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지아비를 경멸하는 사회, 모성본능과 팔경법(八敬法)
여성상위 시대에서
실크로드여행지에서 본 것이 있다. 모두 26명으로 이루어진 여행팀에 노부부가 있었다. 전직 외교관출신 부부로서 남자는 80대 초반이고 여자는 70대 중반이었다.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하다 은퇴하여 세계 각국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그런데 노부부 모습이 너무 보기에 좋았다. 식사할 때마다 부인이 남편을 깍듯이 챙겨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에서도 일거수 일투족을 챙겨 주었다. 그렇다고 남자가 권위적이지 않다. 점잖은 선비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가 챙겨주는 모습이 보기에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과도한 것이었다. 남편에게 “대디, 이것 좀 먹어 보세요” 하며 반찬을 챙겨 주는가 하면 옷매주새를 만져 주는 등 이런 말 저런 말을 해주는 것이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챙겨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뒤에서 ‘흉’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흉은 찬사로 바뀌었다.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 그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하였던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남녀평등시대를 넘어 이제 여성상위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권이 득세한 시대에 보기 드문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남녀평등의 바람이 거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남녀 평등이 이루어지고 있고 어느 분야에서는 ‘역전현상’도 나타난다. 그래서 남녀평등을 넘어 이제 ‘여성상위시대’가 도래 한 것이 다. 이런 현상은 남성의 불평으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남녀평등을 넘어 여성상위시대가 되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까?
여성의 모성본능을 억제하기 위하여
최근 인터넷에서 묘원법사의 음성강의를 들었다.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문제가 일시에 해소 되는 듯 했다. 그것은 ‘팔경법’에 대한 것이다. 고따미경(A8.51)에 따르면 ‘백세먹은 비구니일지라도 이제 갓 비구가 된 새내기에는 공경해야 한다’는 법이 있다. 이는 명백히 불평등한 법이다. 현대식으로 따졌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 부처님은 왜 이런 법을 만들어야 했을까? 이에 대햐여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를 들면 비구니가 비구한테 절을 하도록 한 것도 비구니는 모든 사람들을 내자식이라고 보는 모성본능 때문에, 부처님이 그런 모성 본능에 본질적 문제를 없애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본능적인 것을 제거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게 절을 하라고 그런 거에요. 특별히 비구가 우월적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얻는 방편들이에요.
(묘원법사,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50회 지금은 수행시대:아플 때의 수행,말,순수 위빠사나,느낌과 화살, 2013.09.27)
anuradhapura
묘원법사에 따르면 백세된 비구니가 이제 방금 구족계를 받은 비구에게 공경을 표하라는 것은 ‘여성의 모성본능을 억제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본다고 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여성의 뱃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여성들은 은연중에 “이 새상의 모든 사람들은 내자식이다.”라는 우월적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 한 깨달음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구에게 공경하라는 의미에서 팔경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갈리는 이유는?
묘원법사에 따르면 팔경법이 나온 것에 대하여 여성과 남성의 성의 차이로 보고 있다. 같은 인간이긴 하지만 여자와 남자라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똑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남자와 여자로 갈리는 것은 한마디로 ‘집착’때문이라 한다. 여자가 남자도 보다 집착이 더 있기 때문에 집착이 강한 자가 여자로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과연 이런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를 ‘모성본능적’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긍할 만하다.
영웅호걸도 왕도 여인의 뱃속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태어난다.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진 자도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은 자가 없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Itthī pi hi ekacciyā seyyā posa janādhipa,
Medhāvinī sīlavatī sassudevā patibbatā.
Tassā yo jāyatī poso sūro hoti disampati,
Tādisā subhagiyā putto rajjampi anusāsatīti.
[세존]
“백성의 왕이여, 여인이라도
어떤 이는 실로 남자보다 훌륭하니
총명하고 계행을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네.
그런 여인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니
그러한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야말로
왕국을 지배할 수 있네.”
(Dhītusutta-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16,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백성의 왕은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을 말한다. 빠세나디왕의 왕비인 말리까 부인이 출산실에서 아이를 낳고 시중을 받을 때에 대한 게송이라 한다.
게송에서 부처님은 여인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인은 기본적으로 남자 못지 않게 평등한 존재이고, 어떤 여인은 남자 보다 더 뛰어나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자들이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출산’이다. 그래서 세상을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한나라의 지배자의 왕도 모두 여인의 뱃속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이 여인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그리고 여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모성’을 가지고 있다.
여성의 모성은 한편으로 교만과 자만과 아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모두 여성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평등한 세상에서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모성으로 인하여 자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백세된 비구니일지라도 이제 갓 구족계를 받은 새내기 비구에게는 공경해야 한다.”라는 팔경법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묘원법사는 설명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이 주요한 요인이라고
묘원법사의 해석은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경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집착이 강하여 여성으로 태어났고, 집착이 강한 것은 모성본능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은 초기 경전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런 모성본능으로 인한 자만심을 억누르기 위하여 백세된 비구니일지라도 이제 갓 비구가 된 자에게 공경하라는 말 또한 초기불교경전에서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학자나 스님들은 팔경법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현대불교에 따르면 마성스님은 한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1발제에 나선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마성 스님은 ‘팔경법 제정의 역사적 배경과 현대적 이해’를 발표했다. 스님은 팔경법은 붓다가 직접 제정했을 가능성이 높고, 여성 출가를 허용하기 어려운 당시 상황에서 고안된 방편이라고 강조했다.
마성 스님은 “붓다에 의해 비구니 승가가 성립된 것이 사실이라면 팔경법도 붓다가 직접 제정했을 것이다. 비구니 팔경법이 제정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인도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고찰해야 한다”고 밝혔다.
스님은 붓다가 여성 출가를 망설인 이유를 바라문들의 반대와 승단 내부의 보수적 비구니들의 반대에서 찾았다. 특히 여성의 지위가 매우 낮았던 당시 인도에서도 여성 출가를 허락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승단 내부에서도 바라문 출신의 보수적 비구들은 여인의 승가 합류를 원치 않았다.
마성 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에게 팔경법을 제시하고 이를 준수하겠다는 서약을 받음으로써 승단 내외의 저항을 무마시켰다. 붓다는 결코 여성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팔경법은 당시 비구니승단을 설립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장치였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시간이 경과하면서 보수적 비구들에 의해 팔경법 내용 일부가 수정됐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런 이유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논리라면 부처님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승경전이나 대승계경 모두 폐기 대상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지금 당장 팔경법을 페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팔경법은 비구니계의 바일제법에 명시돼 있으며 이부승(二部僧) 제도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승가에서 이부승 제도가 유지되는 한 팔경법은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 다시 불붙은 비구니 팔경법 여성 차별 논란, 현대불교 2011-11-12)
팔경법은 항상 뜨거운 이슈인 것 같다. 남녀평등의 현대사회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성스님에 따르면 팔경법이 나오게 된 것은 부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주요한 요인이라 한다.
지금처럼 남녀차별이 금지 되어 있지 않은 봉건시대에 있어서 여자에게 출가를 허락하였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때 당시 제도와 관습을 수용하면서도 여성에게도 출가기회를 주기 위한 방편이 아마도 팔경법이 아니었을까 하고 보는 것이다.
마성스님에 따르면 팔경법은 현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한다. 그래서 폐기의 대상이 아니라 한다. 하지만 남녀평등의 시대에 있어서 왜 팔경법이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완은 필요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팔경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법은 그대로 놓아 두되 별도의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자는 것이다.
여성들은 시대착오적인 법이라고
토론에 참석한 여성학자는 팔경법이 명백한 여성차별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강대 종교연구소의 조승미 연구원은 “팔경법 제정 당시의 시대 상황이 끝난 지금에까지 출세간적 위상을 가지면서 견지돼야 할 명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한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하며, 종교가 일반사회 인식을 가로막는 성역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비구니인 해주스님 역시 “스님들이 강원에서 배우는 대승불교와 팔경법은 상충하지 않는가? 한국 비구니의 발전을 저해하는 것 중 하나가 팔경법이 아닌가 생각 한다”고 하여 팔경법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로 보았을 때 남성들은 부처님이 팔경법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보고 그대로 유지하여야 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여성들은 시대착오적인 법이기 때문에 폐지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업(口業)을 짓고만 글쓰기
팔경법과 관련하여 몇 편의 글을 올렸다. 주로 남녀평등에 위배 되는 ‘악법’으로 보았다. 이는 대승경전인 대애도비구니경을 보고 작성하였기 때문이다. 대애도비구니경에도 팔경법이 언급되어 있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여성비하’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여성은 깨달을 수도 성불할 수도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대애도비구니경을 읽고서 남녀평등시대에 도저히 있을 수 없고 부처님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을 것이라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앙굿따라니까야에 팔경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따미의 경(A8.51)’이 그것이다. 고따미의 경에는 “수행녀는 구족계를 받은 지 백년이 되어도 방금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응대해야 한다. 이 원리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어기지 않도록 공경하고, 존중하고, 숭앙하고, 존숭해야 한다.(A8.51)”라고 분명히 명기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팔경법을 대하고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이제까지 글쓴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경을 참고 하지 않고 추측으로 글을 쓴 것이 결국 ‘구업’을 짓고 만 것이다. 경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적인 견해로 글을 쓴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훼손하는 커다란 ‘구업’임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그러던 차에 묘원법사의 법문을 듣고 팔경법이 나오게 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남자와 여자의 성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를 수밖에 없음에 따라 팔경계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당시 제도와 관습과 인습에 따른 시대적 배경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나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래서 묘원법사는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에 대하여 집착으로 보고, 결국 집착이 더 강한자가 여자로 태어난 요인으로 보았는데, 이런 집착은 결국 여성의 모성본능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모성본능이 있는 여성이 남성비구와 동등한 관계로 설정해 놓았을때, 여성의 모성본능으로 인하여 “여인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니 그러한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야말로 왕국을 지배할 수 있네.(S3.16)”라는 게송에서와 같이 여성의 자만심을 경계하기 위하여 백세된 비구니일지라도 이제 갓 비구가 된 자에게 공경해야 한다는 팔경계법이 나온 배경으로 본 것이다.
집착으로 이루어진 존재
여성은 모성본능으로 인하여 남성보다 집착이 더 강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똑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집착이 더 강함으로 인하여 여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집착은 어떤 것일까?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Upadhinidhānā pabhavanti dukkhā
Yekeci lokasmiṃ anakarūpā,
Yo ve avadvā upadhiṃ karoti.
Punappunaṃ dukkhamupeti mando,
Tasmā pajānaṃ upadhiṃ na kayirā
Dukkhassa jātippabhavānupassi'ti.
[세존]
세상에서 갖가지 형태를 지닌 어떠한
괴로움이라도 집착을 원인으로 생겨난다.
참으로 알지 못하고 집착을 만들어내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생성과 발생을
분명히 알아 집착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Dvayatānupassanā sutta-두 가지 관찰의 경, 숫따니빠따 Sn3.12, 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집착’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집착은 빠알리어로 ‘우빠디(Upadhi)’이다. 각주에 따르면 우빠디는 ‘윤회의 토대로서 번뇌를 수반하는 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갈애가 더욱 더 강화된 것이 집착이다. 그래서 집착이 발생되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단단하게 들러 붙어서 아무리 잡아 떼려고 하여도 떨어지지 않는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라고 설명 되어 있듯이 집착은 ‘업으로서 존재(업유)’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세세생생윤회하게 된다.
이처럼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것이 집착이다. 그런 집착에 대한 빠알리어가 우빠디인데, 이는 십이연기에 있어서 ‘우빠다나(집착)’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집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우리들이다.
우리들이라 불리우는 나는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오온은 바로 집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집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온의 집착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오온에 집착된 나에 대하여 부처님은 현재의 나에 대하여 ‘빤쭈빠다낙칸다(pañcupādānakkhandhā)’라 하였다. 이는 다섯가지(pañca) 존재의 다발(khandhā)에 집착(upādāna)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오취온’이라 한다.
존재의 다발(오온)의 연속이 윤회이다
오온에 집착되어 있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의식이라 한다. 이렇게 ‘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Jātimaraṇasaṃsāraṃ ye vajanti punappunaṃ,
Itthabhāvaññathābhāvaṃ avijjāyeva sā gati.
[세존]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거듭하여
나가며 나고 죽는 윤회를 받는다면
그 근본원인은 무명에 있다.
(Dvayatānupassanā sutta-두 가지 관찰의 경, 숫따니빠따 Sn3.12, 전재성님역)
우빠디(집착)는 ‘윤회의 토대가 되는 업’이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의 땔감’이다. 윤회의 땔감이 발생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기인한다. 이와 같은 탐진치가 쌓이면 쌓일수록 윤회의 땔감은 풍부해진다. 그래서 세세생생 존재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된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거듭하여 나가며 나고 죽는 윤회”라 하였다. 이는 Jātimaraṇasaṃsāraṃ에 대한 번역이다.
Jātimaraṇasaṃsāraṃ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존재의 다발의 생성이 태어남이고, 존재의 다발의 파괴가 죽음이고, 존재의 다발의 연속이 윤회이다.(Prj.II.504)”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온이 윤회하는 것이다. 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오취온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빠디에 대하여 윤회의 토대 또는 윤회의 땔감이라 한다.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악마(마라)
그런 우빠디가 여성에게 좀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더 강한 요인은 여성의 ‘모성본능’때문이라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여성의 뱃속에서 태어났다거나 자궁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자만이 생겨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에 여성본능을 자극하는 게송이 있다.
[빠삐만]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따미]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
(고따미경-Gotamīsutta-고따미의 경, 상윳따니까야 S5:3,전재성님역)
여기서 고따미는 부처님의 양어머니가 아니다. 아들이 죽자 비구니가 된 수행녀 고따미를 말한다. 수행녀 고따미의 이야기는 법구경 게송 114번 인연담에서도 볼 수 있다.
자식을 잃은 고따미는 수행녀가 되었다. 그래서 숲에서 살고 있는데 악마가 접근하며 남자(purisa)를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 본다. 이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왕이라고 볼 수 있는 악마가 성적인 유혹을 하는 장면이다. 악마는 고따미에게 접근하여 어린 아이를 잃었다는 것을 상기시기면서 어린 아이를 낳으라는 모성적 본능을 일깨운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유혹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어린 아이에 대한 여성적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수행녀 고따미는 인간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러운 모든 것이 덧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들이나 남자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또한 남자 역시 지나간 일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행녀 고따미는 모성을 자극하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부처님은 고따미의 출가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팔경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팔경법은 반드시 비구니와 비구의 관계에 대해서만 적용가능한 것일까? 세간에서도 적용가능한 것은 아닐까?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
법구경을 보면 26번째품에 ‘바라문의 품(Brāhmaṇavagga)’이 있다. 바라문의 품에 실려 있는 게송을 보면 마지막 구절에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라는 문구를 많이 보게 된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기득권 종교인 바라문교를 비판하였는데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니 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
법구경의 바라문의 품에 등장하는 바라문은 찬탄의 대상이다. 그런 바라문은 ‘아라한’과 동격이다. 하지만 법구경에서는 왜 바라문이 아라한과 동격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가장 고층경전으로 알려진 숫따니빠따에는 바라문을 아라한과 동격으로 취급하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이 그것이다.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을 보면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가 얼마나 타락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바라문들에 실망한 아주 큰 부호 바라문들이 부처님에 “고따마시여, 대체 현재의 바라문들은 옛날 바라문들이 행해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가고 있다고 보십니까? (Sn2.7)”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지금의 바라문들은 예전 바라문들이 행하던 바라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Sn2.7)”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당시 바라문들의 타락이 극에 달했음을 말한다. 이는 이어지는 부처님의 설명에서 자세하게 드러난다.
예전의 바라문들은 ‘청정한 삶(brahmavihara, 梵行)’을 살았는데 현재 바라문들은 대규모 ‘동물희생제’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예전의 바라문들은 ‘인생 4주기’에 따라 ‘청정한 삶’을 이상으로 여겼으나, 현재의 바라문들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 변질되었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은 출생에 기초하여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는 자라기 보다 부처님이 말하는 바라문이란 ‘청정범행’을 닦는 청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그 근원적 의미에서 ‘거룩한 자’라 해석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정한 바라문은 ‘아라한’이라고 다시 정의 하였다. 그래서 법구경 바라문의 품에서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고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을 보면 타락한 바라문의 삶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대규모 동물희생제를 치루고 그에 따른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바라문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 바라문이다. 그러나 예전의 바라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정범행을 닦는 바라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질되어 옛날부터 내려오던 풍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Evaṃ dhamme viyāpanne
vihinnā suddavessikā
Puthu vihinnā khattiyā
patiṃ bhariya avamaññatha.
[세존]
이렇게 해서 법이 무너질 때,
노예와 평민이 나누어지고,
여러 갈래로 왕족이 분열하고,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Brāhmaṇadhammikasutta-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2.7, 전재성님역)
청정범행으로 상징되는 옛날 바라문의 법이 무너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것이다. 그 중에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patiṃ bhariya 'vamaññatha)”라는 구절이 있다.
Pati가 ‘Master, owner, lord, chief, ruler; husband’의 뜻으로 지아비라 하였고, bhariya는 ‘[f.] the wife’로서 아내를 말한다. Avam은 downward의 뜻으로 ‘경멸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법이 무너질 때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고 분열함과 동시에 아내는 남편을 무시하고 경멸하게 됨을 말한다. 이런 점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삼식이와 영식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규범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없고 남편과 여편의 구별도 모호하다고 한다. 이는 전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의 도입으로 인한 혼란으로 본다. 그래서 이곳 저곳에서 평등을 주장하고 남녀평등도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여성이 득세하고 남성이 주눅드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런 불평등은 더욱 더 심화 되어 늙고 힘없고 경제능력이 없는 남편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정년 퇴임한 남자에게 ‘영식’이가 되라고 말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루 세끼 밥을 요구하는 배짱 좋은 ‘삼식’이는 이제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발끈할 내용
한국사회는 일제36년을 거치면서 단절이 있었다.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가치관이 있었음에도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모두 폐기한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유교적 덕목이다.
유교에 따르면 ‘삼강오륜’이다. 유교에서 기본이 되는 도덕지침이다. 즉,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삼강(三綱)
군위신강(君爲臣綱):(임금과 신하사이의 도리)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것이 근본이요.
부위자강(父爲子綱):(어버이와 자식사이의 도리)
아들은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
부위부강(夫爲婦綱):(남편과 아내사이의 도리)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
오륜(五倫)
父子有親(부자유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夫婦有別(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朋友有信(붕우유신): 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출처: 위키백과 삼강오륜)
요즘 시대에 삼강오륜을 들먹인다면 아마도 시대착오적이라 볼 것이다. 평등에 시대에 맞지 않을 뿐더러 현대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치관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유교가 망국의 종교로 알려졌기 때문에 삼강오륜을 거론 하는 것 자체를 불쾌하기 여기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삼강오륜이 반드시 폐기 되어야 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일부는 수용가능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부부와 관계에 대한 것이 그렇다. 부위부강에서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라 하였는데, 이를 요즘 거론 한다면 페미니스트들은 ‘발끈’ 할 것이다. 남녀평등시대에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여자만이 겪는 특수한 다섯 가지 고통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편과 아내의 도리는 있는 것이라 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똑같지 않기 때문에 성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자만이 겪는 특수한 다섯가지 고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여인들은 나이가 어릴 때에 시집가서 친족과 떨어져 지낸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여인들은 월경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여인들은 임신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여인들은 분만을 한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여인들은 남자에게 봉사를 한다.
(특수한 고통의 경, 상윳따니까야 S37.3, 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 여인상윳따(S37)에 있는 경이다. 다섯 가지를 보면 현대와 맞지 않는 것도 있다. 특히 “세상의 여인들은 남자에게 봉사를 한다.”라는 대목이다. 이 구절을 보면 마치 유교의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요.(夫爲婦綱)”을 대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오래된 것이라 하여 지금 시대와 맞지 않는다 하여 쓸모 없는 것일까?
어떻게 회의론자가 되는가
초기경전에 쓰여 있는 부처님의 말씀은 불자들에게 있어서 받아 들여야 하는 가르침이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별적으로 받아 들인다면 ‘회의론자’가 될 것이더.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지 내세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았다.”라는 논리로 자신의 입맛에만 맞는 경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윤회, 내생, 업고, 신통, 천신 등이 등장한다고 하여 모두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이라는 잣대와 과학적 검증이라는 잣대로 경전을 재단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녀 차별이 있는 경에 대하여 현대의 남녀평등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그렇게 말한 것은 그렇게 말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이를 그 시대의 상황으로 돌릴수도 있으나 부처님은 항상 보편적인 가르침을 펼치셨기 때문에 신심있는 불자라면 빠알리니까야에 쓰여 있는 내용을 수용할 수 있다.
설령 수용하기 곤란하면 잠시 ‘유보’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이나 지식이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 쓰여 있는 내용은 부정하기 보다 확신이 들지 않으면 잠시 유보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의 깜냥으로 선별수용하려 든다면 법에 대한 회의론자가 될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경멸하는 사회는
부처님은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여인들은 남자에게 봉사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여인들이 겪는 다섯 가지 고통에 속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Sn2.7)”라고 말한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남편을 경멸하는 사회는 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전래 되어 왔던 가치관이나 덕목이 완전히 파괴 되어 단절되었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당시 제관으로 전락한 바라문의 타락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세상은 불행하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남녀의 차이가 있음에도 똑같이 평등함을 주장하였을 때 “아내는 지아비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Sn2.7)”라는 말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리고 갈수록 심화 될 것이다.
이렇게 아내가 남편을 경멸하는 집안은 행복할리가 없다. 모두 불행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부처님이 고따미경에서 팔경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양성평등사회에서
팔경법은 승가에서 적용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하여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거나 시대착오적인 법으로 본다는 것은 경솔하다. 부처님이 그런 법을 만들어 놓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팔경법이 나온 배경으로 그때 당시 제도와 관습과 인습의 탓일수도 있지만 여성의 모성본능에 따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여성은 남자 보다 집착이 더 강해서 여자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런 집착의 바탕에는 모성본능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세상의 영웅호걸도 모두 여인의 뱃속에서 생겨나 자궁으로 낳았다는 우월의식이 바탕에 은연중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집착과 자만이 있는한 깨달음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위한 방편으로 “백년된 비구니일지라도 이제 갓 구족계를 받은 새내기에게 공경하라”라는 팔경법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설령 이런 이야기가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경전상에서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팔경법을 세속으로 확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한 양성평등사회가 실현된 마당에 은연중에 깔려 있는 모성본능이 발휘된다면 “아내가 지아비를 경멸하는”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도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라 하였고, 유교에서도 “세상의 여인들은 남자에게 봉사를 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은연중에 깔려 있는 모성본능을 억압함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착오적일까?
2013-10-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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