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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따(satta)는 중생인가 뭇삶인가? 해탈의 경(S1.2)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18. 09:17

 

삿따(satta)는 중생인가 뭇삶인가? 해탈의 경(S1.2)에서

 

 

 

상윳따니까야는 매우 방대한 경전이다. 56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고 수 많은 품과 수 천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첫번째 상윳따인 데와따상윳따(S1)은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답식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게송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해탈의 경(Nimokkhasutta, S1:2)이다.

 

해탈의 경(Nimokkhasutta, S1:2)에서

 

경에서 먼저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Yathā kathampana tva mārisa jānāsi 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세존이시여, 당신은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남과 떨쳐버림에 대해 아십니까?(초불연, S1:2)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해서 뭇삶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성전협, S1:2)

 

 

두 개의 번역문을 보면 용어사용에 있어서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먼저 삿따(sattā)’에 대한 것을 보면, 초불연은 중생이라 하였고, 성전협은 뭇삶이라 하였다. 중생이라는 말은 불자들에게 매우 익숙하다. 한자용어 중생은 대승경전에 표현되어 있고 스님들이 법문에서 수 없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중생이란 무엇인가?

 

중생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생 [衆生]

(1)

[불교] 부처의 구제 대상이 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나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2)

많은 사람.

 

 

중생이라는 말은 불교용어로서 구제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 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금강경에서 대승정종분에서 볼 수 있는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이른바 세상에 있는 온갖 중생의 무리에 대한 것이다. 알에서 난 것, 태로 난 것, 습기에서 난 것, 변화로 난 것, 심지어 무색계의 비상비비상처천의 천신에 이르기 까지 총망라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식물도 중생에 포함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중생이라 말은 무정물인 식물을 빼고 정신을 가진 유정물을 말한다. 빠알리어 삿따에 이런 중생개념을 적용한 것이 초불연의 번역어 중생이라 본다. 하지만 이는 대승불교의 대승경전의 중생개념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본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초기불교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조어 뭇삶이란 무엇인가?

 

성전협 전재성박사는 삿따(sattā)에 대하여 ‘뭇삶’이라고 번역하였다. 이후 빠알리니까야의 모든 번역은 뭇삶으로 번역 되어 있다. 그렇다면 전재성박사는 왜 뭇삶이라 번역하였을까?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Sattā : 뭇삶은 중생을 순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중생이란 용어가 이미 일반적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빠알리어에서 중생은 어원적으로 존재를 의미하는 ‘satta’가 있고, 생명.유정을 뜻하는 ‘pana’도 있고, 생성된 것이란 의미에서 생물, 귀신을 뜻하는 ‘bhuta’도 있다. 역자는 때에 따라 존재생명을 쓰기도 하지만 주로 뭇삶으로 번역하였다.

 

(Sattā 각주, 전재성박사)

 

 

각주에서 전재성박사는 왜 뭇삶이라는 용어를 선택하였는지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존재를 뜻하는 빠알리어가 ‘satta’ ‘pana’ ‘bhuta’ 등 여러가지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sattā에 대하여 뭇삶이라고 번역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삿따(sattā)는 어떤 뜻일까? 삿따(sattā)에 대한 빠알리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satta

: 'living being'. This term, just like attà, puggala, jãva, and all the other terms denoting 'ego-entity', is to be considered as a merely conventional term (vohàra-vacana), not possessing any reality-value. For the impersonality of all existence. s. anattà, paramattha, puggala, jãva, satta, pañiccasamuppàda.。

 

 

빠알리-영어사전을 보면 삿따는 살아 있는 것으로 표현 되어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라면 식물과 같은 무정물도 포함 될 것이다. 그런데 부가 설명을 보면 atta, puggala, jiva 같은 것이라 하였다. atta는 자아, 에고, 개성을 말한다. Puggala는 개인, 사람을 뜻한다. Jiva는 생명, 개인적 영혼 등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삿따는 인간에 주로 인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온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삿따가 왜 오온의 인간을 뜻하는 것일까?

 

삿따가 왜 오온의 인간을 뜻하는 것일까? 이는 삿따가 집착의 의미로도 사용되기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sattasajjati의 과거 분사형으로 attached 의 뜻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은 집착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도 고성제에서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 라는 표현이 있듯이 오온에 집착된 존재, 즉 오취온의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삿따는 오온을 가진 존재 즉,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난생, 태생 등으로 범위를 넓혀 중생이라고 번역한 것은 초기불교 입장으로 보았을 때 너무 광범위한 것이다. 따라서 오온에 집착하는 인간으로 한정하는 뭇삶이라는 표현이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더 맞을 듯 하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뭇삶이라는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뭇’이라는 말이 ‘하나가 아닌 여럿’ 이라는 의미가 있고, ‘삶’은 ‘태어나서 죽기에 이르는 동안 사는 일’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뭇삶이라는 말은 ‘여러 사람의 삶’의 뜻이라 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삶이 뭇삶인 것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인간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해결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뭇삶은 인간의 삶으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해결에 대한 법문

 

경에서 하늘사람은 부처님에게 당신은 어떻게 해서 뭇삶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해탈(nimokkha)과 자유(pamokkha)와 멀리 여읨(viveka)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축생이나 난생 등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인연이 되는 자들이 해당되기 때문에 삿따는 당연히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 즉 초기경전은 인간의 괴로움에 대한 해결에 대한 법문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가치관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그런데 삿따를 중생으로 번역하여 난생, 태생, 습생, 화생으로 확대하여 생명이 있는 모든 유정물로 확대해석 한다면 이는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본다. 삿따를 모든 유정물로 본다면 일체중생실유불성과 같은 대승불교의 가치관이다. 그럼에도 초불연에서는 대승에서 사용되는 중생이라는 용어를 답습하여 빠알리니까야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가르침

 

다음으로 하늘사람의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이다.

 

 

Nandībhavaparikkhayā saññāviññāasakhayā,
Vedanāna
nirodhā upasamā eva khvāha āvuso jānāmi.
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즐김에 뿌리박은 존재[] 멸진해버렸고

인식과 알음알이 나는 모두 부수었고

느낌들을 소멸하고 가라앉혀버렸노라.

도반이여,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아노니,

중생들의 해탈과 벗어남과 떨쳐버림을. (초불연, S1:2)

 

[세존]

존재의 환희를 부수고

지각과 의식을 부수고 느낌의 소멸을 그침으로써

벗이여, 이와 같이 해서 뭇삶들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나는 안다네. (성전협, S1:2)

 

 

 

 

 

 

 

Lotus

 

 

 

이는 열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대하여 상수멸이라 하여 구차제정에서는 열반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게송에서 지각과 의식을 부수고 느낌의 소멸을 그치는 것이 해탈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지각, 의식, 느낌 등은 오온에 있어서 정신적인 다발에 속한다. 이런 정신다발이 소멸하였을 때 유여열반이라 한다. 그런데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마저 소멸하였을 때 이를 무여열반, 즉 완전한 열반인 빠리닙바나라 한다. 따라서 게송에서 부처님이 해탈에 대하여 말한 것은 불교가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가르침임을 강력히 시사 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즐길 거리를 찾는 존재들

 

게송에서 존재의 환희를 부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환희에 해당되는 말이 난디(Nandī)’이다. 그리고 존재에 해당되는 말이 바와(bhava)이다. 이는 존재일반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즐기고 환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는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56:11)”라 하였다. 모든 존재는 눈과 귀 등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끊임 없이 즐길 거리를 찾기 때문에 행위를 유발하여 세세생생 윤회 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것이 존재의 특성이다.

 

이런 존재에 대하여 빠일리어 바와(bhava)라 하였다. 바와(bhava)라 하였을까? 이는 이어지는 초전법륜경 구절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kāmatahā bhavatahā vibhavatahā, S56:11)”라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갈애바와 딴하(bhavatahā)’이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위바와 딴하 (vibhavatahā)’이다.  이는 영원주의 와 허무주의에 대한 갈애라고 설명되기도 하지만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갈애로도 설명된다. 그래서 색계와 무색계에 대하여 인간을 뜻하는 삿따라 표현하기 보다 존재를 뜻하는바와로 표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삿따라는 말이 난생부터 천상의 화생에 이르기 까지 광범위한 의미가 아니라 인간으로 한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뭇삶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S1:2)”라고 말씀 하셨다. 열반의 실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오온으로서의 인간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빠알리니까에서 삿따에 대하여 중생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대승의 ‘일체중생실유불성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슬로건에 적합 할지 모르지만 사성제를 특징으로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적합한 용어는 아니라 본다.

 

가장 탁월한 번역 뭇삶

 

빠알리니까야에서 삿따에 대한 번역어 중생은 한역경전의 답습이자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견해일 것이다. 반면 뭇삶이라 번역된 용어는 전에 보지 못하던 신선한 것으로 본다. 비록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들의 삶을 표현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삿따의 번역어 뭇삶은 순수한 우리말로 표현된 가장 탁월한 번역이라 본다.

 

 

Nimokkhasutta

 

2. Evam me suta2. Eka samaya bhagavā sāvatthiya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PTS Page 002. [\q 2/] ]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 jetavana obhāsetvā yena bhagavā tenupasakami. Upasakamitvā bhagavanta abhivādetvā ekamanta aṭṭhāsi. Ekamanta 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 etadavoca:

Jānāsi no tva mārisa, 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Bhagavā:)

Jānāmi3 khvāha āvuso 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Devatā:)

Yathā kathampana tva mārisa jānāsi 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Bhagavā:)

Nandībhavaparikkhayā saññāviññāasakhayā,
Vedan
āna nirodhā upasamā eva khvāha āvuso jānāmi.
Sattāna nimokkha pamokkha vivekanti.

 

 

벗어남 경

 

2.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왔다. 다가와서 세

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당신은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남과 떨쳐버림

에 대해 아십니까?"

   "도반이여, 나는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남과 떨쳐버림에 대해

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당신은 중생들의 벗어남과 풀려

남과 떨쳐버림에 대해 아십니까?"

 

4.     "즐김에 뿌리박은 존재[] 멸진해버렸고

         인식과 알음알이 나는 모두 부수었고

         느낌들을 소멸하고 가라앉혀버렸노라.

         도반이여, 그러므로 나는 이제 아노니,

         중생들의 해탈과 벗어남과 떨쳐버림을."

 

(벗어남 경, S1.2,각묵스님)

 

 

해탈의 경

 

1.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 숲을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 쪽으로 물러나 섰다.

 

2. 한 쪽으로 물러나 서서 그 하늘사람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어보았다.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뭇삶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세존] 벗이여, 참으로 나는 뭇삶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알고 있습니다.”

 

3.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해서 뭇삶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알고 있습니까?”

[세존] “존재의 환희를 부수고

지각과 의식을 부수고 느낌의 소멸을 그침으로써

벗이여, 이와 같이 해서 뭇삶들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여읨에 관해 나는 안다네.”

 

(해탈의 경, S1.2,전재성님역)

 

 

Nimokkho – Release

 

I heard thus. once the Blessed one lived in Sāvatthi, in Jeta's grove in the monastery offered by Anāthapiṇḍika. When the night was waning, a certain deity illuminating the whole of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worshipped, stood on a side and said:

“Venerable sir, do you know the seclusion, deliverance and release of beings?”

“Friend, I know the seclusion, deliverance and release of beings.”

“Venerable sir, as yon know, how is the seclusion, deliverance and release of beings?”

“Diminishing the interest `to be', and destroying perceptions and consciousness, seeing appeasement and cessation of feelings, I see as the seclusion, deliverance and the release of beings.”

 

(Ogham — Flood)

 

 

Emancipation

 

At Savatthi. Then, when the night had advanced, a certain

devatii of stunning beauty, illuminating the entire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Having approached, he paid homage

to the Blessed one, stood to one side, and said to him:

"Do you know, dear sir, emancipation, release, seclusion for

beings?"6

"I know, friend, emancipation, release, seclusion for beings."

"But in what way, dear sir, do you know emancipation,

release, seclusion for beings?"

[The Blessed one:]

2 "By the utter destruction of delight in existence,7

By the extinction of perception and consciousness,

By the cessation and appeasement of feelings: <4>

It is thus, friend, that I know for beings-

Emancipation, release, seclusion."8

 

(Emancipation, S1.2, CDB, Bhikkhu Bodhi)

 

 

 

2013-09-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