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종류의 번역서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이유, 니까야의 오역(誤譯)과 중역(重譯)
법과 담마
흔히 하는 말 중에 ‘법’이 있다. 주로 “~하는 법이야”라고 말할 때 그 법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법이 사실을 알고 보면 불교에서 왔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법이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자문화권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는 법이라는 말은 불교용어임에 틀림없다.
초기불교가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요즘 ‘담마’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 ‘다르마’가 아니라 ‘담마’이다. 이는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법문에서 다르마가 아닌 담마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학자나 스님들 만이 ‘다르마’라고 말할 뿐 이제 ‘담마’라는 말이 보편화 된 것 같다.
빠알리어 담마(Dhamma)는 일반적으로 ‘법(法)’이라는 말로 불리운다. 이는 한자문화의 영향이다. 중국에서 번역된 한문경전을 통하여 법이라는 말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말이 담마라는 말 보다 아직까지는 더 친숙하게 느껴 진다. 그래서일까 빠알리 니까야 번역서에서도 담마라는 말 대신 법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번역의 경직성
빠알리어 담마는 여러가지 뜻이 있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자신의 번역서 빠알리니까야 해제에서 담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다양한 의미를 지닌 빠알리어를 거기에 일대일 대응되는 하나의 한글로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역에서는 가능했지만 초기의 한역경전들을 보면, 동일한 빠알리어 경전들도 다양하게 역자에 따라 달리 번역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역에서는 모든 담마(dhamma)를 법(法)이라고 번역하는 등의 번역에서의 경직성이 강했다. 이러한 경직성은 한역장경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전재성님, 각권 니까야 해제)
전재성님은 번역의 경직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한역경전을 보면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는 용어를 일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담마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원리로서의 담마
그래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담마(dhamma: sk. Dharma)는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기는 하지만, 담마는 부처님에게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무시이래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가르치는 진리, 선행, 해탈의 기본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전재성님, 각권 니까야 해제)
담마라는 말은 여러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 ‘원리’라 한다. 이는 과거불이 출현한 이래 발견한 기본적인 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연기법일 것이다.
연기법은 기본적인 원리이다. 이는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라고 말씀 하신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때 담마는 원리로서의 담마를 말한다.
실재하는 담마
이와 같이 원리로서의 담마에 대하여 해제글에 따르면 “담마가 단지 인간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나타나는 종교적인 가르침을 넘어서는 시공간적으로 보편적인 원리인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으며, 또 이런 원리는 “최종목표인 열반으로 이끄는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실재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연기법과 같은 원리가 왜 ‘실재’한다고 하였을까?
실재라는 말은 ‘실재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실재로 존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가장 간단하게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경행을 할 때 발을 내딛음으로 인하여 부드러운 느낌이나 딱딱한 느낌을 받았다면 ‘지대(地大)’가 실재함을 알 수 있다. 또 시원하거나 더움을 느꼈다면 ‘화대(火大)’가 실재함을 알 수 있다. 또 호흡의 들숨과 날숨을 통하여 풍대(風大)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수행을 통하여 지수화풍 사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수행을 통하여 느낌으로 알 수 있을 때 지수화풍은 실재로 존재하는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연기법도 마찬가지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연기법은 부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연기법이 실재함을 말한다. 어떻게 실재함을 알 수 있을까? 가장 좋은 예가 ‘깟짜야나곳따경(S12.15)’일 것이다.
깟짜야나곳따경에 따르면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하였다.
조건에 따라 현상이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였을 때 지혜가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런 지혜를 통찰하였을 때 연기법은 실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출현하였던 모든 부처님들이 발견한 법이 바로 연기법이다. 그런 연기법은 창조주가 만든 것도 아니고 하나의 원리로서 실재하는 것이다. 다만 지혜로서 통찰하는 자만이 실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원리로서 담마이다.
담마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방침
전재성님에 따르면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고만 번역하면 번역이 경직되고 말 것이라 하였다. 그런 법은 원리로서의 담마를 말한다. 하지만 담마라는 말은 원리라는 뜻 이외에도 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때에 따라서 진리, 가르침, 사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고, 심지어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초불연의 번역방침은 다르다. 초불연의 용어설명을 해 놓은 청정도론 해제글에 따르면 담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번역원칙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불교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dhamma는 ‘법’으로 한역 된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혹 드물게 문맥에 따라 현상 등으로 옮긴 경우가 있는데 이 대는 반드시 ‘(法)’이라 부기해 넣어서 그것이 담마(dhamma)의 역어임을 알 수 있게 했다.
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내 안에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은 불교의 근본이며 특히 법(dhamma)과 대면함(abhi)을 근본주제로 하는 아비담마의 생명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현상’이니, ‘것’이니, ‘사물’이니 하는 애매한 용어로 dhamma를 옮기는 것은 피하였다.
그리고 viparinnama-dhamma같은 경우에는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든지 ‘변하기 마련이며’라는 등으로 옮기지 않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라고 ‘법’을 살려서 옮겼다. 경에서 부처님께서 dhamma라는 술어를 채용하셨을 때는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해제, 초불연 대림스님)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은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이끌고 있다. 두 분 스님 모두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분담하여 번역하여 놓았다. 그런 초불연의 번역방침을 보면 매우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는 번역어를 고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의문점은
그런데 글을 보면 담마에 대하여 ‘현상’ ‘것’ ‘사물’ 등으로 바꾸어 번역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성전협의 전재성님의 번역스타일에 대한 비판이라 보여진다. 전재성님은 담마에 대하여 문맥에 따라 진리, 가르침, 사실, 것 등으로 번역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불연의 번역지침을 보면 담마에 대하여 한자용어인 ‘법’으로 통일하여 적용할 것을 천명해 놓았다. 이유는 “경에서 부처님께서 dhamma라는 술어를 채용하셨을 때는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는 성전협의 번역과 차별을 두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담마에 대하여 굳이 법이라는 용어를 고수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존중한다면 한자어 법(法)을 사용할 것이 아니라 빠알리 원어 그 자체인 ‘담마(Dhamma)’라는 용어를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번역할 때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S6.1)”라 하지 않고, “내가 증득한 이 담마는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왜 경직된 번역어 ‘법(法)’을 고수할까?
초불연에서는 시종일관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는 용어를 고수하고 있다. 이유는 부처님이 담마라고 말씀 하신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바꾸어는 안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다 보니 전재성님의 지적대로 번역이 ‘경직’되어 보인다. 천편일률적으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법이라는 말을 적용하다 보니 번역이 딱딱해 보이는 것이다. “일체가 공한 것이여” 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일체가 공한 법이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왜 법이라는 경직된 번역어 적용을 고수 하는 것일까?
각묵스님이 번역한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을 보면 빅쿠 보디의 CDB를 많이 참고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CDB의 해제글을 보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초불연에서 왜 법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지에 대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빅쿠 보디가 작성한 CDB해제글을 보면 담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DHAMMA
When the word denotes the Buddha's teaching, I have retained the Pali
"Dhamma," for even "teaching" fails to convey the idea that
what the Buddha teaches as the Dhamma is not a system of
thought original to himself but the fundamental principles of
truth, virtue, and liberation discovered and taught by all
Buddhas throughout beginningless time. This is the Dhamma
Venerated by the Buddhas of the past, present, and future,
which they look upon as their own standard and guide (see 6:2).
(Bhikkhu Bodhi, CDB )
빅쿠 보디가 영역한 상윳따니까야를 CDB(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라 한다. 그런데 해제글을 보면 초불연 청정도론 해제에서 담마에 대한 설명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어떤 내용일까? 위 영문을 번역해 보았다.
담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시할 때 나는 빠알리어 “담마(Dhamma)”를 유지해 왔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담마는 사유의 구조라거나 부처님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무시이래 모든 부처님들이 발견하고 말씀 하여 온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심지어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것 조차 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바로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들에 기준과 가이드로 삼아 존중된 담마이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빅쿠 보디의 글에 따르면 왜 담마라고 써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런 말은 초불연에서 “부처님께서 dhamma라는 술어를 채용하셨을 때는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과 일치 된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 담마라고 말한 것은 담마라고 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초불연 번역이 빅쿠 보디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존중의 경(S6.2)에서
빅쿠 보디는 담마에 대하여 “Teaching(가르침)”이라는 용어조차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빅쿠 보디는 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빅쿠 보디는 글의 말미에서 ‘(see 6:2)’라 하였다. 여섯 번째 상윳따니까야 두 번째 경, 즉 S6.2를 참고하라고 하였다.
S6.2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브라흐마상윳따(S6)에 있는 ‘존중의 경(Gāravasutta, S6.2)’이다. 경에서 빅쿠 보디가 참고한 것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evametaṃ bhagavā, evametaṃ sugata. Yepi te bhante ahesuṃ atītamaddhānaṃ arahanto sammāsambuddhā tepi bhagavanto dhammaññeva sakkatvā garu katvā upanissāya vihariṃsu. Yepi te bhante bhavissanti anāgatamaddhānaṃ arahanto sammāsambuddhā tepi bhagavanto dhammaññeva sakkatvā garu katvā upanissāya viharissanti. Bhagavāpi bhante etarahi arahaṃ sammāsambuddho dhammaññeva sakkatvā garu katvā upanissāya viharatūti.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러하옵니다. 선서이시여, 세존이시여, 과거의 아라한-정등각자이신 세존들께서도 역시 오직 법을 존경하고 의지하여 머물렀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의 아라한-정등각자이신 세존들께서도 역시 오직 법을 존경하고 의지하여 머무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자이신 세존들께서도 역시 오직 법을 존경하고 의지하여 머무십시요.”
(존중 경, S6.2, 초불연 각묵스님역)
[싸함빠띠]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그렇습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과거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셨던 세존들께서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미래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셨던 세존들께서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 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현재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셨던 세존들께서도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그것에 의지 합니다.”
(존중의 경, S6.2, 성전협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아자빨라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브라흐마 사함빠띠가 한 말이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지 5주째라 한다.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과거의 부처님도 깨달았던 것이고 미래의 부처님도 깨달았던 것이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을 말한다. 이미 원리로서 정해져 있는 법을 말한다. 그런 원리를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을 찬탄하는 내용이다.
빅쿠 보디의 원칙
이 원리, 진리, 법이라고 말하여 지는 것이 담마이다. 그래서 빠알리 원문에는 ‘dhamma’로 표현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빅쿠 보디는 담마에 대하여 담마로 표현해야지 가르침이라고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또 CDB의 영향을 받은 초불연에서도 “경에서 부처님께서 dhamma라는 술어를 채용하셨을 때는 그런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담마에 대하여 법이라는 번역어를 고수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S6.2에서 시종일관 “오직 법을 존경하고”라고 번역하여 담마에 대하여 오직 ‘법’이라는 용어를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빅쿠 보디의 번역어 “and dwelt in dependence just on the Dhamma itself.” 라 하여 ‘Dhamma’를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진리를 공경하고”라고 하여 담마에 대하여 ‘진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탄력적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초불연의 번역에 대한 원칙이 빅쿠 보디의 번역의 원칙과 일치함을 확인 할 수 있다.
초불연의 번역어 ‘머무르다’
그런데 번역의 원칙만 일치 하는 것이 아니라 번역의 방식 역시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존중의 경(S6.2)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Yannūnāhaṃ yvāyaṃ dhammo mayā abhisambuddho tameva dhammaṃ sakkatvā garu katvā upanissāya vihareyyanti.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무르리라.
(존중 경, S6.2, 초불연 각묵스님역)
나는 내 스스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거기에 의지 하는 것이 어떨까?
(존중의 경, S6.2, 성전협 전재성님역)
두 문장을 보면 마치 서로 다른 내용처럼 보인다. 초불연에서는 ‘다짐’하는 것으로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의문형’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또 사용되는 용어도 다르다. 담마(dhamma)에 대하여 전자는 ‘법’으로 하였고, 후자는 ‘진리’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것이 또 있다. 초불연의 “의지하여 머무르리라.”와 “거기에 의지 하는 것이 어떨까?”라는 대목이다. 초불연에는 ‘머무르리라’가 있는데, 바로 이 대목이 두 번역서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본다.
이 부분과 관련된 빠알리어가 ‘upanissāya vihareyyanti.’이다. ‘의지하여 머무르다’의 뜻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초불연의 번역이 직역에 가깝다. 그런데 빅쿠 보디의 CDB에서도 ‘and dwell in dependence on’으로 되어 있어서 ‘의지하여 머무르다’로 번역되어 있다. 영어 dwell이 ‘머무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this very Dhamma to which I have fully awakened.’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내가 완전히 깨달은 바로 이법”이 된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는 ‘바로’라는 말이다. 이는 영어 ‘very’의 번역어이기 때문이다. 영어 ‘very’는 ‘매우, 아주, 정말’로 번역 되지만 강조를 뜻하는 ‘바로’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초불연의 ‘바로’라는 말은 영어 very를 번역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 보디의 영역과 초불연의 번역이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각주를 보면
위 빠알리어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이나 CDB에서는 각주가 없다. 그러나 성전협에서는 각주를 해 놓았다. 문구에 따르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진리를 공경하고 존중하고 거기에 의지 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진리, 즉 담마가 후에 법신불사상의 시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법신불사상이란 무엇일까? 네이버백과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뜻하며 다른 삼신불인 응신(應身)과 보신(報身)의 모체가 된다. 불교 초기에는 석가모니 한 사람만을 부처로 보았으나,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에는 신격화되어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후에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석가모니만을 부처로 신격화하여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원한 과거부터 이미 성불(成佛)한 부처가 존재하였고 미래에도 존재하여 인간을 교화할 것이라는 미래불, 과거불 관념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이라 한다.
(법신불)
법신불사상은 담마가 신격화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 뿐만 아니라 과거불이나 미래불의 담마가 인격화 되면 비로자나불이 된다.
담마가 인격신으로 변신된 것이 비로자나불인 것이다. 담마가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항상 원리로서 존재한다고 보는 것 역시 법신 사상에 해당될 것이디. 이런 법신사상의 시초가 존중의 경(S6.2)에서 보여 지는 것이다.
담마따(dhammatā)에 대하여
그런데 경에서 법신사상을 뜻하는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abbe saddhammagaruno vihaṃsu3 viharanti ca,
Athopi viharissanti esā buddhāna dhammatā.
그분들은 모두 정법을 공경하며
사셨고 살고 계시며 또한 살아가실 것이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법다움이라네.
(존중 경, S6.2, 초불연 각묵스님역)
[싸함빠띠]
모두가 올바른 가르침을 공경하며 살았고,
살고 있으며, 또한 살아갈 것이니,
이것이 깨달은 님들의 법성이네.
(존중의 경, S6.2, 성전협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담마따(dhammatā)’라는 빠알리어가 있다. 이 담마따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법다움’이라 번역하였고, 성전협에서는 ‘법성’이라 번역하였다. 마치 두 곳에서 번역의 원칙이 바뀐 것처럼 보인다. 초불연에서는 가급적 절집에서 사용되는 한자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고, 성전협에서는 가급적 우리말로 풀어 쓰는 경향이 있는데 ‘법다움’과 ‘법성’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번역의 원칙이 서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빠알리 게송을 보면 ‘saddhammagaruno’가 있다. 복합어에서 saddhamma는 ‘the true doctrine’이라는 뜻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한문용어를 사용하여 ‘정법’이라 번역하였다. 담마를 다른 뜻이 아닌 법이라는 용어를 고수하는 노력의 일환이라면 당연한 번역이라 본다. 그러나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saddhamma에 대하여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였다. 담마에 대하여 일률적으로 법이라는 용어를 경직되게 적용하지 않고 탄력적으로 적용한 결과라 본다.
왜 ‘법다움’이라 하였을까?
그런데 ‘담마따(dhammatā)’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CDB에도 각주가 없다. 다만 성전협에서는 주석에 근거하지 않고 buddhāna dhammatā에 대하여 “원래 ‘부처님들의 법성’이라는 뜻이다.”라고 매우 짤막하게 각주 하였다.
Dhammatā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보면 ‘,(f.) [Sk. dharmità] conformity to the Dhammaniyàma (see niyàma), fitness, propriety; a general rule, higher law, cosmic law, general practice, regular phenomenon, usual habit’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특히 cosmic law라는 말이 눈에 띤다. 그래서일까 빠알리-일본어 사전에는 ‘法性(법성), 常法(상법), 習性(습성)’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담마따에 대하여 법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담마따의 번역어 법성은 법(Dhamma)과 성품(nature)의 결합어이다. 이는 담마가 원리로서 항상 실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여래장 사상으로 발전되어 불성이 되고, 선종에 이르면 진여, 참나 등으로 실재하는 것이 된다. 이로 본다면 빠알리니까야에 표현되어 있는 ‘담마따(dhammatā)’는 대승불교에 법성, 불성, 진여, 참나, 본마음 등으로 불리우는 여래장 사상의 원류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이 ‘담마따(dhammatā)’에 대하여 본래 뜻과 거리가 먼 ‘법다움’이라고 번역하였다.
‘담마따(dhammatā)’와 관련된 CDB의 게송을 보면 “All have dwelt, will dwell, and dwell, Deeply revering the true Dhamma: For the Buuddhas This is a natural law”라 되어 있다. 이를 직역하면 “모든 것은 머물러 왔다. 머물것이다. 그리고 머문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이 진실로 존중한 자연의 법이다”가 될 것이다. 이처럼 CDB에서도 ‘a natural law’라 하여 ‘자연법’으로 해석하였는데, 초불연에서는 ‘법다움’이라고 동떨어지게 번역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법다움이라네.”라 하였는데 삼세제불과 법다움이라는 말이 잘 매칭 되지 않는다.
또 초불연의 법다움 또는 법답게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지 ‘애매모호’하다. 초불연 에서 담마에 대한 번역의 원칙에서 “‘현상’이니, ‘것’이니, ‘사물’이니 하는 애매한 용어로 dhamma를 옮기는 것은 피한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법다움’이나 ‘법답게’라는 말이 무엇을 뜻한다는 말인가? ‘법다움’이나 ‘법답게’라는 말 자체가 애매모호한 용어가 아닐까? 그러나 성전협에서는 ‘담마따(dhammatā)’에 대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법성(法性)’이라고 번역해 놓아 대조를 이루고 있다.
리스 데이비스 여사의 오역
존중의 경(S6.2)에서 세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Tasmā hi atthakāmena
mahattamabhikaṅkhatā,
Saddhammo garu kātabbo
saraṃ buddhānasāsanaṃ.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자
이러한 부처님들의 교법을 기억하여
정법을 존중해야 하리.
(존중 경, S6.2, 초불연 각묵스님역)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바라고
참모임에 성장을 소망하는 자는
깨달은 님의 가르침을 새겨
올바른 가르침을 존중해야 하리.
(존중의 경, S6.2, 성전협 전재성님역)
세 번째 게송에 대해서도 초불연과 CDB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성전협의 전재성님은 매우 상세한 주석을 하였다. 그것도 주석서에 없는 개인적 견해이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게송에서 두 번째 문구인 “참모임에 성장을 소망하는 자는 (mahattamabhikaṅkhatā)”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mahattamabhikaṅkhatā : 여기서 mahatta는 리스 데이비스 부인 번역(Grs.II.22)의 ‘위대한 자아(maha atta)’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maha의 추상명사로 ‘큰 상태’를 뜻하며, 비구 보디의 번역(Cdb.235)은 ‘영적인 성장’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리스 데이비스 부인과 동일한 맥락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앙굿따라니까야의 문맥상으로 보면 ‘참모임의 커다란 성장’을 의미한다.
(mahattamabhikaṅkhatā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은 중요한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였다. 하나는 mahattamabhikaṅkhatā복합에서 mahatta에 대한 것이다. 이 mahatta는 다시 maha atta로 나눌 수 있는데, PTS의 리스 데이비스 여사는 이를 그대로 직역하여 ‘위대한 자아’로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처님은 아뜨만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인 리스 데이비스 여사가 위대한 자아라고 번역한 것은 서양인으로서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본다. 이런 점은 빅쿠 보디 역시 마찬가지라 본다.
빅쿠 보디의 오역
미국인인 빅쿠 보디는 한 발 더 나아가 maha atta 에 대하여 ‘영적인 성장’이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CDB에서 다음과 같은 개송을 보면 알 수 있다.
Therefore one desiring his own good,
Aspiring for spiritual greatness,
Should deeply revere the true Dhamma,
Recollecting the Buddha’s Teaching
(빅쿠 보디, CDB)
빅쿠 보디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자신의 선을 바라면서
영적성장을 열망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회상하면서
참된 담마를 깊이 존중해야만 한다.
빅쿠 보디는 빠알리어 담마에 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담마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보면 Buddha’s Teaching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빠알리어 구문이 buddhānasāsanaṃ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Sāsana에 대하여 Teaching으로 영역한 것이다. 그래서 이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번역된다.
두 번째 문구를 보면 ‘Aspiring for spiritual greatness’로 되어 있다. 이는 ‘영적성장을 열망한다면’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는 오역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아이니 영적 성장이니 하는 말들이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초불연의 오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 번역을 보면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되어 있다. 이는 전재성님이 지적한 대로 리스 데이비스 여사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리스 데이비스 여사는 mahatta에 대하여 ‘위대한 자아’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자아’가 ‘추구하는 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초불연에서는 왜 CDB의 번역을 따르지 않았을까?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따르면 빅쿠 보디의 CDB를 많이 참조 하였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왜 mahatta에 대해서만큼은 따르지 않는 것일까? 이는 빅쿠 보디가 번역한 ‘spiritual greatness(영적성장)’이라는 영역이 잘못 되었음을 파악하였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불교에서 영적성장이라는 말은 적합한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초불연의 번역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자’는 오역이다. 영역을 그대로 답습함에 따른 오역으로 보인다.
우르웰라경(A4.21)를 놓쳐서
전재성님이 두 번째 지적한 것이 앙굿따라니까야 대한 것이다. 리스 데이비스 여사나 빅쿠 보디, 그리고 초불연 모두 잘못된 번역을 한 것은 앙굿따라 니까야 실려 있는 우르웰라경(A4.21)를 놓친 것이라 보여진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상윳따니까야 존중의 경(S6.2)와 똑 같은 내용이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는 우루웰라경(A4.21)이라 한다. 그런데 우루웰라경에는 게송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더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to ca kho bhikkhave saṅghopi mahattena samannāgato atha me saṅghepi (tibba) gāravoti.
비구들이여, 승가가 성립되어 위대함을 구족하게 되자 나의 승가도 역시 크게 존중되었다.”
(우루웰라 경, A4.21, 초불연 대림스님역)
수행승들이여, 그렇게 해서 참모임이 크게 성장하자, 참모임에도 경의를 표했다.
(우르벨라의 경, A4.21, 성전협 전재성님역)
우루웰라경의 마지막 구절이다. 상윳따니까야 존중의 경에서는 게송을 끝으로 경이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앙굿따라니까야 우르웰라 경에서는 게송 다음에 이어지는 추가 구절이 있다. 바로 이 구절을 놓쳐서 리스 데이비스 여사, 빅쿠 보디, 초불연이 오역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성전협의 ‘참모임에 성장을 소망하는 자’로 번역하여 차별화 되었다. 왜 자아의 성장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승가의 성장을 추구하는 자라는 뜻으로 번역하였을까?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십시요”
앙굿따라니까야 우르웰라 경 마지막 구절을 보면 “승가가 성립되어 위대함을 구족하게 되자 나의 승가도 역시 크게 존중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슨말뜻일까? 바로 이 문구가 mahatta에 대하여 ‘위대한 자아’나 ‘영적 성장을 하는 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참모임에 성장을 소망하는 자’라 번역되어야 하는 결정적 이유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이는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부처님에게 가사를 보시하려 하자 부처님은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십시요. 그대가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면 니와 참모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M142)”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고따미가 가사를 개인적으로 보시하려 하자 승가에 보시하라고 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비구 개인의 성장 보다 승가가 성장하여야 함을 말한다. 불법승 삼보가 있어야 불교가 성립 하듯이 승가가 있어야 비구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개인적으로 보시하는 것을 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라 본다.
스님들은 부자이지만 승단은 가난한 이유
불자들이 스님들 개인에게는 열심히 보시 하지만 승가에 보시하는 것은 매우 인색하다. 만일 스님들에게만 보시하고 승단에 보시 하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승단이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은 부자이지만 승단은 가난하다”라는 말이 있다.
종단 차원에서 커다란 불사를 하려 해도 돈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이 있다. 반면 스님들은 돈이 많아 스님이 개인적으로 불사를 하면 성공하는 이유는 스님들이 돈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신도들이 승단에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을 보고 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결국 스님의 타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소유와 청정을 원칙으로 하는 스님이 돈이 생기면 공부할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따습고 배부르면 ‘음심만 치성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입적한 청화스님은 “스님들에게 돈 주지 마세요. 호주머니에 돈 있으면 공부안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이 고따미에게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십시요. 그대가 그것을 참모임에 보시하면 니와 참모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M142)”말씀 하신 것은 오늘날과 같은 스님의 타락을 염두에 두고서 한말처럼 보인다.
비구 보다 승가가 우선인 이유
맛지마니까야 ‘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M142)’에서 부처님이 보시의 개념에 대해서 말하였듯이 비구 보다 승가가 우선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상윳따니까야 ‘존중의 경(S6.2)’에서 mahatta에 대하여 ‘참모임에 성장을 소망하는 자’라고 번역한 것은 타당해 보인다. 반면 초불연에서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번역한 것은 서양번역자의 번역을 답습한 것이라 보여 진다.
오로지 한 스승만?
공부를 할 때 오로지 한 스승 밑에서 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스승을 찾아서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이 좋을까? 스승이 훌륭하다면 굳이 옮겨 다닐 필요가 없지만 자신과 맞지 않다면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전자 보다 후자가 더 나을 듯 하다. 이는 부처님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스승을 두 번 옮겨 다녔다. 출가한 후에 가장 먼저 찾아간 스승은 ‘알랄라 깔라마’이었다. 그러나 스승의 경지에 오르자 그곳을 떠나야 했다.
떠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귀한 구함의 경(M27)’에 따르면 “그러나 그 때 나에게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 머무는 한, 그의 가르침을 싫어하여 떠남, 사라짐, 소멸, 적정, 지혜,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나는 그 가르침에 만족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싫어 하여 떠났다.” 라고 되어 있다.
부처침이 스승을 떠난 것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라기 보다 열반으로 이끄는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웃따까 라마뿟따를 찾아 갔으나 경지에 오르자 전번과 똑 같은 이유로 또 그곳을 떠났다. 이렇게 스승을 찾아 떠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로지 한 번역서만?
초기경전도 마차가지 일 것이다. 인터넷상에서는 초불연 번역이 눈에 많이 띈다. 이는 인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경을 해도 초불연 것이 다수이다. 승가에서는 거의 대부분 초불연 것을 사용하고 있다. 언론 매체에서도 “교학적 이해를 위해 <상윳따 니까야 주석서>와 <청정도론>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참조해 상좌부의 전통견해를 계승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권마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경들을 소개하기 위해 60쪽에 달하는 해제를 더했다.(불교신문)” 이라 하여 초불연 번역물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하지만 과연 끝까지 읽어 보고 그런 글을 썼는지 의문이다. 오역도 있고 잘못된 부분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비교를 하여 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초불연 번역이 빅쿠 보디의 CDB영역을 많이 참고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초불연 번역이 가장 나은 것으로 알아 “비구여~”로 시작 되는 문구를 자주 인용한다.
한 종류의 번역서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이유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국에 두 종류의 번역서가 존재한다는 것은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의 근기에 맞게 선택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명백히 잘못된 부분은 집고 넘어 가야 한다.
청원경에서 “그대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를 가진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S6.1, 초불연)”하였을 때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한 것은 대표적인 ‘오역’이다. 부처님이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믿음부터 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와서 보라!’하였지 먼저 믿음부터 내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는 문구가 맞을 수도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간화선 수행을 할 때 자신이 부처인 것을 믿는 것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화선 3요체 중의 하나가 믿음을 강조 하는 ‘대신근’이다. 이처럼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한국불교 현실에서 본다면 초불연의 번역 “귀를 가진자,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M26, 초불연)”라고 말한 것은 결코 오역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존중의 경(S6.2)에서 보는 것처럼 ‘마하 앗따(maha atta)’에 대하여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 본다. 또 외국의 영역을 답습한 것이라 한다. 자주적 번역을 하였다면 그런 번역이 나올 수 없다. 또 앙굿따라니까야의 우르웰라경(A4.21)을 참고 하였다면 비불교적 개념인 리스 데이비스 여사의 ‘위대한 자아’라거나, 빅쿠 보디의 ‘영적 성장을 추구하는 자’와 같은 용어를 답습하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한 종류의 번역서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시중에 두 종류의 번역서가 나와 있기 때문에 모두 참고하는 것이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고 본다.
2013-09-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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