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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는 기쁨인가 슬픔인가? 윤회의 땔감 우빠디(upadhi)와 기뻐함의 경(S1.12)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12. 11:14

 

소유는 기쁨인가 슬픔인가? 윤회의 땔감 우빠디(upadhi) 기뻐함의 경(S1.12)

 

 

많이 소유한다고 하여 행복할까?

 

많이 소유한다고 하여 행복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유함으로 인하여 슬픔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Nandati sutta

 

Sāvatthiya -

Ekamanta 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 gātha abhāsi:

Nandati puttehi puttimā gomiko2 gohi tatheva nandati,
Upadh
ī hi narassa nandanā na hi so nandati yo nirūpadhīti

(Bhagavā:)

Socati puttehi puttimā gomiko gohi tatheva socati,
Upadh
ī hi narassa socanā na hi so socati yo nirūpadhīti.

 

 

기뻐함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기뻐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떼 때문에 기뻐하네.

재생의 근거(소유물)71)는 인간의 기쁨이니

재생의 근거 없는 자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72)  {22}

 

3. [세존]

아들을 가진 자는 아들 때문에 슬퍼하고

소치는 목자는 소떼 때문에 슬퍼하네.

재생의 근거(소유물)는 인간의 슬픔이니

재생의 근거 없는 자73) 슬퍼할 것도 없도다.  {23}

 

(기뻐함 경, 상윳따니까야 S1.12, 초불연 각묵스님역)

 

 

 

기뻐함의 경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 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2. [하늘사람]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로 기뻐하고,

외양간 주인은 소 때문에 기뻐하듯이

사람의 기쁨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니

집착하지 않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으리.

 

3. [세존]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로 슬퍼하고,

외양간 주인은 소 때문에 슬퍼하듯이

사람의 슬픔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니

집착하지 않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으리.”

 

(기뻐함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2, 성전협 전재성님역)

 

 

 Delight

 

At Savatthi. Standing to one side, that devata recited this verse

in the presence of the Blessed one:

22 one who has sons delights in sons,

One with cattle delights in cattle.

Acquisitions truly are a man's delight;

Without acquisitions one does not delight."

 

[The Blessed one:]

one who has sons sorrows over sons,

One with cattle sorrows over cattle.

Acquisitions truly are a man's sorrows;

Without acquisitions one does not sorrow."

 

(CDB, Bhikkhu Bodhi)

 

 

 

 

 

 

기뻐함의 경(S1.12)이다. 빠알리 원문과 각묵스님역, 전재성님역, 그리고 빅쿠 보디역을 실었다.

 

소유는 기쁨인가 슬픔인가?

 

경의 제목은 빠알리어로 난다띠(Nandati) 이다. ‘To be pleased, to rejoice, to enjoy oneself’의 뜻이다. ‘기뻐하는 것’ 이라는 뜻이다. 경에서는 두 가지로 표현된다. 아들을 갖는 것과 소를 갖는 것이다. 모두 재가자의 삶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고대인도에서 아들과 소는 재산과 마찬가지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소치는 다니야경(Sn1.2)’에서도

 

 

“나 자신의 노동의 댓가로 살아가고,

건강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지내니,

그들에게 그 어떤 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Sn1.2)

 

 

“다 자란 송아지도 있고,

젖먹이 송아지도 있고,

새끼 밴 어미 소 뿐만 아니라

성년이 된 암소도 있고,

암소의 짝인 황소 또한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n1.2)

 

 

라 하였다.

 

 

건강한 자식과 착한 아내와 많은 소를 가지고 있는 다니야에게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래서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뻐함의 경에서 하늘사람도 아들을 가진 것이 기쁨이라 하였고 소를 가진 것도 기쁨이라 하였다. 그래서 이런 기쁨의 대상이 있기 때문 기뻐하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정반대의 게송을 읊으셨다. 아들과 소는 기쁨의 대상이 아니라 슬픔의 대상이라 하였다. 그것은 집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집착으로 인하여 세세생생 윤회하기 때문이다.

 

우빠디(Upadhī)

 

경에서 ‘우빠디(Upadhī)’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재생의 근거(소유물)’이라 번역하였고, 전재성님은 ‘집착의 대상’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빠알리어 우빠디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사전을 찾아 보았다.

 

우빠디(Upadhī)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m.] substratum of re-birth(재생의 토대); attachment(애착)”의 뜻이다. 또 유사한 말로 upadhi는 ‘A wheel(바퀴); the body(신체); a substratum of being(존재의 토대)’라고 설명되어 있다. 빠알리 한자 사전에는 ‘, 依著(渴愛煩惱), 所依, 存在的基礎’라 설명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우빠디라는 말은 ‘재생의 토대가 되는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집착을 말한다. ‘갈애를 조건으로 하여 집착이 일어나고’로 설명되는 12연기에서의 ‘집착’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행위에 따라 업의 존재를 발생하게 하는 집착을 말한다.

 

갈애가 더욱더 강화되어 단단하게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집착이다. 그런 집착은 필연적으로 ‘업으로서 존재(業有)’을 발생하게 할 수밖에 없다.

 

재생의 근거(소유물)라 하였는데

 

우빠디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각주를 달아 놓았다.

 

 

 재생의 근거(소유물)로 옮긴 원어는 upadhi이다. 이 단어는 upa+

dha(to put)에서 파생된 명사로 문자적으로는 그 위에 무엇이 놓여진

의미하며 그래서 삶에 필요한 토대나 소지품이나 설비 등을 뜻한다. 이것

은 외적인 입장과 내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외적인 입장에서

(objectively) 보자면 얻어진 것들을 뜻하는데 자신의 재산이나 소유물을

뜻한다. 내적인 입장에서(subjectively) 보자면 갈애가 생겨서 소유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이것은 다시 태어남(재생)의 근거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빠디(upadhi)는 우빠다나(취착, upadana)와 유사하다. 물론 이 두 단어

의 어원은 다르다. 이 두 입장을 고려해서 역자는 재생의 근거(소유물)

옮겼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재생의 근거로 정착시키고 있다.

 

(Upadhī  각주, 각묵스님)

 

 

우빠디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재생의 근거(소유물)로 번역하였다. 다소 경직된 번역이다. 더구나 괄호를 이용하여 (소유물)’라고 보충어를 집어 넣어 놓았는데 시어에서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시에다 곡을 붙이면 노래가 될 수 있는데 그때 괄호속의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괄호를 사용하면 마치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커다란 돌처럼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시어에 재생의 근거(소유물)라는 번역어는 부자연스럽고 흐름을 방해하는 전형적인 주석적 번역이라 본다. 주석에서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적용된 케이스라 보여진다.

 

CDB의 각주를 보면

 

각묵스님은 우빠디에 대하여 upa+ dha(to put)라고 파자 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우빠디에 대하여 내적, 외적인 것으로 고찰가능한 것이라 하였다. 더구나 내적으로 보았을 때 갈애로 인한 다시 태어남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초불연에서는 우빠디에 대하여 재생의 근거(소유물)’로 정착시킨 번역어를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모처럼 초불연 견해를 보는 듯 하다. 거의 대부분 각주에서는 주석을 근거로 하여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 빅쿠 보디의 CDB를 많이 참고 하였다고 해제글에서 밝혔는데 놀랍게도 CDB의 각주를 보면 똑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Upadhi, "acquisitions" (from upa + dhā, "to rest upon")

means literally "that upon which something rests," i.e.,

the "foundations" or "paraphernalia" of existence. The

word has both objective and subjective extensions.

Objectively, it refers to the things acquired, i.e., one's

assets and possessions; subjectively, to the act of appropriation

rooted in craving. In many instances the two senses

merge, and often both are intended. The word functions

as a close counterpart of upādāna, "clinging," to which,

however, it is not etymologically related. See in this connection

12:66 and II, n. 187, and Sn p. 141.

 

(우빠디에 대한 빅쿠 보디의 각주, CDB, Bhikkhu Bodhi)

 

 

빅쿠보디는 우빠디에 대하여 acquisitions라 하였다. Acquisition획득, 취득, 습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빠디가 upa + dhā로부터 유래 되었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우빠디는 objective subjective로 표현 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외적인 입장에서

(objectively)” 내적인 입장에서(subjectively) 보자면라고 함으로서 CDB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빅쿠 보디는 The word functions as a close counterpart of upādāna, "clinging,라 하여 우빠디는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와 거의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이런 의미에서 우빠디(upadhi)는 우빠다나(취착, upadana)와 유사하다.”라고 되어 있어서 사용된 용어나 구성면에서 CDB의 각주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마치 초불연에서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니 CDB의 각주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CDB의 각주를 인용하지 않는 구절도 있다. 그것은 12:66 and II, n. 187, and Sn p. 141’라는 문구이다. 12:66 S12.66로 보인다.

 

내적인 성찰을 하지 못하였을 때

 

S12.66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S12)에 있는 성찰의 경(S12.66)’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적인 성찰을 하는가?”라고 물어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내적인 성찰이란 내적인 연기적 조건에 따른 내적인 관찰을 말한다. 이는 빅쿠 보디의 subjectively(내적인 입장에서)’에 해당 될 것이다.

 

부처님은 내적인 성찰을 하지 못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끄달려 다녔을 때 재생을 초래하는 우빠디가 발생할 것이라 경고 하였다. 그런 예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음료를 담은 잔이 있는데, 빛깔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있는 물이 담겨 있지만 독약이 섞여 있다고 하자. 그때 더위에 시달리고 더위에 지쳐서 피곤하고 목마르고 갈증이 나는 어떤 사람이 왔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와 같이 벗이여, 이 물그릇에는 빛깔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가 담겨 있지만 독약이 섞여 있다. 원한다면 마셔라. 네가 마시면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와 맛 때문에 입에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가 물리치지 않고 허겁지겁 그 물을 마셔버린다면, 그는 그 때문에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Sammasanasutta-성찰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6, 전재성님역)

 

 

각주에 따르면, ‘음료를 담은 잔은 사랑스럽고 즐길만한 세속적인 대상이라 한다. 더위에 지친 사람은 윤회에 결박된 범부를 말하고, ‘물을 제공하는 사람은 그에게 사랑스럽고 즐길만한 세속적 대상가운데 그 대상을 즐기라고 권유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경에서 유혹과 위험을 경고하는 자는 스승이나 친교사이다. 그래서 그들은벗이여, 이 물그릇에는 빛깔이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있는 음료가 담겨 있지만 독약이 섞여 있다.”라고 말함으로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유혹과 위험을 설한다. 하지만 범부들은 이런 경고를 무시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허겁지겁 그 음료를 마셔서 죽음이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는자로서 묘사 되어 있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다 죽으면

 

사람들은 느낌에 올인한다. 그래서 순간적인 즐거움에 모든 것을 건다. 이처럼 좋은 느낌에 목숨을 걸다보니 “죽어도 좋아”라며 느낌에 목숨을 건다. 만일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다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죽어서도 그 느낌 그대로 유지될까? 죽어도 좋을 만큼 좋은 느낌을 가진 채 죽으면 ‘열반락’을 성취하는 것일까?

 

범부들은 사람의 기쁨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집착의 대상이 없으면 즐거울 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부자는 부자나름대로 즐길거리를 찾고, 가난한 자 역시 나름대로 즐길거리를 찾는다.

 

그런데 이런 즐길거리를 찾아 헤메이는 것 자체가 재생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 괴로움의 발생에 대하여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이라 하였다.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것을 갈애로 본 것이다. 그런데 갈애가 더욱 더 강화 된 것이 집착(우빠다나)이다. 그래서 한번 집착이 생겨나면 떨어지지 않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탄생을 야기한다.

 

윤회의 땔감 우빠디(upadhi)

 

집착으로 인하여 새로운 존재로 나게 하는 것이 우빠디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의 우빠다나와 동의어이다. 우빠디는 한마디로 윤회의 땔감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들이나 소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슬퍼함이라 하였다. 자식이나 재산에 집착하는 것이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윤회하게 하는 원동력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으셨다.

 

 

[세존]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로 슬퍼하고,

외양간 주인은 소 때문에 슬퍼하듯이

사람의 슬픔은 집착의 대상에서 생겨나니

집착하지 않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으리.” (S1.12)

 

 

 

2013-10-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