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행운목에서 꽃이 피면 큰 행운이 온다는데, 올해 두 번 핀 행운목꽃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10. 20:25

 

행운목에서 꽃이 피면 큰 행운이 온다는데, 올해 두 번 핀 행운목꽃

 

 

 

행운목 꽃이 만개 하였다. 지난 11 23일 꽃대를 발견한 지 보름만에 꽃이 피었다. 이런 행운목꽃을 벌써 네 번째 보고 있다.

 

올해 두 번 핀 행운목꽃

 

행운목꽃을 처음 본 것은 2010 12월이다. 2007년년 말에 꽃집에서 행운목을 사서 키운지 3년만에 처음 행운목꽃을 보았다. 이때 감상문을 밤에만 피는 행운목꽃은 어떻게 생겼을까, 2010.12.19)’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 일년후인 2011 11월에 두 번째 꽃을 보았다. 이때도 역시 행운목꽃 향기는, 2011.11.17)’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이렇게 해마다 11월이나 12월이 되면 매년 피는 줄 알았다. 그래서 2012년 겨울이 되자 기대하였다. 그러나 피지 않았다. 그래서 2012년은 행운목꽃을 보지 못하고 넘어 가게 되었다.

 

그런데 올해 4월에 또 행운목꽃이 핀 것이다. 한해 걸러서 1 6개월만에 다시 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행운목꽃과 향기도둑, 2013-04-0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래서 행운목꽃은 겨울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봄에도 피는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한 번 더 행운목꽃이 피었다. 올해 들어 4월에 한 번 피고 또 12윌에 한번 더 피어 2013년에 행운목꽃이 두 번 핀 것이다. 이렇게 총 네 번 행운목꽃이 피었는데, 올해의 경우 두 번피어서 피로하였음인지 예년과 다르게 한 가지에서만 꽃이 피었다.

 

 

 

 

큰 행운이 따른다는데

 

흔히 행운목꽃이 피면 큰 행운이 올 것이라 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 두 번 행운목꽃을 보게 되었으니 큰 행운이 두 번 있어야 하나 아직까지 큰 행운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낸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 또 내일이 어제 같은 매일 똑 같은 패턴의 생활의 반복이다. 물론 내일이 어제 같은이라는 말은 어법에 맞지 않는다. 단지 큰 변화없이 일상이 반복됨을 말한다. 

 

이처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 또 내일이 어제 같은똑 같은 일상이지만 빼 놓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이다. 아무리 바빠도 숙제는 해놓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남는 것은 글밖에 없는 것 같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리지만 여러 시간을 투자하여 써 놓은 글은 남아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행운으로 본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 자체가 최대의 행운이기 때문이다.

 

정신기능이 없는 무정물이지만

 

행운목꽃이 필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나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만 지키고 있지만 꽃이 필 때가 되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

 

어느 날 꽃대가 나온 것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비록 정신기능이 없는 무정물이지만 꽃이 필 때 가 되면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물처럼 느껴진다. 더구나 꽃이 활짝피면 강렬한 향기를 발산하는데 이때 식물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행운목꽃은 주로 밤에 핀다. 그런면으로 보아 야행성이라 볼 수 있다. 낮에는 꽃술을 오므리고 있다고 저녁 6시 넘어 사방이 캄캄해지면 그제서야 꽃술을 활짝 열어 제낀다. 그런 꽃술이 여러 개 모여서 원형의 꽃다발을 이루고 있는데 꽃잎은 매우 작다.

 

 

 

 

 

이렇게 꽃술이 열리면 그 때부터 강렬한 향기를 내뿜는다. 그런 향기는 매우 신선하다. 밀폐된 공간에서 청량한 향기를 내 뿜을 때 비로서 행운목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행운목은 정신 기능이 없는 초목이라기 보다 어떤 정신체를 가진 유정물처럼 보인다.

 

아름답고 향기가 나지만

 

처음 행운목꽃을 보았을 때 무척 신기하였다.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행운목꽃을 보고 , 행운목꽃이 이렇게 생겼구나!”라고 감탄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웠던 것은 강렬한 향기이었다. 아직까지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냄새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밀폐된 공간에서 신선하고 상큼한 향기를 맡으면 마치 정신이 맑아지고 청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처음 행운목꽃을 접하였을 때 행운목꽃을 보고 감탄하였고 또 향기를 맡으면서 감동하였다.

 

밤에만 피는 행운목꽃은 약 일주일 가량 핀다. 어느 꽃이나 그렇듯이 꽃이 질 때쯤 되면 눈뜨고 못 볼 정도로 처참하다. 꽃이 피었을 때 향내를 발산할 때는 아름답지만 꽃이 시들 때쯤 되면 보기 민망할 정도로 지저분해 진다. 진한 꽃에서 나오는 진한 액체가 바닥에 떨어져 끈적 거리고 색은 변색되어 검게 된다. 행운목꽃 역시 제행무상의 법칙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행운목꽃은 아름답고 냄새도 향기롭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 아마 실내에서 키우기 때문일 것이다.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면 행운목꽃도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 검색을 해 보면 바깥에서 재배되는 행운목에는 작은 열매가 맺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내에서 세 번 보았던 행운목에서 아직까지 열매를 보지 못하였다. 이렇게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열매는 별 볼일 없는 식물들이 있다. 장미도 그런 류에 속할 것이다. 반면 꽃은 피지 않지만 열매가 있는 경우가 있다. 무화과가 대표적이다.

 

무화과에서 꽃이 필 때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고 바로 열매가 맺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백과사전에 따르면 꽃이 핀다고 한다. 꽃이 과일 내부에서 피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꽃이 피지 않고 열매만 열리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화과에서 아주 가끔 꽃이 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상기후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인하여 꽃이 필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화과에서 꽃이 피면 사람들은 매우 상서롭게 생각한다고 한다.

 

고대인도에서는 무화과 나무에서 꽃이 피었을 때 매우 희귀하고 희유한 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전륜성왕이나 부처가 이세상에 나투는 상서로운 현상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무화과나무를 뜻하는 우담바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장아함경에 따르면 “너희들은 마땅히 생각하라. 여래가 때때로 세상에 나오는 것은 마치 우담발라꽃이 가끔 한번씩 피는 것과 같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둠바라(Udumbara)

 

우담바라는 불교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동아시아의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삼천년에 한번 피는 전설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담바라꽃이 피었다는 것은 부처나 전륜성왕이 나타날 조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우담바라 나무는 늘상 보는 나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우둠바라(Udumbara)’라 불리는 무화과는 인도 등 남방에서는 실제로 볼 수 있는 나무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도 우둠바라에 대한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

vicīna pupphamīva udumbaresu,
So bhikkhu jah
āti orapāra

urago jiṇṇamiva taca purāa.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stn5)

 

(Uragasutta-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udumbaresu’가 있다. 이는 ‘udumbara’를 말한다. 이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m.] the glamorous fig tree’라 설명되어 있다. ‘매혹적인 무화과나무’라는 뜻이다. 한자어 사전에는 ‘優曇婆羅(우담바라), 優曇華(우담화), 無花果(무화과)’라 되어 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꽃

 

그렇다면 왜 이런 게송이 나오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vicīna pupphamīva udumbaresu  : Prj.II. 18-19에 따르면, 이 시부터 이 경의 마지막시(stn5-17)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한 때 세존께서 싸밧띠에 계셨는데, 마침 그때에 어떤 한 바라문이 자신의 딸의 결혼을 앞에 두고 ‘어떤 천민도 지금까지 사용한 적이 없는 꽃으로 딸을 장식하여 시집을 보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싸밧띠 시의 안팎에서 그러한 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품이 못된 바라문 자제들을 모아놓고는 그러한 꽃이 있는 장소를 물었다. 그들은 바라문에게 ‘무화과의 꽃은 지금까지 이 세상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꽃이니 그 꽃으로 장식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바라문은 다음날 아침 식후에 아찌라바띠(Aciravati)강변의 무화과 숲으로 가서 꽃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낮이 지나 다음 강변으로 가보았다.

 

 꽃을 찾다가 지친 바라문은 거기서 명상수행을 하는 수행승을 만났는데 그는 바라문에게 ‘무화과의 꽃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허황된 말이니 자신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알려준다.

 

세존께서는 수행승의 의도를 알아채고 사념과 자만에 빠진 자를 위해 빛을 놓아 이 시들(stn5-17)을 읊었다.

 

(stn5 각주, 전재성님)

 

 

무화과나무에서는 꽃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무화과꽃을 찾아 오라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다름아닌 우담바라를 말한다.

 

우담바라꽃으로 딸의 결혼식을 장식하고자 하는 어느 바라문의 바램은 헛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꽃을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명상수행자는 무화과의 꽃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말하면서 허황된 말로 자신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존재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

 

우담바라꽃은 볼 수 없다. 그래서 아무리 우담바라꽃을 찾으려 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담바라꽃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존재들 역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 stn5)”라 하였다.

 

여기서 Sār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실체라고 번역하였다. 그런  빠알리어 sāra는 나무의 심재(the pith of a tree)나 정수를 말한다.  그래서 Sāra에 대하여 ‘존재’로 번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존재란 무엇인가? 주석에 따르면 욕유, 색유, 무색유, 상유, 무상유, 비상비비상유, 일온유, 오온유를 말한다. 삼계를 윤회하는 존재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말한다. 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집착함으로서 끊임 없이 삼계를 윤회하는 존재를 말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나라고 하는 것은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존재를 색, , , , 식 등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로 분별하여 보았을 때 그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무화과꽃은 실체가 없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실체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꽃을 찾는 것은 망상이다. 그럼에도 바라문은 딸의 결혼식을 장식하기 위하여 아직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무화과 꽃을 가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원래 존재하지 않기에 아무리 찾아 보아도 찾을 수 없다. 나를 찾는 수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부처님이 나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고 실체도 없는 무아라고 하였음에도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우담바라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살아 있는 듯한 행운목꽃

 

행운목꽃 향기가 강렬하다. 밤이 되자 밤송이 같은 꽃다발에서 일제히 꽃이 활짝 피었다. 낮에는 오므리고 있다가 어두워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껏 피어 있다. 이렇게 무정물에서도 때를 구분하여 꽃이 피고 향기를 발산하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듯하다.

  

 

 

 

 

한번도 행운목꽃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꽃이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래서 꽃을 직접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번도 꽃의 실체를 보여 주지 않는 무화과(우둠바라)에서는 꽃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실체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전설상의 꽃을 찾아 다닌다면 어리석은 행위이다.

 

 

 

 

2013-12-10

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