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끈이론과 초끈이론 그리고 M이론, 원리로서 확립된 연기법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3. 16:44

 

끈이론과  초끈이론 그리고 M이론, 원리로서 확립된 연기법

 

 

 

그 어떤 환경속에서도

 

도로가 인도에 한송이 나팔꽃이 피었다. 흙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이런 꽃을 보았을 때 생명의 강인함을 느낀다. 그 어떤 환경속에서도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이다. 그런 생명은 어떤 것일까?

 

 

 

 

 

 

 

물고기 특유의 자태를

 

생태하천을 지나다 보면 물고기를 볼 수 있다. 도시에서 물고기 잡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하천의 물고기 개체수는 엄청나게 들었다. 그래서 다리 밑에서 보는 물고기는 떼를 이루고 있다.

 

더러운 하천에서 자라는 물고기는 크기가 어른 장딴지만하다. 대체 무엇을 먹고 그토록 크게 자란 것일까? 그리고 물고기 특유의 자태를 유지하는 것일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새의 새끼

 

TV에서 다큐프로를 보면 새에 대한 것이 많다. 새들이 짝을 이루어 알을 낳아 부화하고 새끼를 키우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입을 찢어질 듯이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어미새는 끊임 없이 먹을 것을 날라다 준다. 주둥이만 보이는 듯한 새끼는 어미새가 물어다 준 물고기를 한 입에 꿀꺽 삼켜 버린다. 그것도 지신의 몸만한 물고기이다. 그래서일까 새끼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폭발적이다. 새끼는 자란다기 보다 차라리 폭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두 세 살 영아의 놀라운 능력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 하루가 다르다. 그래서 낳은지 몇 달이 지나면 몰라 보게 성장해 있다. 이런 성장의 과정 역시 폭발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식물이나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언어이다.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보면 역시 폭발적이라 하지 아니 할 수 없다. 그런 언어습득 과정은 매우 신비한 것이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님은 어느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발성의 체계를 반복해서 그 발송의 체계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다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키죠. 그 발성의 체계를 의미의 체계와 결합시킨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하게 어린 영아가 서너살 때 이걸 다 해냅니다.

 

(도올 김용옥, 생각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는 동물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생각이다. 그런데 말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서너살 영아 때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놀랍게도 유아시절에 발성체계와 의미체계를 정확하게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도올 김용옥님은 인간이란 동물에게 있어서 놀라운 능력이라 하였다. 그리고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 어려운 숙제를 유아기에 다 풀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DNA에만 들어있는 것인지

 

그런데 그 다음에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문자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라는 형상을 습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발성의 체계와 의미의 체계를 결합시킬 뿐만 아니라 형상의 체계와도 결합시킨다. 이때가 여섯살이나 일곱살때이다. 그것도 단시간내에 해낸다. 그래서 김용욕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나는 이게 도대체 DNA에 그 언어 습득 구조가 이미 내장 되어 있나? 딴 동물의 DNA와 다른 뭐가 있지 않은가? 나는 도저히 인간이 공통으로 해내는 이런 작업에 대해서 나는 가만히 생각하면서 이 경이를 풀길이 없다고 생각이 들어요.

 

(도올 김용옥, 생각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어렸을 해내는 언어의 습득능력은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김용옥님은 그런 능력이 인간의 DNA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하여 의문한다. 그런 인간의 언어능력과 사유능력에 대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풀길이 없음을 말한다.

 

인간의 기적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것은 빛난다. 보도 블록 사이에 피어난 한송이 나팔꽃을 바라보면 생명의 경이를 느낀다. 또 하천의 더러운 물에서 물고기 특유의 자태를 드러내며 자라는 물고기를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또 입을 크게 벌리고 어미가 가져다 주는 먹이를 먹으며 단시간내에 폭발적 성장을 하는 새의 새끼를 보면 경이롭다. 그러나 가장 경이로운 것은 인간이다. 어떻게 서너살 먹은 영아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의미파악을 하는 것인가이다. 또 초등학교 들어 가기 전에 아이가 문자를 습득하여 그것을 의미체계와 연결하여 사유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 역시 경이롭다. 아니 경이롭다기 보다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 인간에게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 동물과 똑 같은 것은 먹고 마시고 싸는 것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사유하는 능력이다. 그런 사유능력은 결국 “나는 무엇인가?”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다.

 

TV에서 다큐프로를 즐겨 본다. 작년에 본 과학 다큐프로에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문구를 보았다. 입자가속기를 이용하여 우주의 탄생비밀을 밝히고자 연구하고 있는 어느 외국 노교수의 화두이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는 말은 폴 고갱의 작품이름이다. 1897년 폴 고갱이 타이티에서 그린 그림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폴고갱이 자살시도 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라 한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현대물리학자들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또는 “우리는 왜 여기에 있고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이 세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현상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정리하여 이론을 체계화 하고자 하는 것이다.

 

EBS에서 과학다큐빛의 물리학

 

최근 EBS에서 과학다큐 프로를 보았다. 모두 6부작으로 구성된 ‘빛의 물리학’이다. 마지막 6부는 ‘빛과 끈’에 대한 것이다. ‘끈이론’에 대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다큐프로에 따르면 끈이론이 나오게 된 것은 통일장이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만물이론을 추구한 결과에 따라 필연적으로 대두된 이론이라 한다.

 

빅뱅이후 이 세상에는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이렇게 네 가지 힘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 네가지 힘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통일장이론’을 가정하였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통일장 이론에 집착하는 것일까? 프로서 외국 과학자는 “우리는 단순히 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하는 거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라고 하였다. 호기심 때문에 연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실패한 통일장 이론

 

그런데 네 가지 힘중에 전자기력, 강력, 약력  이렇게 세 가지 힘은 하나로 통합되는 이론이 발표 되었다. 하지만 이는 미시적인 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거시적 세계에서 작용하는 중력과는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일장 이론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론이 되었다.

 

아직까지 네 가지 힘을 아우르는 통일장 이론은 없다.  그런데 거시적세계와 미시적세계를 아우르는 통합이론이 발표 되었다. 이른바 끈이론(string theory)’이다.

 

끈이론(string theory)이란 무엇일까?

 

끈이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다큐프로에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지만 좀처럼 이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의 한계를 넘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을 아무리 쉽게 해도 물리학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못따라 가는 것이다.  그런 끈이론이란 무엇일까?

 

끈이론에 따면 “이 세상이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입자들이 고무줄 같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끈이론이 만물이론으로 변한 것은 중력자때문이라 한다. 통일장에서는 중력과 다른 힘을 합칠 수 없었으나 중력자를 끈이론에 적용함에 따라 만물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짆랭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세상을 자르고 자르고 또 잘라서 가장 작은 물질(10에 마이너스 33승)이 점이 아니라 끈이다. 그것은 길이를 갖는다는 겁니다. 길이는 공간을 차지하지요.

 

점이라면 무한히 잘라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양자가 요동치는 이 공간에 적용을 시켜야 하지만 끈은 길이가 있기 때문에 이 보다는 크고 좀 조용한 이 공간에 적용이 됩니다. 여기선 중력도 해결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죠.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6부 빛과 끈)

 

 

통일장에서는 중력과 다른 힘을 합칠 수 없었으나 끈이론에서는 중력자를 끈이론에 적용함에 따라 만물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미시적세계에 적용되는 양자역학과 거시적세계에 적용되는 상대성이론과 통합의 발판이 마련 된 것이다.

 

초끈이론은 정말 만물이론이 될 수 있을까?

 

끈이론은 정말 만물이론이 될 수 있을까? 끈이론은 음악을 닮았다고 한다. 현악기의 현이 진동하면 음이 나오듯이 끈이론도 각자 끈이 진동한다고 한다. 진동패턴이 달라지면서 입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물질과 힘은 이 끈이 진동하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초끈이론’이라 한다.

 

 

 

 

 

 

TV화면을 오실로스코프로 보면 어떻게 될까? 화면이 모두 주파수로 보인다. 끈이론도 아마 이런 개념에서 나왔을 것이라 본다. 입자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물질은 매우 높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물질을 쪼개서 보면 특정 주파수로 강하게 진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끈이론에서도 그와 같이 설명한다.

 

 

끈이 열려있거나 닫혀 있거나 굉장히 빨리 움직이거든요. 그 움직이는 것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듯이 모든 입자가 끈으로 만들어졌다고 가정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음들이 모여 아름다운 음악이 되듯이 이 우주는 초끈이 만들어낸 교향곡입니다.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6 빛과 )

 

 

 

 

 

그런데 끈이론은 다섯개나 된다고 한다.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은 단순하고 하나이어야 하는데 다섯개나 된다니 어찌 된 일일까? 이는 차원으로 설명된다.

 

11차원에서 보면

 

끈이론에서는 여분의 차원을 말한다. 정원용 호스의 예를 들 수 있다. 멀리서 보면 호스는 하나의 선이다. 숨겨진 차원을 보려면 더 가까이 가야 한다. 가까서 보면 선인줄 알았는데 둘레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숨겨진 차원이라 한다.

 

그런데 호스를 쪼개고 쪼개면 점이 된다. 여분이 차원은 점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너무 작아서 관측도 안되는 초 미세 영역을 말한다. 그런데 그 안에도 숨어 있는 차원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작은 영역에 어마어마한 생명들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 여분의 차원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3차원에 시간을 더하면 4차원이다. 거기에 숨어 있는 차원을 더하면 모두 10개의 차원이 된다. 이런 10차원에 대한 끈이론이 무려 5개나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설명하는 만물이론은 복잡해야 할까?

 

5개의 이론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4개의 세계에는 누가살까? 그러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10차원에서 하나 더 추가하면 된다. 11차원에서 보면 5개가 하나라는 것이다. 11차원의 관점에서 10차원을 내려다 보니 5개의 끈이론들은 5개의 단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초기경전에서 장님코끼리 만지기 우화처럼 보인다.

 

장님코끼리 만지기 이야기

 

우다나에 따르면 어느 날 왕이 태어날 때부터 봉사인 자에게 코끼를 보았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봉사들은 보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9명의 봉사가 꼬끼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가장 먼저 설명한 봉사는 “코끼리는 물항아리와 같습니다.(Ud6.4)”라 하였다. 이어서 봉사들은 차례로 키질하는 바구니, 쟁기, 창고, 기둥, 절구, 곤봉, 빗자루와 같다고 하였다.

 

 하나의 코끼리에 대한 눈먼 봉사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교의 유행자들은 눈이 멀었고 눈이 없어서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이익을 알지 못하고 무익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이교도들이 논쟁하는 것을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으로 비유하였다. 서로 자신들이 맞다고 입에 도끼를 물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세존]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실로 이러한 견해들에 집착한다.

사람들이 한쪽 관점만 본다면,

서로 말다툼을 벌이고 논쟁한다.”

 

(다양한 이교도의 경, 우다나 Ud6.4, 전재성님역)

 

 

끈이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5개의 이론은 같은 대상에 대하여 다른 측면에서 본 것이다. 그런데 차원을 올려 놓고 보니 똑 같은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끈이론이 M이론으로

 

끈이론은 아주 다른 이론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Membrane), 마술(Magic),신비(Mystery), 행렬(Matrix) 등을 뜻하는 영어의 M자를 빌려와서 ‘M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M이론은 그냥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다고 한다. 5개의 끈이론을 가지는 가장 큰이론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M이론이라고 하였다.

 

프로에서는 끈이론이 M 이론으로 바뀐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차원이 열린 끈이라고 하였을 때 끝점이 어디엔가 붙어 있어야 해요. 2차원면에요. 그런 것을 브레인이라 합니다. (안창림 교수)

 

 

막자체의 모양에 대한 가능성에 관해선, 가장간단한 것은 끝없이 펼쳐진 종이 한 장입니다. 그러니까 이 칠판 같은 평면이 완벽히 편평하게 공간 전체에 펼쳐져 이는 거죠. (샤미트 카츠루 교수)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6부 빛과 끈)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프로 진행자의 설명에 따르면, 1차원의 열린 끈이 끝나는 지점은 바로 2차원의 (멤브레인)’이라 한다. 끈이 붙어 어떤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이 막에서 끈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막은 3차원이 되기도 한다.

 

 

 

 

 

마술적이고 신비적인 M이론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공간의 차원이 세 개가 아니라 네 개인 세상에서는 세 개의 공간차원과 시간을 가진 세 개의 막과 두 개의 공간차원과 하나의 시간을 가지는 막들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샤미트 카츠루 교수)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6부 빛과 끈)

 

 

참으로 이해 하기 힘든 대목이다. 현대물리학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은 따라기 힘들다. 설명에 따르면 “알고 보니 우주가 거대한 막이었습니다.”라고 한다. 거기에 4차원 우주도 있고, 7차원 우주도 있고, 죽은 우주도 있고, 여러가지 우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아직 살아 있는 우주도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중 하나의 막에 살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 이론이다. 중력, 전자기력 등을 설명하는 현대물리학이 끈이론으로 들어서면서 영역을 넘어서 버린 듯하다. 더구나 끈이론이 M이론이라는 전혀 다른 이론이 되면서 마술(Magic)적 요소와 신비(Mystery)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듯하다. 그래서 M이론은 현대물리학의 범주를 넘어선 듯하다. 

 

끈이론은 만물이론이 될 수 있을까?

 

끈이론은 만물이론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끈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안창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초끈이론이 대통일도 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예언하는 현상안에 이 우주도 포함하고 있지만 왜 그것이 아니면 안되느냐 이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죠.  필연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안창림 교수)

 

(EBS 다큐프라임, 빛의 물리학,  6부 빛과 끈)

 

 

안창림 교수는 초끈이론의 문제점이 필연성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왜 그것이 아니면 안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아마 세상을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설명자에 따르면 끈이론이  보편적 이론을 찾는 탐색의 끝에 다다른 이론이라 하였다. 이는 양자장론을 상대성이론으로 확대시키는 드물고 유일한 시도라 한다. 여태껏 흥미로운 이론이 제기 될 때마다 늘 끈이론의 단면으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볼 때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이제 끈이론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다른 우주의 생명체가  연구해도 똑 같은 답을 얻을 것이라 한다.

 

아인슈타인은 알고 있을까?

 

방송에 따르면 끈이론은 완성된 이론이 아니라 한다. 하나의 가정일 뿐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새로운 이론이 계속 나오는데, 새로운 이론은 뒤이어 나오는 이론으로 인하여 이전 이론이 되어 폐기 되기도 한다.

 

우주적 스케일의 거시세계와 원자단위의 미시세계에 대한 통합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다만 M이론이 근사하게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수학적 원리로 설명되는 현대물리학에서 끈이론은 너무 나아 갔다. 존재론적 사유가 익숙한 학자들에게 인식론적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아인슈타인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하게 될까? M이론에 따르면 우주 어딘가에 아인슈타인도 살아 있을 것이라 하는데 무어라 말할까? 아마도  “Gods does not play dice(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 세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법칙, 궁극의 이론은 무엇일까? 그것이 끈이론일까? 이에 대하여 나레이터는 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백발의 아인슈타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주와 나를 만든 최초의 그것이 과연 끈인지 아마도 그는 알고 있을 겁니다.”라고 하며 나레이션을 맺는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

 

빛의 물리학다큐 프로를 보면 우주의 탄생이나 존재의 근원에 대한 것은 신의 영역이라는 은근한 암시를 주는 것 같다. 프로 말미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한 것이 좋은 예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우주가 신의 작품이라고 죽을 때 까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면 신의 영역으로 떠넘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유일신교에서는 ‘신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에서부터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소소한 문제에 이르기 까지 모두 신의 뜻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목사에게 유혹하는 여인이 나타나자 목사는 마음속으로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유일신교서는 모든 것을 신에게 떠 넘긴다. 특히 이슬람교가 심하다. 이슬람교도들은 말끝마다 ‘인샬라’를 달고 다닌다는데 그 뜻은 “알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 한다.

 

빠알리니까야에 묘사된 창조주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창조신에 대한 이야기는  기독교와 이스람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도처에서도 볼 수 있다. 존재의 근원이 있어서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근원이 되는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런 궁극적 실재가 인격화 된 것이 기독교의 야훼, 이슬람의 알라, 브라만교 브라흐마 등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오늘날 기독교의 유일신과 비슷한 개념의 신이 있었다. 그런 창조신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묘사 되어 있다.

 

‘‘Tatra , bhikkhave, yo so satto pahama upapanno tassa eva hoti – ‘ahamasmi brahmā mahā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daso vasavattī issaro kattā nimmātā seṭṭho sajitā [sajjitā (syā. ka.)]vasī pitā bhūtabhabyāna. Mayā ime sattā nimmitā. Ta kissa hetu? Mamañhi pubbe etadahosi – ‘‘aho vata aññepi sattā itthatta āgaccheyyu’’nti. Iti mama ca manopaidhi, ime ca sattā itthatta āgatā’ti.

 

 

수행승들이여, 거기에 먼저 태어난 한 뭇삶이 있었는데, 그는 이와 같이 ‘나는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예전에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바랬는데, 그러한 내 마음의 서원 때문에 이 뭇삶들이 여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서 ‘부분적 영원주의(Ekaccasassatavādo)

’에 대한 내용이다. 마치 바이블에서 창조신화를 보는 듯 하다. 고대인도에서도 바이블과 유사한 창조이야기가 있음을 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경에서 이 세상을 창조한 자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창조주에 대한 명칭을 보면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나 성당에서 부르는 명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형성되었나?

 

그런데 이와 같은 여러 이름의 소유자가 단지 뭇삶(satta)’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뭇삶이란 중생을 말한다. 우리와 똑같이 윤회하는 범부이다. 자신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믿는 창조주, 하느님은 윤회속에 살고 있는 중생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착각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경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어떤 뭇삶이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 살게 되었는데, 공덕이 다하자 아래 세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태어나 보니 오로지 자신 혼자만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혼자 사는 것이 심심하여서 일까 다른 뭇삶이라도  이곳에 오면, 얼마나 좋을까?(D1)”라고 바라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 마침 공덕이 다하여 죽은  뭇삶이 자신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 태어난 자와 나중에 태어난 자 사이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먼저 태어난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나중에 태어난 자를 창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심심하던 차에 말벗이 있었으면 하였는데 진짜로 “짠”하듯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이 뭇삶들은 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라고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태어난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신 보다 먼저 와 있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 (D1)”라고 생각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경에 따르면 “우리는 여기 먼저 태어난 자를 보았고 우리는 나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D1)”라고 착각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중에 태어난 자는 먼저 태어난 자에게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정복자, 정복되지 않는 자, 모든 것을 보는 자, 지배자, 주재자, 작자, 창조주, 최상자, 조물주, 전능자, 존재하는 것과 존재할 것의 아버지이다. 우리는 이 존귀한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D1)”라고 선언한 것이다. 바로 이부분이 오늘날 유일신교의 창조론과 대단히 유사한 대목이다.

 

부분적 영원주의는 삿된 견해

 

이와 같은 부분적 영원주의는 삿된 견해이다. 그래서 62가지 사견에 속한다.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음에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너무 오래 살아 자신의 전생을 잊어 버린 케이스에 속한다. 그래서 자신은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서 과대망상형 하느님(브라흐마)’ 으로 등장하는 바까범천이야기(S6.4)’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상유정천에서 온 자들은 이전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 보다 먼저 온 자를 창조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먼저 온자가 창조주이고 자신은 피조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성립된다. 하지만 이는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모르는데 오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으로 보는 전도된 인식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영원주의자들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한 것이라고 삿된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존재론의 한계

 

현대물리학에서 과학으로 현상을 입증하려 하는 것은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과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끈이론에 따르면 존재론의 범위를 넘어선다. 우주에 대하여 수학공식으로 표현된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존재론의 한계이다.

 

존재론에서는 국부적으로는 물리법칙이 적용되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로 통합된 이론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EBS다큐에서  말미에 백발의 아인슈타인을 등장시킨 것은 이 우주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창조주영역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일까?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유일신교

 

유일신교는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유일신은 절대로 존재한다고 하여 절대유라 한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이다. 유일신교에 따르면 창조주가 창조한 이 세상은 절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절대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유일신교이다. 그렇다면 절대로 존재하는 것은 진짜 절대로 존재하는 것일까?

 

양극단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다. 이런 존재와 비존재를 빠알리어로 ‘앗티따(atthita)’와 ‘낫티따( natthita)’ 라 하고, 한자어로 유()와 무()라 한다. 

 

이때 유는 ‘존재의 영원성’을 말하고, 절대적으로 소멸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를 상견이라 한다. 반면 무는 ‘존재의 허무성’을 말하고 소멸 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단견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견해가 왜 모순일까.

 

유일신교 신학에서는 창조주에 대하여 ‘절대유(絶對有)’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여기서 절대유는 존재 그 자체를 말한다. 무()일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은 ‘항상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창조주는 존재 자체가 보장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 신은 완전 그 자체이어서 항상 충만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은 진리 그 자체이고, 동시에 미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진선미 그 자체의 신은 누가 만들었을까.

 

그런 신은 있을 수 없다. 특히 그리스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질료와 형상이 있어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있는 것에서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스로 원인이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신교에서는 단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의 최초의 사실을 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라고 본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최초의 시작을 설정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動者)와 같은 절대자를 가정해야 하는 논리적 허구이며, 무한소급(regressus infinitum)은 원인과 결과의 선형적 계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이유에서 존재론적으로 허구이며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므로 인식론적으로 효력이 없다.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2권 해제, 전재성님)

 

 

해제글에 따르면 ‘절대로 존재한다’는 절대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하나의 최초의 원인이 되는 창조주를 가정하지 않는 한 절대유는 허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대로 존재한다는 창조주가 있다라고 보는 것은 넌센스이다.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불교

 

불교는 인식론이다. 만일 불교를 존재론으로 본다면 더 이상 불교라고 볼 수 없다. 왜 그런가 연기법에 들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최초의 원인을 가정하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며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은 시설되지 않는다.(S15.1)”이라고 인식론으로 말씀 하셨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이렇게 무한소급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 최초의 원인이 되는 창조주를 상정해야 된다. 그래서 존재론에 무한소급하면 존재론이 허구임이 금방 드러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한소급을 상정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가 없다.(S15.1)”라고 한 것이나  “그 최초의 시작은 시설되지 않는다.(S15.1)”라고 한 것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연기법에서 무한소급을 요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어떻게 논파 되었나

 

발생에 대한 연기법 정형구는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Imassuppādā ida uppajjati, 若生此卽生彼)”이다. 이렇게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natthita, )’는 성립되지 않는다. 소멸되는 법에 뒤이어 새롭게 생겨난 법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가 논파 된다.

 

또 소멸에 대한 연기법 저형구는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若無此卽滅彼)”이다. 이렇게 세계를 관찰하면 절대적인 유(atthita, )’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미 생겨난 법은 조건이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되는 법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영원주의는 거짓이 된다.

 

이와 같은 발생과 소멸에 대한 연기법 정형구를 보면 다음과 같다.

 

 

imasmi sati ida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깟짜야나여,

이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나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Kaccāyanagottasutta- 깟짜야나곳따경, 상윳따니까야 S12:15, 전재성님역)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있는 그대로의 발생과 소멸이 조건발생적 연기의 본질이라 볼 때 절대유 또는 절대무라고 하는 개념은 관찰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임을 말한다. 존재론에 바탕을 두지만 실재하지 않은 허구임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로 현상을 관찰할 것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불교는 인식론이다.

 

끈이론과 연기법

 

현대물리학에서 이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궁극적 이론을 발견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다. 통일장이론 이론 같은 것이다. 이런 물리학 이론은 국부적 현상에 대해서는 원리가 설명되지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어느 것 하나 완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통합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존재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끈이론은 다르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어느 정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인식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하여 ‘있다’와 ‘없다’라고 보는 존재론적 사유가 아니라, 현상에 대하여 ‘이다’ 와 ‘아니다’라는 인식론적 사유를 하게 된다. 이런 인식론적 사유를 대표하는 것이 연기법이다. 그런데 이 연기법은 이 우주를 설명하는 원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조건의 경, S12:2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는 법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뜻일까? 부처님이 연기법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주에 하나의 법칙으로서 확립되어 있는 것이디. 그런 원리를 부처님이 명상을 통하여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말을 현대물리학자도 하고 있다. 만물이론이라 불리우고 있는 M이론에 대하여 어는 물리학자는 다른 우주의 생명체가  연구해도 똑 같은 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구 저편에 있는 지적인 생명체가 연구하여도 막으로 설명되는 M이론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보편적인 진리는 누가 발견해도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과 현대물리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M이론의 유사성이 보인다

 

만물이론으로 확립되어 있는 연기법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과학자들이 아무리 만물이론을 내 놓아도 결국 연기법의 범주에 포함될 것이라 본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고 사유하지만 결국 부처님의 연기법에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런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법칙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원리를 부처님이 지혜로 발견한 것이다. 따라서 만물이론은 이미 연기법으로 확립되어 있다.

 

 

 

 

2013-10-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