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범천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오계준수보다 우선하는 삼보에 대한 믿음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9. 14:41

 

범천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오계준수보다 우선하는 삼보에 대한 믿음

 

 

 

상윳따니까야에 대응되는 경전이 잡아함경이다. 한역잡아함경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것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니까야와 아함경은 약 60%가량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도올 김용옥선생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원음 훼손 없이 스리랑카에서 그대로 전승되어 왔음에 대하여 EBS특강에서 경탄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40% 가량은 어떤 내용 내용이길래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것일까?

 

아함경의 아육왕전

 

일아스님이 지은 아소까가 있다.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아소까대왕의 일대기에 대한 것이다. 특히 아소카대왕이 남긴 각문을 중심으로 쓰여진 책이다. 이 책에서 일아스님은 한역잡아함경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것은 잡아함경 내에 들어 있는 아육왕경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술 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의 직제자들의 1, 2, 3차 결집을 거쳐 합송하여 마감한 빠알리 경전 속에 더구나 아소까왕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기원후의 저작으로 추정되는 ‘아육왕경’을 끼워 넣은 것은 오류이다.

 

(일아스님, 아소까)

 

 

일아스님은 잡아함경에 아육왕경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하여 오류라 하였다. 3차 결집으로 경전결집이 마무리 되었음에도 후대에 경을 끼워 넣은 것이라 하였다. 아무리 아소까 대왕의 업적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경을 만들어 끼워 넣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경전의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경의 내용을 보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도 아니라 단지 편협하고 나약한 왕으로 묘사 되어 있어서 편찬자의 자질을 의심케 한다고도 하였다.

 

니까야에서도 편집이 없었을까?

 

현재 전승되어 오는 니까야에서는 편집이 없었을까? 이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책에서 물론 빠알리 대장경도 편집시의 장로비구들의 첨삭을 부정할 수 없다.(아소까, 119p)”라고 하였다. 빠알리 니까야도 전승과정에서 편집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빠알리니까야가 전승되어 온 과정에서 편집이 없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 2, 3차 경전결집 과정을 거치면서 결집에 참여한 장로들의 견해가 들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아스님에 따르면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아육왕경에서 보는 것처럼, 허구적인 이야기체와 조잡하게 구성된 문장, 그리고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과연 부처님이 이런 말을 하였을까?” 라고 생각될 정도로 조잡한 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를 열어 보면 가슴 울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 어디에도 교훈적이거나 훌륭한 수행에 대한 가르침도 없이 그저 아름다운 전설 이야기, 무시무시한 지옥이야기, 신통이야기 등을 나열하였을 때 단지 SF판타지소설을 읽는 것처럼 불전문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전문학이 있는데

 

불전문학이라는 것이 있다. 불전문학이란 기존의 경전이나 율장과는 달리 부처님의 생애에 대해서 기술된 것으로 위대한 부처님에 대한 찬탄 위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떻게 성불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불전문학이 나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인간의 행적이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인간과 다를 것이라 생각하여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하나의 문학형식으로 완성된 것이 불전문학이라 볼 수 있다.

 

불전문학은 부처님 탄생 이전의 보살로서 생애에 대한 것과 탄생이후의 깨달음과 중생교화에 대한 것으로 크게 구별된다. 특히 탄생 이후의 불전문학에 대한 것은 대승경전에 계승되었다. 그래서 불전문학과 대승경전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 부처님이 아니라 신격화된 초월적인 부처님에 대한 묘사가 그것이다.

 

불전문학의 대표작은 아쉬바고사(Ashvaghosa, 馬鳴, AD80-150)의 붓다차리타(Buddhacarita, 불소행찬)이다. 기원후 1-2세기 논사이자 시인인 아쉬바고사는 부처님의 부처님의 탄생과 열반에 이르기 까지 부처님의 일대기를 아름다운 시로 묘사하였다. 따라서 불전문학은 신화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부처님을 신격화한 ‘문학작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처님의 위대함에 대하여 보통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비록 신화에 바탕을 둔 문학작품일지라도 후대에 이르면 모두 사실로 받아 들인다. 특히 부처님의 탄생이후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설산수도상

 

부처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전과 북전이 다르다. 남전에서는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탄생, 깨달음(성도), 최초의 설법(초전법륜), 열반 이렇게 크게 네 가지 카테고리로 설명된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된 북전에 따르면 모두 여덟 가지로 정형화 된다. 그래서 도솔천에서 오고,  비람에 태어나며,  네 문밖에 나가 보고,  성을 넘어 출가하며,  설산에 수도하고,  보리수 나무 밑에서 마군이를 항복 받으며 , 녹야원에서 법을펴고,  사라쌍수 밑에서 열반에 드는 8상으로 더 구체화 된다. 그 중 설산수도상이 있다.

 

절에 가면 대웅전 사방 벽면에서 볼 수 있는 팔상도를 볼 수 있다. 특히 설산수도상을 보면 부처님이 히말라야 설산에서 눈을 맞아 가며 수도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빠알리니까야 그 어디에도 부처님이 히말라야에서 수도하였다는 내용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후대 불전문학에서 부처님의 고행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에서 설산수도상 장면을 묘사하는 듯한 원형이 보이기는 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So kho aha sāriputta yā tā rattiyo sītā hemantikā antaraṭṭhake himapātasamaye, tathārūpāsu rattisu ratti abbhokāse viharāmi divā vanasaṇḍe. Gimhāna pacchime māse divā abbhokāse viharāmi ratti vanasaṇḍe. Apissu ma sāriputta aya anacchariyā gāthā paibhāsi pubbe assutapubbā:

 

Sotatto sosīno

eko bhisanake vane.
Naggo na vaggim
āsīno

esanā pasuto munīti.

 

[세존]

사리뿟따여, 나는 한겨울 차가운 밤에 서리가 내리는 팔일간이 찾아오면, 나는 노지에서 밤을 지새우고 숲에서 낮을 보냈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나는 노지에서 낮을 보내고 숲에서 밤을 지냈다. 그런데 사리뿟따여, 그 때에 나에게 즉흥적으로 전에 들은 적이 없는 시가 떠올랐다.

 

밤으로 떨고 낮으로는 타버린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숲에서

홀로 발가벗었는데 옆에는 모닥불도 없지만,

그래도 현자는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마하시하난다경-Mahāsīhanāda 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고행을 할 때 인도의 한겨울에 대한 묘사한 것이다. 부처님이 고행한 장소는 한겨울에 해당되는 칠팔일간 서리가 내린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antaraṭṭhake himapātasamaye(서리가 내리는 팔일간)’라 하였다.

 

인도 비하르주 날씨는

 

경에서 표현된 문구 중에 빠알리어 히마(hima)가 있다. 사전에 따르면 히마는 ‘snow; ice, , 로 표현 된다. 단지 경의 문구만을 따진다면 눈()이 틀림 없다. 그러나 부처님이 고행한 곳을 알게 되면 눈으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님은 히마에 대하여 서리로 번역하였다. 서리는 맑고 바람 없는 밤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갈 때,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지면이나 땅 위의 물체 표면에 닿아서 잔얼음으로 부옇게 엉긴 것을 말한다.

 

인도의 겨울에서 밤공기가 영하로 내려 갔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눈처럼 서리가 내린 것이라 보여진다. 실제로 눈이 내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와 지금 날씨가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불연에서는 이부분과 관련하여 나는 추운 겨울 서리가 내리는 시기인 중간 8일 동안(M12)”이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도 서리로 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빅쿠 냐나몰리와 빅쿠 보디가 공동번역한 MDB에서는 어떻게 표현 되어 있을까? 찾아 보니 ‘When those cold wintry nights came during the eight-days interval of frost (M12)’ 라고 되어 있다. 글에서 ‘frost ‘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서리를 말한다. 이렇게 번역에서는 눈(snow)이 아닌 서리(frost)로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고행을 하기 위하여 히말라야로 들어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운 인도의 날씨는 어느 정도일까? 각주에 따르면 인도의 겨울에 대하여 “12월말과 1월초의 북인도의 차가운 기후를 말한다”라 하였는데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운 날씨는 대체 얼마나 추운 날씨일까?

 

부처님께서 6년동안 고행한 곳은 둔게스와리(전정각산)’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인도 비하르주에 해당된다. 비하르주 겨울 날씨는 어떨까? 자료 검색에 따르면 가장 추운 겨울철 날씨는 낮에는 평균 25도이고 밤에는 평균 10도로 되어 있다. 특히 가장 추운날 최저 기온은 1도인 경우가 몇 일 있다. 1도라면 거의 영하에 가까운 날씨이다. 그런 날씨에서 서리는 내릴 수 있다. 설령 눈이 내린다고 할지라도 금방 날이 밝으면 금방 녹아 버릴 것이다. 대웅전 담벼락에 눈을 뒤집어 쓴 부처님의 고행하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날씨인 것이다.

 

아쉬바고사의 붓다차리타

 

그럼에도 북방불교에서는 설산수도상이라 하여 이를 틀림 없는 사실로 받아 들인다. 이는 후대 창작된 불전문학에 기인한다. 아쉬바고사의 붓다차리타에서 설산수도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모두 다 이곳을 의지하여 머물고

또 이곳은 설산(雪山)과 이웃해 있어

사람의 고행을 증장하게 하는 곳

이곳보다 나은 곳 다시 없다네.

 

(불소행찬(佛所行饌), 입고행림품(入苦行林品))

 

 

붓다차리타(불소행찬)을 보면 부처님이 눈을 맞고 고행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설산과 이웃해 있는 장소에 있어서 고행을 증장하게 하는 곳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장면을 근거로 하여 북전에서는 설산수도상이라는 하나의 고행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본다.

 

불전문학을 보면 부처님 탄생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뉘게 된다. 부처님 탄생이전에 대한 것은 보살로서 삶을 산 부처님의 보살행을 부각한 것으로서 자따까 등과 같은 남전경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탄생 이후에 대해서는 북전 불전문학이 주류를 이룬다. 아쉬바고서의 붓다차리타가 대표적이다. 이런 불전문학은 대승경전의 편찬과도 관계가 있어서 인간 부처님을 신격화되고 초월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법화경, 화엄경 등에서 볼 수 있는 초월적이고 신격화 되어 있는 부처님 상이다. 그러나 남전 빠알리니까에서는 부처님의 탄생 이후에 대한 행적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래서 인간적인 부처님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이다.

 

니까야에 등장하는 범천이나 제석천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전 빠알리니까에서는 부처님의 행적이 인간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렇게 인간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고 해서 부처님의 설한 가르침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경전과 달리 빠알리니까야에서는 인간적인 면을 부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때문이다. 지금 당면한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굳이 초월적이고 신격화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다만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범천, 제석천, 마라 등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각 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 존재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느 세미나에서 본 장면이다. 어느 스님이 각묵스님에게 니까야에 등장하는 범천이나 제석천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각묵스님은 저는 그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을 들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각자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귀신이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자신의 견해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따르는 불자라면 자신이 의지하는 경전을 믿는다. 설령 경전에서 신통 등 초월적 이야기나 범천, 제석천, 마라, 하늘사람 등 초월적 존재가 등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은 자신의 믿음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오감으로 인지 할 수 없다고 하여 무시하거나,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진정한 불자라면 이것이 괴로움이다하였을 때 공감한다면 설령 어떤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고 SF환타지 같은 내용이 나와도 받아 들일 것이다.  그런 내용에 대하여 문학적이라거나 소설이라거나 꾸며낸 이야기라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 들이는 것은 경에서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마라세나(māra-senā, 魔軍)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실 당시 마라와 대화에 대한 것이 있다.  가장 고층 경전으로 알려진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무치여, 이것들은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이 세상에서 침몰하여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계행이 있는 고귀한 자들이

가야 할 길조차 알지 못한다.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를 보았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게 하라.

 

결코 신들도 세상 사람도

그대의 군대를 정복 할 수 없지만,

굽지 않은 발우를 돌로 부수듯,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부순다.

 

(Phadana sutta-정진의 경, 숫따니빠따 Sn3.2, stn439-443, 전재성님역)

 

 

이 경은 부처님의 고행정진에 대한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이 향실에서 출가의 경(Sn3.1)을 설하고 난 뒤에 “나는 육년간이나 정진하며 고행을 했는데, 오늘 수행승들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설한 것이라 한다. 이를 나중에 아난다가 기억을 되살려 수행승들에게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경을 보면 악마와 싸우는 장면이다. 부처님이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에 ‘나무치’라 불리는 악마와 싸우는 장면인데 장소는 네란자라강(니련선하)이다.

 

경을 보면 악마의 군대에 대한 묘사가 보인다. 흔히 마군(魔軍)이라 불리운다. 우리말로 ‘마구니’라고도 한다. 빠알리어로는 ‘마라세나(māra-senā)’ 라 한다. 이와 같은 마라세나에 대하여 부처님은 “코끼리 위에 올라탄 악마와 더불어, 주변에 깃발을 든 군대(stn442)”라 하였다. 악마의 대장이 코끼를 타고 수 많은 깃발을 든 악마의 군대가 부처님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와 같은 마라세나와 부처님의 싸움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한 것이 있다. 자야망갈라가타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Bāhu sahassam-abhinimmita-sāyudhanta

Girimekhala udita-ghora-sasena-māra

Dānādi-dhamma-vidhinā  jitavā  munindo

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

 

악마가 수천의 무기들을 가지고

기리메칼라라고 불리는 무서운 코끼리 위에 타고,

군대를 동원하였을 때,

성자들의 제왕 자비로운 가르침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Jayamagala Gāthā- Stanzas of Victory and Blessing -吉祥勝利偈-승리와 행운을 노래 하오니, 전재성님역)

 

 

 

 

 

 

 

 

이런 장면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 심리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마치 귀신이 있느냐?”고 물어 보는 것 같다.

 

삼보에 대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언젠가 라디오 프로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누군가 귀신이 있느냐?”라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스님은 귀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귀신이 있을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믿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에서 묘사된 마라세나 이야기 역시 믿음의 문제이다.

 

삼보에 대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라면 의심 없이 받아 들인다. 그래서 그래서 하느님 싸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듯한 그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S6:1)”라는 이야기도 의심 없이 받아 들인다. 이런 이야기들이 문학이라거나 소설이라거나 SF환타지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할까?

 

오계준수보다 우선하는 삼보에 대한 믿음

 

불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승보살계를 받고 오계를 지켜야만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의외로 단순하다. 불자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하나마]

“세존이시여, 어떻게 재가신도가 됩니까?”

 

[세존]

“마하나마여,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마하나마경, 앙굿따라니까야 A8:25, 전재성님역)

 

 

똑 같은 내용이 상윳따니까야(S55.37)에도 실려 있다. 경을 보면 재가신도가 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귀의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오계를 준수해야 하는 것 보다 삼보에 대한 믿음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을 보면 이어지는 질문이 “세존이시여, 어떻게 해야 재가 신도가 계행을 갖춥니까?”라고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는 것 등 오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경을 통하여 알 수 것이 있다. 그것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다. 이는 오계준수 보다 우선한다. 비록 오계를 어기는 생활을 할지라도 삼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림이 없다면 불자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살생을 하고 있는 업에 종사하는 어부, 회집 등에 종사하는 사람일지라도 삼보에 대한 믿음이 흔들림 없다면 불자이다. 또 고된 노동 끝에 음식으로 또는 약으로 마시는 한잔의 술을 마셨다고 할지라도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면 역시 불자인 것이다.

 

삼보에 대한 믿음은 오계보다 우선한다. 오계를 준수해야만 불자라고 보는 인식은 초기불교에서는 반드시 성립하지는 않는 것이다. 오계준수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불자가 되는 것에 있어서 충분조건이 된다.

 

회의론자들의 특징은

 

삼보에 대하여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진 자가 불자이다. 그런 불자라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받아 들인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범천, 제석천, 마라 등이 등장하고 팔을 굽히는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도 역시 의심 없이 받아 들인다.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소설이라거나 문학작품이라거나 ‘SF환타지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회의론자는 무엇이든이 의심한다.

 

회의론자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또는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어긋나면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서 검증이 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적 인지주의와 과학적 실증주의를 바탕으로 한 회의론자에게 있어서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범천, 제석천, 마라, 신통, 초월적 이야기는 그저 소설, 문학작품, SF환타지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내생, 윤회 전쟁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눈과 귀, 그리고 과학적으로 검증 된 것들이다.

 

회의론자들의 또하나의 특징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현법열반론으로 귀결된다. 현법열반론은 감각적 인지를 바탕으로 한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 외에 믿지 않기 때문에 오감을 충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죽으면 썩을 몸 이렇게 살아 있을 때 즐기자는 행복(sukha, )론을 외치게 된다. 따라서 행복론은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적 인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는 그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삼보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다. 오계준수는 그 다음 문제이다. 오계준수가 필요조건이라면 삼보에 대한 믿음은 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내는 불자라면 빠알리니까야에 쓰여 있는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 없이 받아 들인다.

 

설령 니까야에 범천, 제석천, 마라 등 초월적 존재와 신통등과 같은 초월적 내용이라 할지라도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니까야에 등장하는 범천이나 제석천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저는 그런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분명히 말한 스님의 말에 공감한다.

 

초기경전, 특히 빠알리니까는 1, 2, 3차 결집에 걸쳐 편집된 것으로 부처님의 원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설령 일부 편집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교훈적이고 훌륭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니까야에 대하여 소설이라거나 문학작품이라거나 SF환타지라 본다면 과연 이를 불자로 볼 수 있을까?

 

 

 

2013-11-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