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의 굴욕, 스님의 굴욕, 불교의 굴욕
동물원에 가면 사자를 볼 수 있다. ‘라이온하우스’라 하여 사자를 좀 더 가까이 관찰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동물원에 있는 사자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좁은 우리에서 사육사가 주는 먹이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이런 사자가 만일 본래 살던 초원으로 돌아 간다면 어떻게 될까? 사육사가 주는 고기만 먹다가 초원으로 방출 되었을 때 과연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
치타의 굴욕
TV다큐 프로에서 아프리카 세렝기티 평원의 모습을 종종 보여 준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프로에서는 약한 초식동물이 강한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는 장면을 매우 리얼하게 보여 준다. 그런데 아무리 상위에 있는 치타, 표범, 사자와 같은 포식자일지라도 먹이를 낚아 챌 때는 최선을 다한다.
먹이를 본 치타의 경우 순간적인 폭발적인 스피드로 영양을 추적한다. 그렇다고 사냥이 모두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먹히지 않기 위하여 영양은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더 많다.
언젠가 다큐 프로에서 ‘치타의 굴욕’이라는 프로를 보았다. 폭발적 순간 스피드를 자랑하는 치타가 사냥에 연속하여 실패 하자 민가에 있는 소떼를 덥친 것이다. 편하게 사냥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치타의 굴욕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야성을 잃어 버린 치타가 초원에서 사냥하기를 포기 하고 민가의 소떼를 넘 본 것이다.
처절한 생존의 현장
도시는 어쩌면 아프리카 세렝기티 평원과 유사하다. 사회가 비록 약육강식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스스로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직업을 가지고 살아 가는 도시는 생존경쟁의 처절한 현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도시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간판이다. 간판을 보면 생존에 대한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을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사람을 끌어 들이기 위한 갖가지 문구와 조명을 보면 “어서 빨리 나를 보아 주세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도시의 가로에서 또 볼 수 있는 것이 노점상이다. 가게가 없는 사람들이 생계수단으로 거리에 나선 것이다. 눈길을 끄는 여러 가지 상품을 진열해 놓은 것을 보면 “제발 이 물건 좀 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점심 때 주변에서 밥을 사 먹는다. 그런데 종종 간판이 바뀐 것을 목격한다. 어느 집은 육개월 내지 일년마다 간판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간판이 바뀌지 않고 삼년 이상 영업을 하는 곳이 드믈다. 이런 현상은 장사가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간판을 내렸다는 것은 실패 하였음을 뜻한다.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았다는 것은 커다란 손실을 보았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주택이나 아파트 등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야채 등을 파는 노점을 볼 수 있다. 주로 나이 든 할머니들이다. 보잘 것 없는 찬거리를 조금 놓고 파는데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큰비가 오면 장사를 할 수 없다. 큰 눈이 내려도 장사를 할 수 없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며 장사를 한다. 그래서 눈이나 비와 바람이 불어도 참고 견디며 앉아 있다.
도시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손님이 없어서 공치는 날도 있을 것이고 날씨 탓으로 장사를 못할 수도 있지만 기다린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삶에 달관한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도를 닦는 도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삼박자가 보장되는 곳
여기 공무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무원은 최상위층이다. 그래서 새로운 카스트가 생겨 났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분보장, 고용보장이 될 뿐만 아니라 노후보장이 까지 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 되면 완벽한 사회보장을 받고 죽을 때 까지 연금혜택을 받기 때문에 공무원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카스트제도가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취업준비생의 절반 가량이 공무원 시험 준비에 올인 하고 있다고 한다. “연금 그거 하나 바라보고” 대한민국의 청춘들이 오늘도 내일도 공무원시험공부에 매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스님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스님이 되면 먹고 사는 문제는 보장이 된다. 일하지 않아도 열심히 수행만 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다. 더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사유재산을 형성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재산을 형성 할 수 있다. 또 조상이 물려준 문화유산이 풍부한 사찰이라면 입장료 수입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더구나 신심 있는 불자를 만나면 먹고 사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일까 “하다 안되면 머리깍고 중이나 될까?’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공무원은 국가에서 고용하고 국가에서 신변을 보장하고 있다. 스님은 종단에 소속 되면 어느 절이나 자신의 집과 같다. 그래서 공무원이 되고 스님이 된다는 사실은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러워진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먹는 문제이다. 먹는 것은 생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무원이나 승가와 같은 커다란 단체에서는 기본적으로 먹는 문제가 해결된다. 그 것도 평생보장된다. 신분보장, 고용보장, 노후 보장 이렇게 삼박자가 보장되는 것이 공무원과 승가사회이다.
우리속에 갇힌 사자
먹는 것이 보장 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큰 노력 없이도 평생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사자와 같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 갇혀 있지만 먹는 것은 보장 되기 때문이다.
서울대공원
우리속에 갇힌 사자를 사자로 볼 수 있을까? 사자는 초원에서 야성을 발휘하여 스스로 먹이를 해결하는 것이 본능인데 사육사가 주는 먹이만 받아 먹는다면 백수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사자라 부를 수 있을까?
돼지는 우리속에서 사육된다. 주인이 주는 먹이만을 먹고 자란다. 그래서 돼지는 먹이 걱정을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주인이 먹이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사자 역시 먹이를 걱정하지 않는다. 사육사가 굶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관리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는 먹이로 사육된다는 점으로 본다면 돼지나 사자나 똑 같은 신세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자는 자유가 없다. 먹이는 보장 되지만 우리 밖을 벗어 날 수 없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야성을 잃어 버린 백수의 제왕 사자는 돼지나 다름 없다.
하나마나한 선거가 되었을 때
매주 촛불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진보당의원 구속에도 불구하고 서울광장에는 수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소식은 공중파방송에서는 볼 수 없다. 진보매체 사이트에서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하나마나한 선거가 될 것을 염려 하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이 동원되어 선거에 개입한다면 선거는 하나마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선거혁명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시민들이 촛불을 든 근본적인 이유는 국정원의 댓글 사건때문이다. 국정원 직원이 여당에 유리한 댓글을 써서 여론을 바꾸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국기문란 행위이다. 공무원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함에도 정치에 개입하여 선거의 흐름을 바꾸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정원 직원은 왜 댓글을 써야만 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부의 지시를 거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법인줄 알면서도 불법을 자행한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우리 안의 사자와 같은 존재가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공무원이라는 울타리속에 있으면 신분보장, 고용보장, 노후보장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부당한 지시도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총무원장의 애매모호한 태도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에서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문제는 현총무원장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있다. 여러 차례 재임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지만 뒤로는 은밀하게 재임준비를 하여 왔기 때문이다. ‘불교광장’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추대형식으로 쉽게 당선 되려 하였으나 사부대중의 반발로 주춤하고 있다.
출가자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까?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탁발에 의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청정한 삶을 살아 가기 위해서이다. 빌어 먹다 보면 무소유와 청정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부터 출가자의 삶은 탁발에 의존하였다. 하지만 한국불교에 탁발문화는 실종되었다. 그대신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그런데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청정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현총무원장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산문 밖은 오탁악세라는데
최근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 따르면 쌍계총림이 새로 탄생되었음을 보도 하고 있다. 경남 하동에 있는 쌍계사가 총림으로 승격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쌍계총림의 대중들은 “산문 밖은 아직 오탁악세이며, 이에 쌍계총림 대중은 방장 혜원을 선두로 불은과 역대 조사의 원력, 공덕에 보답하고 대승불교의 본래면목을 한국불교 중흥불사의 밑거름이 되겠다”라고 보도 하고 있다. 산문 밖은 오탁악세라 한다. 산문밖이라함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말한다. 그렇다면 산문안은 청정한 곳일까?
불자들은 승가에서 들려 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좋은 이야기 보다 좋지 않은 소식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승려도박’사건이다. 스님이 도박을 한 것이다. 그것도 판돈이 엄청나게 큰 도박이라 한다. 신도의 시주돈으로 도박을 한 것이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불자들은 물론 국민까지 분노하였다. 또 불자들은 자신이 불자임을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그런데 승가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고는 도박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관련 신문사이트를 보면 온갖 추문이 일어나는 곳이 승가사회이다. 가장 최근에는 어느 사미승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린치까지 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썩은 보리수와 같다고
모든 것은 소유에서 비롯된다. 승가가 타락한 원인도 알고 보면 소유때문이다. 현총무원장 역시 소유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은처, 도박 등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더 총무원장을 하고자 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왜 출가승들은 침묵하고 있을까?
최근 어느 카페에서 어느 스님의 글을 보았다. 한국불교가 얼마나 썩었는지에 대한 글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계는 어떤가? 한국불교는 한국에서 가장 부패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은 깡패나 조폭의 논리로 움직여간다. 돈을 거머쥐고 폭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실세가 조계종을 움직인다. 그 실세의 상당수는 은처승(隱妻僧)이다. 그들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종단에서 황당하게 설치며 권세를 행사한다. 종단 안에는 그들을 비판하거나 견제할 만한 양심세력이 미약하거나 거의 무력하다.
이 추세로 면 부정한 종단실세는 기성정치권력에 협조하면서 종권을 계속 장악할 것이다. 승가의 타락은 가중될 것이고 양심적인 승려들은 좌절하여 조계종단에서 ‘심정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탈할 것이다. 한마디로 현재 조계종 승가는 해체의 단계에 들었다.
함께 모여 비구계 포살을 하지 않은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승가가 보름마다 모여 비구계 포살을 하지 않는다면 비구 승가이기를 이미 포기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은처승들이 조계종의 고위직을 차지하여 앉아 있고 종정스님은 그런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며 방조하고 있다. 게다가 조계종단의 큰스님들이 원로의원에 추대되려고 돈을 뿌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억대의 큰돈을 가진 스님들이 모여 도박을 즐긴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검찰이 곧 조사에 착수할 것이라는 뉴스가 떴다. 애어른 할 것 없이 한통속이 된 종단은 비구 승가이기를 포기한 것일까? 눈앞의 달콤한 권력과 풍요로운 쾌락에 눈이 멀고 귀가 먹었는가?
대한민국 전체가 썩은 사과이다. 썩은 사과를 계속 씹어 먹을 수는 없다. 정신을 차린 민중은 썩은 사과나무를 뽑아버릴 것이다. 조계종은 뿌리가 썩은 보리수이다. 건전한 양식을 지닌 대중은 썩은 보리수를 그냥 두지 않고 도끼로 패서 불태울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불자들의 의식이 깨어나 썩은 보리수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새로운 보리수 묘목을 심어야 한다.
당신이 양심 있는 스님이라면 조계종이 과연 비구 승가인지, 비구답게 살고 있는지 자문해보라.
막 되먹고 막 나가는 스님들이여, 삼보와 세상 앞에 부끄러운 줄 알고 인과가 두려운 줄 아는가 모르는가?
당신이 진정한 불자라면, 한국불교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남아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라.
어떻게 하는 것이 썩은 보리수를 뽑아내는 일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새로운 보리수묘목을 심는 일인가 심사숙고해보라.
(원담스님, 조계종은 뿌리가 썩은 보리수이다-2013.7.18, 카페 ‘마음의 호숫가애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수좌스님의 글이다. 스님은 글에서 조계종은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다고 하였다. 돈을 거머진 권승들이 조폭의 논리로 활개 치는 곳이 조계종이라 한다. 더구나 권승들은 은처, 도박 등 승가에서 해서는 안되는 것들을 버젓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하여 누구하나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그것은 권승의 눈에 벗어나면 살아 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단 안에는 그들을 비판하거나 견제할 만한 양심세력이 미약하거나 거의 무력하다.”라고 표현 하였다.
겉으로 보기에 녹음이 무성한 나무일지라도 뿌리가 썩었다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조계종단이 그런 꼴이라 한다. 더구나 권승에 대한 견재세력도 없고 비판도 부재하다면 부패는 더욱 더 가속화 될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불자들의 의식이 깨어나 썩은 보리수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새로운 보리수 묘목을 심어야 한다.”한다고 주장한다.
불자의 굴욕, 스님의 굴욕, 불교의 굴욕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사자는 더 이상 사자라 부를 수 없다. 배부른 돼지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울타리 안에서 보호 받으며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는 공무원이나 승가사회 역시 동물원의 사자와 다름 없다.
야성을 잃어 버린 사자는 초원에 나가면 생존할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사자가 된 것이다. 농가 주변의 가축이나 탐내는 치타는 더 이상 치타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큐 프로에서는 ‘치타의 굴욕’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마찬가지로 초원에서 야성을 잃어 버린 사자가 농가를 기웃거린다면 역시 ‘사자의 굴욕’이 될 것이다.
공무원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밖에 나오면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공무원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안주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국정원 댓글 같은 사건이 터졌다. 신분보장, 고용보장, 노후보장이라는 달콤한 미래를 바라보고 영혼을 팔아 먹은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공무원의 굴욕’에 해당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버려야 하겠다는 마음까지 버린 자가 출가수행자이다. 그래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자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보장한다. 탁발전통이 실종 되어 있는 한국불교에서 스님이 되면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더구나 재산을 형성하고 처자식을 숨겨 놓는다. 이런 권승들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올라가 있다. 더구나 재임을 노리고 있다. 그런 자가 또다시 총무원장이 된다면 불교는 어떻게 될까?
한나라의 민도를 알려면 그 나라의 지도자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사기꾼에 전과 전력이 있는 자가 대통령이라면 그 나라의 민도가 그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은처에 도박 혐의를 받고 있는 자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면 한국불교는 무엇인가? 아마도 한국불교의 스님들의 수준이 그것 밖에 되지 않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것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스님의 굴욕’이다. 동시에 ‘불자의 굴욕’이다.
‘사자의 경(S22:78)’에서
사자는 우리 밖에 있어야 사자 다웁다. 초원에 있어야 사자 다운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먹이를 찾아 생존하는 사자야말로 진정한 사자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 사자를 부처님에 자주 비유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e keci bhikkhave, tiracchānagatā pāṇā sīhassa migarañño nadato saddaṃ suṇanti, yebhuyyena bhayaṃ santāsaṃ saṃvegaṃ āpajjanti, bilaṃ bilāsayā pavisanti, dakaṃ dakāsayā pavisanti, vanaṃ vanāsayā pavisanti, ākāsaṃ pakkhino bhaj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모든 짐승들은 짐승의 왕인 사자의 표효하는 소리를 듣고 대부분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동굴에 사는 자는 동굴로 들어가고, 물에 사는 자는 물에 들어가고, 숲에 사는 자는 숲으로 들어가고,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 오른다.
(Sīhopama sutta-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잭성님역)
경에서는 사자가 포효할 때 두려움(bhayaṃ, Fear)과 전율(santāsaṃ, trembling)과 감동( saṃvegaṃ, religious emotion)에 빠질 것이라 하였다.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
이는 무슨 뜻일까? 이어지는 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수행승들이여, 저 장수하는 하늘사람들은 아름답고 지극히 행복하고 높은 궁전에 오래도록 살아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 대부분 '벗이여, 우리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상주하지 않는 것을 상주한다고 여겼다. 벗이여, 우리들은 실로 영원하지 않고 견고하지 않고 상주하지 않지만 개체가 있다는 견해에 사로잡혀 있다' 라고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
(Sīhopama sutta-사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78, 전잭성님역)
경에서 ‘개체가 있다는 견해’라는 말이 나온다. 이말은 빠알리어 ‘sakkāyadiṭṭhi’를 말한다. 한자어로 ‘유신견(有身見)’이라 한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내것이다, 이것은 나의 마음이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견해를 말한다.
천상에 있는 신들은 너무 오래 살고 행복하게 살다 보니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여기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한 것이라 여겼다. 또 개체에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자 두려움이 엄습하고 뒤이어 전율이 일어났다. 나중에는 감동이 일어났다. 왜 그랬을까?
아라한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감동이다. 각주에 따르면 가르침에 따라 성취해야 할 것을 성취했기 때문에 체험하는 ‘지혜의 감동’에서 오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 듣는 행복한 하늘나라의 신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현상이 영원하지 않고 개체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천신들은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리고 영원히 살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영원한 것은 없고 무상한 것이라 말하자 두려움이 일어난 것이다. 과거에 지은 공덕으로 천상에 나긴 하였으나 수명과 공덕이 다하면 어떤 세상에 태어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 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 있듯이 공덕이 다한 존재는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두려움은 전율로 바뀐다. 신들이 무상을 깨닫고는 정신적 전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력한 통찰이 일어남에 따라 감동한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기에 감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자후를 토하면 처음에는 두려움이 일아나지만 곧이어 전율하고 감동으로 바뀜을 말한다.
자신의 힘으로 정당하게
사자후는 당당하고 의미있는 선언을 말한다. 그것은 최상의 지혜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출가 수행자라면 사자후를 토하여야 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무엇이 아쉬어 권승들의 눈치를 보며 빌어 먹으려 할까? 대자유를 찾아 떠난 출가수행자가 고작 직업으로서 승려가 되기 위하여 할 말을 못하는 것일까?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서민들이야말로 진정한 사자와 같다. 비록 수입이 보잘 것 없고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할지라도 자유가 있는 것이다. 조직의 울타리안에서 신분보장, 고용보장, 노후보장이라는 달콤한 미래에 안주하여 주는 먹이나 취하는 돼지 같은 존재가 아니라, 드넓은 초원에서 야성을 발휘하는 사자처럼 자신의 힘으로 정당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자 사자이고 이 시대의 도인(道人)들이다.
2013-09-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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