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최고의 수호경(빠릿따) 자야망갈라가타
위기에 처하면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면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가장 손쉽게 위지할 수 있는 것이 신이다. 유일신교라면 자신들이 믿는 창조주가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불자라면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불자가 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마하나마의 경(S55.37)에서와 같이 삼보에 귀의 하고 오계를 준수하는 삶을 살면 불자로 본다. 이때 삼보에 귀의 한다는 것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불교에서는 마치 유일신교의 유일신처럼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불보살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는 불보살이 신격화 되어 있다.
불자들이 바라는 것은
불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절에서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개인적인 소원성취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합격, 건강, 취업, 사업, 치유 등이다. 이와 같은 발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이다.
만일 불자들이 합격발원기도를 하였을 또는 입찰발원기도를 하였을 때 소원이 성취되었다면 어떨까?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만 들어 준다면 기도하지 않은 자는 탈락할 수 있다는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입학이나 입찰기도과 같은 기도는 이기적이고 극히 개인적인 행위로서 비불교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취지로 글을 쓰면 아쉬워 하는 불자들도 있다. 올린 글을 늘 지켜 보아 주시는 어떤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주셨다.
저는 불교가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기복이라 폄하하며 신앙심보다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려는 방법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경건히 기도하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이고 불교에서의 불공드리는 모습에는 나이든 보살님들이 그저 자식들 잘 되라 빌고비는 기복신앙이라 폄하하는 건 아닌지 그것도
우리 불자들이 더 나서서 말입니다
기도는 자신을 참회하고 집중하며 발원하면서 그렇게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생기고 깊어지는 가장 초기단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불은 멀고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잃거나 얻고자 하는 경험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붙들고 찾을때 그것이 이루어 지는 경험을 했다면 그것에서 부터 신앙심은
나오고 시작이 되는것 아닐까요
그것은 종교를 믿고자 하는 가장 근본적 목적이자 이유가 될 것이고 우리는 종교로서 불교를 보고 있다는것을
잊으면 안 되지 않을까 합니다
(P법우님)
법우님은 종교로서 불교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에 대하여 이성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기복적인 요소를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은 종교로서 설자리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이든 노보살이 자식을 위하여 불공드리는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취지로 글을 주셨다.
불공이란 무엇인가
원칙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기도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불공’이라는 좋은 말을 놓아두고 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 따라하기의 전형이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또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을 향하여 바라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비불교적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기도대신 불공을 올려야 한다. 그렇다면 불공이란 무엇인가? 불공과 관련하여 이미 ‘기도(祈禱)인가 불공(佛供)인가, 진정한 공양의 의미는’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불공을 ‘붓다 뿌자(Buddha-pūjā)’라 한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을 말한다. 그렇다면 공양이란 무엇일까? 마성스님의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정리 된다.
공양이란,
첫째, 불(佛)·법(法)·승(僧)의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절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공양이라 한다. 그런 공양개념을 빼면 세 가지이다.
첫번째 의미는 삼보에 음식·옷·꽃·향 등을 바치는 것이다. 이는 테라와다 불교와 동아시아 불교의 의미가 다르다. 한국불교에서는 육법공양이라 하여 향·등·차·과일·꽃·쌀 이렇게 여섯 가지를 부처님 전에 올리는 것을 말하지만,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단지 향과 꽃을 올릴 뿐이라 한다. 특히 꽃의 경우 핀 꽃을 꺽어서 올리는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꽃을 주어서 바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의 불상 앞을 보면 매우 소박하다.
스리랑카 불자들
공양의 두 번째 의미는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의 뜻이라 한다. 테라와다 불교의 경우 오로지 부처님 한분만을 믿기 때문에 불공의 의미는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경과 찬탄, 칭송, 예배가 될 수 밖에 있다. 그리고 세번째 공양의 의미는 봉사라 한다. 이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가 진정한 공양이라 볼 수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불법승 삼보에 대한 공양이다. 이런 공양에 바라는 기도가 있을 수 없다.
빠릿따(paritta)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자들은 허전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감성적이라기 보다 이성적인 냉철한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불자들에게 허전함을 채워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로 된다. 그래서 무언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하여 가르침에서 벗어난 대상에서 찾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빠릿따(paritta)’라는 것이 있다. 이를 ‘수호경(Protective sutta)’ 또는 ‘호신주’라 한다. 마치 우리나라 천수경처럼 ‘생활경’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수호경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테라와다 불교에서 수호경은 여럿 있다.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수호경은 라따나경(보배경, Sn2.1), 멧따경(자애경, Sn1.8), 망갈라경(길상경, Sn2.4)일 것이다. 이들 경은 가장 고층 경전이라고 알려져 있는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다. 또 이들 수호경은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예불문’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수호경은 어떤 경전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일까?
청정도론에서 본 수호경 이야기
청정도론에 수호경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부처님의 국토는 세 가지인다. 탄생의 국토, 권위의 국토, 경계의 국토이다. 이 가운데서 탄생의 국토는 여래가 입태 할 때 등에 진동한 일만 개의 우주까지이다. 권위의 국토는 백 천 구지의 우주까지이다. 그곳에 「라따나 경」(Ratana Sutta, 寶經=寶呪, Sn p.39),「칸다 빠릿따」(Khandha Paritta, 蘊護呪, Vin ii 109; A ii 72) ,「다작가 빠릿따」 (Dhajagga Paritta, 幢頂護呪, S i 218),「아따나띠야 빠릿따」 (Átánátiiya Paritta, , D iii 194), 「모라 빠릿따」(孔雀護呪, J-a ii 33) 등의 빠릿따들의 위력이 미친다.
(청정도론, 제13장 초월지 31절, 대림스님역)
For the Buddha-fields are of three kinds, that is, the field of birth, the field of authority, and the field of scope.
Herein, the field of birth is limited by the ten thousand world-spheres that quaked on the Perfect one’s taking rebirth-linking, and so on. The field of authority is limited by the hundred thousand million world-spheres where the following safeguards (paritta) are efficacious, that is, the Ratana Sutta (Sn p.39), the Khandha Paritta (Vin II 109; A II 72), the Dhajagga Paritta (S I 218), the Átánátiiya Paritta (D III 194), and the Mora Paritta (J-a II 33).
(영역 청정도론, 빅쿠 냐나몰리역)
청정도론의 저자는 5세기 스리랑카의 붓다고사이다. 청정도론 초월지에서 다섯 가지 수호경이 등장한다. 그것은 라따나, 칸다, 다작가, 아따나띠야, 모라 수호경이라 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 언급된 수호경은 밀린다왕문경에서도 언급된 것이라 한다. 밀린다왕문경에 대하여 5부 니까야에 포함하기도 하고 포함하지 않기도 하지만 이들 다섯 가지 수호경의 경전적 근거는 밀린다왕문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들 다섯 가지 수호경이 미치는 범위는 백천구지의 우주까지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계가 없고 끝도 없고 한량 없이 원하는 곳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우주가 파괴 되기 전까지 전 우주에 이 수호경의 위력이 미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런 수호경 중에 대표격이 ‘라따나경’이다.
수호경 중에 대표격 ‘라따나경’
라따나경을 알게 된 것은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부터이다. 글을 쓰기 시작 하면서 검색과정에서 발견 된 것이다. 그러나 라따나경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가장 고층 경전인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고, 현재 테라와다 불교에서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예불문이 수호경인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천수경처럼 테라와다 불교권 라따나경을 늘 수지독송한다고 한다. 그런 경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수호경이라 하여 주문 같은 것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테라와다에서 수호경은 부처님 말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씀을 언제나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다. 라따나경도 마찬가지이다. 17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라따나경에서 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3.
Yaṃ kiñci vittaṃ idha vā huraṃ vā 양낀찌 윗땅 이다 와- 후랑 와-
Saggesu vā yaṃ ratanaṃ paṇītaṃ, 삭게수 와- 양 라따낭 빠니-땅
Na no samaṃ atthi tathāgatena 나 노 사망 앗티 따타-가떼나
Idampi budd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깨달은 님 안에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Ratanasuttaṃ-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 3번 게송이다. 불법승 삼보를 찬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경에서 부처님에 대한 찬탄 내용이다. 이 세상과 내세에서라도 부처님과 같은 보배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따나경을 ‘보배경’ 또는 ‘보석경’이라 한다. 라따나(ratana)라는 빠알리어가 ‘보배’ 또는 ‘보석’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보배가 세 가지가 있다고 하여 라따나 경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찬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라따나경(Sn2.1)’에 대하여 수 없이 글을 썼고 음악동영상으로 만들었다.
칸다 수호경
라따나경은 수호경 중에 대표격이다. 그래서일까 5세기 붓다고사는 수호경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붓다고사가 소개한 라따나, 칸다, 다작가, 아따나띠야, 모라 이렇게 다섯 가지 수호경 중에 칸다 수호경이 있다. 이 칸다 수호경에 주목하는 것은 부처님이 빠릿따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칸다 수호경이란 어떤 것일까?
칸다 수호경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역자 대림스님은 ‘온호주(蘊護呪)’라 하였다. 이렇게 알기 힘든 한문으로 경의 이름을 붙인 것은 초불연에서 빠알리 니까야를 번역하기 이전에 청정도론이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빅쿠 냐나몰리의 영역 ‘The Path of Purification’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칸다 수호경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있음을 확인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 ‘뱀왕의 경(A4.67)’이 바로 칸다 수호경이다. 그런데 뱀왕의 경의 빠알리어 이름은 아힌다경(Ahinda sutta)이다. 여기서 아힌다는 ‘wanders about; roams.’로 ‘방황하다, 배회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아히(Ahi)가 ‘snake(뱀),蛇(뱀), 毒蛇(독사)’의 뜻이다. 이루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뱀과 관련된 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경에 대한 또다른 제목은 Ahimettasutta라 하여 ‘뱀에 대한 자애의 경’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수호를 위하여
이 뱀왕의 경에 주목하는 것은 부처님이 비구 개인과 비구 승가의 보호를 위하여 빠릿따(수호경, 보호주)를 읊을 것을 허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이 경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nujānāmi bhikkhave imāni cattāri ahirājakulāni mettena cittena pharituṃ, attaguttiyā attarakkhāya attaparittāy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지키고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수호를 위하여 이러한 네 가지 종류의 뱀왕의 혈통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펼치는 것을 이와 같이 나는 허락한다.
( Ahi(metta)sutta-뱀왕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7,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자신을 지키고(attaguttiyā), 자신을 보호하고 (attarakkhāya), 자신의 수호를 위하여(attaparittāyāti) 허락한다고 하였다. 이때 수호경에 해당되는 말이 ‘자신의 수호를 위하여(attaparittāyāti)’이다. 이런 수호경에 속하는 것은 앞서 언급된 라따나경(보배경, Sn2.1), 멧따경(자애경, Sn1.8), 망갈라경(길상경, Sn2.4)과 앙굴리말라경이 대표적이다.
뭇삶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수호경은 자신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을 수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뱀왕의 경에서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빠알리 원문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1.
Virūpakkhehi me mettaṃ mettaṃ erāpathehi me,
Chabyāputtehi me mettaṃ mettaṃ kaṇhāgotamakehi ca.
위루빡카들에게 나의 자애를!
에라빠타들에게 나의 자애를!
차비야뿟따들에게 나의 자애를!
깐하고따마까들에게 나의 자애를!
2.
Apādakehi me mettaṃ mettaṃ dipādakehi me,
catuppadehi me mettaṃ mettaṃ bahuppadehi me.
발 없는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두 발 가진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네 발 가진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많은 발을 가진 자들에게 나의 자애를!
3.
Mā maṃ apādako hiṃsi mā maṃ hiṃsi dipādako,
Mā maṃ catuppado hiṃsi mā maṃ hiṃsi bahuppado.
발 없는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두 발 가진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네 발 가진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많은 발을 가진 자들이 나를 해치지 않기를!
4.
Sabbe sattā sabbe pāṇā sabbe bhūtā ca kevalā,
Sabbe bhadrāni passantu mā kañci pāpamāgamā.
모든 뭇삶들, 모든 생명들, 모든 존재들은 모두
선하고 슬기로운 것만 보고
일체 악한 것을 만나지 않기를!
( Ahi(metta)sutta-뱀왕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67, 전재성님역)
게송에서는 뭇삶들에 대하여 자애의 마음을 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첫번째 게송을 보면 위루빡카, 에라빠타, 차비야뿟따, 깐하고따마까 이렇게 네 가지 이름이 나온다. 이는 뱀의 이름이다. 각주에 따르면 나가(Naga)가문의 뱀이라 한다.
이렇게 네 가지 이름의 뱀에게 자애를 내라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는 경에서도 표현 되어 있지만 어떤 수행승이 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발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이 네 가지 종류의 뱀왕의 혈통을 위하여 자애의 마음을 펼쳤다면, 그는 뱀에게 물려 죽지 않았을 것이다.( A4.67)”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뱀 뿐만 아니라 모든 뭇삶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면 자신을 지키고(attaguttiyā), 자신을 보호하고 (attarakkhāya), 자신을 수호(attaparittāyāti)할 수 있음을 말씀 하시고 빠릿따를 허용한 것이다.
우주적 스케일의 수호경, 아따나띠야의 경(D32)
부처님이 허용한 빠릿따의 내용을 보면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자애의 마음을 내어 스스로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대부분 빠릿따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따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우주적 스케일의 수호경도 보인다. 붓다고사가 언급한 아따나띠야 수호경이다. 그렇다면 아따나띠야 수호경은 어떤 것일까?
아따나띠야 수호경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디가니까야 아따나띠야의 경(D32)에 있다. 경에서는 비인간들 즉, 야차, 건달바, 꿈반다, 나가(뱀) 등의 해꼬지함으로부터 재가의 남자신도와 여자신도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벳싸바나(비사문천) 대왕이 부처님에게 빠릿따를 허용해 줄 것을 간청하는 것으로부터 경이 시작 된다. 그래서 벳싸바나는 긴 길이의 빠릿따를 읊었는데 부처님은 이를 침묵으로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빠릿따는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익혀야 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벳싸바나]
“세존이시여, 어떤 수행승이든, 수행녀이든, 재가 남자신도이든, 재가의 여신도이든 이 수호주 아따나띠야를 잘 익혀서 완전히 외우고 있는데, 만일 비인간, 곧 야차나 야차녀,… 사악한 마음으로, 수행승이나 수행녀나 재가 남자신도나 재가의 여신도가 가면 따라서 가고, …”
(Āṭānāṭiyasutta-아따나띠야의 경, 디가니까야 D32,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수호주(빠릿따)를 잘 익혀서 완전히 외우라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잘 익혀서 완전히 외우는 것’에 대하여 ‘의취’가 성취되는 것이라 하였다.
뜻하는 바를 성취하려면
의취란 뜻하는 바가 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그 의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취를 빠알리 문장에 틀리도록 완전히 충분히 알지 못하고 외우는 경우 보호주로서 효력이 없다. 완전히 충분히 알고 외우는 경우 보호주의 위력이 있다. 이득에 의해서 배우고 외우는 경우에도 의취는 성취 되지 않는다. 욕망의 여윔(出離)의 측면에서 자애를 선구로 하면, 외우는 자의 의취가 성취 된다.
(의취에 대한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수호경을 외우는 자세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아무 뜻도 모르고 단지 입으로만 암송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 본다. 이런 현상을 한국불교에서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한 때 열심히 다라니기도를 한 적이 있었는데
한 때 열심히 다라니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신묘장구대라니 108독 철야독송 기도회에 참가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독송회를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 참가자들은 다라니의 내용을 잘 모른다. 그리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라니의 내용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신성한 진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을 하면 안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뜻도 모른 채 암송을 한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매우 빠르게 독송한다.
이렇게 뜻도 모른채 주어진 시간 내에 기계적으로 독송하다 다라니 기도의 본래의 취지는 온데 간데 없고 단지 해냈다는 성취감만 남는다. 입으로 계속 암송하며 졸음과 싸워 가며 시간을 다 채웠다는 성취감을 말한다. 사실 알고 보면 그런 성취감도 큰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뜻도 모르고 마치 앵무새처럼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나중에는 무스 말인지 모를 정도로, 마치 타종교에서 방언하는 것처럼 변질된 다라니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나모라 다나 다라 야야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 다바야..”로 시작 되는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가 본래의 발음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열심히 외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각주에 따르면 정확한 발음이 아니면 효력이 없는 것이라 한다. 다라니 기도가 효력을 보기 위해서는 정확한 원어 발음과 동시에 그 뜻을 알고 독송해야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동떨어진 발음과 뜻도 모르고 밤을 새워 보아야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말한다.
또한 다라니 기도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득을 노리고 하는 것 역시 효과가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철야기도 하기 전에 다라니 공덕에 대하여 말한다. 다라니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늘 나라에 태어난다는 등 소원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각주에 따르면 그 어떤 빠릿따는 내용을 충분히 알고 외워야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도 정확한 원어로 된 발음을 말한다.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의 여윔(出離)의 측면에서 자애를 선구로 하면, 외우는 자의 의취가 성취 된다고 하였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에서
불교에 기도라는 말은 없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는 불교에서 기도는 있을 수 없다.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에게 의지하고 기도하는 행위는 불교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빠릿따를 허용하였다. 삶을 살아 가는 데 있어서 닥칠지 모르는 재난이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수호경은 매우 많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행복경(Maṅgala Sutta, Sn2.4)
② 보배경(Ratana Sutta, Sn2.1)
③ 자애경(Metta Sutta, Sn1.8)
④ 칸다 호주(Khandha paritta, A.ii.72)
⑤ 모라 빠릿따(Mora paritta, J159)
⑥ 왓따 경(Vattha Sutta)
⑦ 깃발 호주(Dhajagga paritta S11.3)
⑧ 아따나띠야 경(Aṭānāṭiya Sutta, D32)
⑨ 앙굴리말라 호주(Aṅgulimāla paritta, M86)
⑩ 칠각지 호주(Bojjaṅga paritta)
⑪ 뿟반하 경(Pubbaṇha Sutta, A.i.294)
이들 수호경의 특징은 철저하게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달리 다른 것에 의지 하지 않는다.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그럼에도 테라와다불교국가에서는 경전 밖에서 의지 하는 수호경이 있다.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발견한 것인데 그것은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이다. 이 게송은 모두 아홉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게송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 부처님의 승리의 행운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9번 게송)
마치 대승불교 경전에서 유통분을 보는 것 같다. 게송에서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 하고”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여덟 가지 부처님의 승리에 대한 것이 나에게 임하였을 때 어떤 불행도 극복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시대 최고의 수호경 자야망갈라가타
비록 자야망갈라가타가 경전에 실려 있지 않고 경에서 추린 것을 조합하여 구성된 것이긴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호경으로 본다. 그래서일까 스리랑카에서는 자야망갈라가타가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 행사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독립기념일과 같은 공식적인 행사에서 독송되고, 결혼식과 같은 비공식적 행사에서 ‘결혼식 축가’로도 불리워지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야망갈라가타에 대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대표적으로‘불행이 물러 가고 행복이, 자야망갈라가타 독송’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실생활에 있어서 자야망갈라가타는 널리 독송되고 있다. 그래서 자야망갈라가타가 이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수호경(빠릿따)으로 본다.
吉祥胜利偈巴利文黄慧音唱诵(23분 30초, 3회 반복, 33M)
2013-10-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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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물러 가고 행복이, 자야망갈라가타 독송 (0) | 2013.0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