅에 기초하여, 이와 같이 성장, 증가, 성숙에 이르듯이, 존자 고따마여, 마치 힘 드는 일이 행해진다면, 어떠한 일이든지 그 모든 일들이 땅에 의존하고 땅에 기초하여 행해지듯이, 이와 같이 존자 고따마여, 사람은 물질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물질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느낌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느낌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지각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지각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형성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형성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의식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의식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킵니다.”

 

(Cū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기둥도 떨게 만든다는 자이나교도 삿짜까의 자아론이다. 식물이 땅에 의존하듯이 오온 역시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인식에 대하여 부처님이 “ ‘물질은 나의 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는 식으로 다그치자 삿짜까는 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오온에 실체가 없음에 대하여 배치가 되는 말이긴 하지만 대중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삿짜까의 인식은 깔라마경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고,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는 것과 같다. 또 스승의 권위에 끄달려 하는 말과 같다.

 

문답식으로 논파한 부처님

 

부처님은 삿짜까의 잘못된 견해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논파 하였다. 먼저 부처님은 삿짜까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이와 같은 것을 질문할 것입니다. 그대가 원한다면 그것에 대답해 보십시오.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통치권을 가진 왕족의 왕은 마치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그런 것처럼, 마치 마가다 국의 비데하 비의 아들 아자따쌋뚜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영토에서 살해되어야 하는 자를 살해하고 박멸되어야 하는 자를 박멸하고 또는 추방되어야 할 자를 추방할 힘이 있습니까?”

 

(Cū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여기서 악기베싸나는 삿짜까에 대한 호칭으로서 종족의 성이다. 부처님은 왕의 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고대인도에서 한나라를 통치하는 왕은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왕이 명령을 하면 군대를 동원하여 힘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에 삿짜까는 존자 고따마여, 그는 그것을 행할 것이고 그것을 행하기에도 적합합니다.”라고 말함으로서 왕의 힘에 대하여 인정한다. 이는 왕국이 왕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왕국은 왕의 것임을 말한다.

 

삿짜까 침묵

 

이어서 부처님은 삿짜까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Cū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이 대목에서 삿짜까는 침묵한다. 이전에 모든 식물이 땅을 기초로 하듯이 오온도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고 답변한 것과 대조적이다. 왕이 자신의 나라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온으로 이루어진 나의 몸과 마음 역시 나의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 맞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

 

왕은 자신의 나라에 대하여 통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몸과 마음이 자신의 통제권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차 질문을 한다. 두 번째 질문에도 침묵하자 부처님은 악기베싸나여, , 해명해 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M35)” 라고 말한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경에 따르면 이때에 야차 바지라빠니가 불타고 불꽃이 이글거리고 빛을 방출하는 쇠로 된 금강저를 가지고 니간타의 교도 쌋짜까의 머리 위에 공중에서 서서 말하길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했는데 답변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그대의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터지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삿짜까가 침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부처님의 말씀이 맞지만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맞다라고 말하기 곤란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맞다라고 인정한다면 자신의 믿음, 즉 자아를 바탕으로 한 자이나교의 교리에 대한 밈음을 내려 놓는 것이기 되기 때문이다. 또 체면이 말이 되지 않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토론하면 옆에 있는 기둥마저 떨며 전율하며 감동할 것이라 하였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이는 순간 체면손상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으로 본다.

 

삿짜까의 교화

 

부처님은 세 번째 질문을 통하여 삿짜까를 교화 시킨다. 내용은 빠알리니까야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쌋짜까]

“존자 고따마여, 그렇지 않습니다.”

 

(Cū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이렇게 물질부터 시작하여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이르기 까지 오온에 대하여 질문한다. 질문 요지는 물질 등 오온이 나의 통제하에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만일 오온이 나의 통제하에 있다면 나의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해도 내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오온이 내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나라를 다스리는 왕은 힘을 행사 할 수 있기 때문에 나라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작은 몸하나, 이 하찮은 느낌 하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빠알리니까야 어느 곳을 열어 보아도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를 말씀 하신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물질은 영원합니까, 무상합니까?”

 

[쌋짜까]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입니까, 즐거운 것입니까?”

 

[쌋짜까]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입니까?”

 

[쌋짜까]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Cū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오온 중에 물질에 대한 것이다. 나의 통제영역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이 몸이 사실 알고 보았더니 ‘내 뜻대로’ 된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이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아인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을 나의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물질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실체가 없는 괴로움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내 것이 아님을 설하였다. 그런데 경에서 부처님은 괴로움 역시 마찬가지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괴로운 것에 집착하고 괴로운 것에 의존하고 괴로운 것에 탐착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자는 스스로 괴로운 것에 대하여 두루 알고 괴로운 것을 부수어버리고 지내는 것입니까?”

 

[쌋짜까]

“존자 고따마여,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존자 고따마여,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Cū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괴로움도 오온과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실체도 없는 괴로움에 집착하여 괴로움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이 괴로운 것이긴 하지만 무상하고 무아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괴로움 그 자체는 실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영원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삶은 끊임 없는 문제의 연속

 

삶의 과정은 끊임 없는 문제의 연속이다. 그런 문제는 다름 아닌 괴로움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지 않은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사람들은 허둥대며 당황해 한다. 그러면서 운명론에 빠지거나 신에게 떠 넘겨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당면한 괴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절대자도 자신에게 닥친 괴로움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나의 것도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몸하나 내 느낌 하나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괴로움이야 말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이 괴로움은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 역시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아 사라져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괴로움은 어떤 것일까? 가르침에 따르면 괴로움은 그 자체가 괴로운 것으로서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무아인 것이다. 그런 괴로움에 대하여 마치 실체가 있는 영원한 것으로 여긴다면 더 괴로울 것이다. 괴로움은 무상한 것이기에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새로운 기분이 들듯이 전날 괴로운 느낌은 이전의 느낌이 되어 버린다. 괴로움 그 자체에 집착해 있다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지만 괴로움 그 자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생한 것을 안다면 벗어날 수 있다. 조건발생하여 일어난 것은 조건이 사라지면 역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삶의 활력을 느낄 때

 

이른 아침 일터로 향하는 길에 보는 나팔꽃은 생명으로 가득하다. 잔뜩 팽창된 동그란 꽃잎을 보면 삶의 활력을 느끼게 한다. 비록 한낮의 뜨거움에 시들하거나 어두운 저녁에 오므리고 있을지라도 아침이 되어 한껏 팽창된 나팔꽃을 보면 발걸음이 가벼워 진다.

 

 

 

2013-09-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