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신만만한 중산층에게, 부처님의 역류도(逆流道, Patisotagami)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23. 11:47

 

자신만만한 중산층에게, 부처님의 역류도(逆流道, Patisotagami)

 

 

 

가을찬가

 

추석때가 되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라는 말이다. 이 말뜻은 아마도 농촌에서 더 실감나리라 본다. 특히 농경시대에 있어서 가을찬가와 같은 말이라 본다. 왜냐하면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들에는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고 나뭇가지에서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가을농촌의 풍경은 보기만 해도 풍요롭다. 더구나 결실을 앞둔 시점에서는 모두가 마음이 너그러워져 인심도 부드러워질 것이다. 따라서 가을은 풍요와 결실의 계절이기에 사람들은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하지만 도시는 다르다. 도시에서는 들도 없고 나뭇가지에 열매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석때가 되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라는 말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만 춥지도 덥지도 좋은 계절이 왔구나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여 더운 여름을 혹독하게 보낸 서민과 소시민들이라면 계절의 변화에 감사할 것이다.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자들은 가을이 반가울 것이다. 선선한 가을날씨를 맞이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항상 이런 날씨가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은 너무 추워서,  너무 더워서,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공치는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반겨 주는 꽃

 

이른 아침 일터로 향했다. 추석연휴가 끝나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분주해 보인다. 늘 그렇듯이 생태하천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반겨 주는 꽃이 있다. 나팔꽃이다. 아침햇살이 비칠 때 활짝 만개한 나팔꽃이 가장 먼저 반겨 준다.

 

 

 

 

 

 

가을의 꽃은 무엇일까? 무어니무어니해도 코스모스를 빼 놓을 수 없다. 가을에 주로 핀다고 하여 가을꽃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생태하천에도 여기저기 코스모스가 피어 있다.

 

 

 

 

가을의 정취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억새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한반도 전역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인 억새는 높이가 1-2미터에 달한다. 그래서 어느 하천에서도 볼 수 있다. 마치 총채처럼 생긴 억새를 보면 확실히 가을이 왔음을 알 수 있다.

 

 

 

 

 

도시를 품고 있는 산

 

일터로 가는 길에 본 수리산 관모봉이 보인다. 초록으로 덮힌 젊은 산이다. 해발 426미터로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다. 밑변이 긴 안정된 삼각형모양을 한 산을 보고 있으면 도시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주변에 산이 있으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산은 모든 것을 품어 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선과 각을 특징으로 하는 매마른 도시에서 푸른산을 한번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이렇게 사람도 품고 도시도 품는 산은 어머니와도 같다. 그래서 어머니 같은 산이다.

 

모든 것을 품어 주는 것이 산이다. 그런데 산과 같은 것이 있다. 가르침이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마치 모든 것을 품어 주는 산과 같다. 그래서 니까야를 접할 때 마다 커다란 산을 마주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자신만만한 중산층의 삶

 

숫따니빠따에 다니야경(Sn1.2)이 있다. 소치는 다니야로도 알려져 있다. 아내와 자식을 부양하며 소들를 키우며 살아가는 다니야에게 부러울 것은 없다. 다니야 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Attavetanabhatohamasmī
Putt
ā ca me samāniyā arogā,
Tesa
na suāmi kiñci pāpa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소치는 다니야]

나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고

건강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니,

그들에게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전재성님역)

 

 

일반적으로 중산층이라 함은 안정된 직장을 다니면서 넓직한 아파트에 살며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일순위에 들어간다. 더구나 온순한 아내와 공부잘 하는 아이들까지 있다면 남부러울 것 없을 것이다. 그런 중산층의 사람에게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눈보라가 불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 다니야도 요즘개념으로 따진다면 중산층에 해당된다.  수십마리의 소리를 키우고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정당하게 살아 가기 때문이다. 그런 디니야에는 비난 받지 않는 온순한 아내가 있고 별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어서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밖에서 아무리 천둥번개가 쳐도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라고 말하면서 걱정하지 않는다.

 

일체지자의 삶은?

 

이와 같은 다니야의 자신만만한 삶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응답한다.

 

 

Nāha bhatako'smi kassaci 
Nibbi
ṭṭhena carāmi sabbaloke,
Attho bhatiyā1na vijjati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세존]

나는 누구에게도 대가를 바라지 않아.

내가 얻은 것으로 온 누리를 유행하므로,

대가를 바랄 이유가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전재성님역)

 

 

중산층인 다니야는 수십마리의 소를 키우면서 여유있게 살아간다. 노동으로 살아간다. 그런 노동은 정당한 것이어서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살아간다(Attavetanabhatohamasmī)”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생계를 위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 걸식에 의존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자에게 있어서 노동의 대가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내가 얻은 것으로(Nibbiṭṭhena)”온누리를 유행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내가 얻은 것이란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이 내가 얻은 것으로( Nibbiṭṭhena)”이라고 말한 것은 군인이 군 복무에서 자유로워진 것처럼 전지(全知, sabbaññutā)를 얻은 후에 해탈한 것을 말한다.(Prji.II.38)”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이 얻은 것은 일체지인 것이다.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은 거리낄 것이 없다. 생계를 위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내아 자식 등 부양가족이 없어서 온누리를 자유롭게 유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늘이여, 비를 뿌리거든 뿌리소서.”라고 말한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천둥번개가 쳐도 걱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반대편에 선 마라

 

경의 마지막 게송에서는 다니야가 아닌 악마 빠삐만이 등장한다. 마치 다니야경을 결산하는 듯한 게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Nandati  puttehi puttimā
Gomiko gohi tatheva nandati,
Upadh
īhi narassa nandanā
Na hi so nandati yo nir
ūpadhī.

 

[악마 빠삐만]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기쁨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도 없습니다.”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전재성님역)

 

 

초기경에서 악마의 출현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어떤 이는 초기경에서 마라(악마), 브라흐마(범천)의 출현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악마나 범천, 제석천이 등장하는 것에 대하여 후기에 편집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악마나 범천, 제석천이 초기경에 등장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영화에서 주연이 있다면 조연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악마, 범천, 제석천, 하늘사람, 하늘아들 등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 마라(악마)는 항상 부처님의 반대편에 서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위 게송도 그런 케이스이다.

 

세속적 견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

 

마라는 기뻐함(nandi)’을 노래 하고 있다. 자식과 재산을 많이 가지는 것은 기쁜일이라 한다. 그래서 자식이나 재산이라는 집착대상이 있기 때문에 즐거움이고 쾌락이고 기쁨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세속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이나 재산이 반드시 기쁨만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라의 게송에 다음과 같이 역시 게송으로 답하였다.

 

 

Socati puttehi puttimā 
Gomiko gohi tatheva socati,
Upadh
īhi narassa socanā
Na hi so socati yo nir
ūpadhīti.

 

[세존]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마라의 견해와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다. 자식이나 소유가 기쁨이 되기 보다 슬픔(soka)’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있는 이는 자식으로 인해 슬퍼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슬퍼합니다.”라고 노래 하였다. 이는 세속적 견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세속에서는 자식이 많고 재산이 많은 것을 복이라 여긴다. 그래서 누구나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심지어 종교에서도 소유욕을 부추긴다. 유일신교의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구약 1)”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자손을 많이 낳아 번성시키는 것이 피조물의 의무이고 또 자연을 정복하여 많은 것을 취하는 것이 피조물의 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와 정반대로 집착의 대상으로 인해 사람에게 슬픔이 있으니라 하였다. 소유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집착이 생겨나면 결과적으로 슬픈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은 세속에서 추구하는 가치관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i)

 

그래서 부처님은 위없는 원만한 깨달음을 증득하고 난 후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세존]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한다. 욕망의 경향을 즐기고 욕망의 경향을 기뻐하고 욕망의 경향에 만족해하면,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곤이 되고 나에게 곤란이 될 것이다.

 

(Brahmā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 상윳따니까야 S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깨달은 진리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관과는 거꾸로 가는 것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아 다니는 것이 세상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연기의 법칙을 보지 못한다. 그런 자들에게 연기법을 설명해 보았자 이해 하지도 못할 뿐더러 피곤한 일임을 독백형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으로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S6:1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즉 물살을 거꾸로 올라가는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i)’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식을 가지는 것과 재산을 형성하는 것에 대하여 슬픔으로 보았다. 그리고 집착이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습니다. (Sn1.2)”라고 말씀 하셨다.

 

책장에 꼽혀 있는 니까야를 접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이다. 그래서 자식을 갖는 것도 재산을 형성하는 것도 집착이라 하여 기쁨이 되기 보다 연기의 실상으로 보았을 때 슬픈 것이라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모두 다 열심히 생육하고 무한하게 번성하기를 바라는데 부처님은 거꾸로 집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거리에 십자가는 넘쳐 나지만 진리를 펴는 곳은 매우 드믈다. 가물에 콩 나듯 어쩌다가 보일 뿐이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에 가르침을 접하는 것은 기쁨이다. 비록 몸은 세속에서 부대끼며 살지라도 책장에 꼽혀 있는 니까야를 접하면 탈세속이 된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정반대의 역류도가 있기 때문이다.

 

 

 

2013-09-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