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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락과 적멸락, 환희의 경(S1.11)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4. 11:20

 

오욕락과 적멸락, 환희의 경(S1.11)

 

 

 

왜 일체개고인가

 

누구나 바라는 것이 행복이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지금 불행한 자는 하루 빨리 이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애가 일어난다. 그러나 모두 괴로울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행복을 누리는 자들은 그 행복이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지속되지 않아서 괴롭고, 지금 여기에서 불행한 자들은 불행 그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자나, 지금 여기에서 불행한 자 모두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체개고라고 한지 않았던가!

 

천상락보다 더 수승한 노래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쾌락을 느낀다면 죽어도 좋아라고 목숨을 건다. 그런 행복은 곳이 있을까? 오로지 행복만 있는 곳이라면 낙원일 것이다. 그런 낙원은 다름 아닌 천상이다. 천상에서 행복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노래가 있다. 그러나 천상락보다 더 수승한 노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Nandanasutta

 

11. Evamme suta eka samaya bhagavā sāvatthiya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 Bhagavā etadavoca:

Bhūtapubba bhikkhave aññatarā tāvatisakāyikā devatā nandanavane5 accharāsaghaparivutā dibbehi pañcahi kāmaguehi samappitā samagībhūtā paricārayamānā6 tāya velāya ima gātha abhāsi:

Na te sukha pajānanti ye na passanti nandana,
Āvāsa
naradevāna tidasāna yasassinanti.

Eva vutte bhikkhave aññatarā devatā ta devata gāthāya paccabhāsi:

Na tva bāle vijānāsi 7 yathā arahata vaco,
Aniccā sabbe sa
khārā8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ti.

 

 

 

난다나 경

 

 

2.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3. 비구들이여, 옛날에 어떤 삽십삼천의 천신이 난다나 정원에서

압사라의 무리에 둘러싸여 천상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갖추고 완비하여 즐기고 있었다.

그는 바로 그 시간에 이 게송을 읊었다.

 

4. 명성이 자자한 삼십삼천에 있는

남성 신들 거처인 난다나 정원을

보지 못한 자들은 불쌍한 자들이니

행복이 무엇인지 그들은 모르도다. 

 

5. 비구들이여, 이렇게 말하자 어떤 천신이 그 천신에게

게송으로 이렇게 응답하였다.

 

어리석은 그대여, 아라한들 이런 말씀

그대는 꿰뚫어 알지도 못하는가?

형성된 것들[諸行]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이라네.

일어났다가는 다시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 진정한 행복일세.’”

 

(난다나 경,  S1.11, 초불연 각묵스님역)

 

 

환희의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그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옛날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한 하늘사람이 환희의 동산에서 요정들의 시중을 받으며 하늘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소유하여 갖가지를 구족하고 즐기면서 이와 같은 시를 읊었다.

 

[하늘사람] ‘영예로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하늘사람들이 살고 있는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말하자 다른 하늘사람이 그 하늘사람에게 이와 같은 시로 대답했다.

 

[다른 하늘사람]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알지 못하니 거룩한 님께서 말씀하셨네.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환희의 경, S1.11,성전협 전재성님역)

 

 

Nandana – Rejoicing

 

Thus I heard. once the Blessed one was living in Sāvatthi in Jeta's grove, in the monastery offered by Anāthapiṇḍika.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bhikkhus from there:

“Bhikkhus, in the past, in the Nandana grove of the thirty two gods, a certain god provided with the five strands of heavenly sensual bliss was enjoying them until the snapping of the fingers and said this stanza:

“They, that have not seen Nandana grove, do not know the enjoyments of the king of gods, and the fame, of the thirty-three gods

Bhikkhus, a certain deity hearing this, replied with this stanza:

“You fools do not know the words of the worthy ones,
All determinations are impermanent,

They are of the nature of rising and falling.
Arisen they fade, their complete surcease is bliss.”

 

(THE TIPITAKA)

 

 

 

Nandana

 

Thus have I heard.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t Savatthi in Jeta’s Grove, Anathapiṇḍika’s Park. There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bhikkhus thus: “Bhikkhus!”

 

2“Venerable sir!” those bhikkhus replied. The Blessed one said this:

 

3“Once in the past, bhikkhus, a certain devata of the Tavatisa host was revelling in Nandana Grove, < 11 > supplied and endowed with the five cords of celestial sensual pleasure, accompanied by a retinue of celestial nymphs. on that occasion he spoke this verse:

 

4“‘They do not know bliss
Who have not seen Nandana,
The abode of the glorious male devas
Belonging to the host of Thirty.’

 

5“When this was said, bhikkhus, a certain devata replied to that devata in verse:

 

6“‘Don’t you know, you fool,
That maxim of the arahants?
Impermanent are all formations;
Their nature is to arise and vanish.
Having arisen, they cease:
Their appeasement is blissful.’”

 

(CDB, Bhikkhu Bodhi)

 

 

 

난다나경은 두 종류의 행복에 대하여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를 즐기는 행복과 열반의 즐거움이다. 두 종류를 행복을 대조함으로서 어떤 행복이 궁극적인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환희의 동산이라 하였을까?

 

경에서 ‘난다나정원 (nandanavane)’ 이 나온다. 삼십삼천에 있는 정원으로서 하늘에 태어난 하늘사람들이 누리는 낙원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환희의 동산’이라라고 번역하였다. 왜 그렇게 번역하였을까? 아마도 ‘nanda’라는 말의 영향 때문이라 본다.

 

난다라는 말은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nandi’라는 말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다. nandi 는 즐거움(Joy)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S56.11)”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에서 nandi라는 말이 두 번 나온다. 이때 난디는 즐거움 또는 쾌락, 환희의 뜻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난다나정원 (nandanavane)’ 에 대하여 환희의 정원이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원어를 이용하여 난다나 정원라고 번역하였다.

 

앗차라(accharā)와 압사라춤

 

환희의 동산(nandanavane)에는 오로지 행복과 즐거움과 쾌락만 있는 곳이다.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온갖 쾌락은 모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코락은 다름아닌 오욕락이다. 그래서 눈으로는 아름다운 형상을 보고, 귀로는 좋은 소리를 듣고, 혀와 코로는 맛있고 달콤한 음식을 취하고, 몸으로는  이성과의 보드라운 잠자리를 갖고자 하는 오욕락이다.

 

이와 같은 감각적 쾌락을 상징하는 단어가 하나 보인다. 그것은 앗차라(accharā)라는 말이다. accharā 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압사라의 무리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요정들이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CDB에서 ‘celestial nymphs(천상의 님프)’라 하였다.

 

 Accharā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 [f.] 1. a nymph (님프); 2. snapping of fingers (손동작); a short moment(짧은 움직임)’이라는 뜻이다. 빠알리-일본어 사전을 보면 ‘① [Sk. apsaras] 仙女, 水精. ② ’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accharā가 천상의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압사라는 손동작을 이용하여 짧은 움직임으로 춤을 추는 천녀를 말한다. 또 그런 춤을 압사라춤이라 한다. 그래서 오욕락을 즐기는 천상에서 손가락을 이용한 손동작 춤을 추는 여인과 함께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빠알릭사전에 따르면 accharā에 대하여 [Sk. apsaras] 고 설명이 되어 있다. 산스크리크트어 압사라(apsaras)에서 유래된 말임을 알 수 있다.

 

TV여행 프로에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대한 것이 있다. 이때 소개 되는 춤이 ‘압사라춤’이다. 앙코르와트를 장식하는 벽에 부조로도 새겨져 있는 압사라춤은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춤이다. 그런데 이춤을 보면 손가락을 이용한 손동작이 특징이다. 그리고 움직임은 크지 않다.

 

 

 

 

Apsara

 

 

위키백과에 따르면 압사라는 힌두교 신화와 불교 신화에 나오는 구름과 물의 여자 요정으로서, 신이나 영웅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남편들이 만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경에서 묘사된 환희의 정원은 인간이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는 곳이다. 압사라의 시중을 받으며 오욕락을 즐기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욕락을 마음껏 즐기고 있는 삼십삼천의 하늘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환희의 동산을 보지 못한 사람은 행복을 알지 못하네.(S1.11)”라고 시로서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

 

오욕락을 즐기는 것은 일시적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어 사는 순간 똥으로 변하고 불과 대여섯시간만 되면 허기가 져서 견디지 못한다. 아무리 이성과 보드라운 잠자리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느낌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죽어도 좋아하며 느낌에 목숨을 건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떤 것일까?

 

진정한 행복은 오욕락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하늘사람은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vūpasamo sukhoti, S1.11)”라고 노래 하였다. 열반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뜻이다. 이 게송을 빠알리로 보면 다음과 같다.

 

 

Aniccā sabbe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ti.

 

 

이게송은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널리 회자 되어 왔다. 그리고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활용되고 있다. 또 동아시아 불교에서 선사들이 즐겨 읆는 게송으로서 설산동자의 투신설화에서도 볼 수 있다. 한문으로 된 게송은 다음과 같다.

 

 

諸行無常     제행무상

是生滅法     시생멸법

生滅滅已     생멸멸이

寂滅爲樂     적멸위락

 

 

빠알리 게송에 대한 두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형성된 것들[諸行]은 참으로 무상하여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법이라네.

일어났다가는 다시 소멸하나니

이들의 가라앉음 진정한 행복일세.(각묵스님역)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송을 분석해 보면

 

그것을 한문게송에서는 생멸(生滅)’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한문게송을 보면 앞생멸과 뒤생멸이 모두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빠알리원문을 보면 다르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어 보았다.

 

 

 

빠알리 게송

 

앞생멸

 

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니

현상생멸

 

뒷생멸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 ti

 

生滅滅已 寂滅爲樂

 

,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 현상의 적멸이야말로 지복일세

오온생멸

 

 

 

앞생멸에 대한 것은 ‘Uppādavayadhammino’라 하였고, 뒷생멸은 ‘Uppajjitvā nirujjhanti’라 하였다. 이렇게 다르게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현상오온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생멸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은 무상하다는 제행무상을 말한 것이고, 뒷생멸은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이 무상하다는 오온무상을  말한다. 왜냐하면 오온이 무상함을 인식하는 자만이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온이 무상함을 인식하는 자만이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계절이 바뀌면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고, 늙어서 죽는 것을 보면 인생이 무상함을 느낀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 Dhp277)”라 하였다.

 

앞생멸은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무상함이다.  그래서 빠알리 원문을 보면 Aniccā vata sakhārā’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는 현상이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 Dhp277)”라 하였다. 법구경에서 말하는 제행무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나 뒷생멸에서는 Uppajjitvā nirujjhanti라 하였기 때문에 다르다. 이런 차이는 무엇 때문에 발생한 것일까? 아마도 무상에 대한 인식이라 본다.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계절이 바뀌면 세월이 무상함을 느끼고, 늙어서 죽는 것을 보면 인생이 무상함을 느낀다. 그러나 무상함을 느끼는 자들은 대부분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을 때도 내가 무상함을 느낀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들이 느끼는 무상함은 무아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떨어지는 낙엽이나 사람이 죽었을 때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점이 배우지 못한 범부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차이다. 그래서 후반부 생멸은 오온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온이 무상함을 보아야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문게송은 앞과 뒤에 모두 생멸이라 하여 구분하지 않았다. 이는 한문의 한계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왜 빠알리니까야에 의존해야 하고 그것도 빠알리 원문을 찾아 가며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2013-10-0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