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끄러움과 창피함(慚愧),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9. 11:37

 

부끄러움과 창피함(慚愧),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낮에 하는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 다르고

 

법과 제도만 있으면 사회질서가 유지될 수 있을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최근 국가기관의 대선개입논란을 보면 아무리 법과 제도를 잘 만들어 놓았을지라도 이를 운용하는 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무력화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법과 제도를 만든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강조한다. 그래서 법과 질서를 어기면 법대로 처리하고자 한다.

 

용산참사가 대표적이다. 서민들이 생존권을 박탈당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저항하였음에도 법과 질서를 내세워 강공을 편 결과 끔찍한 참사가 일어 났다. 이렇게 법을 만든 자들이 법과 질서를 강조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국가기관 선거 개입도 그렇고 고위공직자들의 청문회를 보아도 그렇다.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은 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끊임없이 범계행위가 일어나는 것도 계율을 지키지 않아서 않아서이다. 승려로서 해서는 안되는  수 백가지나 되는 비구계가 있음에도 이를 지키지 않는 것은 아무리 제도가 훌륭해도 이를 지켜 내려는 마음이 없을 때 무용지물이 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慚愧, hiri- ottappa, 양심과 수치심 

 

최근 승려들의 밤샘 술판 사건이 또 다시 불자들은 물론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승려로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 왜 자꾸 벌어지는 것일까? 인천의 스승이라고 칭하는 스님들이 낮에 하는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이자랑 교수는 다음과 같이 교계신문에 기고 하였다.

 

 

불교경전을 읽다보면 수행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안으로도 부끄러움을 알고, 밖으로도 부끄러움을 알며…”라는 두 가지 표현이 서로 대조를 이루어 정형구로 곧잘 등장한다. “안으로도 부끄러움을 알고란 참(, hiri), “밖으로도 부끄러움을 알며란 괴(, ottappa)라는 역어를 풀어 표현한 것이다.

 

이 둘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느끼는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참이 악행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면, 괴는 악행에 대한 두려움 내지 불안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은 악행을 혐오하는 것이 특징으로, 자신이 악행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너무 부끄럽고 양심에 걸려서 악행을 피하는 것이다.

 

한편, 괴는 수치심이다. 마치 좋은 가문의 규수가 타인의 시선을 중시 여겨 수치스러운 일을 기피하듯이, 자신의 악행을 보고 쏟아질 타인의 비난 등이 두려워 악행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참과 괴를 각각안으로도 부끄러움을 알고, 밖으로도 부끄러움을 알며…”라고 표현한다. 참과 괴는 각각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하며, 악행의 철저한 예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스님의 자격, 이자랑교수, 법보신문 2013-12-04)

 

 

문단은 편의상 나눈 것이다. 이자랑교수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한자 ()()’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참과 괴라는 한자어는 낯설다. 많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끄럼과 창피함은 순수한 우리말로서 누구나 알 수 있는 말이다. 이에 대한 빠알리어가 히리(hiri)와 옷땁빠(ottappa)이다. 이에 대한 또다른 한자어는 양심과 수치심이다. 이렇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여러 가지 명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아비담마적으로 해석하면, 부끄러움은 내적인 것이고, 창피함은 외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아비담마에 따르면 선한 마음으로 분류 된다. 그렇다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부끄러움과 창피함의 차이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그 말이 그 말 같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악행을 저지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 지금 악행을 저질렀는데 이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 부끄러움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히리(hiri) 한자어로는 참()이라 하고 또 양심이라 한다. 이렇게 내적으로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부끄러움이라 한다.

 

그렇다면 창피함이란 무엇일까? 지금 악행을 저질렀다면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 발각될지 두려워 할지 모른다. 이렇게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여 두려워 하는 것이 창피함이라 한다. 그래서 창피함에 대한 빠알리어는 옷땁빠(ottappa)이고 한자어로는 괴()라 하고 또 수치심이라 한다.

 

그런데 이자랑 교수의 글을 보면 창피함(수치심)에 대하여 규수의 예를 들고 있다. 그래서 괴는 수치심이다. 마치 좋은 가문의 규수가 타인의 시선을 중시 여겨 수치스러운 일을 기피하듯이,”라 하였는데, 아비담마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hiri는 좋은 가문에다 학덕과 교양을 갖춘 착한 여인이 자신을 중시여겨서 차마 나쁜 짓을 못하는 것과 같은 마음을 낸다.(아비담마 길라잡이 1 213p)”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자랑 교수는 부끄러움을 창피함으로 착각하여 규수의 예를 든 것 같다.

 

천한 사람들의 특징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선한 마음이다. 반면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은 불선한 마음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52가지 마음부수에서 양심(hiri)과 수치심(ottāpa) 25가지 선한 마음으로 분류 되어 있고, 양심없음(ahiri)과 수치심없음(anottāpa) 14가지 불선한 마음으로 분류 되어 있다. 그런데 부끄러움과 창피함이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Rosako kadariyo ca pāpiccho vaccharī saho,
Ahiriko anott
āpī ta jaññā vasalo iti.

 

남을 화내게 하고, 이기적이고,

악의적이고, 인색하고, 거짓을 일삼고,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33)

 

(Vasala sutta-천한 사람의 경, 숫따니빠따 Sn1.7, 전재성님역)

 

 

 

 

Bo Tree

 

 

 

경에서는 천한 사람들의 특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와살라경은 라따나경, 망갈라경, 멧따경 등과 더불어 수호경 중의 하나라 한다.

 

경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라 하였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지금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리고 계속악행을 해서 지탄을 받아도 그러건 말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한마디로 후안무치이고 얼굴에 철판을 깐 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이처럼 낯짝 두꺼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법과 질서가 있음에도 이를 가볍게 어긴다거나, 낮에 하는 말 다르고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달라서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수 없이 본다. 고위 공직자들의 청문회에서도 확인 할 수 있고, 도박을 일삼고 밤샘술판을 벌인 승려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두 가지 법

 

이렇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가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법이 인간사회를 수호하는 법이다. 그 법이 없다면 사회에서 인간규범이 사라진다.

 

예를 들어 부끄러워함이나 창피함이 없다면 부모, 형제, 자매, 사촌 등의 사이에 본래 있을 수 없는 근친상간이나 난잡한 남녀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은 인간 사회의 규범을 수호하는 본질적인 것이다. 특히 청정한 대자연에 쓰레기나 폐수를 버리는 것에 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스러워했다면 오늘날 같은 환경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나까무라 하지메의 불교어대사전(佛敎語大辭典 499)에 따르면, 이것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부끄러움은 마음속으로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자신의 죄를 타인에게 고백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또는 부끄러움은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을 가르쳐 죄를 짓지 않게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자신의 관찰을 통해 죄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타인의 관찰에 대하여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타인의 덕을 흠모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스스로의 죄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그밖에 부끄러움은 사람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고, 창피함은 하늘에 대하여 부끄러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Ahiriko anottāpī 각주, 전재성님)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은 것이라 하였다. 만일 양심과 수치심이 없는 사회라면 어떻게 될까?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상상도 할 수 없는 사건이 비일지비재하게 발생할 것이다.

 

친딸을 성폭행하였다는 뉴스가 간간히 있는데 이처럼 근친상간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비만 오면 물고기들이 떼 죽음 당하였다는 뉴스를 본다. 비가 올 때 몰래 오폐수를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 역시 양심과 수치심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심이 실종 되고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그런 사회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아마도 개판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개판치는 사람들

 

이 세상에는 개판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개판치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다. 낯이 두껍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끄러움이나 창피함을 모른다. 그래서 후안무치(厚顔無恥)’라 한다. 낯짝이 두껍기 때문에 뻔뻔하고 부끄러움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서슴없이 한다.

 

개판치는 자들들에게 있어서 도덕적 규범은 거추장스런 것이다. 법이나 제도가 있지만 있으나마나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낯짝 두꺼운 자들이 우리사회의 지도층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낮에 하는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 다른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종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언젠가 개판치는 목사라는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어느 여성작가가 인터넷 매체에 기고한 글이다. 한국기독교의 목사들의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도 개판치는 스님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불자들과 국민들을 짜증나게 하는 승려 도박사건이나 승려밤샘술판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더욱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이런 모순과 위선과 거짓이 이제 구조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질러도 양심을 가책을 받지 않은 듯 하고 오히려 재수 없게 걸렸다라는 식이다. 더욱더 실망스러운 것은 매관매직이다.

 

이번 34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도박혐의를 받고 있는 스님이 표를 몰아 주는 대가로 봉은사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봉은사 주지 추천권을 행사한 스님이나 이를 허용한 총무원장 스님이나 새로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스님이나 모두 현재 도박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상태라는 것이다.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이렇게 도박을 일삼고 더구나 매관매직까지 하는 스님들은 과연 양심과 수치심이 있을까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에 천박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Dhātusova bhikkhave, sattā sasandanti samenti: assaddhā assaddh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Ahirikā ahirik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Anottāpino anottāpīhi2 saddhi sasandanti samenti. Appassutā appassut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Kusītā kusīt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Muṭṭhassatino muṭṭhassatīhi saddhi sasandanti samenti. Duppaññā duppaññehi saddhi sasandanti same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믿음이 없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배움이 없는 자는 배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와 어울린다. 게으른 자는 게으른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새김이 없는 자는 새김이 없는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지혜롭지 못한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Assaddhasutta-믿음이 없는 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14:17, 전재성님역)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말에 그 사람에 대하여 알려거든 그 사람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라 하였다. 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끼리 어울리고,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창피함을 모르는 자와 관계를 맺는다. 이렇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철면피들이 모였을 때 개판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한국불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에게 정복당해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잘못을 해도 처벌하지 않는다. 도박을 해도, 술판을 벌여도, 은처를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짓과 위선과 모순을 고발하면 오히려 보복을 당한다. 이렇게 양심없고 수치심이 없는 자들에 정복당한 한국불교는 천박한 자들의 것이다. 그래서 언제 또다시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지 알 수 없다.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

 

빠알리어로 히리(hiri)라 하고 한자어로는 참()이라 하고 또 양심이라 불리우는 부끄러움’, 그리고 빠알리어로 옷땁빠(ottappa)라 하고 한자어로는 괴()라 하고 또 수치심이라 불리우는 창피함’, 이렇게 두 가지는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그리고 인간사회를 수호 하는 두 가지 법이다. 그래서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Sujīva ahirikena                수지왕 아히리께나

kākasūrena dhasinā             까까수레나 담시나

pakkhandinā pagabbhena           빡칸디나 빠갑베나

sakiliṭṭhena jīvita           상낄릿테나 지위땅.

 

부끄러움을 모르고

까마귀처럼 교활하고 무례하고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오염된 삶을 사는 것은 쉽다.

 

 

Hirīmatā ca dujjīva            히리마따 짜 둣지왕

nicca sucigavesinā             닛짱 수찌가웨시나

alīnenā' ppagabbhena             알리네나 빠갑베나

suddhājīvena passatā             숫다지웨나 빠싸따.

 

항상 부끄러움을 알고

청정을 찾고 집착을 여의고

겸손하고 식견을 갖추고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은 어렵다.

 

(법구경 Dhp244-245, 전재성님역)

 

 

 

2013-12-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