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국민과 싸우자는 건가?”여성대통령의 부정적 아니무스 발현을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28. 12:32

 

 

지금 국민과 싸우자는 건가?”여성대통령의 부정적 아니무스 발현을 보며

 

 

 

심야에 기습적으로

 

어제밤 수서발 KTX고속철도 면허가 발급되었다. 이를 기습이라 본다. 업무가 모두 끝난 후에 마치 무언가에 쫒기듯이 기습적으로 신청을 하고 그 자리에서 발급된 것이다. 그리고 국토부장관이 저녁 10시에 담화를 발표 하였는데 국민 여러분 ! 철도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습니다드디어 철도경쟁시대가 열린 것입니다라 하였다. 당사자들에는 벅차고 희망적인 메시지임에도 발표자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 쫒기듯이 작전하듯이 심야에 발표된 장면을 보면 꼭 일년전 서울경찰청장의 기습발표가 연상된다. 그때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대선후보 토론이 끝난후 11시경에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국정원직원의 댓글이 없었음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는 지금 현재 법정에 서 있다. 그리고 감옥에 갈일 만 남은 것이다. 이렇게 최근 일년간 국민들의 관심사에 대하여 업무가 다 끝난 후 심야에 그것도 기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습처리는 그토록 강조하던 원칙주의에 위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양성의 사회에서

 

요즘 뉴스를 들으면 법과 원칙에 따라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법과 원칙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소통이 되고 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원칙을 강조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장이 지시하였을 때 이를 어기는 사람이 없듯이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원칙을 강조하였을 때 이를 따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과 원칙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폭력적으로바뀌기 쉽다는 것이다. 공권력도 약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는 헌법에도 보장 되어 있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자들은 국민적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부친 정책에 저항하는 국민에 대하여 일종의 ‘적’으로 간주 한다. 그래서 마치 작전하듯이 기습하고 분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째찍과 당근을 사용하라고 하였다. 이는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떼 쓰는 아이에게

 

아이들은 장난감을 좋아한다. 그래서 새로운 장난감을 보면 사달라고 한다. 그러나 부모는 말로서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를 쓰기 시작한다. 한번 떼를 쓰면 막무가내가 되기 쉽다. 심지어 거리에 드러눕기까지 한다. 그 경우 부모가 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아이는 떼를 써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그런데 한번 써먹은 수법이 먹혀 들어 갔을 때 아이는 다시 써먹는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잘 알기에 부모는 들어 주지 않는다. 심지어 매를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가 떼를 쓰면 어르고 달랜다. 그리고 타협점을 찾아 나간다. 이렇게 아이와 부모의 관계에서도 일방통행은 하지 않는다.

 

아이가 자라서 청소년이 되면

 

아이가 자라면 청소년이 된다. 청소년기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이른바 숨어 있던 개성이 표출되어 반항하기 때문이다. 반항한다고 하여 이를 매로 다스릴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커 버렸다. 만일 매를 들어 폭력적으로 제압하려 하였을 때 관계는 더 멀어 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폭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성질도 아니다. 다 큰 자식을 힘으로 다스리기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비록 자식이지만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대했을 때 변화의 조짐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식에게만 변하라고 해야 할까?

 

사람은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자식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먼저 변하는 것이다. 내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부모와 자식관계 뿐만 아니라, 부부관계,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또 노사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고, 국민과 정부의 관계에서도 역시 적용 될 수 있다.

 

국민을 적으로 보았을 때

 

모든 것을 내 뜻대로하였을 때 갈등이 발생된다. 자신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권력을 잡았다고 하여 내 뜻대로를 관철시키고자 한다면 심야에 기습처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심야 기자회견을 보게 된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화와 타협으로 신뢰가 유지되는데 내뜻대로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면 법대로원칙대로만이 있을 것이다. 이는 집권자가 국민을 자식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적은 물리치고 분쇄하여야 하는 대상이다. 이번 철도노조파업이 대표적이다.

 

박근혜정권이 들어선지 일년이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국민통합적으로 보았을 때 바람직한 면도 있다. 왜냐하면 여성은 소외된 계층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치 소외된 지역에서 대통령이 나옴으로서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었듯이, 성차별과 소외의 대명사라 불리우는 여성에서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여성대통령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역사의 필연이라 볼 수 있고 국민통합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행보를 보면 다시는 여성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것은 불통의 이미지 때문이다.

 

여성들만이 갖는 특유의 고집

 

최근 청와대의 홍보수석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였다. 여성대통령의 원칙주의에 대하여 “원칙대로 하는 것에 손가락질하고 불통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랑스런 불통”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원칙주의를 고수하면 불통이 되는데 이는 다름 아닌 고집을 말하는 것이고 또 집착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칙주의를 고수하면 고집, 아집, 집착, 불통으로 발전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여성들만의 고유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여성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여성들은 특유의 고집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만이 갖는 특유한 성격이 있다. 이를 좋게 표현하면 원칙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고집과 집착이다. 특히 집착은 남성 보다 여성이 월등하게 높다. 그렇다면 여성은 왜 집착이 강할까?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여성의 모성본능때문이라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여성의 몸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이 모성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성본능은 자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발전 되고 결국 내 뜻대로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된다. 그래서 자식과의 갈등이 많은 것도 집착에 따른 내 뜻대로가 발현 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내 뜻대로되지 않을 때

 

만일 여성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의 문구가 이를 잘 설명한다고 본다.

 

 

Aṭṭhimāni bhikkhave, balāni, katamāni aṭṭha: ruṇṇabalā bhikkhave, dārakā, kodhabalo mātugāmo, āvudhabalā corā, issariyabalā rājāno, ujjhattibalā bālā, nijjhattibalā1 paṇḍitā, paisakhānabalā bahussutā, khantibalā samaabrāhmaā, imāni kho bhikkhave, aṭṭhabalān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힘이 있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어린아이는 우는 것으로 힘을 삼고,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고,

도둑은 무기로 힘을 삼고, 왕은 권력으로 힘을 삼고, 어리석은 자는 불만으로 힘을 삼고, 현명한 자는 성찰로 힘을 삼고, 수행자나 성직자는 인내로 힘을 삼는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힘이 있다.

 

(Bala sutta-힘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2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각자 으로 삼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모두 여덟 가지로 소개 되어 있는데 눈에 띄는 것은 어린아이여인에 대한 것이다. 어린아이는 우는 것으로 힘을 삼고, 여인은 성냄으로 힘을 삼는 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전 구절을 보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 없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인이 성냄을 힘으로 삼는 것에 대하여 공감한다.

 

대체로 여자들은 하다 잘 안되면 성내는  경향이 있다. 또 한편 여자들은 우는 것으로 힘으로 삼기도 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다 안되면 울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우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음이 누그러지고 결국 여자가 하자는 대로 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성내는 것과 우는 것, 두 가지로 힘을 삼고 있다고 보여 진다.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 준 어머니

 

이런 주장에 대하여 여성들이나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을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초기경에 따르면 여성은 과거에 남성이었고, 또 남성은 과거에 여성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어머니의 경, S15.14)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 번도 아버지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아버지의 경, S15.15)

 

 

이와 같이 경에 따르면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이었다. 또 누군가 나의 아버지이었다. 마찬가지로 누구나 어머니이었고 아버지이었던 것이다지금 여성은 과거전생에 남성이었던 때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지금 남성은 과거전생에 여성이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라고 하여 성적차별을 한다거나 불이익을 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라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성내는 것과 우는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여성의 특징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여성은 모성본능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본다. 이는 심리학에서도 알려져 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이 있다. 독일 융심리학연구소에서 수학한 바 있는 이부영박사가 지은 분석심리학 책이 있다. 모두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에서 두 번째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이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무의식 성향에 관한 학설인데 일반적으로 남성 속의 여성성인 아니마와 여성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로 설명된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지나친 이성에게 호감이 생기는 것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성과 동일시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모성본능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래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융심리학에 따르면 남성 속의 여성성 여성 속의 남성성이 있어서 서로 통합 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오로지 여성성만 강조 되었을 때 긴장과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라 한다. 대표적으로 모성애를 들 수 있다. 이부영박사의 아니마와 아니무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모성이란 감싸고 보살피고 돕고 베풀고 가르치는 것이다. 위험에 처한 사람, 아직 미숙하며 보호가 필요한, 성장과정에 있는 이들에게 본능적으로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고 그 성장을 돕는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근심과 걱정과 보살핌은 상대방의 자립심을 막으며, 오직 어머니로서의 보람만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함으로써 그들의 장래를 망칠 수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박사, 136)

 

 

 

 

 

 

책에서는 모성본능의 두 가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다. 특히 부정적인 것을 보면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자신의 뱃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내 뜻대로하고자 하였을 때 파멸을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고집불통이 되는 이유

 

여자들을 부정적으로 묘사 하였을 때 고집집착으로 표현한다. 반면 이를 긍정적으로 묘사 하면 원칙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한번 원칙을 세웠을 때 결코 바뀌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칙이 고집이 되고 집착이 된다. 그런데  원칙이 받아 들여지지 않으면 화를 내고 심지어 울기 까지 한다. 이렇게 여자들은 성냄을 힘으로 삼고 우는 것을 힘으로 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여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에 대한 예가 있다. 같은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그는 틀림없이 날 지겨워해.”이렇게 한번 생각하면 그녀는 그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믿어 버린다. 다른 가능성은 결코 없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박사, 111)

 

 

이글은 융심리학연구소의 폰 프란츠박사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데 어느 날 그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날 지겨워해.”라고 생각하며 오해 할 것이다. 그런데 오해가 지나쳐 이를 기정사실화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스스로 믿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폰 프란츠 박사는 부정적인 아니무스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여성속의 남성성의 의미인 아니무스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것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마음이 돌아서면 결코 다시 되돌아 오지 않음을 말한다. 아무리 설득하고 어르고 달래도 요지부동이다. 바로 이것이 부정적 아니무스가 작용하였을 때 고집이 되고 불통이 되는 것이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이 되고, 한번 싫은 것은 계속 싫은 것이 된다

 

아주 부드러운 여자가 어느 순간

 

부정적 아니무스에 대한 또 다른 예가 있다. 이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여성이 큰 소리로 강력하게 무언가를 주장할 때는 여성의 남성적 측면이 분명히 밖으로 드러나지만, 드러나지 않게 나타날 수도 있다.

 

아주 부드러운 여자가 어느 순간 토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불가침의 고집을 부리고 일보도 양보 하지 않을 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상대방 나라의 경제담당 여자외교관의 상냥하고 여자다운 외모와 태도에 매료 되어 남성들이 협상이 잘 될 것이라고 안심했다가 호되게 혼났던 경우가 연상된다. 남성의 아니마가 나타내는 유약한 감상과 기대, 심지어 응석에 대해 아니무스는 가차없이 찬물을 끼얹어 남성의 부질없는 환상을 잠재우게 하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박사, 111)

 

 

중학교때의 일이다. 남자선생님이 대부분이었는데 홍일점 식으로 여자 선생님도 몇 분 있었다. 그런데 첫국어시간에 여자선생님이 들어 오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혼에다 이제 교사생활한지 몇 년 안된 처녀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웃고 떠들다가 반전체가 단체 기합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책상에 올라가 걸상을 들고 수업시간 내내 앉아 있었던 것 기억이 있다. 남자선생님들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여선생님에게 벌어진 갓이다.

 

종종 여자 담당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여자이기 때문에 더 상냥하고 잘 해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오산이 되기 쉽다. 잘 나가다 한번 틀어지면 회복불능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여자담당을 대하면 매우 조심하게 된다.

 

책에서도 여자외교관의 케이스가 소개 되어 있다. 미모의 세련된 매너의 여자 외교관을 대하였을 때 협상이 잘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은 남성에게 있어서 아니마가 발현된 것이라 하였다. 이때 아니마는 남성의 여성성으로서 보호 받기를 바라고 응석부리기를 원하는 부정적 아니마에 해당된다.

 

그런데 문제는 협상이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이다. 이때 눈에 보이지 않던 부정적 아니무스가 발현 되었을 때 여자외교관은 고집불통이 되어 버린다.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고집이 발현 되었을 때 결국 파국으로 끝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을 현 정권에서도 보게 된다.

 

두 얼굴의 여성대통령

 

박근혜대통령의 한복입은 모습은 아름답다. 더구나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었을 때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를 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와 180도 다른 것이 있다. ‘원칙을 강조하였을 때이다.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밀고 나가려고 할 때 표독스런인상을 보게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니무스가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한 없이 자애로운 모습이지만, 반대로 아니무스가 부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파괴적으로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어머니의 예와 같다. 자신의 몸에서 난 자식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것이 집착으로 발전되어 결국 자식을 망쳐 버리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박근혜대통령은 철도노동자의 파업에 대하여 자신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주변에 총리나 장관이 있지만 목소리는 너무 작다. 그래서 마치 난장이들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부드러운 이미지의 여성 대통령이 한번 원칙을 정하면 여간해서는 바꾸기 힘든 것 같다. 그래서 책에서 보듯이 아주 부드러운 여자가 어느 순간 토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 불가침의 고집을 부리고 일보도 양보 하지 않을 때의 경우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여성대통령은 긍정적인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문제가 없으나 부정적 아니무스가 발현 되면 파멸로 이끈다일개 평범한 여자가 원칙을 고수하고 고집부리고 집착하면 부정적 아니무스가 발현되어 자식을 망치고 결국 가정을 파괴하듯이, 권력을 쥔 여성에게서 부정적 아니무스가 발현 되었을 때 국민이 고통받고 국가가 위태로워 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 철도파업에 따른 원칙천명과 이어지는 기습적 면허발급을 보면 확실히 권력자의 부정적 아니무스가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어지는 대규모 파업과 혼란은 다양성의 사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성의 사회에서 법과 원칙만을 강조함에 따라 결국 여성특유의 고집불통이 되었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2013-12-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