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을 비방하면 죄업이라고? 기득권승려의 슬로건“지금 이대로 영원히!”
개판치는 스님들
불자로서 이제 불자라고 떳떳이 말을 못하고 다니게 될 시대가 올지 모른다. 승려들이 ‘개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듣기에도 민망한 승려도박, 승려폭행 등 온갖 부정적인 단어들이 난무 하기 때문이다.
개판치는 승려이야기는 이제 불교계를 넘었다. 그래서 메이저 신문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보수신문의 자매지인 신동아 9월호와 10월호에 낯 뜨거운 기사가 실렸을 뿐만 아니라 진보적 인터넷매체인 오마이 뉴스에서도 적광스님 폭행사건이 대서특필되었다. 특히 오마이뉴스 기사에서는 “나는 도살장 끌려온 한 마리 짐승, 1200만원 돈봉투에 영혼 팔 수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적광스님의 연행동영상 까지 실렸다.
“승려나 목사나 다 똑 같습네다”
오마이뉴스 기사는 우리나라에서 진보적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트위터 RT가 91개, 독자원고료가 88000/8건에 달했다. 그렇다면 기사에서 동영상을 보고 사람들은 무슨생각을 하였을까? 추천수가 2위인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승려나 목사나 다 똑 같습네다.
고급승용차타고 호탤에서 식사하며 너스레떨고
돈냄세 풍기는 그들 모두 수도자는 아닙니다.
난장판의 중심에 서있는 평범이하의 필부보다
오히려 낮은 수준의 인간이지요. 그들을 통하여
무슨 영혼구제...?하늘이 웃습네다.
(나는 도살장 끌려온 한 마리 짐승 , 1200만원 돈봉투에 영혼 팔 수 없었다, 댓글, 오마이뉴스 2013-09-27)
끌려 가는 적광스님
승려나 목사나 다 똑같다는 말이다. 그 동안 사회에서는 개판치는 목사로 인하여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이제 개판치는 승려로 인하여 불교 역시 기독교 목사와 ‘동급’으로 본 것이다.
“왜 우리스님만 가지고…”
하지만 아무리 승려가 개판을 쳐도 “우리 스님”인 것 같다. 장주스님이 폭로한 조계종 고위층의 상습도박승 16인 중에 전불국사 주지를 하였던 ㅈㅅ스님이 있다.
ㅈㅅ스님에 대하여 교단자정센터에서 대구지검을 찾아 신속한 수사를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최대관람료 사찰인 불국사가 도박사찰이 된 것은 재정이 불투명하게 운영된 것이라 판단하여 이에 대한 제도개혁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하려 하였다. 그런데 불국사 신도들로부터 거센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날 대구지검 포항지청 입구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었다. 불국사 신도회(회장 이영숙) 40여명은 검찰에 수사촉구서를 접수하는 김종규 원장에게 거세게 항의했고, 기자회견장까지 쫓아와 에워싸 회견문을 낭독하는 김 원장의 목소리는 자주 끊겼다. 신도들은 휴대전화로 기자회견 내용을 녹음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소리쳤다.
신도들은 ‘J 스님’과 ‘불국사’가 거론될 때마다 항의해 기자회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기자들의 질문에 김종규 원장이 답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
.
신도회 박완규 부회장은 “현재 검찰이 참고인 조사를 하는 등 수사를 착착하고 있다. 서울서 여기까지 와서 검찰에 수사하라 마라 할 이유가 있냐”면서 “도박 의혹을 받는 스님은 16명인데 왜 장주 스님과 J 스님만 수사하라는 건가”라고 따졌다.
(“왜 J 스님만 거론하냐…선거 앞두고 이용하나”, 불교닷컴 2013-08-22)
ㅈㅅ스님은 도박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주스님이 폭로한 신동아 9월호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해외원장 도박을 전문으로 하는 즈ㅅ스님에 대하여 장주스님은 “ㅈㅅ 스님은 베팅을 크게 합니다. 워낙 돈이 많은 사람이라.”라고 말한 바도 있다. 더구나 불국사 경내에 도박장 까지 설치해 놓고 도박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런 스님에 대하여 신도들은 “왜 우리스님만 가지고 그러느냐”고 항의 데모를 하였다고 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승려들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이를 보호 해 주는 열성신도들이 있다. 승려가 도박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도 ‘우리 스님’인 것이다. 그래서 일까 스님에 대하여 비판을 하면 마치 큰 죄라도 짓는 것처럼 여긴다.
최근 인터넷 카페에서 글을 하나 보았다. 어느 네티즌이 올린 글이다.
우리 보살님들 스님에 대한 모든 것 궁금함이 참 많아요!
그러나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님에 대한 모든 것을 너무 많이 알고 나면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
.
그런데 스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나면 존경심보다 흉 볼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스님 흉을 보는 것은 부처님 법에 가장 큰 죄업을 짓는다 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알려들지 않는 것이 흉 볼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스님을 흉 보는 일, 죄업입니다. ㅎㄹ 스님)
글의 작성자는 ㅎㄹ스님이다. 이글 어느 네티즌이 이카페 저카페에 퍼날랐는데 무려 30군데이다. 퍼나른 자의 댓글을 보면 “일부 몰지각한 분들로 인해 불법을 전하는 대부분의 귀하고 소중한 스님들까지 폄하 되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일부 개판 치는 스님들도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을 싸잡아서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치 개판치는 목사들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기독교인들이 늘 하는 말이 일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글도 그런 맥락이라 보여진다.
스님을 승보로 보기 때문에
글에서 “스님들 흉을 보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스님에 대하여 “너무 많이 알려고 허면 다친다”는 뉘앙스로 표현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다름 아닌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을 불법승 삼보 중의 하나로 본다. 그래서 스님을 부처님과 동급인 승보로 보는 것이다. 그런 승보에 대하여 흉을 보는 것은 불법을 훼손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큰 죄업을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을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을 비난하는 것과 같다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에 대하여 비판하면 ‘승가모독’이라 한다. 아마도 이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한글 삼귀의문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스님들을 비방하면 죄업이라고?
승보로 간주 하는 스님을 흉보는 것이 죄업이고 승가모독이라면 개판치는 승려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은처를 하고, 도박을 하고, 횡령을 하고, 폭행을 해도 못 본척 해야 할까? 그래서일까 글쓴 스님은 “차라리 알려들지 않는 것이 흉 볼일이 없어지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스님들의 잘못을 보아도 못 본척 하라는 뜻으로 보인다. 은처를 하든, 도박을 하든 스님들 일에 재가자들이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쓴 스님은 왜 “스님 흉을 보는 것은 부처님 법에 가장 큰 죄업을 짓는다 했습니다.”라 하였을까? 아마도 대승보살계에 근거한 것이라 보여진다. 대승보살계에서 열가지 큰 계율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6.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불자들아, 만일 너희가 출가한 보살이나, 집에 있는 보살이나, 비구나, 비구니의 허물을 자기 입으로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시켜서 말하게 하지 말지니, 허물을 말하는 원인이나, 허물을 말하는 반연이나, 허물을 말하는 방법이나, 허물을 말하는 업을 짓지 말라.
10.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불자들아, 너희는 삼보를 비방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시켜서도 비방하게 하지 말지니,
비방하는 원인이나, 비방하는 반연이나, 비방하는 방법이나, 비방하는 업을 짓지 말아야 한다. 보살은 외도나 나쁜 사람들이 삼보를 비방하면, 그 한 마디 말에도 3백 자루의 창으로 가슴을 찔린 듯한 것이거늘, 하물며 자기의 입으로 비방하고, 믿는 마음과 불성에 효순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그러므로 사람과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을 도와서 비방하면 보살의 큰 죄가 된다.
(대승보살계)
대승보살계는 불자라면 누구나 받는 계를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물론 재가불자들도 받는다. 그런데 십중대계를 보면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에 이어 스님을 비방하지 말라는 계율이 보인다. 그것도 십중대계에서 두 번이나 강조된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을 비방하면 큰 죄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불자들은 배우기를 스님들이 잘못을 하여도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 하였다. 설령 스님들이 잘못 하여도 곧바로 참회하여 초발심으로 돌아 갈 것이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스님의 흉을 보는 것에 대하여 승가모독으로 보는 것이다.
스님을 친견하려면
재가불자들은 스님에 대하여 잘 모른다. 불과 만여명에 지나지 않는 출가승려에 대하여 천만불자들이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스님에 대하여 안다고 할지라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느 종교기자는 자신의 컬럼에서 “여기 스님은 모두 밍크코트 입은 사람만 상대 하는데 난 능력이 없고 보시도 못하니 조용히 법당에 앉았다 그냥 가요”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대부분 불자들이 이런 신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스님을 친견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 없이 친견하기를 원하는 배짱있는 불자들은 극히 드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없는 불자들은 조용히 법당에서 참배만 하고 나오는 식이다. 그래서 재가불자들은 스님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럼에도 스님을 보면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왜 출가하였을까?”하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을 해소시켜 주기 위함일까 불교방송에서 스님 대담 프로를 보면 진행자가 꼭 물어 보는 것이 “스님은 어떻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어요?”라고 조심스레 물어 본다. 출가동기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 출가동기를 보면 10인 10색이라는 말이 있듯이 매우 다양하다.
승가전체의 타락으로 보는 이유
이렇게 재가불자들이 스님에 대하여 잘 모르다 보니 스님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존재인줄 안다. 그리고 스님들은 병도 걸리지 않는 사람인줄 안다. 마치 초등학교 학생이 선생님은 화장실도 가지 않은 존재로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언론을 통하여 승려도박, 승려은처, 승려폭행, 승려먹튀 등과 같은 사건을 접하였을 때 환상은 깨진다. 그들도 별 수 없는 우리와 똑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승려들이 재가불자 보다 못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승려들이 도박이나 폭력, 횡령 등과 같은 범죄행위를 하였을 때이다. 이런 범죄행위는 재가불자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 과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승려들이 사회의 도덕적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집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더구나 고위층이 연루 되었을 때 승단전체가 매도 된다. 일부 극소수 스님에 의하여 자행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계종을 대표하는 스님이 은처와 도박에 연루 되었다는 사실은 그런 대표를 뽑은 곳이 승단이기 때문에 승가전체가 타락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승단을 싸잡아 타락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승려타락에 대하여 일부의 문제로 보고 대다수 승려들은 고귀한 삶을 살고 있다는 식의 말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철부지 같은 스님들 때문에
승려들이 개판치면 누가 가장 많이 피해를 볼까? 당연히 재가불자들이다. 스님들이야 산중에서 살기 때문에 산중이 불국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재가불자들은 타종교인들과 함께 살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종교가 다르고 직장이나 단체에서도 종교가 다른 것이 현실이이다. 그럴 경우 승려도박과 같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커다란 사건이 터졌을 때 불자들은 매우 곤혹스럽다. 혹시 모임에서 어떤 이가 “스님들이 왜 도박을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불자들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어느 스님의 라디오 방송에서 해명한 것처럼 “치매 예방을 위하여 심심풀이로 합니다”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재가불자들은 승가를 염려한다. 이는 거꾸로 된 현상이다. 승가에서 재가불자를 돌보고 보살펴야 하나 요즘은 거꾸로 재가불자들이 승단을 염려 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왜 그럴까? 철부지 같은 스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말 안듣는 아이처럼 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처럼 내키는대로 행동하는 스님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도개혁을 외쳐 보았자
승단을 향하여 재가불자 단체들은 꾸준히 제도 개선을 요구 해왔다. 그러나 마이동풍, 우이독경이다. 아무리 크게 말을 하여도 도무지 먹혀 들어 가지 않는 것이다. 왜 스님들은 개판치면서도 재가불자들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있다.
최근 원로의원인 고우스님이 재가불자단체가 주관한 참여불교리더스포럼에서 ‘불교의 현주소와 의식개혁의 필요성’을 주제로 법문하였다. 이 법문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 총무원장선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규모가 너무 크다. 재가연대가 공정선거 운동을 하고 있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개개인의) 의식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더라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 고우 스님 “이번 총무원장선거 답 없다” , 참여불교리더스포럼서 “재가연대 활동 소용없을 것”, 불교닷컴 2013-10-02)
원로의원 고우스님의 발언에 따르면 아무리 재가불자들이 제도개혁을 외쳐 보았자 소용없는 일이 된다. 제도를 바꾸려 하지 말고 불자들의 의식을 먼저 바꾸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의식을 바꾸라는 것일까? 기사를 읽어 보면 ‘중도’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중도는 어떤 것일까?
고우스님이 말하는 중도는
고우스님이 말하는 중도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불교방송, 불교tv 등에서 활발하게 법문을 하고 있는 스님의 중도론은 다름 아닌 성철스님의 중도론을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철스님의 중도론은 부처님이 설한 중도와 다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S56.11)”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 말하는 중도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바탕을 둔 법계연기 사상에 대한 것이다. 또 이미 완성된 도로서 중도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고우스님은 기사에 따르면 “부처님 45년 설법은 중도를 이야기한 것이다.”라 하여 마치 성철스님이 말한 중도론을 부처님이 말씀 한 것처럼 말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오는 말이라 보여진다.
인터넷 댓글이 쓰레기라 하지만
오로지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의지하여 마치 성철스님의 중도론 전도사로서 한말이다. 그런 스님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불교TV에서 고우스님이 법문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댓글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백일법문이 엉터리인 이유는, 여러가지입니다.이번 제11회 내용 중 06:00시각 이전 내용만 봐도 오류투성이입니다.'양변이 융합한 것이 중도다'이말도 엉터리입니다.양변을 융합하면 제3의 존재가 탄생합니다.즉 결혼한 남녀사이에 자식이 나오듯이 말입니다.중용에 대한 풀이도 엉터리입니다.중용의 중은 쌍차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한 중도의 中자는 道를 강조한 수식어 일뿐입니다.中道=正道=眞道란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불성,법성을 발견하시고 반야심경의 空,연기법을 발견하셨습니다.고우스님의 법문을 들어보면 오온개공의 의미도 모르고,손바닥으로 한개 반개하는 것과 쌍차쌍조로 중도설명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뭐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어요,천지분간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횡설수설 옹알이 하는 수준에 불과해 보입니다. 성철敎,고우宗일 뿐입니다. 불법의 핵심 대의와 거리가 뭔 말일뿐입니다. 일관성도 없고 온통 뒤죽박죽 법문이예요.소승불교,대승불교,선불교의 차이점도 구분하지못하는 수준입니다 (2013-05-06)
(댓글, 백년의 가르침 성철스님 백일법문<법사 고우스님> , 불교TV 2013-04-09)
어느 스님은 인터넷에 쓰여진 글은 모두 ‘쓰레기’라 하였다. 학술적으로 참고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진짜 필요로 하는 정보는 인터넷에 올려 놓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터넷에 올려진 글이 쓰레기라면 ‘댓글’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쓰레기 중의 쓰레기로서 ‘가장 악취나는 쓰레기’라 불러야 할까?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필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진흙탕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보면 쓰레기 속에서도 건질 수 있는 것이 있다. 비록 쓰레기와 같은 댓글일지라도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익명을 전재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진실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댓글을 보면 고우스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 보다는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더 따르기 때문에 고우스님의 법문에 대하여 ‘성철종 고우종’이라 하였다. 그리고 횡설수설 옹알이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왜 티벳은 망하였을까?
고우스님은 재가불자들이 요청하는 제도개혁은 소용없다고 하였다. 지금 승단이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의 무대가 되었음에도 제도개혁을 외쳐 보아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중도로서 의식개혁을 먼저 하자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하였다. 그래서 티벳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처는 의식개혁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티베트의 예를 보면 명확하지 않은가? 1,000년간 불교국가로 제정일치의 사회를 만들었지만 나라를 폐쇄하고 개혁을 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중국에 병탄되고 말았다. 이렇게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은 폐쇄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던 불교승려들의 의식 자체가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제정일치의 티베트에서 나라를 운영하던 왕 이하 고관대작은 모두 승려들이였기 때문이다.
(포항공대 강병균 교수, "고우 스님 매우 위험한 답입니다", [기고] 리더스포럼 법문에 대한 반론, 불교닷컴 2013-10-04)
의식개혁 보다 제도개혁이 더 중요함을 말한다. 제도개혁 없이 의식개혁만 부르짓으면 조직이 망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티벳을 들고 있다.
티벳이 왜 망했을까? 이는 제정일치의 사회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종교의 수장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승려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나라를 이끌어 갔으나 결국 망했다는 것이디. 바로 이것이 제도개혁을 하지 않아 조직이 망한 대표적인 사례라 한다.
어떤 이들은 티벳이 망했기 때문에 오늘날 티벳불교가 전세계로 확산되었다는 논리로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정일치라는 원시적인 통치구조 속에서 정경분리라는 제도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는 망하기전 티벳과 다름 없다고 본다. 스님들이 정부조직을 흉내를 내서 입법, 행정, 사법기관을 만들어 그들만의 리그를 벌였을 때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사부대중이 모두 참여하는 제도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제도 개혁을 요구 하고 있으나 기득권을 대표하는 고우스님은 “어림도 없다”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그들끼리 똘똘 뭉쳐
한국불교 승려들은 그들끼리 똘똘 뭉쳐 있다. 특히 돈이 되는 입장료 사찰이 있는 교구본사 중심으로 뭉쳐져 있다. 문중이라는 이름으로 뭉쳐서 기득권을 향유하는 승려들을 보면 자신의 영역을 넘보지 못하도록 철옹성을 쌓아 놓은 봉건시대 영주들을 보는 듯 하다.
철옹성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은처, 도박, 폭력, 횡령, 먹튀 등과 사건이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도 스님들의 일이므로 재가자들이 왈가왈부 할일이 아니라 한다. 그래서 스님의 흉을 보면 죄업이라고 말한다. 스님이 아무리 개판을 쳐도 승보인 스님을 비난하면 부처님을 비난하는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은처승, 도박승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어도 문제 삼지 않는 듯하고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듯 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국불교의 승단은 도박, 폭력 등 범죄 행위에 있어서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성역인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불교저널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 하였다.
실제로 승려의 억대해외원정도박건은 SBS의 궁금한 이야기 ‘Y’와 〈신동아〉9월호에서 보도했지만 철옹성같은 종단 기득권 세력에게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이러한 미미한 파장은 자승스님의 재임출마를 가능케 했다. 나아가 백양사 도박 건으로 지난 해 해체선언했던 모든 계파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간판을 다시 앞세워 재등장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한 마디로 도박 따윈 청정승가를 생명으로 하는 조계종에선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반증이다. 그냥 반증이 아니라 역설적 반증이다. 청정승가가 아니므로 도박이 뭐 문제가 되느냐 하는 반증인 것이다. 왜? 조계종단은 현재 오도사문(汚道沙門)이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 [데스크칼럼]종단 골칫거리 도박문제, 불교저널 2013-10-04)
한국불교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도박 사건이 일어나도, 폭행사건이 일어나도 종단의 기득권 세력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가볍게 바꾸어 다시 종권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들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았을 때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불교 전체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비구 아닌 자를 종단의 수장으로 뽑았을 때 그 조직은 모두 비구 아닌 자의 무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을 ‘오도사문(汚道沙門)’이라 하였다.
오도사문(汚道沙門)의 한국불교
오도사문이란 무엇일까? 기사에 따르면 오도사문은 은처 도박 폭력 사이비 승려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 권력에 탐착하고 명리에 집착하는 자들로서 무리를 이루어 범계(犯戒)를 당연시하는 자들이 오도사문이라 한다. 현재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비구 아닌 자들을 말한다.
오도사문이 판을 치는 한국불교는 절망적이다. 어느 누가 총무원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디. 돈 되는 입장료 사찰을 중심으로 한 교구본사와 문중으로 똘똘 뭉쳐 있는 기득권 승려들이 총무원장을 뽑기 때문에 누가 나오더라도 그 밥에 그 나물이 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제도개혁이 되지 않는 것이다.
급격하게 몰락하기를 바라는
고이면 썩는다고 하였다. 마치 썩은 물과 같은 것이 한국불교이다. 그리고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다. 그래서 언제 쓰러지느냐가 문제이다. 그래서 어느 불자는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승이 재임되는 것이 더 낳을수도....
자승이,
이번에 당선되어 재임하는 것이 더 낳을수도 있다.
당선후에...
기다리는 것은 장주나 적광의 고소건에 대한 조사나 부정선거소송이다.
이 경우에는 재선거의 가능성이 있다.
이 때에는 제대로된 후보에 의한 선거가 될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원칙본위의 정치상황이나 사법부의 재벌에 대한 판결을 보면,
이것이 공연한 기대가 아니다.
그런의미에서,차라리 보선보다는 자승이 더 희망적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지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서광, ‘자승 스님의 연임, 자성과 쇄신 결과물인가’의 댓글, 불교닷컴 2013-09-27)
불교닷컴 기사에 대한 댓글이다. 익명을 전제로 한 댓글은 근거 없는 이야기와 욕설이 난무하는 쓰레기로 보지만 때로 참고할 만한 글도 있는 것이다.
글쓴이는 차라리 현총무원장이 연임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한다. 썩을 대로 썩어 이미 회생이 불가능하다면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삼관왕’이 총무원장이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16인의 승려에 대하여 장주스님이 이미 검찰에 고발해 놓았고, 조계종 호법부에서 죽도록 맞은 적광스님 역시 검찰에 고발해 놓았기 때문에 설령 현총무원장스님이 다시 총무원장이 되면 개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왕 썩은 조직이 서서히 몰락하기 보다 ‘급격하게 몰락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승복부터 바꾸어야 한다
썩은 보리수는 뽑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보리수를 심어야 한다. 새로운 종단이 탄생되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승복먼저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미래의 승복, 어떤 모양의 가사(Kasaya)일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작성한 바 있다. 그런데 최근 불교닷컴 에서 승복문제를 거론 하는 기사를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국제회의나 대회에 참가해 보면 한국불교는 보이지가 않는다. 그나마 두 세 명이 참가하는데, 승복과 가사 색이 다르다 보니 다른 비구나 빅슈들과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서, 문헌상으로 승단의 역사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항상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남방 비구들이나 라마들은 이 승복과 가사 색에 대해서 물어 보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일본 승려들은 승복과 가사가 자기들 방식대로 개량해서 입고 다니고, 재가승들은 양복 위에 낙자만을 수하고도 떳떳하게 다니는 것을 볼 때, 경전어는 한문이 공통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법장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같은 동아시아 불교라고 부르는 것을 재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한국불교는 우선 율장 면에서 남방 상좌부의 비구들이나 티베트의 라마들과 같은 부처님의 적통 승단인 상좌부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들과 어느 정도 동질성을 화복하려면 이번 기회에 승복과 가사 색에 변화가 와야 함을 감히 주장하면서 제언 드리는 바이다.
( 승가정신에서 너무 멀어져 가는 한국불교, 이치란 박사, 불교닷컴 2013-10-02)
한국불교에서 입고 있는 회색승복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율장정신에도 맞지 않고 세계적인 추세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제불교회의가 열리면 회색승복을 입은 한국 스님들은 ‘낯선 이방인’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국스님들은 테라와다 빅쿠 들처럼 비구계를 받는다. 그러나 비구계대로 사는 스님은 매우 드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 생활도 하지 않고, 그에 따라 ‘자자’도 없고 ‘포살’도 없다. 대부분 나홀로 토굴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당시의 가사를 입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운 보리수를 심는다면 가사부터 바꾸자는 것이다. 가사를 바꾼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흔히 “중벼슬이 닭벼슬 보다 못하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예외이다. 중벼슬은 닭벼슬 보다 결코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중벼슬은 세속의 권력 못지 않게 매력적이다. 그것은 이권이 있기 때문이다.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문화재와 토지가 그것이다. 그것을 차지 하기 위하여 감투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개념인 문중이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 기득권을 지켜 나간다. 그래서 기득권을 옹호 해 줄 수 있는 자를 대표로 뽑는다. 마치 이땅의 보수 기득권층을 보는 것 같다.
승이나 속이나 기득권층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대로 영원히!”이다. 지금 이대로 영원히 지금 가지고 있는 권리와 기득권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에 대하여 불온시한다. 그래서 좌파, 빨갱이등으로 매도 한다.
기득권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법을 만들고 말을 듣지 않으면 “법대로!”를 외친다. 이것이 이땅의 보수 기득권층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보수정당을 지원하고 보수신문에 의존한다. 그래서 기득권이 천년만년 향유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보수 기득권층은 변화를 싫어 하고 이 체제와 제도에 대하여 “지금 이대로 영원히!” 를 외치는 것이다.
세속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곳이 한국불교의 기득권 승려들이다. 그들은 아무리 은처승, 도박승, 폭력승 소리를 들어도 그들끼리 똘똘 뭉쳐 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철옹성을 구축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를 두려워 한다. 제도개혁을 요구하면 의식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기득권 승려집단의 슬로건은 “지금 이대로 영원히!”이다.
2013-10-05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M이론과 초기불교 (0) | 2013.10.09 |
---|---|
2013 안양시민축제를 보고 (0) | 2013.10.06 |
끈이론과 초끈이론 그리고 M이론, 원리로서 확립된 연기법 (0) | 2013.10.03 |
윤회는 없다고? 한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를 보고 (0) | 2013.10.01 |
자신만만한 중산층에게, 부처님의 역류도(逆流道, Patisotagami) (0) | 2013.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