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슬픈 고교시절 미션스쿨에서 삼년
“최선을 다한 당신께 부처님의 가피가~~~”
산길을 올라 가다 플레카드를 보았다. 기도에 대한 것이다. ‘대입, 고입, 취업시험 합격발원 100일 기도’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상단에 ‘최선을 다한 당신께 부처님의 가피가~~~’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문구이다. 절 대웅전 앞에 큰 글씨로 쓰여 있는 플레카드를 보면 대부분 합격발원에 대한 것이 많다. 특히 수능을 앞두고 100일 기도와 같은 문구가 눈에 띈다.
불자들에게 있어서 기도라는 말은 익숙할까? 기도라는 말이 유일신 종교에서나 사용되는 줄 알았는데 불교에서도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깜짝놀랐다. 2004년 정식의 불교에 입문하고 본 것 중의 하나가 기도이다. 합격발원 기도, 100일 기도 등 갖가지 명칭의 기도가 있었고, 심지어 관음재일, 지장재일 등 재일과 관련된 것도 기도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항상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한다.
학교인지 교회인지
이제까지 한 번도 기도해 본적이 없다. 기도는 유일신교도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다닐 때 경험 때문이다.
배정받은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가 세웠다는 학교이다. 그 때 당시 백년 전통에 가까운 학교이었다. 그래서 학교분위기는 기독교일색이었다. 마치 학교인지 교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예배와 찬송으로 넘쳐 났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방송예배,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성경시간,월 1회 실시 되는 전학년 운동장 예배, 그리고 일년에 한번은 3일간 수업을 전폐하고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집중수련 등 그 학교에서는 기도와 찬송이 끊이지 않았다.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은 댓가
기독교는 생리에 맞지 않았다. 어떤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매달리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상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믿겨야 믿는데 믿기지 않으니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대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믿는 다는 것은 무당이 ‘몸주신’의 조정을 받는 것처럼 여겨 졌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받아 들이는 순간 그 하나님이라는 대상에 평생 끌려 다닐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끝내 받아 들이지 않았다.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은 댓가는 매우 컸다. 가장 민감한 청소년 시기 3년간을 우울하게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입학한 일학년 때가 가장 심하였다. 너무나 다른 환경에 들어 와 있다 보니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모두다 찬송가를 따라 부를 때 소리 내서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과 같았다.
찬송가를 부를 때
찬송가를 부를 때 입을 다물고 있지는 않았다. 모두다 노래를 부르는데 나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반항하는 것으로 비추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입은 벌리되 소리는 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주변의 시선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거의 매일 예배와 찬송이 이루어지는 미션스클에서 거짓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척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 세월을 3년간 보냈다.
고교 3년은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기간이었다. 기독교는 정서에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시간에는 늘 마음속으로 저항하였다. 교목이 하나님 운운하며 열심히 설교하지만 마음속으로 늘 부정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특별 초청된 강사 목사가 대뜸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을 부정하는 학생이 있어요!”라고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 소리를 듣자 가슴이 뜨끔 하였다. 마치 나를 두고 한말처럼 여겨 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뺑뺑이’로 배정되다 보니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때 당시 추첨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 갔다. 그런데 ‘뺑뺑이’를 돌려서 배정되다 보니 기독교와 전혀 정서가 맞지 않는 미션스쿨에 가게 되었다. 그래서 고난의 3년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입학한 첫 해 성적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것도 최하위권 이었다. 기독교에 대한 반항심으로 늘 우울하게 보내다 보니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일학년 때이다. 언젠가 담임선생님이 얼굴을 보더니 대뜸 “너, 실연당했니?”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치 넋이 나간 듯 항상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본다. 이렇게 종교문제로 인하여 학교에 적응 하지 못한 결과 성적은 아래로 곤두박질 치게 되었다. 60명 중에 오십몇 등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것일까? 학교공부는 뒷전이었고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기독교 학교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생각으로만 그쳤다.
그러나 2학년이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소위 똘반이라 불리우는 열반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확 들었다. 대학입시가 현실로 다가 온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방황하면 나만 손해 일 것 같았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입시준비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2년간은 입시 준비로 마음을 돌렸지만 끝내 기독교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미션스쿨 3년 동안 기독교를 받아 들였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고교 3년이 남들처럼 즐거웠을 것이다. 예배와 찬송으로 인하여 은혜와 은총을 듬뿍 받아 청소년기를 잘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받아 들이지 않음에 따라 대가는 컸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것이다.
만일 남들처럼 하나님을 받아 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하나님이라는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늘 죄지은 것처럼 살아 갔을 것이다. 일요일 교회에 가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고,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돈을 훔쳐 하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는 그런 삶을 말한다. 다행히도 끝까지 기독교를 받아 들이지 않음에 따라 ‘대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기독교를 거부한 이유
그렇다면 청소년기에 한 아이가 왜 이토록 처절하게 기독교를 거부 하였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뺑뺑이를 돌료 마구잡이로 배정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그래서 기독교와 정서가 맞지 않는 자는 거의 매일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분위기에 적응 하기 힘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마치 큰 죄나 짓는 것처럼 말하는 학교분위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마치 벌 받을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학교 분위기가 정서적으로 맞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받아 들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마음속에 이미 불교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절에 간적이 없지만 불교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은 ‘불교교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
불교중학교 역시 뺑뺑이로 들어갔다. 추첨으로 배정받은 곳이 ‘동대부중’이었다. 그때 당시 종로5가 가까이에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이교도의 높은 빌딩이 들어차 있다.
동대부중은 동국대학교 소속이다. 그래서 불교적인 분위기가 지배한다. 그렇다고 하여 미션스쿨 처럼 거의 매일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분위기는 아니다. 고작 일주일 한 번 있는 불교시간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강하게 불교영향을 받았다. 마치 깨끗한 천에 물감을 드리듯이 아무런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렇게 불교를 아무 저항없이 받아 들인 이유는 이전에 다른 신앙이 없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처음 깨닫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Apārutā tesaṃ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ṃ, S6.1)”라 하였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을 내려 놓아야만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청소년 포교의 중요성이다. 마치 백지와 같은 상태의 청소년에게 가르침을 전하였을 때 가장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미 하나님을 받아 들인 자들은 곤란하다. 그들에게 불교진리를 말해 보았자 효과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때묻지 않은 변성기 이전에 불교를 접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불교시간의 교재가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접한 불교교재는 변성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에 그대로 물들었다.
불교교재는 요즘 불교 교재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부처님의 탄생에서부터 출가 등 부처님의 일대기가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불자가 되면 누구나 부처님의 일생부터 배운다. 부처님의 일생을 이해하여야 부처님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하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스님이 되고 싶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불교시간에 불교를 가르친 선생님을 ‘불교선생님’이라 불렀다. 그때 불교선생님이 현재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있는 ‘조용길교수님’이다. 그때 당시 조용길 선생님은 30세 전후의 미혼으로 보였다. 약간 곱슬머리에 이마가 넓고 얼굴은 희고 감관이 맑아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조용길선생님은 항상 온화한 얼굴이었다. 성내지 않고 서글서글한 눈매가 보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불교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어려운 불교교리에 대하여 칠판에 그림까지 그려 가며 설명하면 머리에 그대로 쏙쏙 들어 왔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흰 쥐와 검은 쥐에 대한 이야기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불설비유경에 있는 내용이다.
인터넷에서 조용길 선생님에 대해서 검색하여 보니, 선생님은 광덕스님을 도와 대불련 창립을 주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광덕스님과 함께 불광법회를 주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불교신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광덕스님과 함께 대각사에서 불광법회를 주도하며 신불교운동을 펼치시던 모습이다.
대각회법회
종단 행정을 접고 1970년대 중반부터 서울 대각사에서
불광운동을 펼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광덕스님 모습.
사진: 불교신문
사진에서 중앙이 광덕스님이고 앞줄 가운데
점퍼차림으로 마이크를 쥐고 합장하고 있는 분이 젊은 시절 조용길선생님이다.
불광법회에 20대 부터 참여한 법우님에 따르면 조용길선생님은 그때 당시 불광법회에서 사회를 보았었다고 한다. 중학교에서는 교법사로 있으면서 대외적으로 불광법회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불광법회는 오늘날 불광사로 발전하였다. 현재 불광사는 잠실에 있다.
이렇게 마치 부처님처럼 보이는 선생님이 불교 교리에 대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였을 때 불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스님이 되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교재에 실려 있는 고승열전을 보게 되었을 때 스님이 되고 싶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스님으로 일생을 사는 것이 가장 보람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스님으로 사는 것 외에 보통사람들이 살아 가는 모습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생각으로 그쳤다. 늘 아웃사이더 이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상상하였을 뿐 실행으로 옮기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한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이렇게 중학교에서 처음 접한 불교의 영향은 매우 컸다. 미션스쿨에 들어가서 3년 동안 마음속으로 고통을 받은 것도 중학교 3년 동안 불교의 영향 때문이다. 절에 다녀 본 적은 없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항상 불자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독교로부터 해방되자 더 이상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종교에대하여 ‘넌더리’가 났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다시 불교를 접하게 된 것은 9년전의 일이다. 나름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언젠가부터 제동이 걸리는 듯하였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까 하여 그 동안 잊고 지냈던 불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로 시간을 내어서 직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불교교양대학에 다닌 것이다. 강남에 있는 포교전문 사찰이다. 일주일에 두 번씩 저녁시간에 4개월 다녔다. 이렇게 다시 불교를 찾게 된 것은 풀리지 않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그런 문제 중에는 풀리는 것도 있고 풀리지 않는 것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나도 풀리지 않는 문제도 있다. 문제는 자신의 힘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에 봉착되었을 때이다. 그럴 경우 대부분 신을 찾는다.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서적으로도 맞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교시절 끔찍한 기억 때문에 처음부터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남은 것은 불교이다. 불교에 어떤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아! 그 분”
불교교양대학에서 조용길 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다. 불교교양대학에 다닐 때는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한꺼번에 수백명이 교육받는 마치 작은 운동장처럼 큰 법당의 끝 모서리에 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서 알아 보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조용길’이라는 이름을 들었어도 중학교 다닐 때 그 선생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때 당시 전혀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것은 강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양대학에서 조용길 교수는 아함경을 강의 하였다. 말이 강의이지 사실상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길 교수가 편찬 하였다는 두꺼운 ‘아함성전’을 4개월에 그것도 일주일에 한번 있는 1시간 강의로 소화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교수님은 그저 이러 저러 이야기로 때우는 식으로 강의 하였다. 그런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불만이었다. 진도는 나가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그분이 중학교 시절 존경하였던 불교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조용길 교수님을 다시 보게 된 것은 불교TV사이트를 통해서 이었다. 2006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 불교TV를 즐겨 보았는데, 어느 날 ‘생활속의 아함경’을 강의하는 교수님의 얼굴이 매우 낯익은 것이었다. 세월은 흘렀어도 이미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순간적으로 “아! 그 분”이라는 소리가 마음속으로 나왔다. 인터넷에서 본 그 교수님은 바로 중학교 시절 불교선생님이었고, 또 불교교양대학에서 강의 하던 바로 그 교수님이었던 것이다.
정식으로 불자가 되어
불교교양대학을 다님으로 인하여 정식으로 불자가 되었다. 연비와 함께 ‘대승보살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글자로 된 ‘법명’도 받았다. 이어서 경전반에 등록하여 금강경을 배웠다. 한문으로 된 얄팍한 책을 스님이 해설하는 형식이다. 그런데 함께 배우던 어떤 법우님으로부터 금강경을 외우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그 소리를 듣고 도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약 45일 걸쳐 금강경을 모두 외었다. 금강경을 외우면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복적 신앙이 작용한 것도 큰 요인이었다.
불교교양대학과 경전반을 다닌 일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래서 반야심경, 천수경, 법성게, 금강경을 모두 외웠다. 다 외운 다음에는 잊어 버리지 않기 외었다. 특히 금강경을 열심히 암송하였다. 그리고 늘 천수경과 금강경 테이프를 가까이 하였다. 그래서 집에서나 차에서나 틈만 나면 들었다. 그러나 끝까지 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도’이다.
끝까지 하지 않은 것 하나
기도는 불교에 있어서 비불교적 행위에 해당된다. 어떤 대상이 있어서 대상에게 바라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유일신 종교에서나 합당한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있어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바라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주시고, ~주시고,… 주옵서소!”라고 하여 끊임 없이 달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서 왜 기도가 유행할까? 아마도 기독교의 영향이라 본다. 기독교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기독교 따라 하기’를 하다 보니 기독교의 기도방식을 불교에 도입하여 각종 바라는 기도가 생긴 것이라 보는 것이다.
미션스쿨에서 기도하는 소리는 신물나게 들었다. 그런데 불교에서 각종 명목의 기도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웠다. 불교에 기도가 있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바라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기도하는 행위는 매우 비불교적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차이가 없다. 다만 기도의 대상만 다를 뿐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의 법문에서 부처님을 하나님으로 교체하면 기독교 목사가 하는 말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신의 힘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기도에 의지하는 것은 기독교 방식이다. 창조주가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주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어떤 이는 “이왕 만들어 놓을 거면 제대로 만들어 놓을 것이지…”라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들은 풀리지 않는 문제,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기도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기도하는 행위는 엄밀하게 말하면 신에게 모든 것을 떠 넘기는 것이다. 그런데 작고 소소한 문제까지 모조리 떠넘긴다. 그래서 유일신교도들의 기도에는 “~주시고, ~주시고,… 주옵서소!”하는 달라는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천도기도와 저주기도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기도가 무용지물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바라는 기도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처님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바라는 기도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 돌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커다란 돌이 호수에 빠져 있는데 기도한다고 돌이 떠 오를 수 있을까?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계도 지키지 않고 중죄를 지어 죽은 자를 위하여 후손들이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천도기도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들이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S42.6)”라고 기도 할 수 있다. 버터나 기름은 물에 잠기지 않고 뜨는 성질이 있음에도 물에 잠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저주기도’의 한 형태이다. 오계를 준수하고 선업 공덕을 쌓은 이가 죽었을 때 악처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저주기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경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라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계도 준수 하지 않고 악업만 짓고 죽은 자를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기도는 결코 이루어 질 수 없고, 오계를 준수하여 선업을 쌓았음에도 저주기도를 하여 악처에 떨어지게 하는 기도는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말한다. 저주기도와 무관하게 오계를 준수하여 선업을 쌓은 이는 천상에 태어날 것이고, 후손들의 천도기도와 무관하게 오계를 어겨 악업을 지은 자는 악처에 태어 날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천도기도’와 ‘저주 기도’를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해서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꿈꿉니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 바라는 기도를 한다.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하여 기도를 통하여 이루고자 한다. 그래서일까 어는 천주교인은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저는 천구교 와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저도 기도를합니다. 기도를해서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꿈꿉니다.
(천주교인)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다. 자신의 올린 글을 오픈해 놓으면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자들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기웃거리는 것 같다. 종종 목사가 글을 남겨 놓고 가기도 하고 때로 반론을 제기 하기 때문이다.
댓글을 남긴 천주교인에 따르면 “기도를해서 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꿈꿉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보는 유일신교도들은 실현 가능한 일이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종교인들은 기도를 강조할까?
왜 종교인들은 기도를 강조할까?
기도라는 말은 유일신교도들에게나 적합한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항상 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이다. 이렇게 종교인들이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돈’과 관계 되어 있기 때문이라 본다. 교회나 절에 자주 나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신도들이 교회나 절에 자주 나와야 수입이 더 생기기 때문이다.
신도들은 교회나 절에 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 교회나 절에 가서 기도할 때 그냥 나오지 않고 무언가 내고 나온다. 그래서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신도들이 교회나 절에 자주 나오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교단체에서 하자는대로 하면 매일 나가야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회나 절에서 살다시피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종교단체에 바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종교인들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늘 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하세요!”이다.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알게 된 것 중의 하나는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법(法)을 말한다. 법을 빠알리로 ‘담마(Dhamma)’라 한다. 담마는 다름아닌 ‘진리’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한다. 따라서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말은 진리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왜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하였을까?
초기불교를 통하여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고민하였던 모든 것들에 대한 해법이 가르침 안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의 과정에서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본다. 그러면 틀림 없이 거기에 답이 들어 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이미 해법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 가르침에 답이 있기 때문이다.
조계종 종립중학교에 배정 받아 처음으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 접한 불교는 요즘 볼 수 있는 대승불교가 아니었다. 교재에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과 같은 내용이 전혀 없었다. 부처님의 일생부터 시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중학교 불교책에서는 초기불교 경전에서나 볼 수 있는 내용도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세상은 불타고 있다”라고 시작 되는 ‘연소의 경(S35.28)’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이 법문을 이해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왜 세상은 불타고 있다고 하였을까?”라고 마치 화두처럼 의문을 달고 다녔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고 마침내 의문을 풀게 되었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Ādittapariyayaysutta-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28, 전재성님역)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 인하여 발생된 탐진치 때문이다. 탐진치가 윤회의 땔감이 되어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중학교 때 품었던 의문이 해소 되는 듯 하였다.
앙굴리말라의 경(M86)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설령 중죄를 저질렀을지라도 헤어날 방법이 있다. 기도를 통하지 않고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 예를 ‘앙굴리말라의 경(M86)’에서 본다. 그래서일까 희대의 연속살해범 앙굴리말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이를 초불연과 성전협 번역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Yo ca pubbe pamajjitvā pacchā so nappamajjati,
So imaṃ lokaṃ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전에 방일했지만 그 후로는 방일하지 않는 자
그는 이 세상을 비추나니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초불연)
예전에는 방일하여도 지금은 방일하지 않은 자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성전협)
2.
Yassa pāpaṃ kataṃ kammaṃ kusalena pithiyati,
So imaṃ lokaṃ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그가 지은 삿된 업을 유익함(善)으로 덮는자
그는 이 세상을 비추나니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초불연)
저질러진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덮으니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성전협)
3.
Yo have daharo bhikkhu yuñjati buddhasāsane,
So imaṃ lokaṃ pabhāseti abbhā muttova candimā
참으로 젊은 비구가 부처님의 교법에 몰두할 때
그는 이 세상을 비추나니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초불연)
참으로 젊은 수행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성전협)
4.
Disā hi me dhammakathaṃ suṇantu Disā hi me yuñjantu buddhasāsane,
Disā hi me te manuje1 bhajantu Ye dhammamevādapayanti santo.
나의 적들은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 교법에 몰두하기를!
나의 적들은 참으로 법으로 인도하는 좋은 분들을 섬기기를! (초불연)
나의 적들은 법문을 들어라. 나의 적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
나의 적들은 가르침으로 이끄는 훌륭한 사람들과 사귀어라. (성전협)
5.
Disā hi me khantivādānaṃ avirodhappasaṃsinaṃ,
Suṇantu dhammaṃ kālena tañca anuvidhīyantu.
참으로 인욕을 설하고 온화함을 칭송하는 분들이 있으니
나의 적들은 그들의 법을 때때로 듣고 그것을 따라 행하기를! (초불연)
나의 적들은 인욕을 설하고 원한이 없는 것을 찬양하는 자에게
올바른 때에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따라 수행하라. (성전협)
6.
Na hi jātu so mamaṃ hiṃse aññaṃ vā pana kañcanaṃ4,
Pappuyya paramaṃ santiṃ rakkheyya tasathāvare
그러면 분명 그들은 나를 해치지도 다른 이를 해치지도 않으리라.
최상의 평화를 얻어 약하거나 강한 자들을 보호하기를! (초불연)
이와 같이 하면 반드시 나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네.
그는 최상의 평온을 얻어 약자이건 강자이건 수호한다. (성전협)
7.
Udakaṃ hi nayanti nettikā usukārā namayanti tejanaṃ
Dāruṃ namayanti tacchakā attānaṃ damayanti paṇḍitā.
물 대는 자들은 물을 인도하고 화살 만드는 자들은 화살대를 곧게 하고
목수들은 나무를 다루고 지자들은 자신을 다스린다. (초불연)
관개하는 사람은 물꼬를 트고 활 만드는 자는 화살촉을 바로잡고
목수는 나무를 바로잡고 현자는 자신을 다스린다. (성전협)
8.
Daṇḍeneke damayanti aṅkusehi kasāhi ca,
Adaṇḍena asatthena ahaṃ dantomhi tādinā.
어떤 자들은 몽둥이로 길들이고 갈고리와 채찍으로 길들인다.
그러나 나는 몽둥이도 없고 칼도 없는 여여한 분에 의해서 길들여졌다. (초불연)
어떤 사람들은 몽둥이나 갈구리나 채찍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이 몽둥이 없이 칼 없이 다스려졌네. (성전협)
9.
Ahiṃsakoti me nāmaṃ hiṃsakassa pure sato,
Ajjāhaṃ saccanāmomhi na naṃ hiṃsāmi kañcanaṃ
비록 예전에는 살인자였지만 이제 내 이름은 ‘불해(不害)’이다.
이제야 나는 참된 이름을 가졌으니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초불연)
예전에 살해하는 자였던 나는 이제는 살해하지 않는 자이네.
오늘 나에게 진실한 이름이 있으니 아무도 ‘해치지 않는 자’였네. (성전협)
10.
Coro ahaṃ pure āsiṃ aṅgulimālo ti vissuto,
Vuyhamāno mahoghena buddhaṃ saraṇamāgamaṃ.
나는 전에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진 도적이었다.
큰 격류에 휩쓸리다 부처님을 귀의처로 다가갔다. (초불연)
예전에 나는 흉적으로서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성전협)
11.
Lohitapāṇi pure āsiṃ aṅgulimāloti vissuto,
Saraṇāgamanaṃ passa bhavanetti samūhat
비록 전에는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진 손에 피를 묻히는 자였지만,
이제 나의 귀의처를 보라. 나는 존재의 사슬을 끊었노라. (초불연)
예전에 나는 손에 피를 묻히는 앙굴리말라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존재의 그물을 끊고 내가 귀의한 것을 보라. (성전협)
12.
Tādisaṃ kammaṃ katvāna bahuṃ6 duggatigāminaṃ,
Phuṭṭho kammavipākena anaṇo bhuñjāmi bhojanaṃ.
악처로 인도하는 그런 업을 참으로 많이 지어 왔지만
업의 과보를 얻어 이제 나는 빚 없이 음식을 수용하도다. (초불연)
이와 같이 나쁜 곳으로 이끄는 많은 악업을 짓고
아직 그 업보에 맞닥뜨리지만 부채 없이 음식을 즐기네. (성전협)
13.
Pamādamanuyuñjanti bālā dummedhino janā,
Appamādañca medhāvī dhanaṃ seṭṭhaṃva rakkhati.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들은 방일에 빠지지만
현자는 방일하지 않음을 최고의 재산처럼 보호한다. (초불연)
어리석어 무지한 사람들은 오로지 방일에 탐닉한다.
슬기로운 자는 방일하지 않기를 마치 최상의 보물을 수호하듯 하네. (성전협)
14.
Mā pamādamanuyuñjetha mā kāmaratisanthavaṃ,
Appamatto hi jhāyanto pappoti vipulaṃ sukhaṃ.
방일에 빠지지 말고 감각적 욕망에 탐닉하지 마라.
방일하지 않고 참선하는 자 궁극적인 행복을 얻으리. (초불연)
방일에 빠지지 말라 감각적인 쾌락에서 기쁨을 찾지 말라.
방일하지 않고 명상하는 자 크고 한없는 즐거움을 얻으리라. (성전협)
15.
Sāgataṃ1 nāpagataṃ nayidaṃ dummantitaṃ mama,
Saṃvibhattesu dhammesu yaṃ seṭṭhaṃ tadupāgamaṃ.
잘 왔노라 잘못 오지 않았노라. 나의 이런 요청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어라.
설해진 가르침들 가운데 으뜸가는 것을 나는 얻었다. (초불연)
밝혀진 가르침들 가운데 그 최상의 것에 나는 도달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나는 환영하여 거절하지 않네. (성전협)
16.
Sāgataṃ nāpagataṃ nayidaṃ dummantitaṃ mama,
Tisso vijjā anuppattā kataṃ buddhassa sāsananti.
잘 왔노라 잘못 오지 않았노라. 이런 나의 요청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어라.
세 가지 명지[三明]를 얻었으니 부처님의 교법을 [모두] 실천하였노라. (초불연)
나는 세 가지 밝은 지혜를 얻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성취했다.
내가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나는 환영하여 거절하지 않네. (성전협)
(앙굴리말라의 경, 맛지마니까야 M86)
참으로 감동적인 게송이다. 연쇄살인범이 부처님을 만나 구원받는 것에 대한 노래이다.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게송에서 앙굴리말라는 “한때 커다란 폭류에 휩쓸렸으나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Vuyhamāno mahoghena buddhaṃ saraṇamāgamaṃ)”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안식을 얻었다. 오늘도 내일도 가르침 속에서 산다.
2013-10-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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