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지를 끊고…”수께끼 게송, 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S1.5)
다섯은 무엇을 의미할까?
초기불교를 접하고 나서 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매우 정교한 교리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체계적인 교리를 접하면 마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교리에 대한 게송이 있다. 마치 수수께끼와 같은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ichinda suttaṃ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ṃ gāthāya ajjhabhāsi:3
Kati chinde kati jahe kati cuttari bhāvaye,
Kati saṅgātigo "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īti:
(Bhagavā:)
Pañca chinde pañca jahe pañca cuttari bhāvaye,
Pañca saṅgātigo "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īti.
얼마나 끊음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얼마나 끊고, 얼마나 버리고
얼마나 다시 더 닦아야 합니까?
얼마나 많은 속박을 벗어나야만
그를 일러 폭류 건넌 비구라 합니까?”
3. [세존]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 제거하고
다섯 가지 다시 더 닦아야 하노라.
다섯 가지 속박을 모두 다 벗어나야
그를 일러 폭류 건넌 비구라 하노라.”
(얼마나 끊음 경,S1.5, 초불연 각묵스님역)
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 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2. [하늘사람] “어떤 것을 끊고 어떤 것을 버리랴?
그 위에 어떤 것을 더 닦고
어떤 집착을 극복해야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 부르랴?”
3. [세존] “다섯을 끊고 다섯을 버린 뒤
그 위에 다섯을 더 닦고 다섯 가지 집착을 극복하면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 부르리.”
(Katichinda sutta-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 S1.5, 성전협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마치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것 같다. 하늘사람이 어떤 것을 끊고, 어떤 것을 닦고, 어떤 집착을 극복해야 집착을 건넌 수행승이라 하는지 게송으로 넌지시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섯을 끊고 다섯을 버린 뒤 그 위에 다섯을 더 닦고 다섯 가지 집착을 극복하면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고 말한다. 대체 다섯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건도 아닌데‘얼마나’라고?
번역을 보면 경의 제목이 다르다. 초불연에서는 ‘얼마나 끊음 경’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이라 하였다.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두고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빠알리 원어를 보면 경의 제목이 ‘Katichinda sutta’로 되어 있다. Katichinda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kati+chinda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kati는 how many? 의 뜻이다. 표시를 뜻하는 의문사이다. 그래서일까 빅쿠 보디의 영문제목을 보면 ‘How Many Must one Cut?’으로 되어 있다. 이를 단순히 직역하면 ‘얼마나 끊어야 하나?’라고 번역 될 것이다. 빅쿠 보디의 번역을 많이 참조 하였다는 초불연 번역을 보면 ‘얼마나 끊음 경’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라는 말이 타당할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얼마나’는 ‘의문문에 쓰여, 수량이나 정도를 물어보는 데 쓰는 말.’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흔히 물건값을 물어 볼 때 “이것 얼마에요?”라고 말하는데 그 얼마나 개념이라 보여 진다. 그런데 수수께끼 같은 게송을 보면 물건값을 부르는 듯한 얼마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끊느냐는 것이다.
‘얼마나’와 ‘어떻게’는 다른 말이다. ‘얼마나’가 수량이나 정도를 물어 보는 양의 개념이라면, ‘어떻게’는 방법이나 방식의 개념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영어 how를 어떻게 번역하였는가에 달라진다.
영어 how는 ‘1) 어떻게, 2) 얼마나, 3) 방법, 4) 몇, 5) 왜’ 의 뜻이 있다. 제1의 뜻이 ‘어떻게’이다. 이는 방식이나 방법을 말한다. ‘얼마나’는 양을 말한다. 그래서 물건값을 물어 볼 때 “How much is it?”이라 한다. “이 것 얼마에요?”라는 뜻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얼마나 끊고, 얼마나 버리고~”라고 되어 있다. 물건도 아닌데 마치 물건값 물어 보듯이 ‘얼마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Kati에 대한 영역 ‘How Many’에 대하여 별 생각 없이 번역해서 발생된 문제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성전협에서는 “어떤 것을 끊고 어떤 것을 버리랴?”하여 방법론적으로 접근하였다.
다섯 가지 끊어야 할 것은?
경을 보면 다섯에 대한 이야기가 네 번 등장한다. 끊고, 버리고, 닦고, 극복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수수께끼 문제를 보는 듯 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 번역서의 각주를 참고 하여 표를 만들었다.
먼저 다섯 가지 끊어야 할 것이다. 다섯 가지 끊어야 할 것(Pañca chinde)은 ‘오하분결’을 말한다.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이라는 뜻이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다섯 가지 끊어야 할 것(Pañca chinde, 오하분결)
No |
빠알리어 |
초불연 용어 |
성전협 용어 |
|
orambhagiyani saṃyojjanāni |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 |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결박 |
1 |
sakkāya-diṭṭhi |
유신견 |
개체가 있다는 견해 |
2 |
Sīlabbata-parāmāsa
|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
3 |
vicikicchā |
의심 |
회의적 의심 |
4 |
kāma-rāga |
감각적 욕망 |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
5 |
paṭigha |
악의(byāpāda) |
분노(paṭigha) |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열 가지 결박 중에 낮은 단계의 다섯 가지에 대한 것이다. 이 결박에 대한 빠알리어가 ‘삼요자나(saṃyojanā)’이다.
삼요자나(saṃyojanā), 족쇄인가 결박인가?
삼요자나(saṃyojanā)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았다. 영어로 “'fetters'. There are 10 fetters tying beings to the wheel of existence,”로 설명되어 있다. 윤회하는 존재로 묶어 두는 열 가지 족쇄 또는 속박, 구속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빠알리-일본어 사전에는 結(결), 繫縛(계박), 結縛.(결박)으로 되어 있다. 물건을 뜻하는 족쇄가 아니라 무언가에 매여 있는 것을 말한다.
삼요자나(saṃyojanā)는 ‘함께 묶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비담마에서는 뭇삶을 윤회 하게 하는 정신적 요인이라고 설명된다. 그런 정신적인 요인은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금취, 탐욕, 성냄 등 열 가지에 달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신적인 요소에 대하여 물질을 뜻하는 ‘족쇄’라고 번역한 것은 ‘과도한 의역’이라 본다. 왜냐하면 열 가지는 존재를 윤회하는 삶으로 붙들어 매는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윤회하는 삶이 교도소에서 사는 죄수 같다고 할지라도 요즘 교도소에서 죄수를 족쇄로 묶어 놓는 곳이 있을까?
성전협에서는 삼요자나에 대하여 ‘결박’이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유신견, 탐욕, 성냄 등 열 가지 사항이 ‘정신적 요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paṭigha(분노)와 byāpāda(악의)는 어떻게 다른가
위 표를 보면 번역어가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같은 빠알리어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번역자마다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중에 다섯 번째 항목 ‘빠띠가(paṭigha)’가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악의(byāpāda)’라 하였고, 성전협은 ‘분노(paṭigha)’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의 ‘악의(byāpāda)’라는 번역은 문제가 있다. 어떤 문제인가?
초불연 각주를 보면 삼요자나에 대한 설명이 길게 되어 있다. 주로 청정도론과 아비담마 길잡이에 있는 내용을 다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삼요자나의 다섯 번째 항목인 ‘paṭigha’에 대하여 ‘byāpāda’로 설명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로 자양분경(S46.51)과 아비담마 길잡이 7장 6절을 참고 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paṭigha(분노)’ 와 ‘byāpāda(악의)’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빠띠가(paṭigha, 분노)는 대상이 있는 분노를 뜻한다. 그래서 성냄(dosa) 과 일치한다. 반면 뱌빠다(byāpāda,악의)는 원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적의를 뜻한다. 마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갖는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달리 사용법이 다른 것이다.
“아뱌-빳죠 호미! (avyāpajjho homi, 제가 성냄에서 벗어나기를!)”
빠띠가(paṭigha, 분노)는 분노의 대상이 있어서 직접적인 분노가 표출 된 것을 말한다. 그런 분노는 결국 업보를 가져 오기 때문에 윤회하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빠띠가는 삼요자나(결박)에 해당된다.
그러나 뱌빠다(byāpāda,악의)는 구체적인 분노의 대상이 없는 막연한 적개심에 해당된다. 그래서 ‘악의’ 또는 ‘적의’라고 번역된다. 그래서일까 불자들에게 인기 있는 빠알리 노래 중에 자애송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Ahaṃ avero homi 아항 아웨로 호미
avyāpajjho homi 아뱌-빳죠 호미
anīgho homi 아니-고 호미
sukhī - attānaṃ pariharāmi 수키- 앗따-남 빠리하라-미
제가 증오에서 벗어나기를!
제가 성냄에서 벗어나기를!
제가 격정에서 벗어나기를!
제가 행복하게 지내게 하여지이다!
(자애송)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아뱌-빳죠 호미 (avyāpajjho homi)”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뱌빠다(byāpāda,악의)에 부정접두어 a가 붙어 “제가 성냄에서 벗어나기를!”라고 번역된다. 어떤 구체적인 성냄이 대상이 있다라기 보다 막연한 분노, 적개심, 악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뱌빠다(byāpāda,악의)는 오장애에서
그런데 초기경에 뱌빠다(byāpāda,악의)는 오장애의 용어로 사용된다. 선정삼매에 들어 가면 다섯 가지 장애가 사라진다는 것이 오장애인데, 초기경에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rāga), 분노(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흥분과 회한(uddhaccakukkucca),의심(vicikicchā)’ 이렇게 다섯 가지로 설명된다.
번역자의 실수
이와 같이 본다면 빠띠가(paṭigha, 분노)는 열 가지 결박(삼요자나)에 속한 것이고, 뱌빠다(byāpāda)는 다섯 가지 장애(nivarana)에 속한 것이 된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열 가지 결박(삼요자나)에 왜 뱌빠다(byāpāda)를 집어 넣었을까? 더구나 초불연에서 간행된 아미담마 길라잡이에서도 열가지 족쇄에 대한 구절을 보면 분명히 빠띠가(paṭigha, 분노)가 들어 가 있는데, 상윳따니까야 각주에서는 엉뚱하게 뱌빠다(byāpāda)가 들어 가 있다. 한 가지로 추론 할 수 있다. 하나는 빠알리 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 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빠알리 사전에는
(1) personality-belief (sakkàya-diññhi, q.v.), (2) sceptical doubt (vicikicchà q.v.), (3) clinging to mere rules and ritual (sãlabbata-paràmàsa; s. upàdàna), (4) sensuous craving (kàma-ràga, 4.v.), (5) ill-will (byàpàda), (6) 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åpa-ràga), (7) 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åpa-ràga), (8) conceit (màna, q.v.), (9) restlessness (uddhacca, q.v.), (10) ignorance (avijjà, q.v.).
(saṃyojanā. 빠알리사전, PECD 194)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항을 보면 바뺘다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아비담마상가타에는 빠띠가로 되어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주석서를 중시하는 초불연의 입장이라면 당연히 빠띠가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뱌빠다를 열 가지 족쇄에 포함한 것은 초불연의 실수라 보여진다.
오상분결이란?
게송에서 “다섯을 버린 뒤 (pañca jahe)”라 하였다. 무엇을 버린다는 말일까? 이는 오상분결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다섯 가지 버려야 할 것(pañca jahe, 오상분결)
No |
빠알리어 |
초불연 용어 |
성전협 용어 |
|
Uddhambhagiyani saṃyojjanāni |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 |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결박 |
6 |
rūpa-rāga |
색계에 대한 탐욕 |
미세한 물질계에 대한 탐욕 |
7 |
arūpa-rāga |
무색계에 대한 탐욕 |
비물질계에 대한 탐욕 |
8 |
māna |
자만 |
자만 |
9 |
uddhacca |
들뜸 |
흥분 |
10 |
avijjā |
무명 |
무명 |
열가지 결박에 대한 사항은 모두 정신적 요인이다. 그럼에도 행위를 유발하기 때문에 모두 윤회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열 가지 결박이 모두 풀리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결박은 단계적으로 풀리는 것으로 설명된다. 1번부터 3항까지 풀리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는 것으로 본다. 이를 수다원단계라 한다. 그리고 4번과 5번이 옅어지는 단계가 사다함단계이다. 그리그 4번과 5번이 완전히 제거 되면 불환자라 하여 아나함이라 한다. 그리고 6번부터 10번까지 모든 번뇌가 제거 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이 단계를 아라한이라 한다. 따라서 오상분결은 아라한이 되기 위하여 제거되어야 하는 정신적 결박에 해당된다.
냄새를 냄새로 제거 하듯이
아나함은 다섯 가지 끊어야 할 것(오하분결)이 모두 끊긴 상태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다섯 가지 버려야할 것(오상분결)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색계나 무색계에 대한 탐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나함이 불환자이기 때문이다. 불환자는 색계 정거천에서 한 번 더 태어나면 열반에 든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환자가 된다.
그런데 미세하게나마 자만, 흥분, 무명이 남아 있다. 이는 불환자가 되기 까지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면 이마져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초기경에서는 자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케마까]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어,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가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
(Khemaka sutta-케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9, 전재성님역)
배우지 못한 범부는 흙 묻은 옷과 같다. 그런데 무상, 고, 무아라는 세제를 이용하여 옷을 빨면 흙이나 기름 때 등은 제거 될 것이다. 하지만 세제 냄새는 남는다. 비구냄새 같은 것이다. 이를 아나함으로 볼 수 있다. 아직 까지 오상분결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비누냄새 마져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향기박스에 넣으면 된다고 하였다. 마치 독을 독으로서 제독하듯이, 냄새를 냄새로 제거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오상분결이 사라진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 한 것이다.
향기 박스는 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지혜로 비유 된다. 비누냄새 나는 세탁물(아나함, 불환자)을 향기박스(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지혜, 아라한)에 집어 넣으면 비누냄새가 제거 되어 더 이상 비누냄새가 나지 않게 하는 원리와 같다.
이 냄새와 같은 것이 ‘자만’이다. 불환자가 되기 까지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자만이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면 그런 자만 마져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비누냄새 나는 옷과 향기박스의 비유를 들어 자만의 제거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오근(五根)이란?
경에서 “그 위에 다섯을 더 닦고(pañca cuttari bhāvaye)”라 하였다. 이는 무슨뜻일까? 두 번역서를 참고 하여 용어에 대한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다섯 을 더 닦는 것(pañca cuttari bhāvaye, 오근)
No |
빠알리어 |
초불연 용어 |
성전협 용어 |
|
Pañca indriyani |
다섯 가지 기능 |
다섯 가지 능력 |
1 |
saddhā |
믿음 |
믿음 |
2 |
viriya |
정진 |
정진 |
3 |
sati |
마음챙김 |
새김 |
4 |
samādhi |
삼매 |
집중 |
5 |
pañña |
통찰지 |
지혜 |
이는 오근에 대한 것이다. 다섯 가지 기능을 말한다. 이런 다섯 가지 기능은 각각 결심하게 하고, 분발하고, 확립하고, 산만하지 않게 하고 식별하게 한다. 이와 반대 되는 법은 우유부단함, 게으름, 부주의함, 동요, 미혹이다.
오근에서 사띠의 역할은?
오근과 오력은 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각 요소마다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균등하게 닦을 것이 요구 된다. 믿음이 너무 강하면 지혜가 약화 되어 맹신하거나 미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지혜가 강화되면 교활 해진다. 따라서 믿음과 지혜는 균등해야 한다.
삼매가 강하고 정진이 약하면 어떻게 될까? 아비담마에 따르면 게을러 진다고 한다. 반대로 정진이 강하고 삼매가 약하면 흥분상태가 된다. 따라서 정진과 삼매는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균형을 유지해주는 기능은 무엇일까?
국회상임위에는 여와 야가 모여 국정을 논의한다. 이때 사안에 따라 갈등이 일어나기 쉽다. 그 경우 상임위원장이 조정을 한다. 그래서 원만하게 회의가 진행되도록 하는 역할이다. 이와 같이 대립과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인 역할과 같은 것이 사띠이다. 또 사띠는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이나 향신료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띠는 믿음과 지혜, 그리고 정진과 삼매의 괸계에 있어서 한편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이처럼 오근과 오력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띠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 사띠의 능력은 어떻게 정의될까? 상윳따니까야에서 오근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능력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능력이라 한다.
(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8:09, 전재성님역)
경을 보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라는 문구가 있다. 각주에 따르면 지혜에 대한 언급이라 한다. 사띠를 설명하면서 지혜를 언급하는 것은 사띠의 강력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사띠는 지혜와 결합되면 강력한 힘을 받지만 분리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지혜는 어떤 것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이라 하였다. 오래 전에 행한 말이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 말씀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고 사유해서 되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지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항상 기억 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각주에 따르면 전재성님은 사띠에 대하여 “새김의 확립과 알아차림 이외에 본래 ‘기억하고 상기한다.’는 뜻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다.
기억이 실종된 ‘마음챙김’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기억의 기능이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띠는 철저하게 수행용어이기 때문에 기억이라고 번역하면 안된다. 그래서 수행에 맞는 번역을 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번역을 할 것인가. 그래서 ‘운나바 바라문경’에서는 사띠는 우리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죠. 그렇게 문답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챙기는 역할을 한다. 혹은 마음이 대상을 챙겨서 해탈 열반으로 지향한다. 이래 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각묵스님, 초기불교이해 강의 음성파일 30:, 제18장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사념처) (하))
사띠에는 기억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넌센스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분명히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S48.10)”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불연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기억의 기능이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단지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에 한정한다. 그래서일까 사띠에 대하여 기억이라는 뜻이 전혀 들어 가지 않은 ‘마음챙김’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다섯 가지 집착이란?
마지막으로 게송을 보면 “다섯 가지 집착을 극복하면(Pañca saṅgātigo)”라 하였다. 이는 무슨뜻일까? 역시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섯 가지 집착의 극복(Pañca saṅgātigo)
No |
빠알리어 |
초불연 용어 |
성전협 용어 |
|
Pañca saṅgā |
다섯가지 속박 |
다섯 가지 집착 |
1 |
rāga |
욕망 |
욕망 |
2 |
dosa |
성냄 |
성냄 |
3 |
moha |
어리석음 |
어리석음 |
4 |
māna |
자만 |
교만 |
5 |
diṭṭhi |
견해 |
견해 |
다섯 가지 극복해야 할 집착에 대한 것이다. 불자들이라면 항상 들어서 잘 알고 있는 탐욕(rāga), 성냄(dosa), 어리석음(moha)이 들어가 있다. 여기에다 자만과 견해가 합해 져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집착은 초기경전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논장의 위방가(분별론)에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수수께끼 게송은 법구경에도 있다
수수께끼 게송은 법구경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전재성님의 각주에 보면 Dhp 370에 똑 같은 게송이 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각주에는 이러한 언급이 없다.
법구경을 찾아 보았다. 370번 게송에 똑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게송과 관련된 인연담이 있다. 그런데 368, 369, 370 이렇게 세 게송에 대한 인연담이다. 따라서 세 개의 게송은 인연담을 공유하므로 한 묶음이라 볼 수 있다. 이 세 개의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이 자애롭게 살고
깨달은 님의 가르침에 기쁨을 발견하면,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수행승이여, 이 배의 물을 퍼내라.
물을 퍼내면 그대를 위해 가볍게 나갈 것이다.
탐욕과 성냄을 끊어버리면
그대는 열반에 도달할 수 있으리.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려라.
그리고 특히 다섯 가지를 닦아라.
다섯 가지 집착을 넘어선 수행승은
거센 흐름을 넘어선 자라고 불린다.
(Dhp 368-370,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은 도둑과 관련이 있다. 도둑놈이 잘못을 뉘우치고 수행승이 되었는데, 명상주제를 받아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 본 부처님이 읊은 게송이다.
인연담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 보면
인연담에서 위의 세 개의 게송을 포함한 부처님의 말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이 자애롭게 살고 깨달은 님의 가르침에 기쁨을 발견하면,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수행승이여, 이 배의 물을 퍼내라. 물을 퍼내면 그대를 위해 가볍게 나갈 것이다. 탐욕과 성냄을 끊어버리면 그대는 열반에 도달할 수 있으리.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를 버려라. 그리고 특히 다섯 가지를 닦아라. 다섯 가지 집착을 넘어선 수행승은 거센 흐름을 넘어선 자라고 불린다.
수행승이여, 선정을 닦아라, 방일하지 말라. 그대의 마음을 욕망의 대상을 따라 돌게 하지 말라. 방일하여 뜨거운 쇳덩이를 삼키지 말라. 불타면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울부짓지 말라. 지혜가 없는 자에게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가 있으면, 참으로 그에게 열반이 현전한다. 텅 빈 집에 들어가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행승이 사실을 통찰하면 인간을 넘어서는 기쁨이 있다.
존재의 다발의 생성과 소멸을 누구든지 철저히 알면, 그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것이 인지하는 자의 감로수이다. 여기 지혜로운 수행승에게 이것이 첫 번째 것이다. 감관을 수호하고, 만족하고, 계율의 덕목에 따라 자제하는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고 나태함이 없는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우정의 삶을 살고 덕행의 삶에 밝아라. 그로써 기쁨이 가득하면 그대는 괴로움을 종식시킬 것이다.”
(법구경 Dhp 368-370 공통 인연담,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법구경 게송 368-370을 읊으시고 연이어 선정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이어서 계를 지키는 삶, 우정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상윳따니까야의 수수께끼 게송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다.
용어통일부터 먼저 하자는데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교리를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접한 것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이었다. 그리고 각묵스님의 인터넷과 tv 영상강의를 통하여 접하였다. 그러다보니 ‘삼요자나’하면 ‘족쇄’가 떠오를 정도로 초불연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유입되어 당연시 되었다. 하지만 성전협의 번역서를 접하고 용어가 달리 사용됨을 알게 되었다. 삼요자나가 족쇄라는 뜻 뿐만 아니라 ‘결박’으로 번역 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사띠가 ‘마음챙김’ 이라는 하나의 번역만 있는 줄 알았는데 ‘새김’이라는 번역어거 있는 줄 알았다. 더구나 마음챙김에는 기억의 기능이 없는 화두챙김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초불연의 모든 번역어에 대하여 다시 한번 숙고하게 되었다. 초불연에서 사용되는 번역어가 반드시 바른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빠알리니까에는 두 구룹의 번역어가 사용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두 번역자가 만나서 용어통일부터 먼저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결코 양보하지 않으리라 본다. ‘삼요자나’에 대하여 ‘족쇄’와 ‘결박’으로 번역 되어 있는데, 누가 양보 할 것인가? 그리고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과 ‘새김’으로 각각 번역되어 있는데 누가 포기할 것인가? 결국 선택은 독자들에 달려 있다. 독자들이 많이 사용하였을 때 굳어지는 것이다.
Katichinda suttaṃ
5. Sāvatthiyaṃ —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ṃ gāthāya ajjhabhāsi:3
Kati chinde kati jahe kati cuttari bhāvaye,
Kati saṅgātigo "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īti:
(Bhagavā:)
Pañca chinde pañca jahe pañca cuttari bhāvaye,
Pañca saṅgātigo " bhikkhu oghatiṇṇo'ti vuccatīti.
얼마나 끊음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얼마나 끊고, 얼마나 버리고
얼마나 다시 더 닦아야 합니까?
얼마나 많은 속박을 벗어나야만
그를 일러 폭류 건넌 비구라 합니까?” (7)
3. [세존]
“다섯 가지를 끊고, 다섯 가지 제거하고
다섯 가지 다시 더 닦아야 하노라.
다섯 가지 속박을 모두 다 벗어나야
그를 일러 폭류 건넌 비구라 하노라.”55) (8)
(얼마나 끊음 경,S1.5, 각묵스님역)
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 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2. [하늘사람] “어떤 것을 끊고 어떤 것을 버리랴?
그 위에 어떤 것을 더 닦고
어떤 집착을 극복해야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 부르랴?”
3. [세존] “다섯을 끊고 다섯을 버린 뒤
그 위에 다섯을 더 닦고 다섯 가지 집착을 극복하면
거센 흐름을 건넌 수행승이라 부르리.”
(Katichinda sutta-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 S1.5,전재성님역)
Katichinde - How Many Are Cut
“I heard thus. once the Blessed one lived in Sāvatthi, in Jeta's grove in the monastery offered by Anāthapiṇḍika. When the night was waning, a certain deity illuminating the whole of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worshipped, stood on a side and said:
“How many should be cut, how many given up and how many developed further?
With coming together of how many is said, the bhikkhu has crossed the flood?
There's five to cut, five to give up and five to be developed further
And with the coming together of five, it is said the bhikkhu has crossed.”
How Many Must one Cut?
At Savatthi. Standing to one side, that devata recited this verse
in the presence of the Blessed one:
7 "How many must one cut, how many abandon,
And how many further must one develop?
When a bhikkhu has surmounted how many ties
Is he called a crosser of the flood?"
[The Blessed one:] <6>
8 one must cut off five, abandon five,
And must develop a further five.
A bhikkhu who has surmounted five ties
Is called a crosser of the flood."12
(CDB, Bhikkhu Bodhi)
2013-09-24
진흙속의연꽃
'니까야번역비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종류의 번역서만 고집해서는 안 되는 이유, 니까야의 오역(誤譯)과 중역(重譯) (0) | 2013.09.26 |
---|---|
더러워진 마음을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 깨어 있음의 경(S1.6) (0) | 2013.09.25 |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늙기 전에 할 일은? 스쳐감의 경(S1.4)에서 (0) | 2013.09.21 |
자주(自主)불교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덧없음의 경(S1.3)에서 (0) | 2013.09.20 |
삿따(satta)는 중생인가 뭇삶인가? 해탈의 경(S1.2)에서 (0) | 201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