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합니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30. 13:14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합니다

 

 

 

올해 끝자락에서

 

올해 끝자락에 와 있다. 시간이나 세월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어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느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이렇게 끝자락에 와 있을 때 한번쯤은 뒤를 되돌아 보게 된다.

 

어떤 이는 말한다. 시간이 무척 빨리 지나간다고. 그래서일까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고 한다. 자신이 속한 나이에 곱하기 2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이십대라면 시속 40키로미터이고, 40대라면 시속 80키로미터, 60대라면 시속 120키로 미터의 속도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은 무척 빠르다. 그래서 월요일이 되었는가 싶은데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면 늘 금요일에 와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정신 없이 흘러 가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 귀한 자나 천한 자를 가리지 않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 간다. 다만 흘러 가는 시간, 세월을 어떻게 잘 활용 하느냐에 따라 느낌은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나 있어서 시간과 세월이 흘러 간다는 것은 늘 아쉬운 것이다. 더구나 한해 끝자락에 와 있을 때 더욱 더 그렇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한해가 저물어 간다. 지난 일년을 되돌아 보았다. 너무나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다. 큰 변화없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 또 내일이 어제 같은 매일 동일한 생활의 패턴을 반복해 왔다. 여기서 ‘내일이 어제 같다’라는 말은 물론 문법에 맞지 않는다. 단지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늘 반복되는 패턴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루하다든가 권태로운 것은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이전과 이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재미 있는 영화가 있다. 그래서 처음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릴정도로 감동해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똑 같은 영화를 계속 보여 주면 어떻게 될까?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여준다면 식상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같은 영화를 100번 보여 준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경우 차라리 고문하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거기에는 약간씩 다른 변화가 있기 때문에 지루 하지 않은 것이다.

 

매일 반복 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전혀 지루하다거나 권태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로 가슴이 설레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글쓰기이다. 미리 마음속으로 구상해 놓은 시나리오를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른 아침 사무실로 달려 가서 차분한 마음으로 여백을 대한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거의 매일 글을 쓰게 되었다.

 

자기검열 하며

 

지난 일년을 되돌아 보았다. 지난 일년의 역사는 개인사적으로 보았을 때 다름 아닌 글쓰기의 역사이다. 삼백육십여개의 글 목록을 보니 매우 다양하다. 주로 경전에 근거한 것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시국관련 글도 꽤 된다. 그리고 자조적인 독백 형식의 글도 있다. 이렇게 글이 다양한 것은 그때 그때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하면서 지켜야 하는 룰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검열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로 비방이나 비난의 글을 쓰지 않는 것이다. ‘구업을 짖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비판글을 쓸 수 있지만 근거 없는 비방이나 악의적은 비난은 가르침에 따르면 그에 대한 과보를 피할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가급적 삼갔다. 그럼에도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참회하였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마음의 다짐을 한 것이다.

 

법우님들이 남겨 주신 글을 보면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구업을 짖는 것이라 본다. 사람의 행위는 크게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구업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글이거나 나쁜 글이거나 할 것 없이 언어적 행위를 하였기 떄문에 구업을 짖는 것이 된다. 그런 구업에 대한 과보는 피할 수 없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으면 구업을 짖지 않고 구업에 대한 과보도 받지 않겠지만,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는 업을 짖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과보를 피해 갈 수 없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가급적 좋은 글을 쓰고자 노력한다. 그래서일까 종종 이름 없는 법우님들로부터 글을 받는다. 한번도 본적이 없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익명의 법우님들이 남겨 주신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날마다 님의 글을 읽고 스크랩하고..해당 구절에 관한 경전 찾아가면서 읽고..노트정리하면서 부처님 말씀 공부하고 있습니다..날마다 저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기에 진심으로 감사말씀 올립니다~!

 

(수인산님)

 

 

2)

스승없는 시대에 태어나, 삶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느끼면, 유일하게 피안이 될   수 있는 곳이 부처님의 원음이 있는 니까야 입니다.   내년에는 위빠사나 수행의 인연이 닿기를 기원해 봅니다.   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__()__

 

(바른 마음님)

 

 

3)

어느 법우님 댓글처럼 저 역시 매일 들어와
연꽃님께서 올려 놓으신 법문 읽으며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타 불교싸이트나 스님들 법문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경문들에 대해
초보불자가 이해하기 쉽게 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연꽃님외에
어느 재가법사나 스님이 이만큼 일반불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부할 수 있게
법문을 매일 올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시는 과정에서 저와 생각이 다른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이런경우 저는 나무보다는 숲을 보려고 합니다.
연꽃님께서 던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 뿐입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연꽃님께서
이해를 돕기위해 부연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부분적으로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고 해서 그 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행태는
숲은 보지 못하고 한 그루 나무만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도 올려주신 법문으로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_()-

 

(금강님)

 

 

4)

진정한 믿음의 수행이 무엇인지 알게해 주시는 연꽃님이 올려 주신글
늘 하심하는 마음으로 배우며 공부하렵니다
감사합니다.

 

(백목향님)

 

 

 

 

 

 

이외에도 수 많은 법우님들이 글을 남겨 주셨다. 공통적으로 고맙다거나 감사하다는 말이 주를 이룬다.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임에도 이렇게 관심을 보이고 늘 지켜 보아 주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린다.

 

가소가소 하다

 

처음부터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블로그활동을 하기 이전에는 한번도 글이라는 것을 써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 플러스 일은 이(1+1=2)라고 알고 있는 공학도 출신으로서 상품개발에만 전념하다 보니 글을 배워 보지도 못하였고 인문학에 대한 소양도 없다. 그럼에도 그날 그날 보고 듣고 느낀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기록하다 보니 만7년 동안 쌓이고 쌓인 글이 이제 2300개가 넘었다. 그러다 보니 검색창에 불교와 관련된 키워드 검색을 하면 대부분 올린 글에 걸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로 보아 알 수 있는 사실은 한 개인의 글쓰기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도중에 초기불교를 알게 되어 지금은 주로 초기불교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초기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필연적이라 본다.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보고 심지어 빠알리 원문까지 들여다 보게 되었다. 물론 빠알리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사전을 찾아 볼 뿐이다. 그런데 학자도 아닌 것이, 스님도 아닌 것이, 더구나 남방불교국가에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것이 빠알리 원문을 들먹이며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한마디로 가소가소 하다라고 표현한다. ‘가소롭다는 것이다. ‘같잖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글 같잖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지난번에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이곳은 12세에 출가를 하여 8년간 공부후 20세에 구족계를 받고 다시 대학등에 가서 공부를 한다. 그리고 대학공부 끝나고 다시 5-8년이란 기간동안 공부를 하여 박사 학위등을 받는다. 그만큼 오랫동안 교리 공부를 하고 그리고 이곳 남방불교권에서 직접 몸으로 체험도 한다. 연꽃님처럼 남방불교권은 한번도 와 본적이 없고 그리고 정식으로 공부를 한적도 없는 불교도들이 함부로 경전을 해석하고 글을 창작하지 않는다. 니까야 경전 전권을 사 놓고 밤낮으로 읽어 본다고 자신이 초기불교의 최고라는 그런 아만과 자만심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 Re:열반을 두려워 하니 삼계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 자극적인 제목과 엉터리 해석들. 실론섬님)

 

 

2)

남방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많이 배우고 닦은 학자나 수행자들은

 

이곳에 와서 직접 공부하고 체험하고 실제로 경전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함부로 말을 꺼내면 안됩니다.
나같은 무지한 중생에게조차 비난을 받게 마련 입니다.

마성스님이나 각묵스님 그리고 전 박사님 또는 고요한 소리에 글을 옮겨놓으시는 불자분들이
님만큼 초기불교 몰라서 이따위 글들을 끊임없이 창작 안하는게 아닙니다.

 

(실론섬님 댓글)

 

 

3)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갑니다.
니까야 경전 전체를 집에 모셔놓고 그냥 한번 읽어 본 것을 끊임없이 자기의 사견을 집어 넣어
글을 창작하시는 모습이 너무 안스러워서 제가 계속하여 답글을 다는 것 입니다.

차라리 현장 상황은 어떠신지요? 라고 한번쯤 마이크를 넘기시든가 아니면 이번 겨울에 여기에
공부하러 오십시요. 한국은 춥지만 여기는 따뜻하니 지내시기 좋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부하시는 출가자분들이 7명 정도 되오니 같이 대담도 해보시고 그리고 불교 대학에서
강의도 한번쯤 들어 보시지요.

경전만 있으면 미국이나 러시아나 똑같이 불교 잘 할 수 있다는 망발 하시기 전에...

 

(실론섬님 댓글)

 

 

이글은 어느 인터넷카페에 옮겨진 것에 대한 글이다. 글을 보면 충고의 글이라기 보다 차라리 비방이나 비난에 더 가깝다. 남방권에 한 번도 가보지도 않고 남방권에서 정식으로 테라와다 불교체험을 해 보지 않은 자가 빠알리니까야의 경전문구를 들먹이며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댓글에서는 이곳에 와서 직접 공부하고 체험하고 실제로 경전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함부로 말을 꺼내면 안됩니다.”라고 말한다.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공부하고 수행하지 않았다면 글을 쓰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글 같잖고 가소롭다는 말이다.

한번도 인도와 테라와다 불교국가에 가본 적이 없다

 

인도,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국가에 한 번도 가본적이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잘 알고 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글로벌시대에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매우 많다.  이는 방송의 다큐 프로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다. 아무리 HD화면으로 구석구석 보아도 현지에서 바람과 공기, 햇볕과 함께 체험 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더구나 아무리 공부를 스스로 하였다고 할지라도 남방불교국가에서 직접 수학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인도와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 성지순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테라와다국가에서 직접 수행을 할 엄두는 아직 나지 않는다. 생업에 종사하는 생활인으로서 여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현지에 사는 불자나 수행자는 축복이라 본다.

 

한번도 인도와 테라와다 불교국가에 가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학한 적도 없다. 더구나 글이라고는 써 본적도 없는 공학도 출신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원음에 대한 글을 매일 쓰고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보통불자라 하여 글을 쓰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테라와다 불교국가에 가 보지 않았다고 하여 글을 써서 안된단느 법이 있을까? 아직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배우는 단계이기 때문에 더욱 더 신중하게 글을 쓴다. 정식으로 불교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수학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경전뿐이다. 그래서 빠일리니까야에 의존하여 글을 쓰고 있고 가급적 개인적인 견해는 배제한다.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에게

 

불자들은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사는 곳 주변에 십자가는 넘쳐 나지만 절 구경하기가 힘들다. 설령 절이 있다고 하더라도 초기불교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은 만족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넷상에서 이곳저곳 기웃거려 본다. 그런데 글을 많이 올리다 보니 검색에 따라 이곳까지 연결되는 것 같다. 그러나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불교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이 아닌 보통불자의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 빨리 남방국가에서 수학한 학자나 스님들이 넷상에서 좋은 글을 써 주기 바란다. 그것도 어쩌다 한번 쓰는 것이 아니라 매일 글을 올려서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에게 갈증을 해소 해 주기 바란다.

 

단지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지나지 않음에도 관심을 보여 주는 법우님들이 있기에 힘을 받는다. 그러나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수행과 포교는 많이 배우고 닦은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불자가 글쓰는 일이 없기를 만들어 주기 바란다. 그럼에도 많이 배운 자들이 침묵한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될 것이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오로지 필명으로 소통하는 인터넷 시대에 있어서 그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이 남긴 흔적 밖에 없다. 그것은 다름아닌 남겨 진 글이다. 그런 글이 본문에 있는 것인건 댓글이건 사용하는 단어나 문장, 그리고 글에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얼굴과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음과 같은 비방글이 대표적이다.

 

 

연꽃님은 자기 스스로 밝혔듯이
집과 직장만 오고가는 전형적인 폐쇄형/자폐증 인간 입니다.
절에도 안가고 보시도 자비도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오직 니까야 경전 구입해 놓고 그 속에 있는 문자만 앵무새처럼 되뇌이면서 글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올바른 가치관이나 불교관을 표현하는게 아니라 사악한 사견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번 율장에 대한 글을 통하여 제가 단단히 마음 먹은게 하나 있습니다.
연꽃님의 가증스러운 이교도적인 가면을 철저하게 벗겨버리겠다는 것 입니다

 

(실론섬님)

 

 

이 글을 접하면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해칠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식의 인상을 받게 된다. 과연 이런 글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의 글이라 볼 수 있을까? 팔정도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정어정사유에 위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어와 정사유는 어떤 것일까?

 

악의에 찬 중상모략

 

먼저 정어에 대한 것이다. 팔정도의 정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ā ca bhikkhave, sammāvācā: yā kho bhikkhave, musāvādā veramaī pisunāya vācāya veramaī pharusāya vācāya veramaī samphappalāpā veramaī aya vuccati bhikkhave, sammāvācā.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언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거짓말을 하지 않고  2) 이간질을 하지 않고  3)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4) 꾸며대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언어라고 한다.”  (S45.8,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정어(正語)]인가? 비구들이여, 거짓말을 삼가고 중상모략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는 것 - 이를 일러 바른 말이라 한다.” (S45.8, 각묵스님역)

 

 

정어에 대한 것을 보면 musāvādā, pisunāya, pharusāya, samphappalāpā’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거짓말, 이간질, 욕지거리, 꾸며대는 말이라 하였다. 각묵스님은 거짓말, 중상모략, 욕설, 잡담이라 번역하였다. 특히 pisunāya에 주목한다. 이는 이간질 또는 중상모략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중상모략의 과보는?

 

댓글을 보면 악의를 띤 중상모략에 가깝다. 있지도 않은 사실에 대하여 마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글의 제목만 보고 댓글을 쓰는 것 같다. 올린 글 전체를 잘 살펴 읽어 보았다면 이간질하고 중상모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어를 지키지 않아 받게 되는 과보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이간질 하니, 여기서 들어서 저기에 말하여 저들을 갈라놓고, 혹은 저기서 들어서 여기에 말하여 이들을 갈라놓으며, 분열을 조장하고, 화합을 깨뜨리고, 불화를 좋아하고, 불화를 기뻐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말을 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 다니고, 언어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 다니고, 정신적으로 뱀처럼 몰래 기어 다닌다. 그의 신체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언어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정신적 행위도 굽어 있고, 그의 운명도 굽어 있고, 그의 다시 태어남도 굽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의 운명이 굽어 있고 다시 태어남이 굽어 있는 자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어느 하나의 운명, 즉 오로지 괴로움 뿐인 지옥이나 몰래 기어다니는 종류의 축생으로 태어 나는 것이 자명하다고 나는 말한다.

 

(Sasappaniya pariyāya sutta-뱀처럼 기어다님에 대한 법문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0:216, 전재성님역)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그래서 불자가 되는 가장 큰 조건은 삼보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도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그리고 실천수행에 대한 방법의 기초가 되는 것이 오계준수이다. 이런 오계는 열가지 행위로 구분된다. 팔정도의 정어에 있어서 중상모략에 대한 것도 십악행 중에 하나에 속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이간질(중상모략)하는 과보에 대하여 표현해 놓았다.

 

부처님은 이간질 하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반드시 받는 다고 하였다. 있지도 않은 사실, 근거 없는 이야기로 해치려 하였을 때 그 때 받는 과보는 지옥아니면 축생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이간질 함에 따라 그의 신체적 행위도 굽었고, 언어적 행위도 굽었고, 정신적 행위도 굽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굽은 행위를 하였을 때 그에 따른 과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존재들은 존재의 본성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 그 행위된 것에 따라 태어나고, 그 태어나진 것에 따라 접촉이 이루어진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뭇삶은 행위의 상속자라고 나는 말한다.( A10:216)”라 하였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는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해코지 하는 사유

 

불자라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그런 가르침이 빠알리니까야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에 대하여 문학작품이라고 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선별적으로 부분적으로 적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의 오감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이렇게 가르침을 선별적으로 받아 들이는 자에게 있어서 경전의 말씀은 소설, 문학작품, SF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팔정도에 정어가 설명되어 있지만 이간질과 중상모략을 서슴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 이런 바탕에는 반드시 잘못된 사유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정사유를 말씀 하셨을 것이다. 팔정도의 정사유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sakappo: yo kho bhikkhave, nekkhammasakappo avyāpādasakappo, avihisāsakappo, aya vuccati bhikkhave, sammāsakappo.

 

수행승들이여, 올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1) 욕망을 여읜 사유를 하고2) 분노를 여윈 사유를 하고 3) 폭력을 여읜 사유를 하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올바른 사유라고 한다.” (S45.8, 전재성님역)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정사유(正思惟)]인가?  비구들이여, 출리(出離)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불해(不害)]에 대한 사유 - 이를 일러 바른 사유라 한다.” (S45.8, 각묵스님역)

 

 

빠알리어 상깝빠(sakappa)라는 말은 영어로 ‘intention(의도) purpose(목적)’ 등으로 번역된다. 한문으로는 思惟, 思念, 로 번역 된다. 이런 한문 영향이서일까 일반적으로 사유라 번역된다. 그런데 사유는 생각과도 같은 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의도가 실려 있는 생각이다. 어떤 의도일까? 그것은 정사유 정형구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욕망, 분노, 폭력의 의도가 있는 사유이다. 이처럼 의도가 실렸을 때 이는 곧바로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댓글에서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재미 없다는 식으로 협박아닌 협박을 하였다면 이는 분노로 인한 해코지 하는 사유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합니다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다. 특히 인터넷시대에 더 그렇다.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으면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은 익명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래서 향내나는 글도 있지만 악취풍기는 글도 있다. 특히 오물장과 같은 견해로 이간질 하고 중상모략하는 경우 보기에도 딱하다. 이는 다름 아닌 커다란 구업을 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탕에는 잘못된 사유가 있다. 해코지 하려는 의도, 분노의 사유가 있기 때문에 구업을 짖는  것이다. 그런데 구업을 짖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기에 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된 것에 대한 참회가 필요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을 짖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가급적 좋은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다름 아닌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남방불교 국가에도 가보지 않았고 남방에서 공부하지도 않은  보통불자가 매달릴 것이라고는 경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가불자가 글을 쓴다는 이유로 비방과 비난, 심지어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저 쓸 뿐이다. 다만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사는 사람이나 살았던 학자나 수행자들이 좋은 글을 많이 써주기를 바란다. 그것도 어쩌다 한번 쓰는 것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올려서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의 갈증을 해소 해 주기를 바란다.

 

글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는 일상이고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런 글은 학자들의 논문도 아니고 스님들의 법문도 아니다. 보통불자가 매일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삶의 기록이다. 비록 ‘B’ ‘삼류글쓰기에 지나지 않지만 항상 주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로 인하여 불편해 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번 글쓰기에서 참회 하였다. 따라서 글쓰기를 하면서 항상 되돌아 본다. 사람은 가도 글은 남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올해 끝자락에 와 있다. 혹시 남겨진 글로 인하여 누군가 불편해 한다면 사과 드린다. 그리고 참회 한다. 그래서 글쓰기 할 때 늘 염두에 두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였을 때 발견한 다음과 같은 문구이다.

 

 

참회하나이다.

참회하나이다.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합니다

 

 

 

2013-12-30

진흙속에 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