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솔직한 배타주의와 간악한 포용주의, 류상태목사 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21. 15:24

 

솔직한 배타주의와 간악한 포용주의, 류상태목사 이야기

 

 

 

입바른 소리를 하면

 

어느 시대이든지 입바른 소리를 하면 불이익을 당한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오히려 손해를 본다. 특히 거대한 조직일수록 권위가 높은 조직일수록 맞서는 경우 쫒겨 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은 침묵한다. 모순과 위선과 거짓임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여 보고도 못본 척 하고 들어도 못들은 척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려러니 하면서 지나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간혹 사람들 중에는 제도와 조직과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자신의 양심에 따라 모든 이익과 권리를 포기하고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고발하는 것이다.

 

일하면서 동시에 인터넷을

 

일하면서 동시에 인터넷을 한다. 일의 특성상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을 띄어 놓고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것이다. 동시에 일을 하면 눈으로는 작업을 하고 귀로는 소리를 듣는 것이 가능하다. 마치 라디오를 들으면서 작업하는 것과 같다. 물론 이런 경우 단순작업일 때만 가능하다.

 

좀더 주의집중을 요하는 경우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순간에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경우 주변에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그러나 밭을 맨다든가 단순 조립작업의 경우 크게 주의력을 요하지 않기 때문에 라디오소리가 들려 온다. 컴퓨터 모니터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주의력을 요하는 작업이 끝나고 단순한 작업을 할 때 인터넷을 띄어 놓고 듣는다.

 

모니터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소리를 듣는다. 인터넷시대이기 때문에 라디오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즐겨찾는 사이트를 띄어 놓고 소리를 듣는 것이다. 주로 불교TV에서 스님들 법문이나 기타 교양강좌가 대상이다. 최근에는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것을 듣는데 불교와 관련 된 것을 주로 듣다 보니 김용옥님의 강좌를 많이 접하게 된다. 특히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EBS강좌는 매우 유익하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직설적인 화법을 들으면 속이 다 후련한 느낌이다.

 

팝캐스트 방송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

 

또 하나 즐겨듣는 것은 팝캐스트 방송이다. 마치 라디오처럼 소리만 나오는 것인데 즐겨 듣는 것은 이슈 털어주는 남자(이털남)’이다. 이렇게 이털남을 즐겨 듣는 것은 시국과 현안에 대하여 깊이 있는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보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나 금기시 되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탈탈 터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세상이 돌아 가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류상태목사 이야기

 

이털남에서 류상태목사 이야기를 들었다.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라는 제목의 방송이다. 류상태목사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흥미를 끌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일부는 녹취하였다.

 

류상태목사는 현재 목사가 아니다. 교단에서 쫒겨 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목사라고 칭하는 것은 마치 스님을 하다가 환속해도 스님이라고 불러 주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류상태목사가 유명하게 된 것은 강의석 사건때문이다. 2004년 대광고에서 학내종교자유를 외치는 사건이 일어 났다. 그때 당시 대광학원 교목실장을 하고 있었던 류상태 목사는 이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된다.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털남에서는 리얼하게 들려 준다.

 

학교에서 쫒겨난 후

 

현재 류상태목사는 무직이라 한다. 학교에서 쫒겨난 후 지난 10년간 수많은 직업을 가졌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다마스를 이용한 퀵서비스를 하였다고 한다. 진행자가 어떤 일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처음에는 노점을 했구요 그러다가 기독교연구소에 갔다가 나와서 요양보호사를 잠깐했다가 택시기사도 해보고 대리운전도 하고 마지막으로 한게 화물차 다마스 퀴이라는 것을 했고 지금은 다른 알바 하고..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학교와 교단에서 쫒겨난 목사가 생계를 위해서 갖가지 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3D업종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요즘은 밤에 보험회사 사무실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한다. FC(보험설계사)들이 퇴근하면 사무실 정리를 하고 청소하고 문닫는 등의 일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든다. 이런 3D일을 마치 찾아서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행자가 일부러 이런 일을 찾아서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물어 본다. 그러나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글을 쓰는 일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데 글쓰기를 하다 보니 부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자신은 글을 써서 알리고 싶은게 있다고 하였다.

 

핵심을 가로 지르는 말

 

류상태목사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한다. 내용은 콘스탄티누스대제에 대한 이야기라 한다. 앞으로 열권 정도 평생을 걸쳐 시리즈로 쓸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역사소설을 쓰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진행자가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자기가 좋아하게 생각하는 어떤 꼭 전하고 싶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데 글이 좋은 거죠. 한번 써 놓으면 내가 떠나고 나도 남을 수 있는거잖아요.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류상태 목사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핵심을 가로 지르는 말을 하였다. 글은 써 놓으면 남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떠나도 글은 남아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꼭 글로 남기고 싶다고 하였다. 글을 써서 독자들과 나누고 공유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생업에 소홀 할 수밖에 없고 알바로 이런 저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이블에 예수의 말은 10%밖에

 

그렇다면 류상태목사가 글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진행자가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구절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라고 나오는 것이 다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많은 부분들이 예수님을 빌은 교회의 말일 수 있고, 다른 공동체 사람들의 예기 일 수 있어요. 거기에서 진정한 예수의 사상을 가려 내야 하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말씀 중에 진짜 예수 께서 하신말씀 중에 20퍼센트도 안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류상태목사는 놀라운 말을 하였다. 바이블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예수의 말도 아니고 더구나 그들의 신의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교회가 조직화 되면서 만들어진 말이라 한다. 그래서 소위 사복음서라 하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에서 예수의 말은 20%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요한복음에서 실려 있는 것에는 예수의 말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류상태 목사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성경에 이와 같이 쓰여 있다 이것은 별로 의미가 없어요.”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현재 류상태목사는 교단에서 쫒겨 났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의 순수한 예수의 행적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한다는 것이다.

 

류상태목사는 바이블에 쓰여 있는 것 중에 예수의 말은 10%도 안된다고 하였다. 대부분 조직지향적인 교회의 메시지가 담긴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예수님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바이블의 문자주의에 대하여 비판한다.

 

오로지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그렇다면 문자주의의 폐해는 어떤 것일까? 진행자가 지하철에서 전도사들이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외치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사람들 때문에 더 교회에 안나가요 그런 사람이 오늘날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해요. 왜냐? 판단력이 마비된 거에요. 오로지 성경에 이렇게 적혀 있으니까 나는 목숨 내놓고 한다는 거에요. 안티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무뇌아가 된 거에요.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류상태목사는 예천불지를 부르짖는 전도사들에 대하여 무뇌아와 같다고 하였다. 그들은 단지 바이블에 쓰여진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바이블에 있는 내용이 대부분 교회를 조직화하는 과정에서 삽입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곧이 곧대로 믿기 때문이라 한다. 이 대목에서 불교와 비교 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 근본주의가 필요해

 

불교에서는 문자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특히 동아시아불교가 그렇다. 대표적으로 선불교이다.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말씀 하신 진리라는 것은 문자나 말로서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오로지 마음이나 뜻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문자나 말로 전승된 경전에 빠져드는 것에 대하여 경계 하였다. 심지어 선방에서는 일체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한다. 깨달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불교에서 교외별전과 불립문자라 하여 반문자주의를 지향하게 되었고,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이라 보아 직지인심견성성불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의는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과 점점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와 선불교는 전혀 다른 종교처럼 된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문자지상주의이다. 그래서 바이블의 한글자 한글자 모두 자신이 믿는 창조주의 말이라거나 예수의 말이라 믿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바이블에 쓰여 있는 대로 살다 보니 주변과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피를 흘리는 역사를 보여 주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문자주의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문자를 맹신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긴장이 고조되고 갈등이 심화 되어 심지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최근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원음이 우리말로 번역 되어 나왔다. 이제까지 불자들은 한문경전을 접하였으나 2000년대 이후 빠알리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접하게 됨에 따라 직접 부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되었다. 이는 우리말 한문경전이 당구처럼 스리쿠션 맞고 접하는 것이라면 우리말 빠알리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을 직접접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접한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매우 체계적으로 되어 있어서 마치 바이블의 몇 장 몇 절하는 식으로 분류 된다. 그러나 그 양을 보면 바이블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하다. 바이블이 단권이라면 바이블의 수십배에 해당되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우리말 빠알리니까야

  

 

그런 부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일까? 바이블에 표현 되어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 대로 살면 긴장이나 갈등, 전쟁이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를 필요로 한다.

 

기독교에서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는 위험한 것이지만 반대로 불교에서는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를 취하면 평화로워 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기독교와 반대로 문자주의와 근본주의를 필요로 한다.

 

효과적인 전도는 어떤 것일까?

 

길거리에서 전도사를 많이 본다. 그들이 하는 말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예수믿고 복받으세요등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툭 던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서 사탕을 나누고 주고 커피를 대접하기도 한다. 그리고 떡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렇게 도시 어디에서나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전도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전도사들을 보면 저 멀리 서부터 어떻게 피해 갈까 고민한다. 그러나 통과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지나쳐 버린다. 이렇게 전도사들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사람들을 붙들고 부처님 믿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법은 청하지 않는 자에게 설법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법을 청해 주기를 간청하였을 때 그것도 삼세번 요청하였을 때 설법하는 장면을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법은 들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을 때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부처님 법이 좋다고 하여 예천불지식으로 밀어 붙였을 때 사람들만 피곤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전도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변화된 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불교단체 일원이 되고픈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대로 살아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반드시 말로 전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최대의 포교라 본다.

 

개독교라는 말이 있는데

 

류상태목사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파격적이다. 이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극히 정상적인 말이다. 그런 말 중에 하나가 있다. ‘개독교라는 말이다. 진행자가 인터넷에 보면 개독교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류상태목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모욕적인 것은 맞는데요 저는 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독교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오히려 무릎꿇고 사과하고 싶고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목사이었고 저보다 먹사라 합니다. 네가 먹고 살려고 그 짓하는 거지  저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저도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십년전에 이런 이야기 못했어요. 저 비겁한 사람입니다. 쫒겨 났으니까 이야기 하는 건데 맞다고 보는 거지요. 막상 나와서 보니까 입에 풀칠할려고 침묵하였던 것이 엄청난 죄이었구나 후회가 되요. 그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교회 지도자들, 전 그 사람들을 용서 하지 못합니다.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파격적인 질문에 역시 파격적인 답변이다. 류목사는 개독교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고 하였다. 그래서 개독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추호도 비난할 마음은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잘못을 일깨워 준 그들에게 무릎 꿇고 빌고 사죄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불교의 현실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류상태목사가 한국기독교의 타락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기독교 못지 않고 한국불교도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면에 있어서는 기독교 보다 더 타락한 곳이 불교처럼 보인다. 이는 불교 지도부가 썩어도 너무 썩었기 때문이다.

 

몰래 처자식을 숨겨두는 은처, 승려도박, 밤샘승려 술판 사건건 등이 있는데, 그런 것중의 하나가 승려폭행사건이다. 불교계 내부의 모순과 비리와 위선과 거짓을 폭로 하려던 한 사미승을 죽도록 폭행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같은 스님에 의하여 저질러졌다.

 

한국기독교가 썩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목사가 목사를 팼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이 스님을 납치하여 강금하고 린치를 가하고 죽도록 팬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한국불교가 한국기독교 보다 더 썩은 듯 하다. 사회에서는 기독교가 개독교또는 개독이라 부른다. 썩은 기독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썩은 불교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이사장에게 불려간 류상태목사

 

다음으로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강의석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2004년 기독교 계통 학교인 대광고등학교에서 학내종교문제로 갈등을 빚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큰 이슈가 되었고 전불교계가 일어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런 사건의 와중에 류상태 목사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류상태 목사는 강의석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 준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내가 대광학원 전체 기독교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인데 내가 눈치 보고 그러면 안되겠다 이제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른 기독교를 가르쳐야 겠다 라고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돌리고 돌려서 따뜻한 예수님, 합리적 신앙을 이야기 했죠.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걸 캐내더라구요. 재단 이사장이 불러서 왜 그런 이야기 하느냐? 당신 다원주의자냐? 이 다원주의가 무서운 이야기거든요. 대한민국에 이 다원주의 다자만 나와도 끝나는 거에요. 그런데 지금도 참 가슴 아픈게 저 다원주의자 맞거든요. 그때 저는 이미 다원주의자였어요. 그런데 , 저는 다원주의자입니다.”라고 하면 그걸로 끝나는 거에요.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팝캐스트 방송에 따르면 류상태 목사는 스스로 종교다원주의자라 하였다. 그런 신념을 갖게 된 것은 강의석 사건이 일어나기 이삼년 전의 일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에피소드를 들려 준다.

 

류상태목사에 따르면 교장 보다 높고 무서운 존재가 인 재단 이사장이라 한다. 그래서 이사장에게 불려 갔는데 마치 심문하듯이 물어 보았다고 한다. 자신이 목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예수나 기독교에 대하여 말을 빙빙 돌려 가며 말하였는데 이것이 재단의 귀에 들어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다원주의자가 아닌지 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굴하게도 다원주의자가 아니라고 곧바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포용주의자라고 하면서 포용주의에 대하여 길게 설명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세 가지 주의가 있는데

 

방송에서 류상태 목사는 기독교에는 현재 세 가지 주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라 한다. 이 세가지 중에 현재 한구기독교의 입장은 배타주의라 한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오로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류상태 목사는 자신이 다원주의자임에도 이를 숨기고 포용주의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행자가 다원주의자라는게 무엇입니까? 설명좀 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류상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기독교도 여러 종교들 처럼 진리를 찾아 가는 종교중의 하나다. 원오브뎀이다, 엔분의일이다, 기독교도 특별할 것 없다,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다, 모든 종교는 진리를 찾아 가는 길벗이고 기독교도 그 중의 하나다.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는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만 진리가 있고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오브뎀(One of them) 또는  엔분의일(1/N)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기독교도 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기독교는 혼자 잘난척 하기 때문에 온갖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종교가 결국 세상을 망치고 말아 먹을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이 가정이 원수더라구요

 

류상태 목사는 재단이사장에게 불려 가서 자신은 다원주의자가 아님을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포용주의자라고 말하였는데 이때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일신 종교들, 유대교, 이슬람교, 아주 골통 교리 기독교, 교리 이슬람교 이런 사람들이 세상 말아 먹을 거에요. 이걸 적어도 인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말은 해야 되는데 (말을 하면)그걸로 끝난단 말이에요.

 

그때(2004) 제가 40대 중반이었어요 처자식 있고 부모 있고 이게 어렵더라고요. 천주교 사제들이 가정을 갖지 말라고 하는게 의미가 있구나! 나는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 가정이 원수더라구요.

 

그 때 딱 묻는데 제가 무슨 짓을 했는가 하면 아닙니다탁 나오는 거에요. 그 자리에서 1초도 안걸리더라구요. 비참한 거죠. 그리고 그 다음에 저는 다원주의자가 아니라 포용주의자인데..”그러면서 포용주의를 쫙 설명하고 있는 거에요.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류상태 목사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사장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가장으로서 그렇게 비굴해질 수 밖에 없었음을 말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두 부류의 성직자가 있다. 하는 가정을 갖고 있는 성직자이고 또 하나는 가정을 갖지 않고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성직자이다. 전자는 주로 개신교 목사에 해당되고 후자는 천주교 사제에 해당된다.

 

성직자가 가정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가정을 갖음으로 인하여 장점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점도 많다는 것이다. 류상태 목사 같은 케이스가 이에 해당 될 것이다. 그래서 조직에 대하여 거짓과 위선과 모순을 보았을 때 그것에 대허여 (No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가족을 생각한다면 가장의 의무를 져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는 성직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잘못 된 것을 보고 잘 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천주교 신부들이 결혼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정을 갖지 않은 성직자가 왜 유리할까?

 

천주교에서 세게 나오는 이유는?

 

최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부정선거에 따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다른 종교에서도 뒤를 이었다. 놀라운 것은 원불교에서도 퇴진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교계에서는 어떤 성명을 발표 하였을까? 불교계에서는 대통령 퇴진 까지 요청하지 않았다. 다만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성명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다면 같은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에서 왜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일까?

 

최근 불교계는 위기를 맞고 있다. 문화재와 관련된 문제가 제기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 보조금으로 유지 되고 있는 문화재에 대하여 정부에서 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종단지도부에서는 10.27 법난에 버금가는 압박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네티즌은 교계신문 기사에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천주교는 교황청 때문에 못 건드리고, 개신교는 미국(개신교인들이 미국대통령 한국에 오면 시청광장에서 성조기 흔드는게 괜히 그러는게 아냐)눈치봐야하고, 불교는? 없어. 불교는 때리는 척 액션만 취해도 바로 꼬리내려.

 

(댓글)

 

 

댓글에서는 천주교와 개신교의 불교에 대하여 비교하고 있다. 지금 종교인들이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는데 불교만 유독 약하게 나오는 이유는 믿을 구석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독신성직자들은 가정이 없기 때문에 강하게 나온다. 특히 천주교의 경우 사제가 독신이기도 하지만 뒤에는 로마교황청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서 함로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도 일부 성직자들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는데 정부에서 역시 함부로 못하는 것은 뒤에 미국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독신비구승단을 표방하는 불교에서 성명이 가장 약한 이유 중의 하나는 기댈대가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정부에서 강하게 나오면 금방 꼬리를 내리고 말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어느 스님들은 잘못된 것은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속도 불사한다고 한다. 감옥 가는 것에 대하여 국립선방에 가는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모두가 독신비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만일 처자식이 딸려 있다면 목구멍이 포도청이기 때문에 함부로 못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진리를 수호하고자 한다면 성직자는 독신을 표방해야 할 것이다.

 

솔직한 배타주의, 간악한 포용주의

 

개신교는 배타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류상태목사는 자신이 다원주의자라 하였다. 그럼에도 이사장실에 불려 가자 포용주의자라고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포용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류상태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포용주의는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기독교 사상을 말할 때 크게 세가지가 있어요.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 배타주의는 오로지 기독교뿐이다 이걸로 끝장 나는게 배타주의에요.

 

포용주의는 할 수 있는데 까지 다 포용해요. 부처님도 천국갈 수 있다. 거기까지 이야기 하면 사람들이 다 박수치죠. 저도 많이 이야기 했어요.

 

근데 포용주의의 간사함이 어디에 있냐 하면 불교도 좋고 다 훌륭한데 스님도 천국갈 수 있는데 부처님은 해탈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부처님이 애쓴 게 가상해서 부처님도 죄인이지만 부처님 조차도 예수님피로 죄를 씻겨 줘서 구원된다그래서 나온 말이 뭐냐하면 익명의 그리스도, 그 사람 이름은 없지만 교회안에 들어와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 준다이걸 제가 인정할 수 있습니까? 배타주의는 솔직하기라도 해요. 이거 보다 더 간악한게 포용주의이에요. 다원주의자인 제 생각에 포용주의는 간사하다고 생각 되는 거에요.

 

근데 제가 위기에 처하니까 제가 다원주의자가 아니라 포용주의자 인데 포용주의는 이런 겁니다” “저는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설명을 쫘~악 하고 있더라구요.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류상태 목사는 포용주의에 대하여 간사하다고 하였다. 어떻게 간사한 것일까? 겉으로는 포용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하지만 포용주의는 매우 음흉하다는 뉘앙스로 말한다. 그렇더면 포용주의는 어떤 것일까?

 

남미에서 가톨릭의 토착화가 성공한 요인

 

포용주의의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가톨릭과 혼합주의, 성모 마리아 모양의 길상사 관세음보살상’라는 제목으로 쓴 글이다. 글에서 남미의 포용주의에 대한 것을 언급하였는데 하나의 논문을 예로 들었다.

 

 

가톨릭은 ‘인꿀뚜라시오(Inculturatio)’라 하여 특정 민족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가톨릭의 교리와 신앙생활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토착화를 중요한 원리로 삼고 있다.

.

.

 

‘똘레란시아(Tolerantia)’는 타 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적 입장인 포용주의 세계관을 대변한다. 타종교에도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음을 인정하는 가톨릭은 '이들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방식뿐만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현대 멕시코 가톨릭의 혼합주의 분석과 선교전략, 한동대학교 국제지역연구소)

 

 

남미에서는 거의 대부분 가톨릭을 믿고 있다. 이렇게 남미에서 가톨릭의 토착화가 성공한 요인에 대하여 ‘인꿀뚜라시오(Inculturatio)’와 ‘똘레란시아(Tolerantia)’ 두 가지 요인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유상태 목사의 지적대로 가톨릭에서는 익명의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다. 미래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지금 가톨릭에서 불교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도 알고 보면 이와 같은 포용주의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류상태 목사는 간사하다고 하였다. 오히려 개신교 처럼 배타적인 것이 더 솔직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한다.

 

설득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설득 당하고

 

류상태 목사는 이와 같이 길게 강의석 사건이 일어 나기 전의 배경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강의석 사건이 났을 때 상황에 대한 것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돌아 나오는데 비참하기 이를데 없더라구요. 그리고 자학을 하게 되더라구요. 이게 지난 이삼년 동안 그대로 반복이 되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의석이 한테 사전 공작을 하고 그런 건 전혀 말도 안되는 거고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럴 그릇도 못되요.

 

그런데 의석이가 딱 그러고 나니까 이건 정말로 애를 죽이던지 내가 부끄럽지 않게 그런 문제더라구요. 너무나 피할 수 없는 문제에요.

 

의석이가 딱 나와서 문제를 터뜨렸는데 그래도 저는 찾아 갔죠. 애가 뭔가 헛점이 있기를 바랬죠. 설득은 안된다는 것은 알았어요. 제 목표는 애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도망갈 구멍을 찾는 것 이었어요.

 

근데 아무리 애하고 이야기를 하고 살펴봐도 헛점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완전히 제가 위선자가 되지 않는 한 애를 놓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할 수 없다 너는 네 길을 가라”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해라” “나도 그렇게 하마이게 제가 묶이게 됩니다. 

 

(류상태목사, ‘494회-'류상태 목사, 기독교 변질의 역사를 드러내다')

 

 

강의석 사건이 난 것은 2004 6월이라 한다. 강의석군 학내 종교 자유 문제를 들어 이의를 제기하자 교목실장인 류상태 목사가 난처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설득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설득 당하고 만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해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미션스쿨에 배정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이 사건 이후로 류상태목사는 네가 무슨짓을 한 건가라며 먹고 살 걱정 때문에 학교 눈치도 보고 그러기를 서너 개월동안 했다고 한다. 그리고 새학기가 시작 되는 9월에 사표를 냈다고 한다. 이때 강의석 군도 강제로 제적 되어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강의석 사건은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라고 보아야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고교 평준화 이후 학교 배정 과정에 있어서 종교가 고려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많은 학생들이 강제종교 교육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당하였다. 그런 이야기 대하여 부처님께 안식처를 얻었네, 슬픈 고교시절 미션스쿨에서 삼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미션스쿨에 배정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오래 전 올린 글에 자료가 있는데 이를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종교사학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2006년 교육통계연보 자료에 따르면 중학교의 경우 25%, 고등학교의 경우 24%이다. 전체사학에서 거의 1/4이 종교사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사학중에 종교별 비율은 얼마나 될까. 표로 만들어 보았다.

 

 

종교별 사학 비율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대

대학교

총종교사학

17

167

227

22

49

불교

1

11(6.5%)

10(4.4%)

-

2

개신교

10

123(73.6%)

165(72.6%)

17

34

천주교

6

27(16.1%)

38(16.7%)

2

9

원불교

6(3.5%)

7(3%)

2

3

 

 

 

중학교의 경우 불교사학이 11개인데 비하여 개신교의 경우 123개로서 73%를 차지 한다. 고등학교의 경우 불교사학이 10개인데 비하여 개신교사학은 165개로서 72%를 차지한다. 따라서 종교사학문제라 하면 개신교사학을 일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전체학교 중에서 개신교 사학에 배정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표로 만들어 보았다.

 

 

종교사학에 배정될 확률

종 교

초등

중학교

고등학교

전문대

대학교

전체학교

5,646

2,935

2,095

158

191

불교

1

11(0.37%)

10(0.47%)

-

2

개신교

10

123(4.2%)

165(7.8%)

17

34

천주교

6

27(0.91%)

38(1.8%)

2

9

원불교

6(0.2%)

7(0.3%)

2

3

 

 

 

 

중학교의 경우 총2,935개의 학교중 개신교 학교가 123개이므로 개신교 중학교에 배정될 확률은 4.2%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의 경우 더 높아져 7.8%에 이른다.

 

이와 같이 자료에 따르면 학생들이 종교 사학 특히 개신교의 미션스쿨에 배정될 확률은 고교의 경우 8%에 달한다. 따라서 종교가 달라서 고통받는 학생이 나올 수 밖에 없고 그런 와중에 강의석사건이 일어난 것이라 보면 된다.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지적하는 이들

 

류상태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 보다 도 용기 있는 행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목구멍 포도청이라는 이유로 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현실에 순응하며 살지만 일부 용기 있는 자들은 이를 지적한다.

 

용기 있는 자들은 기존 제도와 질서에 대하여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지적한다. 그러나 쫒겨 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래서 류상태 목사도 쫒겨 났고 강의석군도 쫒겨 났다. 이는 사회 전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 되었다고 말하면 쫒아내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 뿐만 아니라 종교인들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종교인들이다. 그래서일까 천주교 사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로마 교황청이라는 거대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지적하는데 앞장 서 왔다. 그러나 불교계만은 항상 뒷북치는 것 같다. 천주교 사제 보다 더한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출가자들이 대체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성직자들이 앞장 서주기를 바란다. 이 사회의 모순과 거짓과 위선에 대하여 낱낱이 밝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3-12-2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