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단권 니까야는 가능할까? 한권바이블과 책장속의 니까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25. 11:25

 

단권 니까야는 가능할까? 한권바이블과 책장속의 니까야

 

 

크리스마스날에

 

크리스마스날이다. 이날을 공식적으로 성탄절이라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이날을 크리스마스또는 크리스마스데이라 한다. 이처럼 대부분 나라들이 크리스마스라 칭하지만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성탄절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성인은 오직 예수 한분 뿐일까? 붓다나 공자, 소크라테스 등을 성인이라 하는데 이들이 태어난 날은 성탄이라 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가 태어난 날을 성탄이라고 공식적으로 칭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크리스마스날을 맞아 가지고 있는 바이블을 열어 보았다. 개역한글판으로서 구약과 신역이 모두 들어 있는 자그마한 책이다. 문체는 “~느니라” “~하였더라” 로 끝나는 고어체이다.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더니 ‘잠언’이 나왔다. 죽 읽어 보니 마음을 사로 잡는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은 글이 없을까 보니 그 중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언11장 19절)”라는 내용이다. 이런 문구는 불교의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드믈고 거의 대부분 신에 대한 것이다.

 

1902년 독역된 맛지마니까야

 

빠알리니까야가 서양에 소개 되었을 때 독일에서는 법구경에 대하여 ‘동방의 성서’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로지 바이블만 알고 있었던 서양사람들에게 동양의 불교경전을 접하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믿던 종교와 전혀 다른 교리를 접하게 되자 강한 호기심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빠알리니까야가 19세기 말에 유럽에 전해지자 곧바로 번역에 들어 갔다. 그래서 1855년 덴마크의 빈센트 하우스 뵐이 담마빠다(법구경)을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1869년에는 독일어로도 번역 되었다. 1881년 리즈 데이비스는 빠알리성전협회(PTS)를 창립하여 본격적으로 번역에 착수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전재성님의 맛지마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독일에서 1902년에 맛지마니까야가 독일어로 완역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 보다 무려 100년이 앞선다. 물론 한역 아함경이 있지만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은 2003년 전재성님이 최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맛지마니까의 영향을 받아 소설 데미안을 썼다는 사실이다. 맛지마니까야에 병아리 부화 이야기(M16)’가 있는데 이를 모티브로 하여 소설을 쓴 것이다. 이때가 1916년이다. 이렇게 이미 백년 전에 유럽에서는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사상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전철에서 보란 듯이 바이블을

 

전철이나 지하철에서 종종 바이블을 꺼내놓고 읽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가죽으로 된 커버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작은 바이블이다. 다들 스마트폰 보기에 열중이지만 마치 보란 듯이 바이블을 꺼내 놓고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바이블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한 것이고, 또하나는 왜 불교경전을 보는 사람은 없을까에 대한 것이다.

 

언젠가 바이블을 본 적이 있다.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에서 고교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나누어준 바이블을 본적이 있다. 그 이후로도 호기심에 몇 번 본적이 있다. 그러나 종교가 달라서 그런지 큰 감동을 받지 못하였다. 이해가 되지 않고 지루해서 몇 페이지 못 가 덮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 하였다. 그래서일까 바이블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단지 목사가 설교한 것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단권 니까야는 가능할까?

 

바이블은 한권으로 되어 있다. 글씨의 사이즈에 따라 책의 크기도 결정된다. 이렇게 한권으로 되어 있는 바이블은 기독교신자들에게 있어서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고급 커버로 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금니로 된 것도 있어서 한손에 쏙 들어 오는 바이블을 자랑스럽게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불경은 단한권으로 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불경을 요약하고 간추린 것을 단권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부처님의 원음 전체를 한권으로 묶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빠알리니까야가 그렇다.

 

21세기에 들어 와서 우리나라에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었다. 그래서 누구나 우리말로 번역된 니까야를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니까야는 매우 방대하다. 사부니까야를 모두 합하면 수십권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글씨가 크기 때문에 권수가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니까야에 대하여 한권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성전협 개정판은 일곱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곱권중에 어떤 책은 1400페이지 가까이 된다. 그래서 이를 일렬로 놓으면 그 크기에 놀란다. 열어 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주옥 같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이렇게 양이 많은 것은 부처님이 45년 동안 쉼 없이 설법을 하기도 하였지만 반복구문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복 구문을 생략하면 크기는 얼마로 줄어 들까? 빅쿠 보디가 영역한 상윳따니까야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CDB)’는 반복구문이 일부 생략되어 있다. 그럼에도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작은 글씨로 한페이지 두 컬럼으로 되어 있는데 각권당 1100페이지에 달한다. 이렇게 반복구문을 생략해도 한권으로 만들기 힘들 정도로 양이 방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원음은 상윳따니까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디가니까야도 있고,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도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법구경과 숫따니빠따가 들어가 있는 쿳따까니까야에는 모두 18종이나 된다. 이렇게 많은 경전을 한권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아무리 깨알같이 글씨를 만들어도 오부니까야의 모든 내용을 한권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한글번역을 모두 인터넷에 올린다면

 

빠알리대장경에는 경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율장도 있고 논장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율장, 경장, 논장 세가지를 합하여 빠알리삼장이라 한다. 이 빠알리 삼장을 모아 놓으면 책장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래서 한권의 책으로 부처님의 원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불가능은 없다. 원음이 워낙 방대하여 한권으로 만들어 낼 수 없을 지라도 서버에 저장 되어 있는 것을 꺼내어 보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다.

 

빠알리삼장은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THE TIPITAKA(http://awake.kiev.ua/dhamma/tipitaka/ )’사이트에는 빠알리 삼장이 모두 올려져 있다. 그리고 영문번역도 함께 실려 있다. 그래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네트워크가 깔린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접속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글번역은 올려져 있지 않다. 네티즌들이 컴퓨터 사경하여 부분적으로 올려진 것은 있지만 완전하지 않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셋째, 아울러 저희들이 번역한 한글 4부 니까야의 가르침을 음성파일과 동영상파일 등으로도 만들어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널리 부처님 원음을 보급시키는 전법활동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희들 번역에 대한 공신력을 높이고 또한 여러 종류의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 부처님 원음을 한글로 이 땅 방방곡곡에 널리 전하겠습니다.

 

( 4부 니까야 완역 봉헌법회 인사말, 대림 스님(초기불전연구원 원장), 2012-11.20)

 

 

대림스님은 인사말에서 번역된 사부니까야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알리겠다고 하였다. 이는 인터넷에 경의 내용을 올리는 것도 해당된다. 이는 사부니까야 봉헌법회에서 각묵스님이 말한 것을 녹취하여 글로서 올린 적이 있는데, 그 때 기록을 보면  “미디어팀의 경우 번역물을 카페에 올리는 작업을 하고 강연내용을 MP3나 동영상으로 만들어 스마트 폰에 올리는 역할을 할 것이라 한다. (초기불교 맏형론, 초기불전연구원 4부 니까야 완역봉헌법회에서)”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초불연에서 번역된 모든 것을 인터넷에 올려 놓겠다는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준비작업 중이어서인지 번역물이 모두 올려져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책은 구입해서 보아야

 

요즘은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원음을 접할 수 있다. 누구나 검색하면 원음을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글로 된 것은 전문을 접할 수 없다. 누군가 부분적으로 올려 놓은 것은 접할 수 있으나 원음 전체를 올려 놓은 것은 아직까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번역물을 모두 인터넷에 올려 놓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라 여겨 진다. 개인의 저작물이고 또 저작권에 관계 된 것이기 때문에 올려 놓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음을 접하기 위해서는 책을 구입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책을 구입해서 읽으면 인터넷으로 보는 것과 또 다른 맛이 있다. 마치 공짜심리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인터넷 읽기와 달리 책을 구입해서 읽으면 더 사유하며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노랑 형광메모리펜으로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를 대부분 갖추었다. 그래서 수시로 열어 본다. 책상 바로 옆에 책장이 있어서 곧바로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볼 때는 항상 노랑 메모리펜을 준비한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은 칠을 한다. 그러다 보니 칠한 곳이 점점 늘어난다. 누군가 이를 본다면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번 볼 때 마다 칠을 하고 또 보면 그 위에 덧칠을 해서 어느 페이지의 경우 온통 노랑색 형광메모리 자국이 가득하다.

 

그러나 절대로 필기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필기구를 사용하면 마치 책에 낙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부득이 하게 필기가 필요할 때는 작은 포스트잇을 사용한다. 포스티잇에 글을 써서 해당 페이지 붙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또 책마다 포스트잇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필기구를 이용하여 낙서하는 일은 없다.

 

달리 불상이 없어도

 

현재 한글번역이 갖추어져 있지만 모든 한글번역을 다 갖추고자 한다. 현재 영역은 인터넷에 모두 올려져 있지만 기회가 되면 영역본도 구입코자 한다. 그래서 책장 가득 원음으로 채우고자한다. 그래서 언제든지 꺼내 보고자 한다.

 

인터넷으로 원음을 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잉크냄새가 나는 듯한 책으로 원음을 접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불자들이 모두 니까야를 구입하였을 때 그 니까야는 단순한 책이 아니다.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모신 것이나 다름 없다. 달리 불상이 없어도 달리 불단이 없어도 니까야가 꼽혀 있는 책장이 불상이고 불단인 것이다.

 

 

 

2013-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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