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사는 스님은 비구가 아니다, 아파트 토굴과 승려도박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장에 자승스님이 재선되었다. 그것도 2위와 표차를 50표차로 벌인 대승이라 한다. 선거인단으로 선출된 179명의 스님들이 자승스님에게 표를 줌으로서 자승스님은 한국불교의 미래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총무원 숙소에서 지내며 매일 새벽예불을 올리겠다고
34대 총무원장선거를 앞두고 라이벌 보선스님은 종책을 발표 하였다. 그 중에 눈에 띈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특히 보선스님은 총무원 숙소에서 지내며 조계사에서 매일 새벽예불을 모시는 한편 정초기도와 초사흘기도 등을 올리며 직접 정진에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 보선스님 “수행종풍 확립ㆍ비구니 역할 강화”, 불교포커스 2013-09-24)
보선스님은 자신이 총무원장이 되면 총무원 숙소에 머물면서 새벽예불에 참석하고 법문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제까지 총무원장이 그렇게 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불자들은 스님이라면 새벽 일찍 일어나 새벽예불을 올리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보선스님의 공약을 보면 현총무원장은 총무원숙소에서 자지도 않고 새벽예불도 올리지 않은 것임에 틀림 없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개인수행을 한다는 명목으로 ‘토굴’에서 생활 하는 스님을 말한다. 그런 토굴도 토굴 나름이다.
토굴의 개념
토굴이란 무엇일까? 불자들이 아는 상식은 ‘굴속’을 연상시킨다. 동굴에서 명상수행을 하는 수행자를 만한다. 그러나 스님들이 기거하는 토굴개념을 보면 불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깨뜨린다.
한국불교에서 말하는 토굴개념은 매우 넓다. 사람이 사는 곳은 모두 토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흙으로 지어진 집뿐 만아니라 도시의 주택이나 아파트도 토굴 개념이 들어 간다. 그런 토굴에서 혼자 사는 것이다.
대중과 떨어져 토굴에서 혼자 생활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더구나 냉난방 시설이 잘 갖추어진 아파트토굴이라면 어떨까?
서 있으면 앉고 싶고 ,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 누우면 졸리웁다. 이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온갖 편의 시설이 다 갖추어진 토굴에서 나홀로 자유롭게 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게을러 질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침예불도 하지 않을 것이다.
비구가 혼자 산다는 것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불자 지식인의 기고문이 연달아 있었다. 그 중 공동체 생활을 거부하고 나홀로 사는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비구가 혼자 산다거나 사원 아닌 곳에서 숙식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사원의 승가교육이 살아 있는데, 많게는 5천 명에서 적게는 2-3백 명의 젊은 비구들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교학을 연마하거나 명상을 한다. 태국도 40만 명의 비구가 있는데, 전통 승가 교육은 물론이고 두 개의 현대식 불교대학에서 각각 1만 여명의 비구들이 공부하고 있고,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이 원칙이다.
( 승가정신에서 너무 멀어져 가는 한국불교, 이차란 박사, 불교닷컴 2013-10-02)
이치란 박사의 기고문에 따르면 비구가 혼자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는 비구들이 함께 모여 산다고 한다. 이렇게 공동체생활을 해야 서로 잘못을 지적해주는 ‘자자’와 계목을 함께 외우는 ‘포살’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구가 혼자 살면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토굴에서 홀로 살며 수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늦잠을 자는지 새벽예불을 올리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비구가 혼자 사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대부분 스님들이 나홀로 산다. 총무원장 스님도 마찬가지이다.
자승스님의 일상
보선스님은 “총무원 숙소에서 지내며 조계사에서 매일 새벽예불을..”라고 공약을 발표 하였다. 이는 명백히 현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겨냥한 것이다. 자승스님은 대중들과 공동체 생활도 하지 않고 새벽예불도 올리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자승스님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장주스님이 폭로한 16인의 도박승 명단에도 들어가 있는 자승스님에 대한 일상의 단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 국내에서 도박을 할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저녁 먹고 9시쯤 시작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밤을 샙니다. 작년 백양사 사건 보세요. 아침까지 도박을 하잖아요. 그런 식이죠. 보통 7, 8명, 많을 때는 10여 명이 모여서 합니다. 판에 못 끼는 사람은 대기조가 되죠. 누군가 올인이 되어서 나가면 채우는 식으로. 은정재단에서 도박을 할 때는 아예 6층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멈춰놓았어요.”
장주 스님은 도박장으로 쓰였다는 은정재단 내 서재의 구조를 자세히 설명했다.
“사무실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서재가 나옵니다. 오른쪽에는 책이 정리되어 있고, 차를 끓이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고, 안쪽으로 방이 하나 있는데, 그 옆에 자승 스님의 방이 따로 있어요. 방에는 침대와 금고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서 도박을 할 때면 자승 스님은 금고를 열어 놔요.”
▼ 판돈 규모는.
“1인당 보통 1000만 원 정도는 가지고 하죠. 하다가 잃으면 자승 스님께 돈을 빌려서 하죠. 자승 스님은 자신의 침실 금고에서 돈을 꺼내 빌려줬어요. 한 판에 많게는 수백만 원씩 왔다갔다하죠. 1000만 원에서 5000만 원까지 빌려줍니다. 그래서 자승 스님에 대해서는 도박 혐의 외에도 도박장 개설, 도박자금 대여도 문제를 삼은 겁니다. 나도 여러 번 돈을 빌리고 갚았어요.”
( “상습도박, 도박장 개설, 판돈 대여…” “종회의원 금권선거 특혜주고 고발 무마” , 점입가경! 조계종 비리 폭로전, 신동아 2013-9월호)
장주스님이 폭로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자승스님의 토굴은 ‘은정문화재단(http://www.eunjung.or.kr/)’이다. 자승스님의 은사인 정대스님(30대 총무원장, 1999년-2003년)이 사재 50억원을 출연하여 만든 불교단체이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자승스님의 토굴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도박장’이라 한다. 토굴에 도박장을 마련해 놓고 도박에 중독된 스님들과 도박을 즐겼다는 것이다. 그것도 판돈인 1인당 천만원이고 많게는 오천만원이라 한다.
늦잠 자며 게으름을 피웠을 때
작년 승려도박사건이 일어 났을 때 조계종 호법부장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스님들이 치매 예방으로 심심풀이로 화투나 카드를 즐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 하였다. 총무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스님이 머리를 식힐 겸 ‘바카라’나 ‘블랙잭’과 같은 도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총무원장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한가한 자리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그대 새내기들은, 장로 수행승들이 떠났다고, 해가 뜰 때까지 이빨을 갈며 잠은 잔단 말인가?”
(착하고 건전함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7,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대부분 밤을 앉아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갓 입문한 새내기 수행승들은 장로들이 자리를 떳다고 하여 늦잠을 잤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무란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새내기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왕위를 부여받은 왕족의 왕이 원하는 대로 누워있는 즐거움, 쭉 뻗고 쉬는 즐거움, 잠자는 즐거움에 탐닉하여 종신토록 통치하면서도 백성의 사랑을 받고 호감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고나 들은 적이 있는가?”
(착하고 건전함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7, 전재성님역)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 정사를 보지 않고 게으름만 핀다면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다. 급기야는 쫒겨 날지 모른다. 그래서 편히 쉬지도 늦잠을 자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왕 뿐만 아니라 관리, 상속자, 장군, 촌장의 예를 들어 지도자가 취해야 할 바를 설명하였다.
스님이 밤샘도박을 한다면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수행자나 성직자가 원하는 대로 누워있는 즐거움, 쭉 뻗고 쉬는 즐거움, 잠자는 즐거움에 탐닉하여 감관의 문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않고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관철하지 않고 초야와 후야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는데 전념하지 않으면서도 번뇌를 부수고 번뇌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는 사실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는가?”
(착하고 건전함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7, 전재성님역)
수행자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의 수호에 달려 있다. 그래서 초야이든 후야이든 밤에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비구가 쉬는 즐거움, 잠자는 즐거움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맛있고 달콤한 식도락을 즐긴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결코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감각기관을 단속하여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밤새도록 도박을 하고 새벽예불도 올리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사는 출가자가 있다면 이를 비구라 볼 수 있을까? 또 불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원칙으로 하는 불교국가
자승스님의 토굴은 은정문화재단이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매우 호화로워 보인다. 엘리베이터가 있고 도박장이 있을 정도이면 고급아파트나 고급빌라 못지 않다. 그런 곳에서 홀로 산다면 심심할 것이다. 그래서 도박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홀로 스님은 다른 불교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한다.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란 박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 숫자는 적지만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상좌부 권 비구들은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빅슈 승단인 대만 베트남도 사원에서 공동체의 생활이 원칙이고, 중국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티베트불교도 사원에서 공동체 생활이 원칙이며 남인도에는 5천 명, 3천 명의 라마들이 한 사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 승가정신에서 너무 멀어져 가는 한국불교, 이차란 박사, 불교닷컴 2013-10-02)
스리랑카 등 테라와다 국가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고, 티벳불교 역시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 스님들만 나홀로 토굴을 생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자(pavarana)란 무엇인가?
부처님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금강경에서 표현 되어 있듯이 1250명의 비구들과 탁발을 하며 공동생활을 하였다. 부처님이라고 하여 별도로 멀리 떨어져 지내지 않았다. 더구나 자자와 포살을 하여 계율준수를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자자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자 수행승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마음 편히 말하라.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
(참회의 모임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8.7,전재성님역)
자자를 빠알리어로 빠와라나(pavarana)라 한다. 전재성님은 ‘참회’라 번역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빠라와나는 안거의 해제일인 보름날에 수행승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에 지은 죄를 고백학고 참회하고 비판을 하는 행사라 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솔선수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면 그 중에 한 제자가 일어나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볼 때 세존께서는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차례대로 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며 다시는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포살(uposatha)이란 무엇인가?
참회와 관련된 용어 중에 ‘포살 (uposatha)’이 있다. 비구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지나간 보름간의 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고백 참회하는 행사를 말한다. 매월 15일과 30일에 두 번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날 승단의 비구가 지켜야 할 규칙인 바라제목차(patimokkha, 계율)를 외우고 다짐한다.
나홀로 사는 자는 비구가 아니다
이와 같은 자자와 포살은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때 가능하다. 나홀로 사는 비구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율은 공동체 생활을 할 때만 지켜 질 수 있고, 비구계는 모두 공동체의 계율이다. 따라서 나홀로 토굴에 사는 자는 비구라 볼 수 없다. 자자도 없고 포살도 없기 때문에 계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켜야 할 계율도 없다. 그래서 나홀로 사는 자는 비구가 아닌 것이다.
자승스님은 홀로 살고 있다. 은정문화재단이라는 빌딩에서 혼자 산다. 그곳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장주스님의 폭로로 일부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은처의혹이 있으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홀로 살기에 모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보선스님은 공약에서 자신은 총무원 숙소에서 지내며 조계사에서 매일 새벽예불을 올리겠다고 하였다. 그런 보선스님은 이번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고대국가에서 왕권이란
흔히 중벼슬이 닯벼슬 보다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스님들은 한사코 높은 자리를 맡지 않으려 하였다. 심지어 주지소임도 맡지 않으려고 하였다.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승스님은 지난해 불출마 선언을 하였으나 이번에 뒤집었다. 망어죄를 지으면서 까지 총무원장이 된 것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조계종총무원장이라는 자리는 매력적인 자리임에 틀림 없다. 돈과 명예와 권력 이렇게 삼박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권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고대 왕조의 왕권만 못할 것이다. 그런 왕권은 얼마나 대단한 권력일까?
고대국가에 있어서 한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권력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거의 무한대의 권력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의 뜻대로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대로 된다면 자신의 것이다. 왕이 명령을 내려 움직인다면 그 나라는 왕의 것이 된다. 그래서 왕과 국가는 동일시 된다.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왕권
초기경전에 따르면 왕권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오십 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하루 밤낮이고, 그러한 서른 밤이 한달이고, 그러한 열두 달이 일년이고, 그러한 일년의 오백년이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의 수명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여자나 남자가 여덞 가지 고리를 갖춘 포살을 준수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네 위대한 왕의 하늘나라 신들 사이에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인간의 왕권은 천상의 행복에 비해 보잘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2,전재성님역)
왕권을 가진 왕도 오십년이 한계이다. 아마도 고대인도에서 오십년을 기대수명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왕권은 하늘나라에서 태어나는 존재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도 안된다. 인간 바로 위에 있다는 사대왕천의 하루가 인간의 오십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왕이 누리는 행복은 천상의 행복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권은 천상의 행복과 비교하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왕권을 최상의 행복으로 여긴다. 그러나 왕의 행복 보다 더 수승한 행복이 있다. 그것은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왕권의 행복은 여덟 가지 계율을 지켜서 얻는 행복과 비교하여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계율을 지켜 천상에 태어나면 왕권이 부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임에랴!
방황의 끝은 어디인가?
옛말에 등따습고 배부르면 음심만 치성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님이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더구나 개인수행이라는 명목으로 토굴에서 나홀로 수행을 한다면 게을러 질 것이다. 또 누가 옆에서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슨일을 하는지도 알 수 없다. 처자식을 숨겨 놓았는지 밤샘도박을 하는지 야동을 보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주머니에 돈도 넉넉하게 있다면 공부할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가 부와 권력을 누렸을 때 그 끝은 어디일까? 이에 대하여 원담스님은 자신의 카페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부처님 당시 최고로 번성했던 부유한 도시 바라나시에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부와 권력이 허락하는 모든 혜택을 다 누리면서 안락하고 유쾌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날 재벌2세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식주를 위해서 노동할 필요가 없는 그는 24시간이 온통 여가 시간이다. 게다가 모든 종류의 쾌락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을 다 가지고 있다. 눈과 귀를 기쁘게 하고, 코와 입을 즐겁게 하며, 미인의 감촉과 감미로운 감정과 향락적인 상상을 다 만족시킬 수 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살고, 한 평생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부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아닌가?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대중은 가진 자들은 아마도 모두 그렇게 살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삶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에게도 고통은 있다. 쾌락이 보장된 삶에 권태라는 것이 끼어든다. 한 때 즐거움을 주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해진다. 쾌락의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것이다.
경탄할 만한 경치도 자꾸 보면 그냥 배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영혼을 울리는 음악도 오래 들으면 청각을 무디게 만든다. 뇌쇄적인 미인의 섹시미도 자주 보면 시들해지고, 입맛은 까다로워지고, 취향은 세련되어진다. 만족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호사와 사치와 모든 유흥과 향락이 권태로워진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전위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해본다. 변태성 섹스에 마약까지도. 과도한 쾌락은 심신을 소진시키고, 권태는 정열을 식게 만든다. 삶은 무의미해지고 무력감에 빠진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누리고 소비하고 즐기는 식으로 살아왔으니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젠 누리고 즐기는 일조차 심드렁해졌다. 남아나는 게 시간이라, 눈을 뜨면 ‘오늘은 뭐하고 지내지, 뭐 재미난 일 없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뭐 한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 방황의 끝은 어디인가?|, 원담스님)
부처님의 제자 ‘야사’를 모델로 한 이야기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들어 맞는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졌을 때 가치관이 없다면 결국 타락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스님들이 쉽게 도박에 빠지는 모양이다.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는 행복
나홀로사는 스님을 더 이상 비구라 볼 수 없다. 비구는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계율을 지켜가는 자를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율을 지켜서 얻는 행복은 왕권 보다 더 빛나는 것이라 하였다. 더구나 계율을 지켜 천상에 태어났을 때 왕권과 비할바가 아니라고 하였다.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계율에 대하여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세존]
1.
Pāṇaṃ na hāne na ca dinnamādiye
Musā na bhāse na ca majjapo siyā
Abrahmacariyā virameyya methunā
Rattiṃ na bhuñjeyya vikālabhojanaṃ.
“생명을 죽이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말고
거짓말을 하지 말고 취기 있는 것을 마시지 말고
순결하지 못한 것을 삼가고 성적 교섭을 금하라.
그리고 밤에 때 아닌 때에 식사하지 말라.
2.
Mālaṃ na dhāre na ca gandhamācare
Mañce chamāyaṃ ca sayetha santhate
Etaṃ hi aṭṭhaṅgikamāhu posathaṃ
Buddhena dukkhantagunā pakāsitaṃ.
화환과 향수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고
낮은 침대, 바닥에 누워야 하리.
이것이 포살일에 지켜야 하는 계행이네.
괴로움을 종식시킨 부처님이 설하신 것.
3.
Cando ca suriyo ca ubho sudassanā
Obhāsayaṃ anupariyanti yāvatā,
Tamonudā te pana antalikkhagā
Nabhe pabhāsenti disāvirocanā.
태양과 달이 모두 밝게 비추고
그 궤도를 따라 멀리 비추네.
어둠을 몰아내고 허공을 달리며
모든 방향으로 비추며 하늘에서 빛나네.
4.
Etasmiṃ yaṃ vijjati antare dhanaṃ
Muttā maṇi veḷuriyañca bhaddakaṃ
Siṅgīsuvaṇṇaṃ athavāpi kañcanaṃ
Yaṃ jātarūpaṃ haṭakanti vuccati
그 빛나는 지역의 모든 재보
진주와 보석과 황금과 청금석과
쇠뿔모양의 황금과 광산의 황금과
황색의 황금과 황금티끌이 있어도
5.
Aṭṭhaṅgupetassa uposathassa
Kalampi te nānubhavanti soḷasiṃ
Candappabhā tāragaṇā ca sabbe.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포살을 지키는 것에 비하면
이들은 십육분의 일의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리.
마치 달이 허공에 비추면
별들의 무리들이 빛을 잃어버리듯.
6.
Tasmāhi nārī ca naro ca sīlavā
Aṭṭhaṅgupetaṃ upavassuposathaṃ
Puññāni katvāna sukhudāyāni
Aninditā saggamupenti ṭhānanti.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계행을 지키며 여덟 가지 덕목을 갖춘 님은
지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에 이르네.
(여덟 고리의 포살에 대한 상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2,전재성님역)
2013-10-11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불교는 2009년 이전과 이후로, 한국테라와다불교 창립과 진정한 승가 (0) | 2013.10.18 |
---|---|
아내가 지아비를 경멸하는 사회, 모성본능과 팔경법(八敬法) (0) | 2013.10.13 |
“나는 똥을 먹고 똥으로 배를 채우고…(S17.5)”자승스님 당선과 승가전체 타락 (0) | 2013.10.10 |
M이론과 초기불교 (0) | 2013.10.09 |
2013 안양시민축제를 보고 (0) | 2013.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