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괴로움을 왜 진리라 하였을까? 불교의 네 가지 진리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4. 10:58

 

괴로움을 왜 진리라 하였을까?  불교의 네 가지 진리

 

 

 

사람들은 영화나 TV를 보면서 그것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불행’에 대해서 그렇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또는 다큐프로에서 가슴 아픈 장면을 보면 그 사람들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현실을 돌아 보고 안심한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 다큐 또는 뉴스에서 전하는 일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살다보면

 

살다보면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과 대면할 때가 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데 우연히 마주친다면 어떨까? 인사를 해야 할지 그냥 지나쳐야 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또 전혀 바라지 않은 일이 생기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렇다고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 닥친 일이기 때문에 내가 풀어 나가야 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원하지 않는 것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살다보면 좋아하는 것과 헤어져야 한다. 아끼는 물건이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탈해 할 것이다. 아끼는 도자기가 있는데 부주의로 깨뜨렸을 때 다시는 옛모습을 복원할 수 없기 때문에 역시 허탈해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 동안 인연을 맺었던 사람과 마지막 작별을 할 때 허전하다. 월급이 나오지 않고 대우도 형편 없는 작은 회사일지라도 마지막 근무를 하며 떠나는 날 아쉽기 그지 없다. 이렇게 살다보면 인연이 있었던 것과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

 

아니 그 착한 사람이 죽었어?”

 

장례식에 다녀 왔다. 나이가 몇 살 아래인 친척의 죽음이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죽었다. 간암말기 판정을 받고 6개월 살다 죽은 것이다. 처음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망연자실했다. “아니 그 착한 사람이 죽었어?”하는 의문이었다. 평소 행동거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젊은 나이에 몹쓸 병에 걸려서 세상을 일찍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자가 죽었을 때 세상사람들은 “그놈 참 잘 죽었다”라고 말하지만, 아까운 인물이 죽었을 때 “그 사람 참 아깝다”라는 말을 한다. 친척은 아까운 사람이다. 그렇다고 하여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도 아니고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다.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 발버등 치며 살다간 보통사람이다. 그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와 함께 한 일련의 추억들이 떠 올랐다. 한 없이 마음이 너그럽고 예절 바르고 모범이 되는 사람이어서 만나면 늘 반가운 얼굴이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나이 어린 상주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명절 때면 늘 보던 얼굴들이다. 그 친척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다. 모두 청소년이다. 나이 어린 아이가 상주가 되어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갓 사춘기에 진입한 앳된 얼굴을 보았을 때 죽은 자에 대한 슬픔보다 산 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더 컸다. 더구나 나이 어린 상주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니 불쌍하고 측은해 보였다. 하늘 같은 존재가 세상을 뜬 것이 마치 하늘이 무너지듯 감내하기 어려운 현실일 것이라 보여 진다.

 

만날 때

 

모든 것이 내뜻대로 되지 않는다. 살다보면 원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 있고 바라는 것이 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은 돌아 간다. 친척에게 간암이라는 불치병이 찾아 온 것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는 것이다. 물론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를 하였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간암이 가족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좀더 주의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원하지 않는 상황과 맞닥뜨린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과 슬픔이 발생하였다.

 

바라지 않은 것과 맞닥뜨리는 것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appiyehi sampayogo dukkho, S56.11)”라 하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좋아 하지 않는 대상과 마주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지와 관계 없이 예고 없이 찾아 온다. 누구나 피하고 싶은 질병 같은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것들이 닥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여덟 가지 괴로움 중의 하나로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라고 하셨다.

 

헤어질 때

 

질병은 누구나 바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질병은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몹쓸 병이 사람들에게 예고 없이 찾아 온다. 그래서 커다란 고통과 슬픔을 야기한다. 더구나 치유될 수 없는 중병일 경우 끝내 목숨마저 앗아가 버린다. 그런 괴로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piyehi vippayogo dukkho, S56.11)라 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려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헤어져야 한다. 아무리 형편없는 회사라도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면 아쉬워 진다. 그렇게 아끼던 물건이 깨져서 망가짐으로 인하여 더 이상 못 쓰게 되었을 때 아깝다. 이렇게 인연이 있었던 것들과 헤어지게 되었을 때 괴로움과 슬픔이 밀어 닥친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괴로움을 왜 진리라 하였을까?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은 모두 괴로움에 해당된다.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만남과 헤어짐이 일어 났을 때 사람들은 더욱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이와 같은 괴로움에 대하여 부처님은 ‘진리(sacca)’라고 하였다. 그것도 ‘성스런 진리(ariyasacca)’라고 하였다. 어떻게 괴로움이 괴로움으로 끝나지 않고 성스런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ampi dukkha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캉 아리야삿짱: 자띠삐 둑카 자라삐 둑카 뱌디삐 둑코 마라남삐 둑캉 압삐예히 삼빠요고 둑코 삐예히 윕빠요고 둑코 얌삣짱 나 라바띠 땀삐 둑캉 상킷떼나 빤쭈빠다낙칸다 둑카”.

 

 [세존]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전재성님역)

 

 

 

 

 

 

 

 

Fractal dukkha

 

 

 

부처님은 여덟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 세상에서 경험 할 수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즉 생노병사가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런 괴로움은 누구나 겪고 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런 괴로움에서 피해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을 겪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근본적인 괴로움과 함께 부처님은 또 네 가지 괴로움을 말씀 하셨다. 사랑하지 않는 대상과 마주치는 것,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것,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것, 그리고 오온에 대하여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이렇게 네 가지 괴로움이 더 있다고 하였다. 그런대 부처님은 이와 같은 여덟 가지 괴로움에 대하여 성스런 진리라고 하였다. 괴로움도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성스런진리이다.

 

괴로움을 기반으로 한 진리 네 가지

 

범부들은 괴로움이 발생하면 피해 가려 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생노병사 등으로 인한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피해 갈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다만 괴로움을 성스런 진리라고 자각 하는 자들만이 괴로움을 피해 갈 수 있다. 그것이 부처님 설한 사성제이다.

 

‘사성제(cattari-ariyasacca)’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네 가지 성스런 진리’이다. 그런 네가지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 ariyasacca)

2)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dukkhasamudayo ariyasacca)

3)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dukkhanirodho ariyasacca)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 ariyasacca)

 

 

네 가지 성스런 진리를 보면 공통적으로 ‘괴로움(dukkha)’과 ‘성스런 진리(ariyasacca)’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괴로움이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뼈져리게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아함을 말한다. 그것도 철저하게 뼈져리게알아야 함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것이다.

 

지금 나에게 괴로움이 발생하였을 때 그 괴로움이 왜 일아나는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거룩한 진리이다. 경에서는 갈애(tahā)가 모든 괴로움의 발생원인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56.11)”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지금 기뻐도 그것은 기뻐함을 갈구하는 갈애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슬픈 것도 결국 슬픔을 갈구하는 갈애 때문이다. 울때 진짜 슬퍼서 울기도 하지만 슬픔이 슬픔을 유발하여 우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역시 갈애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괴로움의 발생요인에 대하여 갈애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 na kāhasi, Dhp154)”라 하였다. 집짓는 자가 바로 갈애를 말한다. 갈애로 인하여 모든 괴로움이 발생하고 결국 세세생생 윤회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

 

사성제에서 멸성제와 도성제는 출세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멸성제를 보면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yo tassāyeva ta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inissaggo mutti anālayo. S56.11)”라 하였다. 갈애의 소멸이 바로 ‘해탈(mutti)’을 의미한다. 이 해탈은 다름 아닌 열반을 말한다. 갈애의 소멸은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갈애를 소멸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경에서는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ayameva ariyo aṭṭhagiko maggo, S56.11)”라 하여 팔정도를 제시한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실천수행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sammādiṭṭhi sammāsa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S56.11)”이렇게 여덟 가지를 닦아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사성제를 보면 전반 두 개는 세간적인 것이고, 후반 두 개는 출세간적인 것이다. 그런데 네 가지 모두 진리라 하였다. 그것도 거룩한 진리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불교에서는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네 가지가 되었다. 세간적 진리와 출세간적 진리가 모두 불교의 진리인 것이다. 이런 진리는 모두 괴로움(dukkha)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괴로움은 성스런 진리에 해당된다. 또 그런 괴로움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아는 자에게만 붙여지는 괴로움이다.

 

괴로움도 진리가 될 수 있다!

 

아비를 잃은 나이 어린 상주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짠하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 마치 이 세상이 끝난듯한 슬픔일 것이다. 이처럼 하늘이 무너질 듯한 슬픔은 누구나 예외 없이 겪는다.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이 새상에 존재하는 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야 하고, 또 사랑하는 것과 헤어져야 한다. 이런 괴로움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진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dukkha ariyasacca,고성제)’라 하였다. 이렇게 괴로움도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 mū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Koigāmasutta-꼬띠가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21, 전재성님역)

 

 

 

2013-11-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