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경문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석가모니부처님”
인터넷시대에 부처님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부처님’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어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말한다. 부처님 앞에 한자식 부처님의 성을 붙여서 ‘석가모니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부처님도 빼 보리고 “석가모니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의는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부처님에 대하여 이름이나 성을 붙여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고따마부처님”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어떤 이는 부처님을 호칭할 때 항상 “고따마부처님”이라고 쓰는 것을 보았다. 왜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일까? 아마도 대승의 부처님과 구별하기 위해서일것이다. 대승에서도 부처님이라 하고, 초기불교에서도 부처님이라 하는데 어느 부처님을 말하는 것인지 혼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을 지칭할 때 “고따마부처님”이라 부른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칭호 역시 적절치 않아 보인다.
다 아는 사이임에도
한 조직에 최고 책임자가 있다. 그런 책임자는 팀장, 사장, 장관 , 대통령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그런데 그 조직의 일원이 해당 장을 지칭할 때 이름을 함께 붙여 부르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다 아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실명을 넣어 “아무게사장님” 또는 “아무게대통령”이라고 부르면 대단히 어색해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자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라고 한다거나 “고따마부처님은~”라고 하는 것은 어색하고 적절치 않아 보이는 것이다.
대승부처님 호칭은?
불자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그냥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 듯 하다. 또 하나를 든다면 “붓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하여 “붓다님”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붓다라는 말 자체에 존칭의 의미가 이미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말 부처는 우리나라 언어표현 예법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의 부처님을 지칭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호칭이 있을 수 있지만 경전의 이름을 붙이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법화경에 등장하는 부처님을 지칭할 때는 “법화경 부처님은~”이라 하면 된다. 또 금강경에 등장하는 부처님에 대해서는 “금강경 부처님은~”이라고 하면 된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이 ‘진짜 오리지널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처님에 대하여 대승과 구분한다 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은~” 라든가 “고따마 부처님~”라고 하는 것은 적절한 호칭이 아니라 본다. 오히려 부처님을 깍아 내리는 것이라 본다. 왜 그럴까?
“수행자 고따마는…”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에 대한 다양한 호칭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외도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공통적으로 쓰는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1)
[하늘사람]
안으로 묶이고 밖으로 묶였네.
사람들은 매듭에 묶여 있네.
고따마께 이와 같이 여쭈어보니
이 매듭을 풀 사람 누구입니까?
(S1:23)
2)
[꼬살라 국왕 빠쎄나디]
고따마시여, 모임을 이끌고 지도하며 무리의 스승이신 수행자나 성직자들, 잘 알려져 있고 대중들에게 높이 평가를 받는 이름이 난 구원자들이 있습니다.
(S3:1)
3)
[바라문 악꼬싸까]
그대 고따마여, 나는 그들에게 단단하거나 연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한다.
(S7:2)
4)
[외도 유행승 잠부카다까]
벗이여 싸리뿟따여, 무엇을 위해서 수행자 고따마는 청정한 삶을 삽니까?
(S38:4)
네 가지 예를 들었다. 모두 불교와 관련이 없는 존재들이 말한 것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고따마”라고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바라문이나 육사외도 들이 그렇다.
외도들은 부처님을 호칭할 때 반드시 ‘고따마’라는 이름을 붙인다. 마치 김씨, 박씨 하듯이 성이나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 유일신교도들이 부처님을 지칭할 때 “부처님이~”라 하지 않고 “석가모니가~”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불자들이 “석가모니부처님”이라거나 “고따마부처님”이라고 하여 이름을 붙여 말하는 것은 부처님을 낮추어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부적절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을 어떻게 호칭해야 하는가?
“세존이시여(Bhagavā)”
우리나라에서 불자들이 부처님을 호칭할 때 “부처님”이라고 하면 된다. 그렇다면 경전에서는 출가자나 재가자들이 부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을까? 다음과 같은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M6, 초불연번역)
그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불렀다. 수행승들은 세존께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M6, 성전협번역)
(Ākaṅkheyyasutta-바란다면의 경, 맛지마니까야 M6)
맛지마니까야의 한 구절을 예로 들었다. 제자들이 부처님을 부를 때 “세존이시여”라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재가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세존이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바가와(Bhagavā)’이다.
왜 ‘바가와(세존)’라 하였을까?
빠알리니까야에서 출가자나 재가자들 모두 공통적으로 부처님을 부를 때 “세존”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다. 왜 그럴까?
부처는 붓다의 음역이다.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경전속에서는 깨달은 자라는 뜻의 ‘붓다’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부처님 당시 붓다라는 명칭이 보편적인 호칭이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이는 우리말 ‘선생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교육을 받고 강단에 서면 누구나 ‘선생님’이라는 명칭을 불러 주듯이 고대인도에서는 붓다라는 명칭이 보통명사처럼 쓰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다른 깨달은 자들과 차별을 하여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바가와’ 라 하여 극존칭으로 호칭한 것이다.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오늘날 초기불교가 널리 보급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초기불교식 또는 테라와다식 예경문이 보급 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이다. 빠알리어로 된 노래도 보급되어 있어서 인터넷 시대에 누구나 들을 수 있다.
예경문은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법회에서 빠지지 않는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도 약식으로 법회를 할 때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라고 독송하면서 이 예경문 하나로 끝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나 주문 외우듯이 암송하는 것이 예경문이다.
예경문 근거경을 발견하고
그런데 이 예경문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번역은 초불연과 성전협 두 개를 모두 실었다.
Evaṃ vutte jāṇussoṇi brāhmaṇo sabbasetā vaḷabhīrathā orohitvā ekaṃsaṃ uttarāsaṅgaṃ karitvā yena bhagavā tenañjaliṃ paṇāmetvā tikkhattuṃ udānaṃ udānesi.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이와 같이 말하자 지눗소니 바라문은 백마가 끄는 온통 흰색으로 장엄된 백마차에서 내려 한쪽 어깨를 드러나게 윗옷을 입고 세존을 향해 합장한 채 세 번 감흥어를 읊었다.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초불연, 대림스님 각묵스님 번역)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바라문 지눗쏘니는 흰 암말이 끄는 온통 흰 마차에서 내려 한 쪽 어깨를 드러내고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을 하고 세 번 감탄하여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성전협, 전재성님 번역)
(Cūḷahatthipadopamasutta-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27)
예경문의 근거가 되는 경이 맛지마니까야의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작은 경(M27)’에 있음을 확인 하였다.
경에서 바라문 지눗소니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예경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부터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라고 세 번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누구나 암송하는 예경문이다.
부처님에 대한 극존칭 세 가지
예경문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세 가지 극존칭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바가와, 아라하타, 삼마삼붓다 이렇게 세 가지 존칭을 사용하였다. 이런 예경문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성전협에서는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라고 번역 하였다.
두 번역을 비교해 보면 바가와와 삼마삼붓다에 대한 것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아라한에 대해서는 번역이 다르다. 초불연에서는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거룩한 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름은 번역자들의 개성에 따른 결과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느 것이 맞다 틀리다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다만 읽는 이가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예경문에서는 부처님의 세 가지 극존칭이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여래십호라 하여 열 가지 부처님에 대한 극존칭이 정형구로 실려 있다. 빠알리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는 십호는 다음과 같다.
Evameva kho brāhmaṇa, idha tathāgato loke upapajjati: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ī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바라문이여, 그와 같이 여기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아라한[應供]이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이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이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天人師]이며,
부처님[佛]이며,
세존[世尊]입니다.
(초불연, 대림스님 각묵스님 번역)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추신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이해하는 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신 님,
사람들을 잘 길들이시는 님,
신들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세상에 츨현합니다.
(성전협, 전재성님 번역)
(Cūḷahatthipadopamasutta-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27)
예경문에서 아라한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공양받아 마땅한 분이라 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중국어로 번역된 응공(應供)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한자어 ‘응공(應供)’에 대하여 ‘공양받아 마땅한 분’으로 번역하여 예경문에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전재성박사는 아라한에 대하여 ‘거룩한 님’으로 번역하였다. 모든 번뇌를 다 소멸한 성자이기 때문에 거룩한 분이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성자는 복전이기 때문에 공양받아 마땅한 것이다.
부처님의 십호를 보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 단순히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붓다가 아니라 이 세상에 존귀한 호칭은 다 붙어 있다. 이런 열 가지 호칭 중에 세 가지로 압축된 것이 바가와(세존), 아라하타(아라한), 삼마삼붓다(정등각자)이다. 그래서 열가지를 대표하여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라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자들끼리 어떻게 불렀을까?
이와 같이 불자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극존칭을 하였다. 함부로 ‘샤카무니’니 ‘고따마’이니 하는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이다. 외도들이나 ‘고따마’라 하였지 부처님의 제자들은 결코 ‘고따마’라고 부른 적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부를 때 “세존이시여(Bhagavā)”라는 극존칭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료들끼리는 어떻게 불렀을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Tatra kho āyasmā sāriputto acirapakkantassa bhagavato bhikkhū āmantesi: 'āvuso bhikkhavo'ti. 'Āvuso'ti kho te bhikkhū āyasmato sāriputtassa paccassosuṃ.
세존께서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리뿟따 존자가 “도반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불렀다. “도반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사리뿟따 존자에게 응답했다.
(초불연, 대림스님 각묵스님 번역)
그때 존자 싸리뿟따가 세존께서 떠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벗들이여, 수행승들이여”라고 수행승들을 불렀다. ‘벗이여’라고 그 수행승들은 존자 싸리뿟따에게 대답했다.
(성전협, 전재성님 번역)
(Dhammadāyādasutta-가르침의 상속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3)
동료들끼리 부르는 호칭이 있다. 그것은 빠알리어 ‘아위소(Āvuso)’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도반이여”라고 하였고, 성전협 전재성 박사는 “벗이여”라고 번역하였다.
“도반이여”vs “벗이여”
아위소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Āvuso
: [ind.] (Vocative), friend; brother. (A form of polite address among monks).。
(禮貌稱呼語)尊者(們), 學友 [對同輩或晚輩使用].。
尊者達よ, 友よ [同輩, または下輩に対して用り].。
아위소는 영어로 friend(친구), brother(형제)라는 뜻이다. 승려들간 정중한 표현의 한 형태라고 부연 설명 되어 있다. 또 중국어로 尊者(존자) 또는 學友 (학우)라 되어 있다. 일본어로 “尊者達よ(존자들이여)” 또는 “友よ(친구여, 벗이여)”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빠알리어 아위소(Āvuso)는 친구, 벗, 존자 등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에서 두 번역을 보면 명칭이 다르다. 초불연에서는 ‘도반’이라 하였고 전재성박사는 ‘벗’이라 하였다. 번역어 도반과 벗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도반과 벗에 대하여 국어 사전을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다.
도반 [道伴]
[불교] 함께 불도(佛道)를 닦는 벗.
벗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사귀는 사람
도반은 불교용어로서 ‘불도(佛道)를 닦는 벗’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반면 벗은 마음이 서로 통하여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라 되어 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도반이라는 말이 더 제자들간의 호칭에 가깝다.
외도도 도반이 될 수 있을까?
승가내부의 호칭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시종일관 ‘도반’이라는 호칭으로 번역하였고, 성전협에서는 ‘벗’ 또는 ‘존자’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부처님과 제자들이 외도들과 대화할 때 서로 어떻게 불렀을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Evaṃ sante āvuso nigaṇṭhā ye loke luddā lohitapāṇino kurūrakammantā manussesu paccājātā, te nigaṇṭhesu pabbajantīti.
도반 니간타들이여, 그렇다면 세상에서 잔혹하고 손에 피를 묻히고 흉악한 업을 지은 자들이 나중에 인간에 태어나서 니간타로 출가한 것이 되고 맙니다.
(초불연, 대림스님 각묵스님 번역)
[세존]
그렇다면 존자들이여 니간타들이여, 세상에서 살인자, 손에 피를 묻히고 잔인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니간타들로 출가한 것이 됩니다.
(성전협, 전재성님 번역)
(Bhayabheravasutta-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4)
맛지마니까야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M4)’에서 부처님과 외도인 니간타의 제자들과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이 외도 니간타들에게 ‘āvuso nigaṇṭhā’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도반 니간타들이여”라고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도반의 사전적 의미가 ‘함께 불도(佛道)를 닦는 벗’의 의미 이기 때문에 외도인 니간타들을 도반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성전협 전재성박사는 “존자들이여 니간타들이여”라고 번역하였다. 아위소에 대하여 ‘존자’로 번역하여 적용한 것이다. 존자라고 칭한 것은 상대방을 배려한 것이라 본다. 이는 같은 수행자로 보기 때문이다. 비록 길은 다르지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사람을 모두 수행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수행자를 사마나라 한다. 한자어로 사문이라 번역된다. 그래서 존자라고 한 것은 사문에 대한 존칭을 뜻한다. 그런데 아위소에 대하여 도반이라고 한 것은 같은 불도를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본다.
부적절한 번역“도반 고따마시여”
그렇다면 외도 니간타가 부처님을 부를 때 어떻게 하였을까? 원본과 두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kho āvuso gotama sukhena sukhaṃ adhigantabbaṃ, dukkhena kho sukhaṃ adhigantabbaṃ.
도반 고따마시여, 행복으로 행복은 얻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으로 행복은 얻어 집니다.
(초불연, 대림스님 각묵스님 번역)
존자여 고따마여, 즐거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가 없지만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얻을수 있습니다.
(성전협, 전재성님 번역)
(Bhayabheravasutta-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4)
초불연 번역을 보면 외도 니간타가 부처님에게 “도반 고따마시여”라고 번역 하였다. 외도가 부처님에게 도반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다. 어떻게 부처님이 외도의 도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외도의 사상과 부처님의 상이 근본적으로 같지 않기 때문에 외도 니간타가 부처님에게 “도반 고따마시여”라고 말한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반면 성전협 전재성박사는 “존자여 고따마여”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단지 같은 사문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배려 하고 존중해 주는 의미에서 부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불자들은 주로 책을 통하여 불교를 접한다. 특히 초기불교의 경우 번역서를 통하여 부처님의 원음을 접한다. 그럴 경우 번역서에 크게 의존한다. 그런데 잘못 번역 되어 있거나 적절치 못한 용어가 들어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용어를 만들어 사용한다든가, 승가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하였을 때 불자들은 그대로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불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두 종류의 번역서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행운이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번역서를 선택하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 경전은 불자들에게 신심을 나게 한다. 가장 신심을 나게 하는 말이 부처님에 대한 호칭이다. 흔히 십호라 불리우는 극존칭을 보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 십호중에서도 세 가지로 요약된 예경문은 가장 신심을 일으키게 하는 말이다.
빠알리어: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우리말 음역:
나모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다사
우리말 번역:
1)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
2)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a Sambuddha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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