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재가불자가가 가져서는 안될 직업 다섯 가지, 한국테라와다불교 창립5주년을 맞이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5. 11:25

 

 

재가불자가가 가져서는 안될 직업 다섯 가지, 한국테라와다불교 창립5주년을 맞이하여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을 왕래하다 보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다. 그러나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일부로 찾아 간다. 11 23일 열린 세미나도 그 중 하나이다.

 

11월 23일 한국불교역사박물관에 있는 국제회의실에서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창립5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학술세미나이다.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세 꼭지의 논문이 발표 된 것이다.

 

조계사 회화나무는 아직도 봄

 

한국불교역사박물관은 조계사 경내에 있다. 현재 조계종 총무원이 있는 건물이다. 그 건물은 불교박물관을 만든다는 목적으로 나랏돈으로 지은 것 것이다. 그래서 불교소유의 건물이 아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현 조계종 총무원은 세들어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계사 경내에 도착하니 이제 늦가을을 지나 겨울이 코 앞에 왔음을 알 수 있다. 불과 몇 주전에 보았던 국화꽃 축제를 보았는데 이제 흔적도 없다. 주말임에도 차가워진 날씨 만큼이나 썰렁하다. 그런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조계사 앞마당에 있는 커다란 회화나무이다.

 

조계사 회화나무는 조계사의 상징과도 같다. 사진을 찍으면 항상 잡히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수령이 450년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희안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지금 거리의 가로에는 거의 낙엽이 졌다. 그나마 간신히 붙어 있는 나뭇잎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한번 비바람이 몰아치면 모조리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조계사 회화나무에는 아직까지 잎이 푸르다. 마치 초봄 신록이 막 시작 된 것처럼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희안한 현상이다. 가을이 되면 노랗거나 빨갛게 잎이 변색되어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이곳 450년 된 회화나무는 아직도 봄이다.

 

석불이 하나 있는데

 

조계사 경내에는 바자회가 열리고 있었다. 특산물과 의류등을 방문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바자회 제목은 나눔으로 행복한 동행 바자회라 되어 있다. 이렇게 조계사에서는 연중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이는 조계사가 인근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인사동을 잇는 전통문화벨트로 조성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중 외국인과 내국인의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한국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이어서 조계사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다.

 

바자회 바로 옆, 그리고 대웅전 옆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이 있다. 그 백송 바로 앞에는 하나의 불상이 있다. 웃는 모습의 중국풍 불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재는 아니다. 만들어진지 오래 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불상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은 조계사 경내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해학적이어서 관광명소로서 전통문화벨트의 분위기와도 맞지 않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1번지로서의 분위기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불상이 중국풍이라는 것이다. 마치 한쪽 손을 내 보이며 무엇을 달라는 듯한 모습이 보기에 불편하다.

 

 

 

 

 

 

부처님을 깔고 서 있는 듯

 

석불상 뒤로 불교역사문화박물관이 보인다. 모두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이다. 이 역시 조계사 경내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 주변의 건물이 모두 전통양식의 건물임에 반하여 유독 이 건물만 현대식으로 되어 있어서 균형을 깨고 있다. 아마도 정부자금으로 지어진 정부건물이어서 그렇게 지은 것일까? 그런데 놀랍게도 불교박물관은 지하에 있다. 지하에 부처님등이 모셔져 있고 지상에는 조계종 총무원 청사가 있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을 깔고 서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이 현 조계종 청사건물이다.

 

로비에서는

 

세미나가 열리는 국제회의실에 들어 갔다. 로비에서는 미리 도착한 스님들과 방청객들 보인다. 입구에서는 방명록을 작성하면 논문이 들어 있는 책자를 나누어 준다. 로비 한켠에는 커피와 차 등 그리고 다과가 준비 되어 있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 갔더니

 

회의장 안으로 들어 갔다. 조계종 중앙종회가 열리는 장소이다. 인터넷 신문에서 늘 보았기 때문에 그다지 낯 설지 않다. 또 작년에 한 번 세미나 참석차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익숙하다. 가운데 중앙에 불상이 있고 가로로 ‘한국테라와다 불교 신행과 실천수행’이라는 제목으로 플레카드가 걸려 있다. 플레카드 좌측에는 한국테라와다불교 로고가 있고 우측에는 탁발하는 모습의 빅쿠들 사진이 보인다.

 

 

 

 

 

빠알리 예불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식순이 진행 되었다. 나누어준 프린트물에서는 합송할 빠알리어와 우리말로 번역된 문구가 있었다. 그래서 1) 삼보예찬, 2)오계수계청, 3) 까라니야 멧따숫따(필수 독경 자애경) 합송순으로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런 법회순서를 보면 우리나라 대승불교와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빠알리어이다. 빠알리어로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하고 세 번 낭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모든 식순에서 빠알리어가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한문으로 독송하는 대승불교 예불방식과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예경문을 비교해 보면

 

그런데 빠알리어로 낭송하고 난 다음 반드시 우리말로 해석된 문구를 낭송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에 대하여 ‘그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 예배드립니다.’라고 모두 낭송한다. 그런데 번역이 현재 번역되어 있는 빠알리니까야와 약간 다르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1) 그분 세존, 공양받아 마땅한 분, 바르게 깨달으신 분께 귀의합니다.(초불연)

 

2)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 귀의 합니다!(성전협)

 

3) 그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 예배드립니다.(한국테라와다불교)

      

 

번역된 세 가지를 비교해 보면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번역문과 초불연의 번역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명사 땃사(tassa)를 앞에 세우고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런 번역 방식은 자칫 오역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분이라고 지칭하였을 때 초불연에서는 그분 세존이라 하였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땃사(땃사(tassa)는 바가와 뿐만 아니라 아라한, 삼마삼붓다 모두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나모 땃사 바가와또’, ‘나모 땃사 아라하또’, ‘나모 땃사 삼마삼붓다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바가와에 대해서만 그분 세존이라고 하여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그분을 붙여 주지 않은 것은 불완전한 번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에서 ‘그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라고 하였지만 초불연과 다른 것은 그분이 반드시 바가와에만 걸리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아라하또와 삼마삼붓다사 모두에게 걸리는 듯이 보이지만 쉼표 인하여 애매모호하게 번역 되었다. 그럴 경우 차라리 ‘그분’이라는 말을 빼 버리고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성전협식 번역이 낫지 않을까? 아니면 ‘그분 존귀한 분, 그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그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렇게 하여 세 가지 케이스에 모두 ‘그분’을 붙여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대승불교 예불의식과 가장 차이나는 것 하나

 

테라와다예불의식에서 대승불교 예불의식과 가장 차이나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오계준수에 대한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 대승불교 법회의식에서 오계준수에 대한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테라와다불교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오계수계청이다. 이렇게 법회를 할 때 마다 매번 낭송되는 오계는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문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삼붓다 사사나 조띠까 뿐냐산또 마하테라

 

오계수계청 행사에서는 특별한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한국테라와다불교를 대표하는 빅쿠스님이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그 분을 소개 할 때 “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스님이신 삼붓다 사사나 조띠까 뿐냐산또 마하테라께 삼귀의와 오계를 청하는 게송을 독송하겠습니다.”라 하였다. 소개문을 보니 ‘삼붓다 사사나 조띠까 뿐냐산또 마하테라’라는 꽤 긴 이름이다. 현 한국테라와다 불교 종정스님을 말한다. 도성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빠알리어 이름은 ‘뿐냐산또’인데 마하테라라 하였다. 마하테라는 우리말로 ‘대장로’라는 말이다.

 

삼귀의와 오계는 한국테라와다 불교 상가라자(종정)인 뿐냐산또 대장로가 집전하였다. 대장로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아마도 수행의 결과가 밖으로 표출 된 것처럼 보인다.

 

대장로에 대하여 자료를 검색해 보면 1919년생으로 되어 있다. 올해 나이로 94세이다. 그럼에도 전혀 나이가 들은 것 같지 않다. 목소리는 힘이 있고 겉으로 드러난 모습 역시 힘이 있어 보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신체기능이 망가져 보기에도 형편 없이 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우리나라 나이로 95세에 해당되는 대장로의 모습은 꼿꼿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세 꼭지의 세미나

 

세미나가 시작 되었다. 모두 세 꼭지의 세미나는 발제자의 발표와 논평과 질의응답순으로 진행 되었다. 발제자가 미리 준비한 원고에 대하여 30분 발표하고, 이에 대하여 반론 성격의 논평이 10분간 이어지고, 이어서 방청객을 대상으로 질의응답을 하는 순서이다. 이번 세미나에서 발표된 논문은 다음과 같다.

 

 

1) 재가불자 신행역할과 방향-빨리 문헌을 중심으로

발제: 이자랑(동국대학교)

논평: 이필원(동국대학교)

 

2) 초기불교 승가(Sangha)의 조직과 운영체계

발제: 마성스님(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논평: 이필원(한국외국어대학교)

 

3)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의 자애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의 관계

발제: 김재성(명상의 집 ‘자애’ 원장)

논평: 일중스님(동국대학교)

 

 

 

우빠사까자나랑까라(Upasakajanalankara, Uj)

 

첫번째 발표자는 이자랑님이다. 소개에 따라면 현재 동국대불교학술원 소속이라 한다. 여성불교학자로서 계율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날 발표에서는 빠알리 문헌에 실려 있는 재가자의 신행과 깨달음에 대한 것이었다. 근거로 한 문헌은 아난다빅쿠가 지었다는 우빠사까자나랑까라(Upasakajanalankara, Uj)이다. 생소한 문헌이다. 소개에 따르면 12세기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지은이가 아난다라 하여 부처님 당시의 아난다가 아니라 12세기의 빅쿠 아난다를 말한다.

 

우빠사까자나랑까라(이하 Uj)는 재가불자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바새의 불도실천법을 설한 책이라 한다. 이책을 중심으로 하여 이자랑님은 논문을 썼는데, 참고 자료를 보니 일본자료가 눈에 많이 띈다. 아마도 교학의 나라 일본에서 수학하였기 때문이라 보여 진다.

 

10복업사란 무엇일까?

 

이자랑님의 논문은 잘 구성되어 있다. 한눈에 보아도 짜임새 있고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 논문을 30분간 읽어 나가는 형식으로 소개 하였다.

 

논문의 핵심은 서론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재가불자의 신행생활에 대한 것이다. 요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Ui는 ‘인륜에 근거한 올바른 생활습관의 확립’과 오계나 올바른 생활을 통해 윤리적 삶을 실현하고, 나아가 10복업사를 짓고, 장애법을 제거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행복을 초래하는 종교적 실천을 실행하는 것이다.

 

(재가불자 신행역할과 방향-빨리 문헌을 중심으로, 이자랑님)

 

 

눈의 띄는 말은 10복업사이다. 십선행이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10복업사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본에서 만든 용어이기 때문일 것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논문에 소개된 10복업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보시(dana)

2) 계(sila)

3) 수행(bhavana)

4) 공경(apacayana)

5) 작무(veyyavacca)

6) 공덕의 시여(pattidana)

7) 공덕의 수희(pattanumodana)

8) 문법(聞法, dhammadavana)

9) 설법(dhammadesana)

10) 견정업(見正業, ditthijjukamma)

 

 

10복업사라는 말도 생소하지만 그 내용 또한 생소하다. 빠알리니까야나 천수경에 표현된 십악업에 반대되는 십선행은 익숙하지만 이를 10복업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난다.

 

해탈과 열반의 성취에 출가-재가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논문에서는 10복업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12세기 인물인 아난다 빅쿠가 지었다는 Uj를 근거로 한 것이다. 논문에서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탈과 열반의 성취가 불도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이 점에 있어 출가-재가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이 점을 재가불자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재가불자의 경우에 가정생활 등으로 인해 출가자에 비해 수행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를 이유로 아예 재가실천도에 무관심해진다면 사실 불교도로 살아가는 특별한 의미는 없을 것이다.

 

(재가불자 신행역할과 방향-빨리 문헌을 중심으로, 이자랑님)

 

 

참으로 공감이 가는 결론이다. 재가불자라 하여 단지 삼보에 대한 믿음, 오계준수, 이웃에 대한 보시를 바탕으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누구나 해탈과 열반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믿음, 지계, 보시만을 강조하여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든가,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든가, 또는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다등 행복론과 자비론만을 말한다면 이는 타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라서 다른 종교와 그다지 차별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출재가 구분 없이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을 목적으로 해야함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재가자가 가져서는 안될 직업 다섯 가지

 

발제자의 발표에 이어 평론이 있었다. 평론자는 동국대학교 이필원님이다. 10분간 주어진 평론은 역시 준비된 원고를 죽 읽어 나가는 형식이었다. 평론에서 이필원님은 1) 재가자가 가질 수 있는 직업, 2) 재가자와 아라한의 관계, 그리고 3) 스님이 범계하였을 때 어떻게 공양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세 가지를 질문하였다. 모두 흥미롭고 관심이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중 재가자가 가질 수 있는 직업에 대한 것이 큰 이슈이었다.

 

이자랑님은 빠알리니까야를 근거로 하여 재가자가 가져서는 안될 직업 다섯 가지를 소개 하였다. 이를 오종직업이라 한다. 이 오종직업이란 것은 1) 칼장사(satthavanijja), 2) 사람장사(sattavanijja), 3) 고기장사(mamsavanijja), 4) 술장사(majjavanijja), 5) 독약장사(visavanijja) 이렇게 다섯 가지 직업을 말한다.

 

이와 같이 경전상에 소개된 직업에 대하여 현대적 의미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직업군이 된다고 한다.

 

 

1) 칼장사(satthavanijja) : 무기중개상, 무기 제작자, 현대전에 필수적인 첨단무기에 대한 프로그래머

 

2) 사람장사(sattavanijja) : -

 

3) 고기장사(mamsavanijja) : 정육점, 다양한 육류 가공업

 

4) 술장사(majjavanijja) : -

 

5) 독약장사(visavanijja) : 살충제나 농약의 제조와 판매

 

 

경전상 불자가 선택해서는 안되는 직업과 관련된 현대적 의미의 직업이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장사와 술장사가 빠져 있다. 사람장사는 사창가 등과 같은 인신매매에 대한 것이고, 술장사는 룸살롱 등과 같은 유흥업소이기 때문에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불교도라면 가져서는 안되는 직업이라 판단해서 일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칼장사의 범주에 들어 갈까?

 

사람장사와 술장사를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직업이 논란거리이다.  이와 같은 현대적 의미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오계를 어기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먼저 칼장사를 보면 요즘 무기장사에 해당된다. 비록 국방을 위해서 무기를 개발한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칼장사에 종사하는 것이 된다. 설령 무기를 집접적으로 만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무기를 제조하는데 필수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엄밀히 말하면 칼장사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에 오계를 어기는 것이 된다. 이렇게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불자로서 남아 있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필원님은 논문에서 현대의 재가자는 과연 이러한 직업을 절대로 가지면 안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시대와 가치관의 변화를 감안할 때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지에 대해 논자의 고견을 듣고 싶다.”고 하였다.

 

생류가 겪는 고통을 생각할 때

 

이필원님의 질문에 대하여 이자랑님은 답변하였다. 이를 메모하였는데, 메모한 것에 따르면 불자는 삼귀의와 오계수지를 기본조건으로 한다. 그래서 불살생 계는 생류가 겪는 고통을 생각할 때 지켜 지는 것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직업선택을 함에 있어서 갈등을 겪게 될 때 과연 이 일을 하는 것이 생류에 도움이 될 것인가?”라고 반조하면 될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짤막한 이자랑님의 답변에 대한 보충 설명이 있었다. 다음 세미나를 발표하게 될 마성스님이 객석에서 자신이 생각한 바를 피력한 것이다.

 

마성스님의 파격제안

 

마성스님은 보충설명에서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스리랑카 사원에서 스리랑카 빅쿠들과 수 년간 함께 생활한 경력이 있는 스님은 하나의 일화를 들려 주었다.

 

스님은 자신이 스리랑카에서 살고 있을 때 빅쿠들의 법문에서는 항상 오계에 대한 것이 빠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살생하지 말라, 술마시지 말라’ 등 오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런 오계법문이 스리랑카 서부 지역 어부들에게 역효과를 내었다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들을 대상으로 살생하지 말라는 법문을 매번 반복적으로 하였을 때 어부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서 서부지역 어민들이 집단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는 어부 뿐만 아니라 육류와 관련된 직업도 마찬가지라 는 것이다. 이렇게 어업과 축산업 등에 종사하는 불교도들이  집단으로 기독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그들은 더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불살생계를 준수하여 불살생과 관련된 직업을 선택하지 않은 불교도들은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였다.

 

스님은 이와 같은 사례를 소개 하면서 오계에 대한 ‘부분적용’을 주장하였다. 계를 지키긴 지키되 직업에 따라 달리 적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생류와 관계된 어업이나 농업, 축산업, 회집, 무기상, 농약 등과 관계된 직업인에게 있어서 그에 해당되는 계를 빼고 네 가지만 지키자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오계준수만 강조하는 것은 테라와다 불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오늘 고기한점을 입에 넣더라도

 

오계준수에 대한 것은 불교도들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 없는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을 때 재가불자들이 설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칼장사,  고기장사, 독약장사와 관련하여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였을 때 수 많은 직업군을 볼 수 있는데, 이들 직업군을 모두 오계 준수를 어긴 것으로 단정한다면 불교도로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될 것이다. 더구나 오계와 관련된 직업을 죄악시 한다면 생계에 지장이 있으므로 집단으로 개종하는 사태가 벌어질 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교의 정체성을 버려가면서 까지 부분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오계준수 서약을 할 때 자신의 직업이 무기프로그램을 만든 것에 종사한다 하여 불상계를 빼고 나머지 네 가지만 서약한다는 것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불교도라면 어디까지나 빠알리니까에 근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불살생계에 대한 것이라면 생류에 대한 고통을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오늘 고기한점을 입에 넣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먹는 것 보다 한 때는 나도 저와 같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멀리 하게 되지 않을까?

 

 

 

2013-11-2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