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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自主)불교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덧없음의 경(S1.3)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9. 20. 16:16

 

자주(自主)불교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덧없음의 경(S1.3)에서

 

 

 

매번 맞는 것이 명절이다. 명절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덧없음이다. 이는 무상함을 말한다. 고정됨 없이 늘 변한다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도 변하고 주변의 환경도 변한다. 비록 반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쉽지 않지만 몇 년 전 또는 수 십 년 전의 모습을 떠 올리면 매우 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주변환경 역시 큰 변화가 있다. 전에 보지 못하던 빌딩이 올라가 있고 이전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수년 전 또는 수십 년 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산이다. 산의 모습은 옛날에 보았던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 하고 있다. 세월에 따라 사람도 변하고 환경도 변해도 변치 않은 모습의 산을 보았을 때 든든한 마음이 일어난다.

 

덧없음의 경(S1.3)에서

 

초기경에서도 덧없음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 있다. 데와따상윳따(S1)에서 하늘사람과 부처님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데와따)가 부처님에게 시로서 묻는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
Eta
bhaya marae pekkhamāno

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īti.

 

삶은 휩쓸려가고 생명은 덧없고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S1.3, 초불연)

 

[하늘사람]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 (S1.3, 성전협)

 

 

상윳따니까야 데와따상윳따 3번 경 우빠니야띠경(Upanīyati sutta, 덧없음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하늘사람(devatā)가 부처님을 향하여 세월의 무상함에 대하여 시로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미래의 행복을 가져 오는 공덕을 쌓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이 덧없는 것일까?

 

삶은 휩쓸려 가는 것일까? 아니면 삶은 덧없는 것일까?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우빠니야띠(Upanīyati)이다. Upanīyati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pass. of upaneti] is brought up to; is carried away’라고 되어 있다. ‘지나가 버린다는 말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 고귀한 자나 미천한 자를 막론하고 인정사정 봐 주는 것이 없는 것이 세월이다. 그런 삶을 되돌아 보았을 때 누구나 느끼는 것은 삶이 덧없음을 느낀다.

 

Upanīyati 에 이어 jīvitamappamāyu가 있다. 이는 jãvita+ appa+ àyu로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이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jãvita(life)+ appa(small )+ àyu (age) 의 뜻이다. Jãvita생명또는 목숨이라는 뜻이고, appa조금또는 매우 조금이라는 뜻이다. Àyu나이를 말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매우 짧음을 말한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생명은 덧없고라고 하였다. ‘세월은 덧없고라는 말은 성립되지만 생명 즉, 사람의 목숨에 대하여 덧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성전협에서는 jīvitamappamāyu에 대하여 ‘목숨은 짧으니’라 하였다.

 

사람의 목숨은 짧은 것이지 덧없는 것이 아니다

 

세월은 덧없고 목숨은 짧은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그런 삶은 어떤 것일까?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nimittamanaññāta maccāna idha jīvita,
Kasirañca parittañca tañca dukkhena saññ
āta.

 

[세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럽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기대수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일까?

 

기대수명은 기대일 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따른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 밤이 지나면 진짜 내일이 올지 아니면 내생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Animittam)”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것이 삶이다. 그런 사람의 목숨은 짧은 것이지 덧없는 것이 아니다. 덧없는 것은 세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은 덧없고라고 표현된 초불연의 번역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동어 반복은 피하는 것이 원칙

 

두번째 구절에서는 늙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라 하였다. 이는 늙음에 이른 자 (jarūpanītassa)’에 에게 마땅히 쉴 곳이 없음을 말한다. 왜 그럴까? 세월은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죽음으로 인도 하기 떄문이다. 그래서 편안한 (santi ) 쉼터(tāā)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라 하여 또 휩쓸린다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첫 번째 구절에서 삶은 휩쓸려가고라고 하였는데 동어반복이다. 글에서 가급적 동어 반복은 피하는 것이 원칙인데, 마치 노래 가사와 같은 게송에서 동어 반복을 하였다는 것은 번역에 있어서 문학적 소질이 부적한 것이 아니어서 그럴까도 생각해 본다. 성전협의 전재성님은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라고 하여 동어반복을 하지 않았다.

 

뭇삶(pāi)의 운명은?

 

늙으면 왜 쉴 곳이 없을까? 이는 숫따니빠따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늙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Nahi  so upakkamo atthi yena jātā na miyare,
Jarampi patv
ā maraa evadhammā hi pāino.

 

[세존]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삶의 운명은 이러한 것입니다.

 

(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빈부귀천고하를 막론 하고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 세월이다. 그런 세월은 무자비하여 인정사정 봐 주는 것이 없다. 누구나 늙어 가기 때문이다. 그런 늙음은 피할 수 없다. 또 늙음이 쉬었다가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쉼터도 없는 것이다.

 

그런 늙음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게송에서는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Jarampi patvā maraa,Sn3.8)”이라 하였다. 늙으면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뭇삶(pāi)의 운명, 법칙(dhammā)이라 하였다.

 

죽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자

 

늙으면 죽는다는 것은 운명이자 법칙이다. 누구나 예외 없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자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Eta bhaya marae pekkhamāno’ 라 하였다. 죽음의 본질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라 하였다. 이는 빠알리어 pekkhamàno‘pekkhamàna: [pr.p. of pekkhati] seeing; looking at’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Pekkhamàna보면서라고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빅쿠보디의 CDB에서도 Seeing clearly this danger in death’라 되어 있다. ‘죽음의 위험을 보면서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이라 하여 주어가 들어가 있다. 단지 죽음을 보는 것을 넘어 죽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자를 말한다.

 

누구나 다 죽는 다는 것을 알지만 죽는 다는 것의 본질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막연하게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절절하게 아는 사람은 드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써 죽음을 회피하려 한다. 그리고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죽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구구절절 애절하게 말씀 하신다. 그래서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halānamiva pakka na pāto patanato bhaya,
Eva
jātānamaccāna nicca maraato bhaya.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Yathāpi kumbhakārassa katā mattikabhājanā,
Sabbe bhedanapariyant
ā1- eva maccāna jīvita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렇습니다.

 

 

Daharā ca mahantā ca ye bālā ye ca paṇḍitā,
Sabbe maccuvasa
yanti sabbe maccuparāyanā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Tesa maccuparetāna gacchata paralokato,
Na pit
ā tāyate putta ñāti vā pana ñātake.

 

죽음에 패배당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지들도 자신들이 아는 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Pekkhata yeva ñātina passa lālapata puthu,
Ekameko ca macc
āna govajjho viya niyati.

 

친지들이 지켜 보지만, 보라 매우 애통해하는 자들을! 죽어야 하는 자들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갑니다.

 

 

Evamabbhāhato loko maccunā ca jarāya ca,
Tasm
ā dhīrā na socanti viditvā lokapariyāya.

 

이렇듯 세상 사람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Bodhi Tree

 

 

부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뭇삶들에 대하여 매우 리얼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열매는 떨어질 수밖에 없고 아무리 값어치가 나가는 귀한 도자기도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한번 형성된 모든 것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진리를 말씀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음 역시 그와 같은 것이어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sabbe maccuparāyanā)라 하였다.

 

 

하지만 진리를 아는 자들은 슬퍼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이다. 이는 단지 막연하게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과 다르다. 세상의 이치를 아는 자들은 죽음을 꿰뚫어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재성박사는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marae pekkhamāno, S1.3)”라고 번역하였을 것이다.

 

공덕은 짓는 것인가, 공덕은 쌓는 것인가

 

네 번째 구절에서는 공덕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īti.’라 하였다. 행복을 바라는 자들은 공덕을 지으라는 말이다.

 

이때 공덕이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뿐냐(puññā)’이다. 그래서 하늘사람은 선행공덕을 지으면 행복한 곳, 즉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노래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라 하였다. 번역에서 있어서 짓는것쌓는 것의 차이라 본다. 공덕은 짓는 것일까? 공덕은 쌓는 것일까?

 

우리말 한자용어에 적선(積善)’이라는 말이 있다. 연말 불우이웃 돕기나 걸인을 보면 적선한다고 하는데 바로 선한행위를 함으로써 선행이 쌓아지는 것을 적선이라 한다. 그래서 적선을 많이 하면 행복과 행운을 가져 올 것이라 한다. 종교적으로는 죽어서 좋은 곳, 즉 천상에 태어남을 말한다.

 

어쩌다 한 번 공덕을 지을 수 있다. 어쩌다 지나는 길에 걸인을 보았을 때 동전을 던지는 것 같은 행위이다. 또 어쩌다 절에 등을 달 수 있다. 자녀의 수능시험을 위하여, 또는 입찰을 앞두고 다급한 김에 무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에서 등을 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쩌다 하는 행위 역시 공덕을 짓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덕을 쌓는 것은 다르다. 꾸준히 선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단체에 기부하는 행위 같은 것을 말한다. 장애를 가진 자들을 돌보는 단체가 있다면 매월 정기적으로 일정액을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는 아예 자동이체를 하기도 한다. 또 밥을 굶는 자들을 위하여 무료 급식소에서 매번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행위는 일시적이 아니다. 어쩌다 돈이 생겨서 또는 아쉬운 사항이 발생하여 잠시 동안 공덕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보든 말든 세상에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꾸준히 선행공덕을 쌓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적선이다. 그래서 공덕을 짓는 것 보다 공덕을 쌓는 것이라는 번역어가 더 마음에 다가온다.

 

공덕행보다 더 수승한 것은?

 

공덕행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공덕행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다.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자 들에게 있어서 더욱 더 바람직한 것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
Eta
bhaya marae pekkhamāno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삶은 휩쓸려가고 생명은 덧없고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 버려야하리. (S1.3, 초불연)

 

[세존]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3, 성전협)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은 것이 뭇삶이다. 더구나 늙음에 따라 마땅히 쉴 곳 조차 없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짧은 삶을 살아가는 뭇삶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늘사람은 적선을 하여 행복한 곳, 천상에 나기를 노래 하였다. 하지만 천상의 삶은 영원하지 않다. 쌓은 공덕이 다 하면 언젠가는 아래 세상으로 내려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천상에서 새로운 공덕을 쌓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악처에 태어나기 쉽다. 행복만 천상에서는 즐기기만 할 뿐 공덕을 쌓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꿰뚫어 알고 있는 부처님은 공덕행보다 더 수승한 궁극적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이를 게송에서는 ‘santipekkha’라 하였다.  고요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을 뜻한다.

 

아미사(āmisa)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게송에서 로까미사(lokāmisa)’가 있다. 이는 로까(lokā) 와 아미사(āmisa)의 결합어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세속적 미끼라 번역하였고, 성전에서는 세속의 자양이라 하였다. 특히 아미사(āmisa)에 대하여 미끼자양으로 번역하였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각주에 따르면, 아미사(āmisa)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욕계와 색계 그리고 무색계의 삼계, 즉 집착의 대상적 세계를 말한다.  또 하나는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필수약품을 지칭하는 네 가지 필수품을 말한다. 그러나 게송에서 말하는 아미사는 전자를 뜻한다. 삼계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을 때 열반을 성취할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라 하였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 버려야하리.”라 하여 성전협 번역과 전혀 다른 맛이 나는 것 같다. ‘평화를 찾는 자라든가 미끼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왜 이런 번역의 차이가 발생한 것일까?

 

빅쿠 보디의 CDB(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전세계적으로 상윳따니까야 번역서는 여러 종이 있다. PTS에서 로마나이즈화한 이래 수 많은 종의 번역서가 나왔는데 주로 유럽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이다. 그래서 영어로, 독일어로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1999년 최초로 상윳따니까야가 번역되었다. 비록 부분 번역이긴하지만 우리말로 된 빠알리니까야를 갖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에 속한다. 그것도 출가자가 아닌 재가불자에 의하여 번역되었다.

 

최근 미국에서 번역된 상윳따니까야가 있다. 미국인 빅쿠인 빅쿠 보디에 의하여 번역된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가 그것이다. 이를 줄여 ‘CDB’라 한다. CDB를 인터넷 검색으로 발견하였다. PDF로 된 것이다. PDF에는 2000년에 간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인터넷주소는 다음과 같다.

 

 

1) CDB 1

http://lirs.ru/lib/sutra/Connected_Discourses_of_the_Buddha(Samyutta_Nikaya).Vol.I.pdf

 

2) CDB 2

http://lirs.ru/lib/sutra/Connected_Discourses_of_the_Buddha(Samyutta_Nikaya).Vol.II.pdf

 

 

내용이 방대해서일까 클릭하면 뜨는데 시간이 한참 걸린다. 수 분이 소요되는 것 같다. 끈질기게 기다리면 PDF 파일이 뜨는데 이를 저장할 수 있다. 특히 넷상에서 스크린 캡처하면 원문을 저장할 수 있다. 이는 글을 옮기는데 있어서 매우 편리하다.

 

빅쿠 보디의 번역을 보면

 

그렇게 하여 저장해 놓은 것 중에 S1.3에 대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The Blessed one:]

 Life is swept along, short is the life span;

No shelters exist for one who has reached old age.

Seeing clearly this danger in death,

A seeker of peace should drop the world's bait.

 

(Reaching, CDB S1.3, 빅쿠 보디)

 

 

빅쿠 보디가 번역한 영문 게송이다.

 

아마추어가 있는 그대로 번역하였더니

 

이를 번역해 보았다. 아마추어가 있는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삶은 함께 휩쓸려 가고 짧은 것이 생명이다.

늙음에 이른 자에게 그 어떤 보호막도 없다.

죽음의 위험을 분명하게 본다면

평화를 찾는자는 세상의 미끼를 떨쳐 내야 한다.

 

 

빅쿠보디의 영역을 있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용어를 이용하여 직역해 보았다.  번역을 해 놓고 보니 초불연 번역과 매우 유사해졌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삶은 휩쓸려가고 생명은 덧없고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 버려야하리. (S1.3, 초불연)

 

 

잘못 인용한 인용한 각주

 

영문에서 sweep휩쓸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is swept along’가 되어 함께 휩쓸려 가는이라는 뜻이 된다. 이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Upanīyati이다.

Upanīya  upaneti abs 로서 가져오다(brings up)’라는 뜻이다. Upanīyati는 이어지는 문구인 jīvitamappamāyu와 함께 쓰여 Upanīyati jīvitamappamāyu가 되는데, 이는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Upanīyati jīvitam appam āyu라 띄어쓰기로 되어 있다. 이는 ‘Upanīyati(좀더 가까이 가져오는, having brought near) jīvitam(, 생활) appam(조금, small) āyu(나이, age)’의 뜻이 된다. 따라서 Upanīyati jīvitam삶이 지나감에 따라’, 또는 살아 감에 따라라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삶은 휩쓸려 간다(Upanīyati)’는 것은 부서지고, 소멸한다는 뜻이다. 혹은 다가가는 것으로 점점 죽음으로 다가간다는 뜻이다. 마치 목자가 소떼를 몰고 가듯이 늙음에 의해 죽음으로 곁으로 인도된다는 뜻이다.”(SA.i22)

 

(‘삶은 휩쓸려 가고각주, 각묵스님)

 

 

각주를 보면 ‘Upanīyati에 대하여 삶은 휩쓸려 간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Upanīyati라는 단어 그 어디에도 이라는 말은 없다. 이는 잘못 인용한 것이다. Upanīyati jīvitam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삶을 뜻하는 jīvita가 빠진 것이다. 그럼에도 Upanīyati에 대하여 삶은 휩쓸려 간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휩쓸려 간다라는 말이 빅쿠 보디의 영역에 사용되고 있는 ‘sweep(휩쓸다)’와 같은 의미라는 것이디.

 

우연의 일치에 해당되는 번역일까?

 

빅쿠 보디의 영역 네 번째 구절을 보면 A seeker of peace should drop the world's bait.”로 되어 있다. 이를 직역하면 평화를 찾는자는 세상의 미끼를 떨쳐 내야 한다.”가 된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 버려야하리.”라고 되어 있다. 너무나 유사해서 놀랍다! ‘A seeker of peace’평화를 찾는 자이고, ‘the world's bait’세상의 미끼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빠알리어 문구는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라 하였다. 주어는 바로 이전 구절인 ‘Eta bhaya marae pekkhamāno’이다. 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으로 번역 되었다. 그래서 죽음을 꿰뚫어 보는자라는 뜻인 pekkhamāna 가 주어가 된다.

 

빅쿠 보디의 영역을 보면 “Seeing clearly this danger in death, A seeker of peace should drop the world's bait.” 라 하였다. 주어가 ‘A seeker of peace(평화를 찾는 자)’이다. 전재성님이 번역한 죽음을 꿰뚫어 보는 자와 다르다. 그런데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빅쿠 보디의 ‘A seeker of peace’ 를 그대로 활용하였음인지 평화를 찾는 자라 하여 주어를 삼았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또 하나 빅쿠 보디의 번역문에 world's bait’가 있다, 여기서 ‘bait’에 대한 영어사전을 찾아 보면 제일의 뜻이 미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에서도 역시 세속적 미끼라 하여 미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에 해당되는 번역일까?

 

자양분과 자양은 어떻게 다른가?

 

아미사사에 성전협에서는 자양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복합어인 ‘lokāmisa’에서 āmisa(아미사)를 자양분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āmisa(아미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āmisa(아미사)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food; flesh; bait; gain’라 되어 있다. 음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미끼(bait)라는 뜻도 보인다. 그런데 이 아미사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미끼라 번역하였고, 성전협은 자양이라 번역하였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양과 유사한 말이 자양분이다. 또 어떻게 다를까?

 

자양분은 빠알리어 아하라를 번역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S12.11에 따르면 1)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분, 2) 접촉의 자양분, 3) 의도의 자양분, 4) 의식의 자양분 이렇게 네 가지 자양분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아하라를 자양분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미사(sāmisā)와 니라미사(nirāmisā)

 

그런데 빠알리어 아미사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자양으로 번역하였다. 자양분과 비슷하지만 자양으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아미싸에 관한한 주석을 번역의 준거틀로 삼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원어에 가까운 자양을 취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적 번역을 거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아미사(자양)가 들어간 다음의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Atthi bhikkhave sāmisā pīti, atthi nirāmisā pīti, atthi nirāmisā nirāmisatarā p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1)자양을 수반하는 희열이 있고 자양을 여의는 희열이 있고 자양을 여의는 희열보다 더욱 자양을 여의는 희열이 있다.

 

(Nirāmisasutta-자양의 여윔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6.31, 전재성님역)

 

 

사선정에 있어서 희열(pīti), 행복(sukha), 평정(upekhā)과 그리고 해탈(vimokkha)에 대한 것이다. 위의 문장은 희열만을 표시 하였는데, 행복. 평정, 해탈도 같은 문장으로 되어 있다.

 

경에서 핵심어는 sāmisānirāmisā이다. 이는 아미사(āmisā)를 수반하는 것에 대하여 사미사(sāmisā)라 하였고, 여의는 것에 대하여 니라미사(nirāmisā)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미사는 눈, 귀 등으로 느끼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뜻한다. 그래서 오욕락을 즉기는 것도 희열이고 행복이라 하지만, 반대로 오욕락을 여의는 것도 희열이고 행복이라 한다.

 

그러나 더 큰 희열은 희열과 행복을 여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이다. 사선정에서 희열과 행복을 느꼈을지라도 열반보다 더 큰 희열과 행복, 평정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3)”라고 부처님이 노래 하였을 것이다.

 

빅쿠 보디의 모순된 번역

 

경에서 전재성님은 사미사(sāmisā)와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 ‘자양을 수반하는자양을 여의는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아미사를 원어 그대로 직역한 것이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의 각주에 따르면 빅쿠 보디의 CDB에서는 사미사(sāmisā) 에 대하여 신체적인 것이라 번역하였고 니라미사(nirāmisā) 에 대하여 정신적인 것으로 번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과도한 의역이라 한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번역은 1) 해탈의 상태를 정신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아라한의 경우, 신체적 고통은 느껴도 정신적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는 것과 모순이 될 수 있고, 2)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선정의 희열이 정신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 그러한 선정의 대상은 미세한 물질계와 상응하는 것이므로 신체적이라고 하는 모순이 생겨난다. 그래서 Rbg.IV.135에서는 세간적과 출세간적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사미사(sāmisā)와 니라미사(nirāmisā)의 각주, 전재성님)

 

 

빅쿠 보디가 사미사(sāmisā)와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 신체적인 것정신적인 것으로 번역한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Rbg.IV.135에서는 세간적출세간적이라고 번역하였다고 한다.

 

 

잘못된 주석을 보면

 

하지만 이런 번역 역시 문제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왜 문제인가? 전재성님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Srp.III.84에서 세간적인 것과 출세간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주석을 달고 있다. 이러한 번역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선정의 희열이 출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것은 선정을 포함하는 팔정도가 세간도(lokiyamagga)인 것과 모순이 된다.

 

(사미사(sāmisā)와 니라미사(nirāmisā)의 각주, 전재성님)

 

 

Srp.III.84 주석서의 페이지를 말한다. 그런데 주석서에서는 사미사(sāmisā)에 대하여 세간적인 것으로,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 출세간적인 것으로 주석을 달아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모순이라 한다. 사선정에 있어서 희열과 행복을  출세간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팔정도에는 바른 삼매를 포함하여 여덟 가지 실천해야 할 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팔정도에 대하여 세간의 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주석 Mrp.III. 84에 따르면, 아미사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에 의존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니라미사에 대하여 “적정(寂靜)의 수승한 사실에 대한 관찰을 생겨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S1.2)”와 그대로 일치한다.

 

주석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그런데 초불연의 사미사(sāmisā)와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한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세간적 희열이 있고, 출세간적 희열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 있다. 세간적 행복이 있고, 출세간적 행복이 있으며, 출세간보다 더 큰 출세간적 행복이 있다.

 

(출세간 경, S36.31,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은 사미사(sāmisā)에 대하여 세간적이라 하였고,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출세간적이라 번역하였다. 이는 주석적 번역이다. 주석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옮겨 있는 것이다.

 

희열, 행복에 대하여 출세간적으로 보는 것은 넌센스이다. 부처님은 사선정의 희열, 행복에 대하여 출세간적이라고 말씀 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외도의 사상에 가깝다고 하였다. 이는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현세열반론자로서 다섯 가지 근거를 통해서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D1)”라고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자아를 가지고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가짜열반을 추구한다는 뜻의 현법열반론이라 비판 하였다. 이는 사미사(sāmisā)가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또 부처님은 벗이여, 그래서 이 자아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라고 말씀 하였다. 이는 자아를 기반으로 하여 지금 여기에서 선정의 희열과 행복을 즐기는 자들을 현법열반론자라 비판 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이 명백히 선정에서 희열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정법이 아니라고 말하였음에도 초불연 번역을 보면 출세간적 희열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없다.

 

대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

 

초불연 번역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특징이 있는데 가장 큰 것 두 가지를 들라면 주석적 번역‘CDB번역을 중시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본문에 수 없이 대괄호치기가 나온다. ‘알음알이[]’과 같은 형태이다. 빠알리어 윈냐나에 대하여 알음알이로 번역하였는데 그것도 부족해서인지 한자어 식을 대괄호로 집어 넣었다. 이런 경우 옮길 때 난감하다. 알음알이 하나만 옮겨야 할지 모두다 옮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우리를]버리도다라고 하였을 때 대괄호 속의 우리도를 포함하여야 할지 망설여진다. 이 경우 대부분 번역자의 의도를 존중하여 남김없이 옮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대괄호치기가 주석적 번역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문맥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음에도 굳이 대괄호를 이용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다. 각주에 있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주석적 번역의 전형은 위라가(viraga)에 대하여 탐욕이 빛바래고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들 수 있다. 탐욕이라는 뜻의 라가(raga)에 대하여 분리를 뜻하는 접두어 vi를 붙여 위라가(viraga)가 되는데, 이는  탐욕이 떨어져 나가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주석서에 따르면 물감이 밴 옷감이 탈색되는 것을 예를 들어 탐욕도 빛바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은 주석적 설명을 초불연에서는 그대로 본문으로 활용하여 모든 정형구에서 탐욕이 빛바래고하여 다소 낭만적으로 번역하였다.

 

주석서를 맹신하는 듯한

 

S36.31에서 사미사(sāmisā)에 대하여 세간적이라 하였고,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출세간적이라 번역한 것 역시 주석적 번역이다. 하지만 이는 맹신에 가깝다. 과거 논사들이 주석해 놓은 것이 백퍼센트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석을 중시하는 것은 초불연 번역의 가장 큰 특징이다.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서 주석서를 중시하고, 청정도론을 중시하고, 아비담마 길라잡이를 중시하였다고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서를 중시한 것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경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언어학적 소양만으로는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 경은 부처님의 직계제자들이 이해하고 받아 들였던 그분들의 안목을 빌지 않고서는 결코 심도 깊게 이해 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인가? 경에 나타나는 특정한 술어와 특정한 구문과 특정한 배경과 특정한 문맥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고민한 것이 바로 주석서 문헌(Attakatha)이다. 그러므로 주석서는 삼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권위이다.

 

(번역에 임하는 태도, 주석서중시, 상윳따니까야 해제,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먼저 언어학적 해박한 지식만으로 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영어, 독어, 일본어, 티벳어등  여러 가지 언어를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주석의 힘을 빌리면 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철저하게 주석서의 의견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가장 오래된 주석은 권위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깔라마경에서 부처님은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A3:65)”라고 말씀 하셨다. 아무리 권위 있는 스승의 말씀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 판단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초불연의 번역 지침에 따르면 오래 된 주석의 권위는 모두 받아 들여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S36.31에서 사미사(sāmisā)에 대하여 세간적이라 하였고,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출세간적이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역자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는데

 

다음으로 초불연 번역을 보면 영역과 어순이 같고 또 번역용어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빅쿠 보디의 Seeing clearly this danger in death, A seeker of peace should drop the world's bait.” 에 대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 버려야하리.(S1.3)”이라고 번역한 것이 좋은 예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마치 영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해제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해제에서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역자가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본서 번역에 있어서 보디 스님이 10여 년간 노력하여 번역 출간한 상윳따 니까야영역본인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vol. 1&2)를 많이 참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보디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달아 놓은 주옥 같은 주해들은 역자의 번역과 주해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각묵스님, 상윳따니까야 해제 맷는 말’)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제까지 초불연에서 빠알리 원전을 그대로 직역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빅쿠 보디의 CDB를 많이 참조 하였다고 한다. 그 참조가 어느 정도인지는 영문과 번역비교를 해 보면 금방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빅쿠 보디의 CDB를 참조 하여 번역하였다는데 있고,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사실에 대하여 솔직하게 밝혔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보디 비구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영역본이 큰 위안과 안심이 되었다.”라고 다시 한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보고 있는 초불연의 상윳따니까야 번역서에 대하여 영문번역으로 보아도 되는 것일까? 해제글에서 각묵스님은 빅쿠 보디를 스리랑카에서 두 번 친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때마다 자상하게 질문하에 대답헤 주시고 공부와 번역을 격려해 주시던 스님의 모습이 훤하다.”라든가 이번 상윳따니까야 번역에서도 보디 스님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다. 지면을 빌어서 보디 스님께 절을 올리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하였다.

 

전재성박사의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와 같은 초불연의 번역에 임하는 태도와 달리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임하는 태도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주석서를 맹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각주를 보면 종종 잘못된 주석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다. 앞서 언급된 S36.31에서 사미사(sāmisā)에 대하여 세간적이라 하였고, 니라미사(nirāmisā)에 대하여출세간적이라고 주석한  Srp.III.84의 주석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또다른 주석과 경의 문맥을 파악하여 자양을 수반하는 희열이 있고 자양을 여의는 희열이 있고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주석을 중시하는 세간적 희열이 있고, 출세간적 희열이 있으며라고 주석적으로 번역된 초불연과  매우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전재성박사는 다음과 같이 강연하였다.

 

 

베끼는 사람들이 전문적인 학자들이 베끼는 것이 아니에요. 사경사가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경사들이 사경을 하다보면 졸아요 졸아. 그러다 보면 한줄씩 빼먹는다고.

 

제가 독일에서 공부를 해 보니까 티베트대장경, 빠알리대장경, 산스크리트대장경을 다 진열해 놓고 봐요. 그런데 보니까 한문도 한줄이 빠진거에요. 산스크리트나 빠알리에 있는데 한문이 한줄이 없어요. 이건 사경사가 졸다가 빼 먹은 거에요.

 

한문대장경이라도 완벽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냐. 한문이 너무 심오해지는 거에요. 앞뒤가 해석이 안되니까. 한줄 빼먹었으니까. 그러면 심오하게 해석해 버린다고.

 

그런데 진리는 명백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읽어서 알아야 되요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써 놓았겠어요.  빠알리 대장경도 마찬가지에요.

 

미얀마본, 태국본, 스리랑카본 라오스 캄보디아 본이 있어요. 그런데 다 대조를 해가지고 배열을 해야 되요 번역하려면. 왜냐하면 한줄씩 빠진 것을 붙잡고 평생 봐 보아야 무슨말인지 몰라요. 이상하게 심오하게 해석한다고. 그건 잘못된 거에요.

 

그래서 영국 PTS에서 엄청난 작업을 한 것입니다. 각나라 필사본들, 그 손으로 긁어서 쓴 것, 알아보기도 힘든 것, 다 대조해가지고 로마나이즈화해서 기호로 만든 거에요.

 

이건 번역하기 보다 힘든 작업입니다. 그걸 영국 PTS에서 한 것입니다. 불교국가에서 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불교국가에서 돈 한푼이라도 영국에 보태 준 것이 없어요. 자기들이 좋아서 한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작업을 해 놓았기 때문에 제가 번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 그렇지않으면 스리랑카본, 태국본, 미얀마본 다 갖다 놓고 할라다 보면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전재성박사, 2012년 3월31 정각원 토요법회, 미디어붓다 2012-05-16)

 

 

전재성박사는 번역할 때 특정 번역본에 의지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세상에 번역되어 있는 것을 모두 참조 하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티베트대장경, 빠알리대장경, 산스크리트대장경을 다 진열해 놓고 봐요.”라고 말하였다. 영어, 독일어, 일본어 뿐만 아니라 티벳어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특히 티벳어와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티벳어-한글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번역할 때 모든 판본을 놓고 일일이 대조과정을 거쳐 한 줄이라도 빠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였다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일까 영문판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또한 한문경전의 용어를 답습하지 않았다. 특히 용어를 한글화 하였는데, 중생을 뭇삶으로, 범천을 하느님으로 하는 등 파격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사대번역과 자주번역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접하면서 기존의 번역방식과 전혀 다름을 느꼈다. 그것은 외국의 유명 번역서를 중역한 것도 아니고 한문용어를 답습한 것도 아닌 우리말로 된 번역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초판본을 보면 우리말 상윳따니까야로 소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자주불교이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 불교를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한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힘으로 도입한 불교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말로 된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높게 평가한다. 불교가 도입된지 1700년이 흘렀지만 우리가 주인이 되는 입장에서 진정한 자주불교를 실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Upanīyati sutta

 

3. Sāvatthiya

Atha5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 gātha abhāsi: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
Eta
bhaya marae pekkhamāno 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īti.

(Bhagavā:)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
Eta
bhaya marae pekkhamāno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휩쓸려감 경

 

2.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의 면전에서 이 게송을 읊었다.

 

삶은 휩쓸려가고 생명은 덧없고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3.     [세존]

삶은 휩쓸려가고 생명은 덧없고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 버려야하리.

(휩쓸려감 경, S1.3, 각묵스님역)

 

 

덧없음의 경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어떤 하늘사람이 한 쪽에 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처럼 시를 읊었다.

 

2. [하늘사람]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오는 공덕을 쌓아야 하리.”

 

3. [세존]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덧없음의 경, S1.3,전재성님역)

 

 

Upameyyam - Comparing

 

I heard thus. once the Blessed one lived in Sāvatthi, in Jeta's grove in the monastery offered by Anāthapiṇḍika. When the night was waning, a certain deity illuminating the whole of Jeta's grove approached the Blessed one, worshipped, stood on a side and said:

“The life span is short and humans are led along,
There is no shelter for those overcome by decay.
Seeing this fear in death, do merit that brings pleasantness.
The life span is short and humans are led along
There is no shelter for those overcome by decay
Seeing appeasement in this, give up worldly material.”

 

 

3 (3) Reaching

At Savatthi. Standing to one side, that devata recited this verse

in the presence of the Blessed one:

3 "Life is swept along, short is the life span;

No shelters exist for one who has reached old age.

Seeing clearly this danger in death,

One should do deeds of merit that bring happiness."9

[The Blessed one:]

4 "Life is swept along, short is the life span;

No shelters exist for one who has reached old age.

Seeing clearly this danger in death,

A seeker of peace should drop the world's bait."lo [3] <5>

 

(CDB, Bhikkhu Bodhi)


 

 

2013-09-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