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명상음악

고단한 삶, 형벌 같은 삶,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붓다 완다나’ 음악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17. 10:53

 

고단한 삶, 형벌 같은 삶,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붓다 완다나음악을

 

 

 

기독교에 찬송가가 있다면 불교에 찬불가가 있다. 최근 어느 카페에서 매혹적인 찬불가를 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붓다사이다. 블로그에 여러 차례 올린 빠알리 예경문이다.

 

그런데 카페에서 접한 음악은 노래 하는 스님으로 유명한 정율스님이 부른 새로운 곡이었다. 소리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오리지널 곡 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그래서 곡을 다운 하기 위하여 검색하여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사장 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정율스님의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

 

정율스님의 빠알리 예경문 찬불가의 제목은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CD가 판매 되고 있다. 정식가격은 14, 000원이다. 옥션에서는 11,700원으로 되어 있다.  CD발매와 관련 하여 불교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 되었다.

 

 

20년 넘게 음성포교에 나서고 있는 노래하는 수행자 정율스님이 최근 빨리어로 제작된 제4집 음반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를 출시했다.

 

3오늘은 좋은날에 이어 2년 여 만에 새롭게 선보인 이번 음반에 수록된붓다 원다나(Buddhavandanā,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는 총 44분으로 소프라노 임신희 씨와 대한불교소년소녀합창단이 코러스를 맡았다. 이번 음반은 말레이시아 작곡가인 신디(shindi)씨의 찬불가에 부처님 당시 언어인 빨리어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아 삼붇닷서(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존귀하신 분 공양 받아 마땅하신 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 분께 귀의합니다)”로 불렀다. 또 이 음반은 앞으로 전국 승가대학에서 빨리어 교육자료 배경음악으로도 활용될 예정이다. 스님은 이를 위해 조계종 교육원에 음반 300장을 보시했다.

 

지난 2004년 정율스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당시 현지 불교백화점에서 우연히 듣게 된 찬불가에 매료돼 음반작업을 결심했다. 미국 LA에서 지도했던 합창단 단원으로부터 작곡가 신디 씨를 소개받아 제작이 이뤄졌다. 정율스님은스리랑카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이 음악을 들었을 때 순간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면서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도 내가 머무는 공간에는 종일 이 음악이 울려 퍼졌고 노래하고 싶다는 발원이 화두처럼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정율스님은 4집에 이어 올해 상반기 내에 5 ‘5삼보께 귀의하는 노래 6부처님께 약속하는 노래를 잇달아 발표할 예정이다. 두 음반 역시 빨리어로 제작되며, 4집과 달리 스님이 작곡한 곡을 싣는다. 정율스님은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풀어서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빨리어를 선택한 것이라며부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빨리어를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더욱 알리고 싶어 이번 음반을 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 부처님 언어로 부른 빨리어 찬불가, '노래하는 수행자' 정율스님 4 음반 출시, 불교신문 2013-03-11)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더욱 알리고 싶어 이번 음반을 제작하게 됐다라고 소개 하고 있다. 하지만 불자들은 이런 음반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인터넷 시대에 인터넷 공간에 노래가 유포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돈을 내고 음반을 구입해야 한다.

 

오리지널 곡 보다 더 감명적인

 

그런데 이런 좋은 노래가 있는 것을 어느 카페에 올려진 음원을 보고 알았다. 다운 받을 수 없고 다만 플레이하여 들을 수 있다. 추적해 보니 조선일보에서 음원을 올려 놓은 것이다. 조선일보 기사와 함께 실려 있는 정율스님의 4집 앨범에 수록 되어 있는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이다.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아 삼마삼붇닷서(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sambuddhassa)”로 시작되는 정율스님의 음성은 오리지널 곡 보다 더 감명적이다.

 

 

 

정율스님의 붓다완다 노래 듣기 (아래줄 클릭, 37분)

 

 

 

 

 

 

정율스님

지난해 5월 명동성당에서 공연하는 정율 스님

(출처: 정율 스님, 고대 인도 서민 언어 '팔리' 음반 발매, 조선일보 2013-01-18)

 

 

정율스님이 부른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아 삼마삼붓닷서….”로 시작 되는 노래에 대하여 다 완다나라 하였다. 이 붓다 완다나는 이미 인터넷에 유포 되어 있다. 유튜브에서도 오리지널 음악동영상이 실려 있어서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다. ‘붓다 완다나오리지널 곡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a Sambuddhassa

 

 

 

이렇게 오리지널 곡이 있음에도 정율스님은 왜 새로운 음반을 만들게 되었을까? 정율스님이 2004년 스리랑카 불교백화점에서 처음 붓다 완다나 음악을 들었을 때 마치 천상의 노래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율스님은 작곡자를 수소문했고, 수차례 소개서와 편지가 오간 끝에 음반 취입 허락을 허락받았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음악이 2013 1월에 발매된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음반을 사야만 들을 수 있다.

 

붓다 완다나(Buddhavandana)’란 무엇인가?

 

초기불교를 접한 불자들에게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라는 문구는 익숙하다. 그래서 법회나 수행을 시작 하기 전에 세 번 낭송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반야심경이 모든 법회에서 독송되는 것처럼 붓다 완다나(Buddhavandana)’ 역시 모든 테라와다 불교 전통법회에서 독송 된다. 그렇다면 붓다 완다나란 무엇인가?

 

오른쪽 마우스 버튼이 금지되어 있는 글

 

붓다 완다나에 대한 해설이 있다. ‘선일스님이 작성한 글(붓다 완다나 해설)이다.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크랩이 금지 되어 있다. 오른쪽 마우스 버튼을 금지하여 놓았기 때문에 글을 가져 갈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유포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가져 갈 수 있어야 해 놓아야 함에도 스님들이 작성한 글을 보면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

 

스크랩이 금지된 붓다완다나에 대한 내용을 글로 옮기기 힘들다. 왜냐하면 스리랑카에서 오랫동안 공부한 스님이 글에는 빠알리어 읽는 방법이 별도로 표기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마 삼붓닷사(samma sambuddhassa)’에 대하여 삼마아 삼붓닷서식으로 표기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를 작은 글씨로 표시하여 놓았기 때문에 옮기가 매우 어렵다.

 

오직 한분 그분을 위하여

 

스님의 해설에 따르면 나모 땃사그분께 귀의 합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모 땃사에서 인칭대명사 땃사바가와또(세존), 아라하또(아라한), 삼마삼붓다사(정등각자)’이렇게 세 단어에 모두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나모 바가와또(세존께 귀의합니다)”

나모 아라하또(아라한께 귀의합니다)”

나모 삼붓닷사(정등각자께 귀의합니다)”

 

 

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귀의의 대상이 세 분을 가리키는데 이는 오직 한 분 석가모니 부처님을 뜻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별칭으로 불리우는 여래십호 중에 세 개를 대표로 뽑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예경문에는 바가와또(세존), 아라하또(아라한), 삼마삼붓다사(정등각자) 세 가지가 나온다. 그런데 왜 아라한이 들어가 있을까?

 

부처님도 아라한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소승불교라고 폄하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라한이다. 그래서 우리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부처님이 되려 하는데 소승불교에서는 겨우 아라한이 되려 하다니…” 라며 폄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이다. 왜 그런가? 빠알리삼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율장 대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러므로 육신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통찰력으로 보아야 한다. 육신과 마찬가지로 느낌이 어떤 것이든, 지각이, 형성, 의식이 어떤 것이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보고 가르침을 잘 습득한 훌륭한 제자들은 몸에도 집착하지 않고,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고, 지각에도, 형성에도, 의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집착을 떠났을 때 욕망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해탈하면‘나는 해탈하였다.’고 알게 된다.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알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다섯 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에 기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다섯 명의 비구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번뇌로부터 해탈하였다.

 

그 때 이 세상에서 아라한은 여섯 명이 되었다.

 

(율장 마하왁가 1 6:38-47,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율장에 따르면 부처님이 무상과 무아와 관련하여 두 번째 설법을 하자 오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율장 대품에서는 이 세상에서 아라한은 여섯 명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 야사와 야사의 친구 네명이 출가하여 번뇌가 모두 소멸하였을 때 이로써 이 세상에 아라한은 열 한명이 되었다.(율장 마하왁가 1 9:1~4)”라 하였다. 이어서 야사의 전친구 50명이 양갓집 자제들이 한꺼번에 출가하여 모두 깨달았을 때 이로써 이 세상에 아라한은 예순 한명이 되었다.(율장 마하왁가 1 10:1~4)”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도 아라한이라는 말이다. 부처님도 아라한임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 테라와다 불교에 대하여 소승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넌센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에 대한 정확한 뜻은 어떤 것일까?

 

붓다완다나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는데

 

예경문 붓다완다나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작은 경(M27)’에 보인다. 빠알리 원문과 함께 초불연과 성전협, 그리고 빅쿠보디와 빅쿠냐나몰리의 MDB 영역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Eva vutte jāussoi brāhmao sabbasetā vaabhīrathā orohitvā ekasa uttarāsaga karitvā yena bhagavā tenañjali paāmetvā tikkhattu udāna udānesi.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1)

이와 같이 말하자 지눗소니 바라문은 백마가 끄는 온통 흰색으로 장엄된 백마차에서 내려 한쪽 어깨를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세 번 감흥어를 읊었다.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초불연, 대림스님 각묵스님 번역)

 

 

 2)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라문 지눗쏘니는 흰 암말이 끄는 온통 흰 마차에서 내려 한 쪽 어깨를 드러내고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을 하고 세 번 감탄하여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성전협, 전재성님 번역)

 

 

3)

When this was said, the brahmin Janussoni got down from his all-white chariot drawn by white mares, and arranging his upper robe on one shoulder, he extended his hands in reverential salutation towards the Blessed one and uttered this exclamation three times:

 

“Honour to the Blessed one, accomplished and fully enlightened!

Honour to the Blessed one, accomplished and fully enlightened!

Honour to the Blessed one, accomplished and fully enlightened!

 

Perhaps some time or other  we might meet Master Gotama and have some conversation with him.”

 

(Bhikkhus Nyanamoli and Bodhi)

 

 

경에서 바라문 지눗소니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예경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라고 세 번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예경문이다.

 

영역(英譯)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이 아니다

 

예경문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세 가지 극존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가와, 아라하타, 삼마삼붓다 이렇게 세 가지 존칭을 사용하였다. 이런 예경문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성전협에서는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라고 번역 하였다.

 

두 번역을 비교해 보면 바가와와 삼마삼붓다에 대한 것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라한에 대해서는 번역이 다르다. 초불연에서는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거룩한 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빅쿠 보디와 빅쿠 냐마몰리의 MDB영역에서는 “Honour to the Blessed one, accomplished and fully enlightened!” 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완전하게 깨달음을 성취한 자, 축복받은 자에게 경배합니다.”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역은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로 표현 되는 세 가지 별칭에 대한 적절한 번역이 될 수 없다고 본다. 특히 부처님에게 축복받은 자라는 의미의 ‘Blessed one’이라는 번역어는 납득하기 어렵다. 영역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붓다완다나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과 성전협의 번역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를 선일스님의 번역과 비교 해 보면 다음과 같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1)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초불연 대림-각묵스님역)

 

2)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성전협 전재성님역)

 

3)“바가와이시고, (최상의)아라한이시고, 삼마~삼붓다이신, 그 분께 예경드립니다.”

(선일스님역)

 

 

세 번역을 비교해 보면 전재성님역과 선일스님역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는 인칭대명사 땃사(tassa)가 바가와와 아라한과 삼마삼붓다에 공통으로 적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불연의 번역을 그분 세존이라 하여 오로지 바가와에 한정한 듯하다. 나머지 아라한과 삼마삼붓다에는 적용하지 않은 것 같아 다소 어색해 보인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선일스님의 바가와이시고, (최상의)아라한이시고, 삼마~삼붓다이신, 그 분께 예경드립니다.”가 가장 이상적인 번역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한 분을 대상으로 하여 세 가지 극존칭이 모두 동원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 바가와’, ‘그분 아라한’, ‘그분 삼마삼붓다식의 번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퍼 갈 수 있게

 

한편의 잘 만들어진 불교음악은 신심을 일의키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불교음악을 통해서이다.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한 2006년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Imee Ooi(黃慧音)’ 음악을 알게 되면서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중국계 말레이시아 불자가수인 Imee Ooi는 수 많은 불교음악을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아끼는 음악이 라따나경(Ratana sutta, Sn2.1)과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이다. 그래서 이 두 음악은 늘 듣고 있다. 그래서 음원을 다운 받아 음악동영상을 만들었다. 중국사이트에 들어 가면 mp3음원이 공개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음악에 대하여 블로그의 프로필란에도 음원과 함께 올려 놓었다.

 

현재 라따나경은 조회수가 6,982회에 달하고, 자야망갈라가타는 7,177회에 달한다. 이외에도 자애송(The Chant of Metta), 자애경(Mangala Sutta)도 음악동영상을 만들어 올려 놓았다. 그래서 누구나 퍼 갈 수 있게 해 놓았다.

 

또 음악을 선곡하여 CD를 만들었다. 그래서 거래처나 도반, 친구, 친척 등 인연 있는 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음악을 듣고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환희가 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어떤 법우님은 이제까지 듣던 대승경전 음악테이프를 치우고 하루 종일 선물한 CD음악만 듣고 있다고 하였다.

 

고단한 삶, 형벌 같은 삶,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잘 만들어진 하나의 음악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그런 음악중에 정률스님의 붓다 완다나도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스님의 노래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들을 수 없다. ‘부처님께 예경하는 노래라는  CD를 사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불자들은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는 줄 조차 모른다.

 

정율스님의 붓다 완다나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아 삼붓닷서….” 를 들으면 천상의 화음을 듣는 듯 하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환희심이 일어난다. 이런 좋은 음악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형벌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3-10-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