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송은 노래로 만들 수 있어야, 폭류 경 vs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S1.1)
번역비교를 위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발행된 상윳따니까야 1권이 도착 하였다. 인터넷으로 주문하였는데 여러 날 걸렸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하루만에 도착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 주문은 날자가 오래 걸렸다.
초불연 상윳따니까야를 구입한 것은 비교해 보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에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기 때문에 서로 비교해 봄으로서 어떻게 다른가 알아 보기 위해서이다.
가장 첫 번째 경을 보면
빠알리니까야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이 상윳따니까야라 본다. 가장 오래 된 고층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주제별로 잘 정리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1권을 보면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게송은 산문과 달리 고층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떤 책이든지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은 의미가 있다. 책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려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경은 어떤 것일까? 빠알리 원문과 초불연, 성전협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Kathannutvaṃ mārisa, oghamatarīti?
“세존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하여 폭류를 건너셨습니까?”(초불연, S1:1)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흐름을 건너셨습니까?”(성전협, S1:1)
빠일리어 마리사(māris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세존’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스승’이라 하였다.
성전협의 각주에 따르면 마리사는 친애와 존경의 호칭이라 한다. 그래서 ‘벗이여, 존자여, 스승이여’ 라는 뜻이라 한다. 그리고 하늘사람들이 장로나 부처님, 또는 자신들의 동료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마리사에 대하여 “스승이시여”라고 번역하였다.
마리사에 대한 초불연의 각주에 따르면, 신들이 부처님이나 제자들을 부르는 말이라 한다. 그래서 주석을 중시하는 초불연에서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여 ‘행복한 분이시여’라고 하려 하였으나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세존이시여”라고 옮겼다고 한다.
빠알리어 ‘오가(ogh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폭류’라 하였고, 성전협은 ‘거센흐름’이라 하였다. 같은 말이다. 폭류(暴流)를 우리말로 표현 하면 거센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한문용어에 익숙한 분들을 위하여
초불연 상윳따니까야 해제를 보면 ‘번역에 임하는 태도’가 있다. 주석서와 청정도론, 아비담마를 중시한 번역이라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급적 술어를 한글화 한다고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모든 술어를 가급적이면 한글로 풀어 적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물론 그렇게 하다보면 한문용어에 익숙한 분들은 당황스럽고 짜증나기 마련일 것이다. 그래서 한문용어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서 많은 곳에서 눈의 알음알이[眼識], 무더기[蘊], 기능[根] 등으로 한문을 병기했다. 그리고 무리하게 한글식 표기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 한국불교와 절집에서 통용되는 한자말을 그대로 사용하려 노력하였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그 동안 쌓였던 의문이 풀렸다. 왜 초불연에서 한자용어를 자주 사용하는지에 대해서이다. 각묵스님에 따르면 한글로만 된 번역을 접하면 ‘당황스럽고 짜증나기 마련’이라 하였다. 특히 한문에 익숙한 사람에게 그렇다는 것이다.
한문에 익숙한 사람은 누구를 말할까? 다름 아닌 절집의 ‘스님들’일 것이다. 한문경전에 익숙한 스님들을 말한다. 그들을 위하여 ‘알음알이[眼識]’식으로 대괄호치기를 이용한 한자를 병기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구나 한글식 표기만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절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자식 용어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초불연 번역이 승가의 스님들 위주로 번역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아이들도 이해가능한 불경을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역자는 학창시절 고아원야학 선생을 하다가 버려진 고아들에게도 이해가 가능한 불경을 번역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경전 자체가 주는 문맥상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야 하고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역자의 주관적인 선입견이 반영되었겠지만, 그러한 것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역자는 영국, 독일, 일본 등 세계적인 번역본을 모두 참고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어를 서구적인 번역어가 깊이 침투해 있는 우리의 일상용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번역에서 어느 정도 왜곡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왜곡을 치유하려면, 독자들은 빠알리 원전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빠알리어 자체는 철학적으로 고도로 정밀화된 추상적 사유체계와 개념적 연결관계를 갖고 있어 번역에서 그러한 사항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역자는 번역된 우리말 문맥 속에서 난해한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도록 가능한 한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 개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쌍윳따니까야 개정판 해제,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임하는 태도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야학교사를 할 때 한문으로 된 경전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고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상에서 사용되는 일상용어로 한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기 쉽게 번역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스님들을 위주로 번역한 초불연과 매우 대조적이다.
숲을 볼 것인가, 나무를 볼 것인가
한글 위주의 번역을 하였다고 하여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문 용어를 사용해야만 뜻이 더 잘 전달 된다고 볼 수 있을까? 만약 그런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대승경전을 영어로 읽는다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어느 선사의 이야기를 떠 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에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눈푸른 외국인 스님이 어느 선사에게 영어로 된 대승경전을 보았다고 하자, 그 선사는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읽어야 심오한 뜻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보면 철저하게 한글화 하였다. 가급적이면 한자용어를 배제하고 우리말 용어로 풀어 사용하였다. ‘오가(ogha)’에 대하여 ‘폭류(暴流)’라는 한자용어가 있음에도 ‘거센흐름’으로 번역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렇게 한자용어를 최소화 하다 보면 그 뜻이 언뜻 들어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문맥 속에서 난해한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도록”이라는 말을 하였다. 가르침의 의미를 문맥에서 파악하라는 말이다.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친절하게도 ‘알음알이[眼識]’식으로 대괄호치기를 이용한 한자용어룰 병기 하였다. 이는 마치 나무 한그루에서 모든 것을 다 보려 하는 것 같다. 숲보다는 나무를 보는 것 같다. 또한 괄호치기는 흐름을 방해하는 바위 같아 보인다. 전체 문장을 통하여 문맥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처럼 보이는 것이다.
“도반이여” vs “벗이여”
경에서 하늘사람이 “세존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하여 폭류를 건너셨습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Yadā svāhaṃ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ṃsīdāmi. Yadā svāhaṃ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1. Evaṃ khvāhaṃ āvuso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intī.
“도반이여,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
“도반이여, 내가 멈출 때 나는 가라앉아 버렸다. 도반이여, 내가 [모으려고] 아등바등할 때 나는 휩쓸려 나가 버렸다. 도반이여, 이처럼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초불연, S1:1)
[세존]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흐름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 (성전협, S1:1)
성전협에서는 화자를 반드시 넣어 준다. 부처님이 말씀 하셧다면 [세존]이라는 말을 넣어 준다. 이는 화자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화자에 대한 구분이 없다. 물론 문맥으로 화자를 구분할 수 있지만 화자를 넣어 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편리할 것이라 본다. 빠알리 니까야 PTS본에도 (Bhagavā:)라는 식으로 화자 구분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어 ‘아위소( āvuso)’가 있다. 이 용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도반이여” 라고 하였다. 성전협에서는 “벗이여” 라고 번역하였다. 이런 기조는 빠알리 니까야 전반에서 그대로 유지 된다. 그러다 보니 초불연 번역을 보면 외도 들에게도 “도반이여”라고 하게 되었다. 도반이라는 말은 불도를 함께 닦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자이나교도나 단멸론자에게도 “도반이여”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경에서는 부처님이 하늘 사람에게 ‘아위소라’ 하였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도반이여”라 번역하였다. 과연 하늘사람이 부처님의 도반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성전협에서는 “벗이여”라고 하였다.
경어를 쓰는 것은 우리나라 예법
초불연 번역을 보면 부처님이 하늘사람에게 “~버렸다.” 나 “~건넜노라.”라고 표현하였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에서는 “~건넜습니다.”라든가 “~들었습니다.”와 같은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서에 따르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친구처럼 또는 제자에게 대하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도 초면에는 경어를 쓰는 것이 우리나라 예법이다. 번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나라의 예법에 맞게 그 시대의 말을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표현을 달리한 이유는?
경을 보면 anāyūha이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아등바등하지 않고”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애쓰지도 않으면서”라고 번역하였다. 두 번역어를 비교해 보면 번역자의 개성이 보이는 것 같다. 아등바등하다는 말은 ‘억지스럽게 우기거나 몹시 애를 쓰다’라는 뜻이다. 초불연 각주에서도 “아등바등하지 않고(anāyūha)란 ‘애쓰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주석 S.A.i.19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애쓰다’라는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두 가지로 본다. 첫번째는 먼저 출간된 번역어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발로로 보인다. 성전협에서 ‘애쓰다’라는 용어를 ‘선점’하였기 때문에 이를 피해 가다 보니 ‘아등바등하다’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라 본다.
두번째는 번역자의 환경에 따른 것이라 본다. 살고 있는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다 보니 아등바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 본다. 일반적으로 아등바등이라는 말이 격이 낮고 속된 말에 가까운 비속어임에도 굳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번역자의 환경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일 것으로 본다.
부처님은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라 하였는데
하지만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아야 하고 보편어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친 것은 무엇을 두고 말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하면 지방어를 고집하고 보편어를 침해하는 것인가? 여러 지방에서 같은 것을 두고 접시라고 여기고, 그릇이라고 여기고, 사발이라고 여기고, 받침이라고 여기고, 팬이라고 여기고, 옹기라고 여기고, 컵이라고 여기고, 대야라고 여긴다. 여러 지방에서 각각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던지 각각 그것에 대하여 집착하여 고집하여 ‘이것만이 옳고 다른 것은 틀리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한다면 지방어를 고집하고 보편어를 침해하는 것이다.
(평화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지방어를 고집하지 말라고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수행승들이 언제나 유행생활을 하였고 지방어를 사용하는 많은 지역을 넘나들었으므로 승단안에서 첨예한 문제이었다고 한다. 다양한 지방출신들로 구성된 승단에서 그들만의 방언을 사용한다면 가르침을 왜곡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불편함으로 인하여 어떤 제자는 부처님에게 산스크리트어(범어)로 표현 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거절하였다고 한다. 부처님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당시의 민중언어를 고수 하였기 때문이다.
‘아등바등하다’는 비속어에 가깝다
‘애쓰다’와 ‘아등바등하다’는 같은 의미라 본다. 그러나 ‘애쓰다’는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말임에 비하여 ‘아등바등하다’는 비속어에 가깝다. 일부 지방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일지 모르지만 표준말은 아니라고 본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방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기 때문에 그 시대에 통용되는 표준말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승가에서만 사용되는 용어와 함께 지방어로 알려진 용어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는다’는 뜻은?
경에서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흐름을 건넜다”고 하였다. 여기서 거센흐름은 ‘윤회’를 뜻한다. 문제는 “머무르지도 애쓰지도 않고”에 해당되는 말이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번역하였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먼저 성전협 전재성박사의 “머무르지도 애쓰지도 않고”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거센 물결을 헤쳐 나가는데는 머물고 애쓰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지만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올바른 수행을 통해서 힘들이지 않고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Srp.I.129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발을 바닥에 밀착시키고 건너야 하는 장소에서 애를 쓰면서 거센 흐름을 건너야 하는데 부처님의 대답은 모순적이지만, 번뇌 때문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조건적인 발생이나 의도적인 형성에 메이지 않도록 애써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머무르지도 애쓰지도 않고’ 각주,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것이 잘못 인도된 의지와 노력은 운명적 파탄을 초래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하고 있다.
‘머물지 않고 애쓰지도 않는다’는 뜻은 이런 것이라 본다. 주식투자를 하는데 돈을 벌기 위하여 집착하면 더 손해 보는 것이 ‘애쓰는 것’에 대한 케이스에 해당되는 것이라 본다. 집에다 홈트레이딩 시스템 프로그램을 깔아 놓고 매일 단타매매에 열중하였을 때 통장의 잔고만 줄어드는 것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이렇게 애쓰는 것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주석서 Srp.I.129의 예를 들어 ‘의도적인 형성’에 대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머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주석서 Srp.I.129에서는 번뇌 때문에 머무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는 집착을 말한다.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사람을 집착하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어 짝사랑하였다면 이는 머무는 것이 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쫒아다닌다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 달아 날 것이다. 그러면 더 쫒아 갈 것이다. 그러면 더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래서 애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애를 쓰면 쓸스록 상대방은 더 멀리 달아난다. 이는 애쓰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머물지도 애쓰지도 말라고 하였다.
중도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고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초불연에서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이 간략한 말씀은 실천적인 측면과 이론적인 측면에서 불교의 중도적인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주석서는 일곱 개의 쌍으로 이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중도적인 입장을 드러낸 것이라 하였다. 중도라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초전법륜경의 고락중도도 있고, 깟짜야나곳따경에서 유무중도도 있다. 그러나 어느 중도를 말하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단지 오염원, 갈애와 견해 등 일곱개로 된 뜻을 설명한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고, 또한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고’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단지 주석서에 실려 있는 사항을 나열해 놓고 있을 뿐이다.
게송번역하기가 가장 어렵다는데
다음은 게송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머무르지도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다고 하자 하늘사람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Cirassaṃ vata passāmi
brāhmaṇaṃ parinibbutaṃ,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tiṇṇaṃ loke visattikaṃ.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평화 얻은
[진정한]바라문을 저는 친견했나이다.
그분은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아
세상에 대한 애착을 모두 건넜습니다.(초불연, S1;1)
[하늘사람]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을
참으로 오랜만에 친견하네. (성전협, S1:1)
일반적으로 게송번역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고도로 축약된 언어를 사용하여 여러가지 상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소질이 없다면
그래서일까 초불연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애로사항을 실토 하고 있다.
쏟아지는 게송을 운치있게 옮겨낸다는 것은 역자에게는 너무 큰 부담이었고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역자는 문학적인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서 오직 게송을 잘못 이해하여 오역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1권 해제)
각묵스님은 스스로 문학적인 자질이 없는 사람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 게송이 차지 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고 도처에 게송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법문한 다음에 그 뜻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게송으로 강조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우다나(감흥어)나 이띠붓다까(여시어경)를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또 법구경은 백프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고, 숫따니빠따 역시 게송이 차지 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번역서를 보면 아직까지 법구경과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등 게송과 관련된 번역서가 없다. 그래서 문학적 소질이 없다면 번역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감흥이 떨어지는 번역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문학적 소질을 갖추고 있는 자가 번역하여야 정확하고 매끈한 번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학적 소양이 없는 자가 번역한 것을 보면 보기에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감흥도 떨어진다. 마치 산문 번역하듯이 번역해 놓았다면 시를 읽는 맛이 없을 것이다.
초불연의 게송을 보면 게송에서도 ‘[진정한]’와 같이 대괄호치기를 하였다. 이는 넌센스라 본다. 게송이나 시는 물흐르듯이 매끄러워야 하는데 대괄호치기를 해 놓았다는 사실은 흐름을 방해하는 것과 같다. 마치 시냇물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놓여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또 초불연의 게송에서 “친견했나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표현은 게송에서 부적절하다고 본다. 마치 ‘사극의 대사를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번역의 원칙이 그 시대의 표준어로 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사극의 대사 같은 표현은 매우 어색해 보이는 것이다.
게송은 시이기 때문에
게송을 다른 말로 ‘시’라 한다. 시는 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이는 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 오리다. 가시는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 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로 되어 있는 시‘진달래’를 보면 알 수 있다.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매끈하다. 그래서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게송은 시이기 때문에 노래로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렇다면 게송은 기본적으로 노래의 가사형식으로 되어 있어야 된다고 본다. 그럼에도 ‘[진정한]바라문을’라 하여 대괄호치기가 있는가 하면, ‘친견했나이다.’처럼 사극대사와 같은 표현, 그리고 ‘모두 건넜습니다.’처럼 산문체로 끝나는 것을 게송이라 볼 수 있을까? 초불연 게송으로 노래를 만든다고 하였을 때 과연 노래가사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은 노래 가사와 같은 구조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성전협의 전재성박사의 게송은 이런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다.
Oghataraṇasuttaṃ
1. Evam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āsi.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ṃ etadavoca:
Kathannutvaṃ mārisa, oghamatarīti?
(Bhagavā:)
Appatiṭṭhaṃ khvāhaṃ āvuso anāyūhaṃ oghamatarinti.
Yathā kathaṃ pana tvaṃ mārisa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īti?
(Bhagavā:)
Yadā svāhaṃ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ṃsīdāmi. Yadā svāhaṃ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1. Evaṃ khvāhaṃ āvuso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intī.
(Devatā:)
Cirassaṃ vata passāmi2 brāhmaṇaṃ parinibbutaṃ,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tiṇṇaṃ loke visattikaṃ.
1. Nivayhāmi — syā. 2. Passāma — sī. 1. 2.
[BJT Page 004] [\x 4/]
4. Idamavoca sā devatā. Samanuñño satthā ahosi.
Atha kho sā devatā "samanuñño me satthā'ti ti bhagavantaṃ abhivādetvā padakkhiṇaṃ katvā tatthevantaradhāyīti.
폭류 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에 머무셨다.
2.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세
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3. "세존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하여 폭류를 건너셨습
니까?"
"도반이여,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
기 때문에 폭류를 건넜노라."
4. "세존이시여,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서 폭류를 건넜습니까?"
"도반이여,내가 멈출 때 나는 가라앉아 버렸다. 도반이여, 내가
[모으려고] 아등바등할 때 나는 휩쓸려나가 버렸다. 도반이여, 이처
럼 나는 멈추지 않고 [모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폭류
를 건넜노라."
5. "참으로 오랜만에 완전한 평화 얻은
[진정한] 바라문을 저는 친견했나이다.
그분은 멈추지 않고 아등바등하지 않아
세상에 대한 애착을 모두 건넜습니다."
6. 그 천신은 이렇게 말하였고, 스승께서는 그의 말에 동의하셨
다. 그러자 그 천신은 '스승께서는 나의 [말에] 동의하셨구나.'라고
안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
에 거기서 사라졌다.
(폭류 경,S1.1,각묵스님역)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 때 어떤 하늘사람이 깊은 밤중에 아름다운 빛으로 제따 숲을 두루 밝히며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 쪽으로 물러나 섰다.
한 쪽으로 물러나 서서 그 하늘사람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어보았다.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까?"
[세존]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
[하늘사람]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세상의 집착을 뛰어넘어
참 열반을 성취한 거룩한 님을
참으로 오랜만에 친견하네."
이와 같이 하늘사람이 말했다. 스승께서는 가상히 여기셨다. 그 때 그 하늘사람은 '나의 스승이 가상히 여기신다.'라고 알고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오른쪽으로 돌고 나서 바로 그곳에서 사라졌다.
(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 S1.1, 전재성님역)
1) Ogham — Flood
I heard thus. once the Blessed one lived in Sāvatthi, in Jeta's grove in the monastery offered by Anāthapiṇḍika. When the night was waning, a certain deity illuminating the whole of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worshipped, stood on a side and said:
“Venerable sir, how did you cross the flood?”
“Friend, I crossed the flood not taking a footing and not exerting.”
“Venerable sir, not taking a footing and not exerting in which manner, did you cross the flood?”
“It's after a long time I have seen a Brahmin who has extinguished,
Without standing and without exerting he has crossed the diffused ness of the world.”
“Friend, when standing I sank, when exerting I was led astray, therefore not standing, not exerting I crossed the flood.”
Saying it, the deity waited for the approval of the Blessed one. Knowing the Teacher approves, she worshiped and circumambulated the Blessed one and vanished from there.
Crossing the Flood
Thus have I heard.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t Savatthi in Jeta's Grove, AnBthapindika's Park.
Then, when the night had advanced, a certain devata of stunning
beauty, illuminating the entire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Having approached, he paid homage to the
Blessed one, stood to one side, and said to him:
"How, dear sir, did you cross the flood?"'
"By not halting, friend, and by not straining I crossed the
flood."z
"But how is it, dear sir, that by not halting and by not straining
you crossed the flood?"
"When I came to a standstill, friend, then I sank; but when I
struggled, then I got swept away. It is in this way, friend, that by
not halting and by not straining I crossed the flood."3 <2>
[The devatz:]
1 "After a long time at last I see
A brahmin who is fully quenched,
Who by not halting, not straining,
Has crossed over attachment to the world."4
This is what that devata said.5 The Teacher approved. Then
that devata, thinking, "The Teacher has approved of me," paid
homage to the Blessed one and, keeping him on the right, disappeared
right there. [2]
(Crossing the Flood, S1.1, CDB, Bhikkhu Bodhi)
2013-09-16
진흙속의연꽃
'니까야번역비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러워진 마음을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 깨어 있음의 경(S1.6) (0) | 2013.09.25 |
---|---|
“다섯 가지를 끊고…”수께끼 게송, 어떤 것을 끊으랴의 경(S1.5) (0) | 2013.09.24 |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늙기 전에 할 일은? 스쳐감의 경(S1.4)에서 (0) | 2013.09.21 |
자주(自主)불교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덧없음의 경(S1.3)에서 (0) | 2013.09.20 |
삿따(satta)는 중생인가 뭇삶인가? 해탈의 경(S1.2)에서 (0) | 201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