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과 연기법
오늘 떠 오른 태양을 보면서
해가 바뀌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고, 또 내일은 오늘의 연속일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 밤에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 떠 오른 태양은 어제 뜬 태양이고, 내일도 또 뜰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떠 오른 태양을 보면서 해가 바뀐 것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해 본다. 오늘 떠 오른 태양은 어제의 태양과 달리 2014년 첫해를 알리는 태양이다.
심리적으로 해가 바뀐 것을 느끼는 것은 달력이다. 달력에는 2014년이라고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방송에서는 새해가 되었음을 끊임 없이 떠들어 대고 있다.
새해 소망을 보면
해가 바뀜에 따라 사람들마다 소원을 말한다. TV에서 보는 보통사람들의 소망은 단순한 것이다. “올해도 건강했으면 좋겠다.”라거나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와 같은 말이다. 그래서일까 새해 일출을 맞이 하여 사람들은 각자 바라는 소원을 이야기한다.
어느 프로에서는 절을 보여 주면서 열심히 절하고 있는 불자들의 소망을 물어 본다. 한결 같이 건강, 학업, 사업, 치유 등 이른바 사대 소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소원을 성취하게 해달라고 부처님전에 열심히 기도한다. 이런 소원성취 기도는 불교뿐만 아니라 타종교 마찬가지이고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누군가에게 빌고 또 빈다.
하지만 그 어떤 프로에서도 이웃이나 자신의 계발에 대한 소망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의식과 제도개혁이 이루어져 모두 다 행복하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든가, 불자라면 “자신을 청정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등의 소망을 말한다. 하지만 소원을 말하는 자들 거의 대부분 이기적 기복에 대한 기도가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사찰순례를 갔었는데 어느 스님이 모아 놓고 이야기하기를 “자신과 가족만을 위하여 기도 할 것이 아니라 이 생에서 해탈과 성불할 것에 관하여 기도 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입니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우리나라 불자의 거의 대부분이 자신과 가족의 안녕, 그리고 사업번창과 같은 기복적인 기도가 주류이지만, 불교의 본래 목표인 해탈과 성불을 위하여 기도 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100여 군데 이상 사찰 순례를 다녀 보았지만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 이었다. 사찰 순례를 가면 거의 대부분 스님들을 볼 수 없고 그에 따라 법문도 들을 수 없어서 단지 이 법당 저 법당 찾아 다니면서 참배만 할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 주지스님이 직접 법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불사’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순례팀을 맞는 경우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사찰에서는 관심 밖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유일하게 불자들을 향하여 불교의 본래 목적이 해탈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본래 목적에 충실할 것을 말하였다. 그절은 각원사로서 ‘새로운 전설의 청동대불과 스케일의 각원사(2010-10-05)’ 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렇게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기도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가장 귀중한 재산은?
최근 교계사이트서 의미 있는 기사를 보았다. 동산불교대학에서 니까야 강독 칠년 결사를 마치고 회향하는 자리에서 전재성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 당대에는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전재성 박사, ‘동산불교대학 니까야 읽기’ 7년 회향서 강연, 미디어붓다 2013-12-31)
한마디 말에, 한문구에 감동 받는 경우가 있다. 비록 짧은 말에 지나지 않지만 한마디 말로 인하여 인생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처해 있을 때 친구나 친지, 또는 스승의 말 한마디에 따라 인생이 180도 바뀌어 지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한마디 말로 인하여 인격적 변화를 초래 할 때 그 말은 ‘진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우쳤다는 이야기를 초기경전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인격적 변화가 일어 났음을 말한다. 그것도 지금까지 생각하던 것과 달리 180도의 사고 전환을 이루어 ‘마음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전재성님이 말한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라는 문구 역시 혁명적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주로 물질위주로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소망이고 소박한 희망이다. 그래서 누군가 해탈과 열반에 대하여 말하면 누군가는 ‘목구멍포도청론’으로 맞선다. ‘지금 당장 배가 고픈데 무슨 해탈열반타령하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목구멍포도청론이 맞다면 불교는 많이 가진 자들의 불교가 될 것이다. 목구멍 문제를 먼저 해결 하고 난 다음 보시, 자비, 해탈, 열반이 가능한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접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불교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천이 없듯이 부자나 가난한 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지금 굶어 죽어 가는 자에게 있어서도 가르침은 유효한 한 것이고,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재산을 많이 가진 자에게 있어서도 가르침은 차별 없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보시의 가르침, 자비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수행의 가르침 등 매우 다양하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먹고 살만하였을 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이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것이 가르침이다. 그런 가르침에서 강조되는 것은 정신혁명이다. 한마디에 말에 마음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전재성님의 “부처님 당대에는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은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하다.
기사에 따르면 동산불교대학에서는 지난 칠년간 니까야 읽기 강독이 있었다고 한다. 매주 한번 하여 무려 칠년에 걸쳐 니까야를 읽어 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니까야가 방대하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읽어 내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해 냈다는 것은 커다란 마음의 성취를 가져 왔을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적 재산’이다. 물질적 재산과 비교가 되지 않은 정신적 재산이다. 그래서 “가장 귀중한 재산이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것”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경전의 내용에는 하자가 거의 없습니다”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이다. 주로 초기불교경전을 근거로 한다. 그러다보니 자주 니까야를 열어 보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니까야를 처음부터 본 것은 아니다. 제1장 제1절부터 차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을 찾아 보는 형식이다. 오부니까야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이를 차례대로 읽어 나가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의미도 없다. 그때 그때 필요한 부분을 찾아 보는 것이다. 다만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하는 의문을 갖고 찾아 보는 것이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답이 있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답이 니까야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 하신 것이 틀림 없다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니까야 어느 한 구절도 버릴 것이 없고 반복구문도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은 모든 언어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사유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경전을 읽어보면 허점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문학도 읽어보면 허점이 보이는데 부처님의 경전은 다르다.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 봐도 경전의 내용에는 하자가 거의 없습니다. 현대 과학으로 봐도 어긋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부처님의 말씀은 아직까지도 허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실로 대단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재성 박사, ‘동산불교대학 니까야 읽기’ 7년 회향서 강연, 미디어붓다 2013-12-31)
전재성님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헛점’이 없다고 하였다. 니까야에 표현된 모든 언어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 니까야에서 초월적인 이야기, 신통이야기 등을 발견하고 후대에 삽입 되었느니하며 심지어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니까야를 접하면 접할수록 그런 문구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오감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깜냥(感量)’으로 가르침을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니까야에 대하여 문학작품이라 든가, 니까야에서 필요한 것만 발췌하여 단권으로 편집하자는 등의 주장은 매우 경솔한 것이다. 그래서 전승된 니까야는 어는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마치 기독교인들이 바이블을 일점일획 틀림 없는 사실이라 인정하듯이, 니까야의 어느 한구절도 버릴 것이 없다고 받아 들여야 한다. 기독교에서 문자주의로 인한 근본주의는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지만, 불교에서 빠알리니까야 문자주의에 따른 불교근본주의자가 되는 것은 인류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 봐도 경전의 내용에는 하자가 거의 없습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무착, 세친, 붓다고사 등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다
전재성님에 따르면 전승된 니까야는 그것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다만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못 번역하여 가르침을 왜곡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불교가 어려워졌습니다. 한문의 추상성 때문입니다. 말의 어렵고 쉬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거기에 들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말이 쉽다고 해서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직까지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드뭅니다. 무착, 세친, 붓다고사 등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해석이 되는데 무려 1500여 년이 걸렸습니다.
(전재성 박사, ‘동산불교대학 니까야 읽기’ 7년 회향서 강연, 미디어붓다 2013-12-31)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무착, 세친, 붓다고사 등 논사들이 해석한 주석서가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주석하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제대로 해석이 되는데 무려 1500여 년이 걸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붓다고사가 5세기 사람이므로 1500년이 지난 시점은 20세기가 된다. 이는 빠알리니까야가 서구에서 번역된 시점과 일치 한다. 영국, 독일 등에서 빠알리 원전을 직접 번역함에 따라 주석가들의 오류도 일부 발견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의 번역서에서 각주를 보면 종종 주석서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어떤 주석을 보면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는 코멘트도 달아 놓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이렇게 20세기가 되어서야 부처님의 원음이 제대로 번역된 것은 인류의 지식과 지성이 높아짐에 따라 과학의 발달에 기인하는 것이라 한다. 특히 상대성이론과 양자론 등의 현대물리학의 발달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연기법을 예를 들어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연기 법칙의 첫 번째 법칙입니다.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는 말도 쉬운 것 같지만, 이것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또 몇 백 년이 흘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던사이언스>의 첫 장을 펴면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는 말이 나옵니다. ‘원인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뉴턴의 만유인력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전재성 박사, ‘동산불교대학 니까야 읽기’ 7년 회향서 강연, 미디어붓다 2013-12-31)
전재성님은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연기법을 제대로 아는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래서 거시적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적인 양자역학의 세계를 이해하였을 때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뉴튼 역학을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결정론적 세계관’이 적용 되었고, 뉴턴 이전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라는 것으로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말이다.
병발(竝發)에 대하여
그래서 전재성님은 현대적으로 해석된 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이 쉬운 말로 번역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쉽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거기에는 큰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거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가 병발(竝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번역에는 병발이 아니라 시간지연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공을 던져 유리창을 깨면 공을 던지는 것이 먼저고 깨지는 것이 뒤였습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에서는 그것이 설명이 안 됩니다. 결론적으로 병발이 맞습니다. 이것 참 어려운 것인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천문학자들은 별빛이 지구까지 오는데 수백억광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여간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전재성 박사, ‘동산불교대학 니까야 읽기’ 7년 회향서 강연, 미디어붓다 2013-12-31)
전재성님은 ‘병발(竝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병발은 문자 그대로 ‘동시에 발생된다’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연기의 법칙은 원인과 결과에 따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시간 지연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돌을 던지면 유리창이 깨지는 것이 원인과 결과에 따른 순차적 연기라면 어느 행위가 일아 났을 때 지금 여기에서 곧바로 반드시 본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성숙하였을 때 결과로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한다. 비록 업보가 시간지연에 따른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접촉에 따른 연기는 동시에 발생되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법을 단순하게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뒤따른다고 보는 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이 나오기 이전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통용되던 이론과 같은 것이라는 뜻으로 본다. 따라서 무착, 세친, 붓다고사 등의 주석가 들에게서 병발된 연기에 대한 설명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연기를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원리가 하나 둘 씩 밝혀지고 있는 현대에서 원인과 결과는 접촉에 따라 동시발생적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를 관찰하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시간과 공간은 동시에 발생된다
거시적 세계에 대한 관찰의 종착지가 상대성이론이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동시에 발생된다. 이는 우리의 일반상식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시간이 있어서 시간속에서 사는 것으로 착각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공간이 팽창함에 따라 시간도 역시 만들어진다.
만일 빅뱅 이전의 특이점이라면 시간과 공간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다. 그 특이점은 원자보다 더 작은 특이점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빅뱅으로 폭발이 일어 났을 때 공간과 함께 시간도 함께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세상속에서 살다가, 즉 시간 속에 살다 죽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죽어도세상은 계속 되는 것이어서 이렇게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였다고 믿었다.
이런 시간속의 삶은 필연적으로 시간을 창조한, 즉 세상을 창조한 근본원인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존재의 근원이라 하고 이를 인격화 한 것이 창조주라 하는데 야훼, 알라, 브라흐마, 상제 등으로 불리운다. 이렇게 사람들은 시간속에서, 세상속에서 살다 죽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다 보니 연기법 역시 시간과 관련 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원인이 일어 났을 때 순차적응로 반드시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관찰을 해야만 실체가 드러나는
그런데 미시적 세계가 있다. 원자이하의 세계를 말한다. 이 미시적 세계에 대한 관찰이 양자역학이다. 그런데 양자의 세계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원인 없이 결과가 일어나기도 하는 등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세계이다. 그래서 관찰을 하기 전에는 불확정적이다. 관찰을 해야만 그제서야 실체를 드러낸다. 바로 이것이 원인과 결과의 연기에 대한 것이고, 이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발생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거시적인 상대성이론과 미시적인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순차적이라기 보다 동시발생적으로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법 역시 순차적이라기 보다 동시적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결론적으로 병발이 맞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별빛이 지구까지 오는데 수백억광년이 걸림을 예로 들었다.
싱거워 보이면서 난해한 연기 정형구
밤하늘에 쳐다 보는 별빛은 아름답다. 공기가 오염되지 않은 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보석을 깔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별빛은 지금 이 순간에 생성된 별빛이 아니다. 수백억광년 전의 것이다. 지금 이 별빛을 보고 있을 때 그 우주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지도 모른다.
전재성님은 수백억광년의 별빛을 예로 들면서 연기의 병발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별빛과 병발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를 보았다. 병발과 관련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연기고리의 계열은 단지 선행적 요소가 후행적 요소를 야기하는 인과과정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고리들 상호관계는 선형적이라기 보다는 수반적이고 복합적이다. 각 연기고리의 기능은 상호의존적으로 지지하는 다양한 관계성을 내포한다.
(상윳따니까야 2권 해제, 전재성님)
참으로 난해하고 어려운 말이다. 그러나 초기불교 교리를 알고 연기와 관련된 경을 접하면 금방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의 속성이 조건발생적연기와 상호의존적 연기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연기의 정형구를 항상 숙지 하고 있어야 한다.
imasmiṃ sati idaṃ hoti.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ṃ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ṃ asati idaṃ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ṃ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이것이 연기의 정형구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정형구안에 다 함축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이 정형구를 접하면 매우 밋밋하다고 할 것이다. 그말이 그말 같아서 매우 싱겁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라며 실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정형구는 매우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팔만사천 법문이 이 정형구 하나를 설명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정형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로 설명되는 조건발생적 연기와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 설명되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건 발생적 연기는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등과 같이 순차적 발생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에는 이렇게 원인과 결과가 나열된 순차발생에 따른 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 설명되는 상호의존적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상호의존적연기와 상대성원리
그러나 이와 같은 상호의존적 연기를 니까야에서 맣이 나타나지 않는다. 왜그럴까? 그것은 재생연결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에 해당된다. 여기서 말하는 의식은 삼세양중인과에 있어서 재생연결식을 말한다. 따라서 경에서는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존]
그 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가?’ 그 때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 지혜로 꿰뚫었다.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경에서 부처님은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12지 연기는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라고 순차적으로 설명되나, 나가라경에 따르면 의식과 명색의 관계는 ‘동시발생적’이다. 그래서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이를 한자용어로 말하면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식(名色緣識)’이 된다. 이에 대하여 이전에 ‘위밧자, 해체인가 분별인가? 십이연기와 위방가경(S12:2) ‘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와 같이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 설명되는 상호의존적 연기는 동시발생적이다. 그래서 ‘병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병발이 상대성이론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식(名色緣識)’로 대표 되는 상호의존적 연기에서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발생 되듯이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동시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어서 시간 속에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상호의존적 연기는 미시적 세계의 양자역학과도 유사하다. 양자역학에서 관찰하는 순간 확정 되기 때문이다. 이는 원인과 결과가 동시 발생하는 것과 같다.
‘초기불교 연기사상’에서
전재성님은 ‘별빛이 지구까지 오는데 수백억광년이 걸림’을 예로 들었다. 시간 속에서 내가 있어서 별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별빛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별빛을 보는 순간, 즉 접촉하는 순간 원인과 결과는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순차적 원인과 결과에 따르지 않음을 말한다. 비록 수백광년이라는 시간 지연이 있긴 하지만 별빛을 보는 자로 인하여 별빛을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는 전재성님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그러나 실제로 약유차즉유피와 약생차즉생피의 원리를 검토해보면 거기에는 원인과 시간의 우선성이 포함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그것들은 결과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의 시간상의 계기를 수반하지 않는다.
2)
이러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연기의 특징이 그것의 무시간성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상대적인 과거, 현재,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의 의미에서의 보편적인 시간의 무를 뜻하는 것이다.
3)
그것들은 결과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지 그것들의 시간상의 계기를 수반하지 않는다. 인과성은 공간상의 어떤 특정한 점에서든, 아니면 공간상의 서로 다른 지역에 위치한 계들 사이에서든 상관없이 동시적 연결과 모순되지 않는다.
4)
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없고, 연속이 다소간 잘 조절된 연속적인 업과 불연속적 업들이다.
(初期佛敎의 緣起思想, III 연기의 보편적 원리와 특성, 전재성님)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 속에서 산다고 보지 말라는 것과 같다. 마치 시간을 빨래줄 처럼 선형적으로 보아 인과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here and now)’의 인과관계에 국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인과관계는 일반적으로 시간지연이 포함되며 공간상의 원격작용이 배제 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만족하는 말과 같이 보인다.
“태양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
지금 여기서 수백억 광년 떨어진 어느 별빛을 보고 있다. 그런데 그 별빛은 10년 전 누가 보았을 수 있고, 백년전 누군가 보았을 수 있다. 이렇게 빛은 누가 보든지 안보든지 상관하지 않고 빛을 내고 있다. 다만 그 빛을 보았을 때 인과관계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발생적이다. 만일 내가 그 별빛을 보지 않았다면 그 별빛이 있는 줄 조차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별빛은 별빛을 보는 자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차라투스타라에 1부1절에 이런 말이 있다.
차라투스투라는 서른이 되었을 때 고향과 고향의 호수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십년의 세월을 지치지도 않고 정신과 고독을 즐기며 살았다. 하지만 마침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 동이 트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양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태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 지난 십 년 동안 그대는 여기 나의 동굴로 떠올랐다. 그러나 나와 나의 독수리와 나의 뱀이 없었다면 그대는 자신의 빛과 그 빛의 길이 싫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침마다 그대를 기다렸고 그대의 넘치는 빛을 흠뻑 취했으니, 그대를 축복했던 것이다. 보라! 이제 나는 지나치게 많은 양의 꿀을 모은 꿀벌처럼 나의 지혜에 싫증이 났다. 이제 나에게는 손을 뻗쳐 나의 지혜를 나누어 줄 대상이 필요하다. 현명한 사람들이 그들의 어리석음을,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부(富)를 기뻐할 때까지 나의 지혜를 나누어 주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가 쓴 것이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한 교향시도 있다. 니체의 사상이 무르익은 후기에 쓰인 것으로, 위버멘쉬(초인), 권력에의 의지, 영겁회귀 등 니체의 중심 사상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라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실존한 배화교 창시자 차라투스트라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책에서 차라투스투라의 독백이 있다. 그것은 “그대 위대한 별이여! 그대가 빛을 비추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존재가 없다면, 그대의 행복은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지금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태양이 있지만 내가 없다면 그 태양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미이다.
사무실이 있는 빌딩 옆에 중형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 플레카드에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써 있었다.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에게 항상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태양에게 감사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대뜸 별빛을 향하여 “별빛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내가 있음으로 해서 이 세상이 존재함을 말한다. 내가 태양을 봄으로 인하여 태양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을 보고서 "태양이여, 그대는 나에게 감사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선형적인 시간이 있어서 그 시간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세상이 있어서 세상속에서 나고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인식을 함에 따라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지금 수백광년 떨어진 별빛을 바라 보고 있을 때 내가 있기에 저 별빛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별빛이 비록 수백광년의 사건에 지나지 않지만 그 별빛을 바라 보는 자에게 있어서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이는 다름 아닌 양자역학과 관계와 같다. 원자 이하의 양자의 세계는 인과관계가 역전되고 무질서가 극에 달하지만 일단 관찰하면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자와 관찰대상사이에 동시적 인과관계가 성립 된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연기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시간속의 삶에 대한 것을 부수는 것이 상대성이론이고, 관찰을 해야만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이 양자역학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씀 하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의 연기정형구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훌륭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무착, 세친, 붓다고사 등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해석이 되는데 무려 1500여 년이 걸렸습니다.”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
별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수백 광년이 걸렸다. 그런 별빛을 바라 보는 존재들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지구뿐만 아니라 지구 바깥의 행성의 존재들도 보고 있을 것이고, 그 이전에 살았던 존재도 보았을 것이다. 모두 내가 존재하기에 보는 것들이다. 그런데 자애의 마음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사무량심 가운데 자애관, 자애의 마음을 내는 순간에 벌써 우주 전체에 그 마음이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자애관을 우습게 알면 절대 안 됩니다. 마음속으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하는 순간에 벌써 몇 백 억 광년이 떨어진 우주 전체에 그 마음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쉬운 것을 왜 안하나요. 안 하다보니까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곧바로 그 순간 전달이 됩니다. 그것을, 바로 이 진리를 모르니까 불행하게도 엄청난 비극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전재성 박사, ‘동산불교대학 니까야 읽기’ 7년 회향서 강연, 미디어붓다 2013-12-31)
전재성님은 자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 등 사무량심을 별빛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었다면 이 자애의 마음은 우주 전체까지 퍼저 나갈 것이라 한다. 이는 초기경전에 십방향에 대한 자애 방사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비록 원한맺힌 자일지라도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Sn 1.8)”라고 자애를 방사하면 그 마음이 전달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모두 소용없는 것이 아니다. 자애의 마음을 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애의 마음을 냄으로 인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 이를 ‘자심해탈’이라 한다.
2014-01-0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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