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번역비교

빠알리니까야 번역자의 조건은? 잘 알지 못함의 경(S1.7)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29. 11:29

 

빠알리니까야 번역자의 조건은? 잘 알지 못함의 경(S1.7)

 

 

 

사경을 할 때

 

불자들의 신행방법중에 하나가 사경이다. 대승불교전통의 한국불교에서는 사경이라 함은 한문사경이 주류를 이룬다. 대표적으로 천수경이다. 그래서 커다란 글씨로 되어 있는 사경용 노트를 별도로 팔고 있다.

 

사경은 반드시 사경용 노트에 해야 되는 것일까? 요즘은 인터넷사경도 한다. 블로그나 카페에 자판을 두들겨 글을 올리는 것이다. 주로 천수경, 금강경, 법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과 같은 경전이다.

 

초기불교경전에 대하여 사경하는 것을 보았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등과 같이 게송이나  짤막한 경이 대부분이다. 간혹 길이의 디가니까야나 중간길이의 맛지마 니까야를 사경하기도 한다.

 

상윳따니까야도 사경하기 좋은 경전이다. 수천개의 경으로 구성된 방대한 경전이긴 하지만 사경하기 좋은 니까야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1권에서 볼 수 있는 게송이 들어간 상윳따이다.

 

넷상에서 상윳따니까야 사경을 종종 본다. 그런데 사경한 것을 보면 어느 한 역자의 번역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한역자가 번역된 것만 올려 놓았을 때 과연 뜻이 올바로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혹시 번역자가 오역이나 과도한 의역이라도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피해를 줄 것이다.

 

어느 한 번역자의 것만 보면

 

게송은 내용이 고도로 축약되어 있고 상징적인 언어로 되어 있어서 번역하기가 매우 난해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한번역자의 것만 올려 놓으면 오도 되기 쉽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두 개 이상의 번역을 올려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두 개의 빠알리번역서가 있기 때문이디. 거기에다 빠알리원전과 영문번역까지 올려 놓으면 금상첨화 일 것이다. 그래야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알지 못함의 경(S1.7)에서

 

상윳따니까야에 잘 알지 못함의 경(S1.7)’이 있다. 주로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짤막한 게송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압축되어 있다. 빠알리원전, 한글 번역 두 종류, 영역 두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Appaividitasutta

 

 Sāvatthiya

 

Ekamanta hitā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 gātha abhāsi:

Yesa dhammā appaividitā paravādesu nīyare,
Sutt
ā te nappabujjhanti kālo tesa pabujjhitunti

(Bhagavā:)

Yesa dhammā suppaividitā1paravādesu na nīyare,
Sambuddh
ā sammadaññāya caranti visame samanti.

 

 

통찰하지 못함 경

 

2. 한 곁에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사성제의] 법을 통찰하지 못한 자들은

외도의 교설로 인도되기 마련이리

그들은 잠들어 있어서 깨어나지 못했지만

그들 이제 깨어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3. [세존]

“[사성제의] 법을 통찰한 자들은

외도의 교설로 인도되지 않도다.

완전하게 깨달은 자들 바른 구경의 지혜 구족하여

평탄치 못한 곳에서도 올곧게 가도다.”

 

(통찰하지 못함 경, S1.7,초불연 각묵스님역)

 

 

잘 알지 못함의 경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 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2. [하늘사람] “성스런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해

다른 가르침으로 기우네.

그들은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지만

이제는 깨어나게 할 때네.”

 

3. [세존] “성스런 가르침을 잘 알아서

다른 가르침으로 기울지 않으면

그들은 올바로 깨닫고 온전히 알아

험난한 길을 평탄하게 걷는다네.”

 

(잘 알지 못함의 경, S1.7, 성전협 전재성님역)

 

 

Appatividitā - Not Penetrating

I heard thus. once the Blessed one lived in Sāvatthi, in Jeta's grove in the monastery offered by Anāthapiṇḍika. When the night was waning, a certain deity illuminating the whole of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worshipped, stood on a side and said:

“Not penetrating certain things, one deviates from right view,
The sleeping do not penetrate, it is time to be wakeful.
Thoroughly penetrating certain things, one does not deviate from right view,
Penetratingly and thoroughly, knowing they tread the right path.”

 

(THE TIPITAKA

 

 

Not Penetrated

 

At Savatthi. Standing to one side, that devata recited this verse

in the presence of the Blessed one:

 

Those who have not penetrated things,

Who may be led into others' doctrines,

Fast asleep, they have not yet awakened:

It is time for them to awaken.

 

[The Blessed one:]

Those who have penetrated things well,

Who cannot be led into others' doctrines,

Those awakened ones, having rightly known,

Fare evenly amidst the uneven.

 

(CDB, Bhikkhu Bodhi)

 

 

 

Pali Canon

 

 

불교에서 진리란

 

불교에서 진리란 사성제을 말한다. 따라서 사성제의 가르침이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성스런 가르침’이라 하였다. 그런데 빠알리 원전을 보면 그냥 ‘담마(dhammā)’로 되어 있다. 담마가 여러 가지 뜻이 있음에도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라면 진리가 된다. 그런 진리는 다름아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뜻이 사성제이다. 이런 진리를 알지 못하면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삿된 견해에 치우지기 쉽다는 것이다. 반대로 진리를 알면 삿된 견해에 치우치지 않아 올바로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과도하게 의역하였을까?

 

하늘사람이 읊은 첫 번째 구절을 보면 ‘Yesa dhammā appaividitā이 있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사성제의] 법을 통찰하지 못한 자들은이라 하였다. 담마를 일률적으로 법이라고 번역하는 초불연에서 단지 이라고 써 놓으면 이것이 사성제를 뜻하는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대괄호치기를 이용하여 ‘[사성제의] 법을이라고 주석적으로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통찰하지 못한 자들은이라 하였는데 이는 ‘appaividitā에 대한 과도한 의역이라 본다. 왜 그런가?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라면 appaividitā는 완료형 수동분사(pp) 로서 잘 확인 되지 않은의 뜻이라 한다.

 

appaividitā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na+paividita]’로 되어 있다. paividita를 찾아 보면 paivijànàti의 과거분사형으로 ‘known’ 또는 られたる의 뜻이다. 따라서 부정접두어가 붙어 알려지지 않은이라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통찰하지 못한 자들은이라고 과도하게 의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에서는 잘 알지 못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빠알리어 ‘appaividitā’에 대하여 ‘통찰하지 못한 자들은’이라고 과도하게 의역하였을까?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는 것이 빅쿠 보디의 CDB를 보면 알 수 있다. 빅쿠 보디는 ‘not penetrated things’라고 영역하였기 때문이다.

 

영어 penetrate는 영어사전에 따르면 ‘…을 꿰뚫다, …에 스며 들다, 침투하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1의 의미가 ‘…을 꿰뚫다이다. 이는 통상 한자어로 표현하면 통찰하다로 표시 된다. 따라서 초불연의 통찰하지 못한 자들은이라고 번역한 것은 빠알리원전 ‘appaividitā을 번역하였다기 보다 빅쿠 보디의 영역 ‘not penetrated things’를 중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게송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문도 아니고

 

부처님이 읊은 게송에서 ‘Sambuddhā sammadaññāya caranti visame samanti.’가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완전하게 깨달은 자들 바른 구경의 지혜 구족하여 평탄치 못한 곳에서도 올곧게 가도다.”라고 하였다. 게송임에도 게송의 맛이 나지 않는다. 마치 산문처럼 딱딱하게 보인다. 이는 시어 번역의 한계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각묵스님은 게송에 대한 번역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게송으로 된 가르침들은 운율로 압축되고 축약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다시 한글 운율로 살려서 번역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특히 문학적 재능이 신통치 않은 역자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괴로움이기도 하였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해제글에 따르면 각묵스님은 문학적 재능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게송 번역하는데 있어서 어려웠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어지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역자는 게송들이 가지는 시적인 맛을 살리기 보다는 게송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읽어서 이를 살려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다 보니 게송의 번역이 딱딱하고 건조하기기 이를데 없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문학적 재능이 없는 역자가 게송을 시어로 본역하기 보다 메시지 전달위주로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딱딱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니까야에서 게송이 차지 하는 비중이 매우 높음에도 마치 산문 번역하듯이 게송을 번역하였다면 이를 게송이라 볼 수 있을까? 더구나 각묵스님은 이어지는 글에서 게다가 게송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해석을 중시하다보니 필요이상의 긴 주석을 단게 걱정스럽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주석을 중시하다 보니 게송에 주석적 내용이 침투한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다.

 

위 게송에서 ‘[사성제의] 법을에서 처럼  대괄호치기를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주석적 번역이다. 산문에서조차 대괄호치기기 나오면 읽기가 불편한데, 더구나 시어에서 대괄호치기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또 윗 게송에서 ‘sammadaññāya에 대하여 바른 구경의 지혜 구족하여라고 번역한 것도 주석의 내용이 본문에 침투한 주석적 번역이라 본다. 이렇게 문학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 심오한 게송을 번역하였을 때 게송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다. 이럴 때 무어라 불러야 할까?

 

문학적 언어적 소양이 있어야

 

어떻게 해야 번역을 잘 할 수 있을까? 초불연의 청정도론 발간사에 따르면 언어학적 소양, 경에 대한 안목, 수행의 뒷받침 이렇게 세 가지가 있어야 함을 말하였다. 여기에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문학적 재능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은 제2의 창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적 재능이 없다면 번역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본다.

 

게송을 번역할 때 정확한 메시지 전달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다 외국어 실력이 뒷받침 되면 금상첨화이다. 따라서 영어 하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빠알리어로 번역된 모든 언어에 대한 소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빠알리어와 산스크리트어와 영어는 물론 독일어, 일본, 티벳어까지 아는 언어적 소양을 말한다.

 

문학적 언어적 소양의 바탕하에서 번역이 이루어져야 독자들을 감동시킬 것이다. 단지 수행경험이 있다고 해서 좋은 번역작품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번역인지 아닌지는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2013-09-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