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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15. 10:37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고양이의 경(S20.10)에서

 

 

 

어느 법우님이 글을 주셨는데

 

상윳따니까야에 고양이의 경(S20.10)’이 있다. 감각적 쾌락의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경을 근거로 하여 글(스님의 시대에서 빅쿠의 시대로)을 작성하였는데,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셨다.

 

 

고양이의 경 가운데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원문 확인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초불연에서는 같은 단락을 "비구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그곳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그곳을 잡아서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버렸다.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성전협의 번역을 따르면 쥐가 고통을 받지만, 초불연의 번역을 따르면 고양이가 고통을 받습니다.

 

(H법우님)

 

 

이글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과 초불연 각묵스님의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빠알리원문을 확인해 보았더니

 

빠알리원문을 확인해 보았다. 문제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1. Tamena biālo gahetvā asakhāditvā4 ajjhohari.

2.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3.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원문에 대한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큰 차이 없는 첫번째 구절

 

Tamena biālo gahetvā asakhāditvā ajjhohari.

1)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초불연 각묵스님역)

2)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성전협 전재성님역)

 

 

첫번째 구절을 보면 번역이 크게 차이가 없다. ‘고양이가 그것을 먹었다라는 내용이다. 다만 씹지도 않고 삼켰다(초불연)’뜯어 먹었다(성전협)’의 차이이다.

 

원문에 ‘asakhāditvā가 있는데 이는 씹지도 않고라는 뜻이다. ajjhohari‘swallowed(삼키다)’의 뜻이다. 그래서 ‘asakhāditvā ajjhohari’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는 초불연 번역이 직역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 구절이다. 번역이 정반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Tassa mudumūsi antampi khādi, antaguampi khādi.

1)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초불연)
2)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성전협)

 

 

정반대의 번역이다. 초불연에서는 생쥐가 고양이의 창자를 갉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반대로 고양이가 생쥐를 잡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반대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첫 구절에서 비롯된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생쥐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양이 뱃속에 들어간 생쥐가 고양이의 내장을 갉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전협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생쥐를 잡아 물어 뜯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고양이가 생쥐의 창자를 갉아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빠알리어 문구를 보면 생쥐(mudumūsi)’에 대한 것은 보이지만 고양이 (biālo)를 지칭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땃사(Tassa)’가 보인다. 땃사(Tassa)인칭대명사이다. 그런데 두 번역을 보면 이 땃사에 대하여 고양이로 보았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라 하였고, 성전협의 번역에서는 정반대로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라 하였다. 이는 땃사에 대하여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고통받는 대상도 정반대

 

이렇게 정반대의 번역이 나오게 된 것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일까? 세번째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So tato nidāna maraampi nigacchi, maraamattampi dukkha.

1)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 (초불연 각묵스님역)
2)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전협 전재성님역)

 

 

세 번째 구절에서는 고통받는 대상이 나온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고통 받는 것으로 되어 있고, 성전협 번역을 보면 생쥐가 고통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 구절에서 기인한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고양이가 고통을 받는다. 뱃속에 들어간 생쥐가 고양이 창자를 갉아 먹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은 고양이는 강자이고 생쥐는 약자이다. 그래서 쥐를 잡는 것은 고양이이다.

 

그럼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거꾸로 되어 있다. 고양이가 약자이고 쥐가 강자이다. 더구나 쥐가 고양이 뱃속에 들어가 창자를 뜯어 먹어서 고양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였다 하니 일반적 상식을 뒤엎는다. 마치 손오공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손오공의 파초선(芭蕉扇)이야기를 보는 듯

 

지난 6월 실크로드 여행을 하였다. 투르판 근교에 화염산이 있었는데, 화염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손오공과 파초선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천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던 손오공은 때아니게 날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을철인데도 선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사방 800리에 이르는 거대한 산에서 불이 난 것이다. 그래서 불을 끄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 우회하는 방법도 있지만 손오공은 정면돌파하기로 한다. 그래서 화염산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 나찰녀의 파초선(芭蕉扇)’ 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찰녀는 빌려 주기는커녕 부채질 하였다. 그러자 화염산은 더욱 더 맹렬히 타올랐다. 그러자 손오공은 작게 둔갑하여 나찰녀의 몸속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나찰녀의 몸 속 여기저기를 마구 찌르고, 건드렸다.  나찰녀는 견디지 못하고 파초선을 내놓았다. 하지만 ´가짜´ 부채였다. 부채질을 할수록 불길은 오히려 더욱 타올랐다. 손오공은 엉덩이 털만 모두 태우고 말았다.

 

(손오공의 파초선이야기)

 

 

고양이경은 부처님이 하나의 예로 든 것이다. 옷을 가볍게 걸친 여인을 보았을 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재난을 경고하기 위하여 예로 든 이야기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마치 손오공이 나찰녀 뱃속에 들어가 괴롭히듯이, 통째로 집어 삼킨 생쥐가 고양이 창자를 물어 뜯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이와 같은 묘사는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상소설이나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 보여 진다. 부처님이 고양이와 쥐의 예를 들었지만 상식에 벗어난 이야기를 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초불연과 정반대로 번역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왜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을까?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왜 이와 같은 번역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CDB의 영향때문이라 본다.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 밝혔듯이 번역자는 빅쿠 보디의 CDB를 참고 하였다고 나오기 때문이다. 문제의 번역에 대한 빅쿠 보디의 영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Then that mouse came out for food, and the cat grabbed it and swallowed it hastily, without chewing it. Then that little mouse ate the cat's intestines and mesentery and on that account the cat met with death and deadly suffering.

 

(빅쿠 보디역, CDB)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쥐가 음식을 구하러 밖에 나왔다. 그때 고양이는 쥐를 잡았다. 그리고 씹지도 않고 성급하게 삼켜버렸다. 그때 작은 쥐는 고양이의 장과 장간막을 먹었다. 그런 이유로 고양이는 죽음과 죽음과 같은 고통과 마주쳤다. (진흙속의연꽃역)

 

 

영어에 대한 보통의 지식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번역가능한 문구이다. 번역을 하여 놓고 보니 놀랍게도 초불연 번역과 일치 되는 것이었다. 초불연 번역을 다시 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때 생쥐가 그곳에 나타났다. 고양이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바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그 생쥐는 그 고양이의 큰창자도 갉아먹고 작은 창자도 갉아먹었다. 그 때문에 고양이는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되었다.(초불연 각묵스님역)

 

 

생쥐를 집어 삼킨 고양이가 고통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빅쿠 보디의 영역과 구성면이나 단어사용이 동일하다. 이것이 성전협 번역과 180도 다른 이유일 것이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재난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고양이와 생쥐를 예로 들었을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Evameva kho bhikkhave, idhekacco bhikkhu pubbahasamaya nivāsetvā pattacīvaramādāya gāma vā nigama vā piṇḍāya pavisati, arakkhiteneva kāyena arakkhitāya vācāya arakkhitena cittena anupaṭṭhitāya satiyā asavutehi indriyehi.

 

So tattha passati mātugāma dunnivattha vā duppāruta vā, tassa mātugāma disvā dunnivattha vā duppāruta vā rāgo citta anuddhaseti.

So rāgānuddhasena cittena maraa vā nigacchati, maraamatta vā dukkha.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비구는 오전에 옷매뮤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몸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을 보호하지 않고 마음챙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각기능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은 채 걸식하러 마을이나 성읍으로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본다.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 여인을 보고서 애욕이 그의 마음을 물들게 한다. 그는 마음이 애욕에 물들어 죽음을 만나고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을 받게 된다.

 

(고양이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초불연 각묵스님역)

 

 

수행승들이여,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어떤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성전협 전재성님역)

 

 

So too, bhikkhus, here some bhikkhu dresses in the morning and, taking bowl and robe, enters a village or town for alms with body, speech, and mind unguarded, without setting up mindfulness, unrestrained in his sense faculties. He sees women there lightly clad  or lightly attired invades his mind. With his mind invaded by lust he meets death or deadly suffering.

 

(CDB, Bhikkhu Bodhi)

 

 

 

(Laos, Luang Prabang)

 

 

 

비구가 탁발을 나갔을 때 겪을 수 있는 재난에 대한 것이다. 비구가 여인과 마주쳤을 때 알아차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따른 욕정이 일어나 그의 마음을 공격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재난을 경고 하였다.

 

욕망을 일으키는 여인의 가벼운 옷차림

 

경에서는 비구에게 감각적 욕망을 일이킬 수 있는 요인으로 여인의 옷차림을 들었다. 빠알리원문에서는 ‘dunnivattha vā duppāruta로 표현 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제대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제대로 옷을 입지도 않은여인으로 번역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여인으로 묘사하였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면 lightly clad  or lightly attired(가볍게 입거나 가볍게 차려입은)”으로 하였다. 그렇다면 빠알리어 원문 ‘dunnivattha vā duppāruta은 무슨 뜻일까?

 

두 단어에 공통적으로 들어 가는 접두어는 (du)’이다. 두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惡的(악한), 不好的(좋지 않은)’뜻으로 부정적이다. dunnivattha을 보면 duvattha의 합성이이다. 여기서 vatthaa cloth(), garment(의류)’의 뜻이다. 그래서 dunnivattha에 대하여 직역하면  나쁜 옷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vattha와 유사한 vaṭṭha가 있다. 빠알리사전에는 vattha와 함께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vaṭṭha의 뜻은 wet with rain(비에 젖은)’의 뜻이다. 그래서 dunnivattha비에 젖은 여인의 옷이라는 뉘앙스이다. 그런 모습을 탁발 나간 비구가 보았을 때 욕정이 일아날 것이라는 말이다.

 

duppāruta라는 말은 着衣した(나쁘게 입었다), 不適着衣せる(부적당하게 입는다)’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mātugāma dunnivattha vā duppāruta비에 젖은 옷이나 몸매가 비치는 옷을 걸친 여인이라고 의역을 할 수 있다.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을 보았을 때 알아차림을 유지하지 않는 비구는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할(rāgānuddhasena cittena)’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욕정으로 인하여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를 고양이와 쥐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숲을 볼 것인가, 나무를 볼 것인가

 

고양이와 쥐의 비유에서 정반대의 번역을 보았다. 이런 일이 발생된 것은 두 번역자의 번역스타일때문이라 본다. 전재성님의 경으 해제글에서 밝혔듯이 나무 보다는 숲을 보듯이 문맥을 통해경을 볼 것을 강조 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주석서에 의존하고 주석서를 존중하는 바탕하에 번역을 하였다. 이와 같은 두 번역자의 스타일이 잘 드러난 것이 고양이와 쥐의 비유에서 정반대의 번역으로 나타난 것이라 보여진다.

 

문맥을 통해서 비교해 보면

 

전재성님의 번역에 대하여 문맥을 통해 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다.

 

 

가해자

경전적 근거

피해자

경전적 근거

고양이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 (S20.10)

 

생쥐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S20.10)

여인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한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S20.10)

수행승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S20.10)

 

 

경을 보고 문맥을 통해서 파악하면 위의 표와 같이 된다. 고양이가 가해자이고 쥐는 피해자이다. 그리고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이 가해자가 되고 알아차림을 확립하지 못한 수행승은 피해자가 된다. 그래서 경의 문맥에 따르면 여인의 예를 든 것이 고양이이고, 수행승의 예를 든 것이 생쥐이다. 그래서 피해자 격인 생쥐와 수행승은 죽음이나 죽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렇게 대조를 해 보면 정확하게 일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빅쿠보디의 영역을 보면        반대로 되어 있다. 빅쿠 보디의 영역을 답습한 초불연의 번역 역시 반대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초불연의 번역이 빅쿠보디의 영역 CDB를 답습하였다는 것은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고양이의 경에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Maraa heta bhikkhave, ariyassa vinaye yo sikkha paccakkhāya hīnāyāvattati. Maraamatta heta bhikkhave, dukkha yadida aññatara sakiliṭṭha āpatti āpajjati, yathārūpāya āpattiyā. vuṭṭhāna paññāyati.

 

비구들이여, 여기서 죽음이란 성자의 율에서 공부지음을 버리고 낮은 [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이란 오염된 계를 범한 것인데 계를 범한 것에 대한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고양이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초불연 각묵스님역)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거룩한 계율안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다.

 

(고양이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초불연 각묵스님역)

 

 

For this, bhikkhus, is death in the Noble one's Discipline: that one gives up the training and returns to the lower life. This is deadly suffering: that one commits a certain defiled offence of a kind that allows for rehabilitation.

 

(CDB, Bhikkhu Bodhi)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재난을 경고 하고 있다. 만약 비구가 알아차림을 확립하지 못하여 가볍게 옷을 걸친 여인에게 욕정을 품어 계율을 어긴다면 죽음 아니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경에서 말하는 죽음(Maraam)’이란 다름 아닌 바라이(Pàràjika , 波羅夷)’죄를 어기는 것을 말한다. 성행위를 하여 계율을 어기면 승단추방에 해당되는 바라이 죄를 짓기 때문이다.

 

승단의 패배자들

 

바라이죄를 짓는 자는 패배자이다. 자신과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승단에 남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승단에서 추방된 자는 패배자이다. 그런 패배자들을 한국불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종교전문기자의 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은처문제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신문 기사 하나를 살펴보자. 1996 8 1 <<경향신문>> 종교면 “도박-은처승 징계 첫 거론, 월하종정 총무원장 보고 받고 척결지시”라는 제목의 기사내용은 이러하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비구종단이다. 여색을 가까이 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결혼은 더더욱 안된다. 재물을 탐내서도 안 되며 도박을 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부인을 몰래 두거나 도박을 즐기고 개인재산을 챙겨 놓은 스님들도 있나 보다.

 

…은처승과 도박승 문제는 불교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왔다. 하지만 청정비구교단임을 내세워온 조계종으로서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운 아킬레스건으로 인식돼왔다. 문제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알면서도 쉬쉬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김나미 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김나미 기자가 언급한 내용은 1996년도 경향신문 기사로서 지금으로부터 16년전의 일이다. 16년 전에도 이미 승려들의 도박과 은처문제가 매우 심각한 승단의 병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1996년 시점에서 “은처승과 도박승 문제는 불교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돼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도박과 은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상화 된 고질병이라 볼 수 있다.

 

바라이죄 무풍지대

 

책에서 승려의 성문제와 관련하여 또 하나 언급된 것은 다음과 같다.

 

 

20여 년 전 막 불교에 입문할 당시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신도회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중구의 한 경찰서장이 한 말이 퍼져 내 귀까지 온것이었다.

 

1970~80년대 서울역 앞 양동 홍등가 지역을 급습해보면 방에서 나오는 반이 승려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지만 한때 그곳에서 승려가 가장 환영받는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 수계 절차없이 외양만 삭발하고 승복을 갖춰 입은 땡중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는 승려들이 고급 요정에  드나든다는 말이 매체를 통해 흘로나온 적이 있다. 본사이든 말사이든 다른 종교에 비해 주머니가 두둑하고 시간 여유가 많은 주지라면 딴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승려에게는 대처가 가능한 종단으로 옮기라고 권하고 싶다.

 

(김나미 기자, 신앙지옥 불신천국)

 

 

막행막식을 하는 승려 대부분이 땡중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위직 승려들이 룸살롱 출입을 하였다면 이는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전부의 문제일 수 있다. 영남에 있는 모교구 본사의 스님은 페인터(화가)로 위장하여 미국에서 사실혼을 입증하는 혼인 증명서가 있었고, 충남에 있는 모교구본사에서는 전주지가 여인의 유혹에 걸려 들어 피해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이미 언론에 회자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출마를 선언하였다가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말을 바꾸어 다시 총무원장이 된 승려가 있다. 그는 승단 추방에 해당되는 망어죄  뿐만 아니라 은처의혹과 도박의혹까지 받고 있다. 

 

이렇게 룸살롱을 출입하고 사실혼 증명서가 있고 여인과 스캔들이 있어도 한국불교에서는 바라이죄로 추방되는 일은 결코 없다. 또 거짓말을 하고 은처를 하여도 추방되기는 커녕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승단은 패배자들의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왜 부처님이 사띠하라고 하였을까?

 

경에서 바라이죄를 지은 자에 대하여 거룩한 계율안에서 그 배움을 버리고 타락하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S20:10)”라고 한 것이다. 바라이죄를 지은 자는 한마디로 패배자인 것이다.

 

설령 바라이죄를 짓지 않고 마음속으로 욕정을 품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서는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 이러한 죄악에 오염되는 것은 바로 죽을 정도의 고통이다. (S20:10)”라 하였다. 여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신체를 가다듬고 언어를 다스리고 정신을 수호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감관을 제어하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리라.”라고 말씀 하신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항상 사띠하라는 것이다. 그런 사띠는 어떤 것일까?

 

사띠가 단순하게 대상에 대하여 마음챙김하는 것일까?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 번역하였다.

 

사띠는 사념처에 잘 표현 되어 있다. 특히 몸에 대한 관찰에 대한 것을 보면 부정관으로 표현 되어 있다. 32가지  신체 부위와 10가지  부정관에 대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항상 기억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래서 가벼운 옷차림을 한 여인과 마주쳤을 때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 차리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대상에 대해서만 마음챙김한다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왜 부처님이 사띠하라고 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될 것이다.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다고?

 

경에서 키 포인트는 죽음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대한 것이다. 죽음은 바라이 죄를 저질러서 승단에서 추방된 것을 의미하고 죽음과도 같은 고통은 비록 바라이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마음속에서 가벼운 옷차림의 여인으로 인한 욕망이 발동하였을 때 겪게 되는 괴로움을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 각묵스님은 죽음에 버금가는 괴로움이란 오염된 계를 범한 것인데 계를 범한 것에 대한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S20:10)”라고 번역하였다.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그 의미가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더구나 출죄제장이라는 한자용어까지 들어 있어서 난해하기만 하다.

 

경전에서 한줄이 빠지면

 

경전에서 한줄이 빠지면 난해해진다. 그리고 심오해진다. 그에 따라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다. 금강경에서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가 좋은 예이다. 초심자는 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심오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구마라습이 번역한 금경경에서는 약이색견아 구문 다음에 이어지는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는 말이 빠져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의 왁깔리경에서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S22:87)”라는 문구와 같은 내용이다. 그래서 빠진 문구를 보충하여 해석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

 

번역을 아주 어렵게 하였을 때

 

그런데 번역을 아주 어렵게 해 놓은 경우 역시 심오해진다. 더구나 뜻도 모르는 한자용어까지 사용하였을 때 그렇다. 초불연의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가 대표적이다. 아직도 이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참으로 죄악에서 벗어남을 알더라도라 하여 누구나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번역인지 승가사회 등 특수계층을 위한 번역인지 드러난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이라는 뜻은 빅쿠보디의 영역 allows for rehabilitation.(갱생을 허용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빠알리어 yathārūpāya āpattiyā에 대한 것인데, yathārūpāya벗어난 것이라는 뜻이고, āpattiyā성직자의 계율위반이라는 뜻으로서 죄악에서 벗어남의 뜻이다.

 

그럼에도 출죄(出罪)가 제장되어 있는 것라는 번역을 대하였을 때 난해함과 동시에 심오함을 느낀다. 아무리 여러 번 읽어 보아도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거나 반대로 심오하게 보기 때문이다.

 

번역의 자주화가 실현 되기를

 

같은 문장을 두고 정반대의 번역을 종종 본다. 그럴 경우 독자들은 혼란을 느낀다. 과연 어떤 번역이 맞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원문을 찾아 보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고 각 번역자의 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래도 알기 힘들면 문맥을 통해서파악하는 것이다. 고양이의 경이 대표적인 예이다. 고양이와 쥐의 입장에 대하여 정반대의 번역을 보았지만 문맥을 통하여 파악하였을 때 쥐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성전협과는 정반대의 번역을 하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빅쿠보디의 CDB의 번역을 답습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하루 빨리 번역의 자주화가 실현 되기를 바란다.

 

 

 

2013-10-1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