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스승이 없는 시대에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2. 1. 12:55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스승이 없는 시대에

 

 

 

일요일 아침에

 

아침부터 악기소리로 요란하다. 일요일이지만 사무실로 가는 길 인근교회에서 나는 소리이다. 드럼소리와 노래소리가 아침부터 나는 것을 보니 교회행사를 위하여 연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요일 오전 특별한 일이 아니면 사무실로 향한다. 그것도 평소와 다름 없이 이른 아침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일요임에도 사무실로 향하는 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벌써 이런 생활이 수년간 지속되다 보니 이제 습관이 되어 버렸다. 마치 모닝커피를 마셔야 몸의 활력이 돈다고 하는 사람이 있듯이 하루 일과를 하는데 있어서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잘 돌아 가지 않는 것처럼 여긴다.

 

오전에 하는 일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컴퓨터를 켜는 일이다. 그리고 두 대의 모니터로 일을 시작한다. 두 대의 모니터를 가지게 된 것은 일 때문이다. 오로지 컴퓨터로 작업 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가로로 긴 두 대의 모니터를 필요로 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두 대의 모니터는 매우 유효하다. 검색하기 위해서 이것 저것 띄어 놓고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새 모니터는 여러 화면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책상에는 이 경전 저 경전이 펼쳐져 있어서 누군가 본다면 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오전 중에는 다른 업무를 중단하고 오로지 글 쓰는 일에만 매진한다. 글을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본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돈도 안되는 글쓰기를 일년 365일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계속 하고 있다. 그래서 일요일이라 하여 늦잠을 잔다든가 하릴 없이 TV에 시선을 고정하며 보내지 않는다. 아침 일찍 나와서 할 일을 다 한 다음에 비로서 다음 일을 하게 된다.

 

절에 가지 않는다 하여

 

일요일 오전에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절에는 가지 못한다.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지 모른다. 근처에 절이 없고 좀 더 멀리 나가면 큰절도 있지만 성향과 맞지 않아서 가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 대승불교사찰로서 법문도 없을 뿐더러 정서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초기경전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이기 때문에 매일 경전을 접하고 있다. 그런 경전에는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설령 신통이나 초월적 경지 등 오감으로 인지 하지 못하는 장면도 등장하지만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경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을 읽으면 반드시 건지는 것이 있다.

 

경전을 접하면서 한마디 한구절이 가슴에 와 닿았을 때가 있다. 그래서 경전을 통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고 마음이 위로가 된다. 이럴 경우 굳이 절에 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절에 가면 시간정력이 든다.  그러나 초기경전을 늘 가까이 하면 모두 다 절약이 된다. 아무 경전이나 열어 보아도 지금 닥친 현실에 대한 해법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경전속에는 세상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행복에 대한 것 보다 출세간적가르침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 , 무아이다. 몸은 비록 세간에 살지만 마음만은 출세간을 지향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의 종식에 대한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감동을 받는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에 대한 것만 말씀 하셨다면 그다지 감명 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서 아무곳이나 열어 보았을 때 어느 한구절에서라도 가슴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일요일 절에 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는 비판할지 모른다. 불자로서 절에 가지 않는다면 불자로서 역할을 다 하지 않는 것으로 비난할지 모른다. 절에 가서 108배도 하고 봉사도 하고 시주도 하는 것이 불자들의 삶의 올바른 방식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절도 좋고 나도 좋아서 서로가 좋은 일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불자가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절에 가서 법문을 듣고 수행도 하고 봉사도 하고 서로 친교를 맺는 것이 바람직함에 틀림 없다.

 

다닐 만한 절이 없을 때는

 

그러나 마땅히 다닐 만한 절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마땅히 따를만한 스승이 없다면 경전에 의지하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삿된 견해를 내세우며 혹세무민하는 자를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를 말한다. 영원론, 허무론, 숙명론 등을 주장하는 스승이 있다면 단호히 거부하고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따르라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는 스승이 없다면 전승된 경전에 의지하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의지할 것은 자기자신과 가르침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라 하셨다. 스승이 없을 때는 가르침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전이다. 요즘 누구나 볼 수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스승이 없는 시대에 불자들이 신행생활을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하여

 

절에 나가지 않는 것은 주변에 절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법이 없다는 것이다. 절에 가서 법문을 들어 보아도 부처님의 원음을 찾아 볼 수 없고 그 대신 각종 기도와 천도재 등 기복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절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한 것 같다. 절에 10, 20, 30년 동안 다닌 불자들 중에는 단지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아상이 강한 경우가 종종있다. 절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아상이 무너져야 하지만 그 반대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절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새내기 신도나 자신 보다 절에 오래 다니지 않은 사람을 아래로 보는 경향도 있다. 과연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하여 더 신심이 있는 것일까?

 

머리가 희다고 하여

 

흔히 하는 말중에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는 유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라고 해서” 논법을 적용한다면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니다”와 같이 여러가지로 응용할 수 있다. 그런데 “~라고 해서”논법이 법구경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법구경 담맛타왁가(Dhammaṭṭhavagga, D19)에 있는 게송들이다. 먼저 한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tena thero so hoti            나 떼나 테로 소 호띠

yenassa palita siro            예낫사 빨리땅 시로

paripakko vayo tassa             빠리빡꼬 와요 땃사

moghajiṇṇo ti vuccati.           모가진노띠 웃자띠.

 

머리가 희다고 해서

그가 장로는 아니다.

단지 나이가 들었으나

헛되이 늙은 자라 불린다.

 

(법구경 Dhp260,전재성님역)

 

 

번역을 보면 “~라고 해서”용법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머리가 희다고 해서 모두 ‘장로(thera)’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장로는 존경받는 빅쿠를 말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사리뿟따나 목갈라나 존자와 같은 부처님의 제자를  장로 하였고, 또한 아라한이 된 자를 장로라 칭하였음을 본다. 그래서 테라(장로)는 기본적으로 수행을 많이 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로서 나이가 든 빅쿠를 뜻한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었다고 하여, 즉 나이가 들었다고 하여 모두 장로가 아니라 하였다. 머리가 희긴 하였지만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자는 단지 나이만 먹은 늙은이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게송을 읊게 되었을까?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거룩한 경지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고 “한 장로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대들은 보지 못했다고?”

 

“세존이시여. 한 사미를 보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는 사미가 아니라 장로이다.”

 

“세존이시여, 지나치게 작았습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고 장로의 자리에 앉았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 진리를 꿰뚫고 많은 사람에 대하여 불살생을 확립하면, 그를 장로라 한다.”

 

(법구경 Dhp260  인연담, 전재성님역)

 

 

인연담을 보면 외양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로라 하여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이의 모습을 연상하기 쉽지만 인연담에 따르면 새파란 사미승도 장로로 불릴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라 하셨다.

 

말을 많이 한다고 하여

 

이와 같이 “~라고 해서라는 용법이 들어간 게송이 담맛타왁가(D19)에는 몇 개 더 있다. 말 많은 이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tāvatā dhammadharo            나 따와따 담마다로

yāvatā bahu bhāsati              야와따 바후 바사띠

yo ca appampi sutvāna            요 짜 압빰삐 수뜨와나

dhamma kāyena passati          담망 까예나 빠싸띠

sa ve dhammadharo hoti           사 웨 담마다로 호띠

yo dhamma nappamajjati.        요 담망 납빠맛자띠.

 

말을 많이 한다고 단지

진리를 갖춘 님은 아니다.

배운 것이 적어도

몸소 진리를 보고

진리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그가 진리를 갖춘님이다.

 

(법구경 Dhp259, 전재성님역)

 

 

빠알리어 dhammadhara가 있다. 이를 전재성님은 진리를 갖춘 님이라 번역하였다. 거해스님역에는 법사로 번역되어 있다. Dhammadhara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knowing the Dhamma(진리를 아는 것)’이라 되어 있다. Dhamma가 진리이고 dhara는 ‘holding; keeping’의 뜻이므로 ‘진리를 가진 자’ 또는 ‘진리를 아는자’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말을 많이 한다고 하여 진리를 아는 자가 아니라 하였다. 이는 무슨 말일까? 각주에 따르면 배우고. 기억하고, 복습하는 등으로 인해서 단지 많이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진리를 아는 님은 아니다. 그것은 문중의 안내자나 문중의 수호자가 될 뿐이다.”라 하였다. 교학적으로만 아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수행이 없이 단지 경전만을 달달 외워 교리나 교학적으로 많이 아는 자에 대한 것이다.

 

교학보다 수행

 

이와 유사한 게송이 법구경 19번 게송에서도 보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Bahum-pi ce sahita bhāsamāno,
Na takkaro hoti naro pamatto,
Gopo va g
āvo gaaya paresa,
Na bh
āgavā sāmaññassa hoti.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방일하여 행하지 않는다면

소치기가 남의 소를 헤아리는 것과 같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지 못하리.

 

(법구경 Dhp19, 전재성님역)

 

 

계행을 지키고 경전을 배웠지만 수행을 하지 않는 자에 대한 가르침이다.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sati)를 확립하지 못하고, 알아차림을 잃고 사는 수행승에게 말한 것이다.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교학 보다 수행이 우선함을 알 수 있다. 이는 259번 게송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인연담에서는 교학에 대하여 통달한 삼장법사와 교학에 대하여 무지하지만 수행을 통하여 가르침을 실천한 수행승을 더 높이 평가 하고 있다. 그래서 19번 게송과 쌍으로 된 20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Appam-pi ce sahita bhāsamāno,
Dhammassa hoti anudhammacārī,
Rāgañ-ca dosañ-ca pahāya moha,
Sammappaj
āno suvimuttacitto,
Anup
ādiyāno idha vā hura vā,
Sa bhāgavā sāmaññassa hoti.

 

경전을 외우지 못하더라도

가르침에 맞게 여법하게 행하고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올바로 알고 잘 마음을 해탈하여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의 집착 여의면,

수행자의 삶을 성취하리.

 

(법구경 Dhp20,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교학보다 실참수행이 우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에 교학을 많이 알지만 수행이 없는 삼장법사가 있고, 지금 여기에 교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수행을 통하여 진리의 흐름에 든자가 있다면 부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 줄까? 당연히 후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교학만 알고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 자에게 “나의 가르침에서 고용되어 소를 돌보는 사람과 같다.”라고 하셨다. 반면에 교학을 모르지만 수행으로 진리를 맛본 자에 대해서는 “나의 아들은 자신의 향유를 위해서 다섯 가지 유제품을 즐기는 소의 주인과 같다.”라고 말씀 하셨다. 교학에 대해서만 아는 자는 고용인에 불과하고 수행을 하는 자에 대해서는 소의 주인과도 같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담맛타왁가(진리에 서 있는 품,D19)에는 “~라고 하여”로 표현 되는 게송이 다수 있다. 또 한가지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Na vākkaraamattena

vaṇṇapokkharatāya vā                     

 Sādhurūpo naro hoti

issukī maccharī saho.

 

연설에 능하고

용모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시기하거나 간탐하거나 교활한 자는

훌륭한 님이 아니다.

 

(법구경 Dhp262,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정치인에게 해당된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정치인은 연설을 잘한다. 표를 의식하여 입에 발린 말을 하고 때로는 정적을 제거 하기 위하여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를 사용한다.

 

보수기득권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예사로 한다. 이는 자신의 당을 지원해 주는 국민들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말을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반쪽 국민들을 대변하는 말이다. 그래서 반대하는 측에서 보면 억지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정치인들은 준수한 용모에 말을 번지르게 한다. 그렇게 말을 잘한다고 하여, 용모가 준수하다고 하여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두고 유명하다고 하여 다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삭발하였다고 하여

 

“~라고 하여” 용법에 대한 또 하나의 게송을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Na muṇḍakena samao

abbato alika bhaa
Icch
ālobhasamāpanno

samao ki bhavissati.

 

규범이 없고 거짓말을 하면

삭발하였다고 수행자가 아니다.

욕망과 탐욕을 지닌다면,

어찌 그가 수행자가 되랴?

 

(법구경 Dhp264, 전재성님역)

 

 

흔히 불자들은 머리 깍은 스님을 보면 모두 훌륭한 수행자라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삭발하고 회색승복을 걸쳤으면 우리와 다른 거룩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와 같은 문구가 있듯이 삭발한 스님에 대하여 삼보중의 하나인 승보로 간주 하여 부처님 대하듯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삭발하였다고 수행자가 아니다. (Na muṇḍakena samao)”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계율을 지키지 않고 막행막식 하는 자를 말한다. 사문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나 사업을 하는 자들도 이에 해당된다. 계도 지키지 않으면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대게 이런 자들은 스스로 머리를 깍은 자들이다. 스승이 없어서 자신을 스승으로 삼아 스님이 된 것이다. 그래서 비구계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비구인 것처럼 행세한다. 

 

스승 없이 스님이 된 자들은 계를 지킬리 없다. 처음부터 비구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계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계율대로 살지 않는다면 더 이상 비구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행위로 인해 ~이 됩니다. (Sn3.9)”라 하여 행위가 그 사람을 결정한고 하였다. 따라서 삭발을 한 자가 장사나 사업에 열중한다면 그를 ‘장사꾼’이라 부르지 빅쿠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욕망과 탐욕을 지닌다면, 어찌 그가 수행자가 되랴?”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마치 반짝인다고 하여 모두 금이 아니듯이 삭발하였다고 하여 모두 빅쿠라 볼 수 없는 것이다.

 

도인과 돌인

 

“~라고 하여용법에 대한 것을 하나 더 들면 다음 같다.

 

 

Na monena muni hoti

mūharūpo aviddasu,
Yo ca tula
va paggayha

varam-ādāya paṇḍito,

 

혼미하고 무지한 자가 침묵한다고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울로 다는 것처럼,

현명한 님이라면 최선을 다한다.

 

(법구경 Dhp268, 전재성님역)

 

 

이 게송을 접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각묵스님의 인터넷영상강의에서 도인돌인에 대하여 설명이다.

 

도인은 모든 것을 알기에 말이 많지 않다. 그래서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에 대한 말을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도인은 가능한 침묵을 지킨다. 그런데 침묵하는 자가 또 있다. 알아야 할 것을 아는 도인과 달리 몰라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법담을 할 때 열띤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침묵만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망갈라경(Sn2.4)에 따르면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 (samaānañca dassana, Kālena dhammasākacchā)”라는 구절이 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쓸데 없는 잡담에는 침묵해야 하지만 담마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야기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담마토크 시간에 오로지 침묵만 지키고 있는 자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영상강의에서 “그느 도인 아니면 돌인일 것입니다”라 하였다.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서는 담마토크를 하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침묵만 지키고 있다면 그는 돌인, 즉 ‘또라이’라는 말이다.

 

만일 누군가 담마토크 자리에서 침묵만 지키고 마치 구경하듯이 앉아만 있다면 어떤 이들은 그를 성자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침묵한다고 성자라 말한다면 이는 다름아닌 가치가 없는 자, 지혜가 없는 자를 일컫는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혼미하고 무지한 자가 치묵한다고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dhp268”이라 하였다.

 

가르침에 출재가의 구분이 없다

 

법구경 게송을 보면 수행승(bhikkhu)또는 수행자(sāmañña)가 거의 대부분 등장한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수행자들을 위한 경전으로 볼 수 있을까?

 

서양에 처음으로 법구경이 소개 되었을 때 그들은 법구경에 대하여 동방의 성서라고 이름 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법구경은 출가와 재가의 구분 없이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가르침을 뜻한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부처님이 설하신 빠알리니까야 역시 인류에 대한 보편적이고 타당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니까야에서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출재가의 구분이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비록 재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출세간적 진리에 접하여 삶을 살아 갈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재가불자가 모두 출가해야 된다거나 출가자처럼 비구계를 지키고 안거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설한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면 비록 출세간적이긴 하지만 누구나 믿고 따를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모든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나왔고, 출가자라 하여 일생동안 출가자로 산다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어서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다고 본다. 이것이 출재가의 구분이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현지에 산다고 하여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하여 반드시 신심있는 불자라 볼 수 없다. 절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인격적 변화를 수반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에 20, 30년을 다녀도 오히려 아상만 강화 된다면 과연 절에 오래 다닌 효과가 있을까?

 

머리를 깍고 절에 산다고 하여 반드시 진리를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 단지 절에 산다는 그것 자체로 깨달음이라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절에서 20년, 30년, 평생 수행을 하여도 깨닫지도 못하고 가르침도 알지 못하여 법을 펴지 못한다면 진정한 수행자로 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어서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다고 하여 그를 성자로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이 활동하셨던 현지에서 산다고 하여 불교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고 볼 수 없다. 현지에 산다고 하여 불교에 대하여 더 잘 안다고 말한다면 마치 갠지스강에 사는 물고기와 같다고 본다. 갠지스강에 목욕을 하면 죄업이 소멸된다는 인도인들의 믿음이라면 갠지스강에 사는 물고기들은 갠지스강에 산다는 그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청정하게 되어 모두 해탈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 산다고 하여 또는 테라와다 불교국가에서 수행을 하였다고 하여 불교에 대하여 다 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가르침을 접하는데 있어서 장소가 문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설한 진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지금 미국과 같은 선진국 대도시에서 담마를 접하는 것과 인도 현지 빈민촌에서 접하는 불교는 조금도 다름 없는 것이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는 인도 현지가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비참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고 삶의 과정에서 고통을 겪는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나의 삶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것이 틀림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들은 비로서 진리로서 받아 들이게 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갖게 된다.

 

이런 가르침을 접하는데 있어서 현지에서 사는 것이 유리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월감을 느낄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또 빈부귀천을 떠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따라서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스승이 없는 시대에 부처님 원음이 실려 있는 빠알리니까야에 의지한다. 그렇다면 빠알리니까야가 스승이고 빠알리 니까야가 있는 바로 지금 여기가 절이 아닐까?

 

 

 

 

2013-12-0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