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 마음의 황무지, 조락의 계절에서도 희망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3. 11:23

 

내 마음의 황무지, 조락의 계절에서도 희망을

 

 

 

낙엽이 질 때쯤

 

불과 몇 일 만에 세상이 바뀐 듯 하다. 거리에 가로수가 앙상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11 20일을 전후하여 낙엽을 목격하여 왔는데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가로수를 보면 은행나무에는 잎이 하나도 달리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모습이다. 일부 은행나무에는 아직도 잎이 달린 것도 있으나 거의 대부분 옷을 벗었다. 더구나 추위까지 닥쳐 더욱더 추워 보인다. 여기에 비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마음은 황무지(荒蕪地)가 된다.

 

낙엽이 질 때쯤 늘 겪는 것이 마음의 황무지이다. 앙상한 가지를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과 현실의 냉혹함을 보면서 일종의 마음의 공황상태가 초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무지란 어떤 것일까?

 

엘리엇의 황무지(荒蕪地)

 

일반적으로 황무지는 사람이 손을 대지 아니하고 그냥 내버려둔 거칠고 쓸모 없는 땅을 말한다. 사전에 따르면 1922년에 발표된 영국의 엘리엇의 장시라고도 소개 되어 있다.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 무녀가 항아리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어.
"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웁니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여름은 우릴 놀라게 했어요, 슈타른버그 호 너머로 와서
소나기를 뿌리고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대공의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말하기는 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바람은 상쾌하게           Frisch weht der Wind
고향으로 불어요            Der Heimat zu
아일랜드의 님아            Mein Irisch Kind,

어디서 날 기다려 주나?     Wo weilest du?>

 

(황무지 (시),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따르면 황무지의 작가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rns Eliot, OM, 1888년 9월 26일~1965년 1월 4일)은 미국계 영국 시인이었다. 그리고 극작가이자 문학 비평가이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후에 영국에 귀화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가 맞이 하는 봄은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말일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시를 해석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이 구절은 초서의 '켄터버리의 이야기(The Canterbury Tale)'의 '희망적인 4월'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의미는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에 따른 심정의 고백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그러한 시인의 의식이 다름아닌 코메의 무녀나,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에 있는 어부왕의 심정과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생명의 부활을 약속받은 이 찬란한 봄의 계절에, 죽은 목숨만을 이어가고 있으니 그것은 잔인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가사(假死) 상태를 원하는 현대의 주민들에게는 모든 것을 일깨우는 사월이 가장 '잔인한' 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저주받은 축복'이기도 하다.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므로 '축복'의 계절이지만, 작고 연약한 씨앗이 겨울의 단단한 땅을 밟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보면 '저주'이기도 하다.

 

시인 엘리엇은 20세기 서구 문명의 황폐화를 겨울의 황무지에 비유한 다음, 이러한 황무지에 희망의 씨앗을 싹트게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황무지)

 

 

봄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는 축복의 계절이다. 그러나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계절이라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가 맞이 하는 봄은 마음의 황무지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음의 황무지

 

황무지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도 보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Akkodhano vigatakhīlo hamasmi (iti bhagavā)
Anut
īre mahiyekarattivāso,
Viva
ā kui nibbuto 'gini
Atha ce patthayasi pavassa deva.

 

[세존]

“분노하지 않아 마음의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Dhaniyasutta-다니야의 경, 숫따니빠따 Sn1.2, Stn19,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사왓티에 있을 때 마히 강변에 살고 있는 소치는 다니야와 대화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다니야는 농경생활의 유익함을 노래하고 뒤에서는 부처님이 유사한 형식으로 자신의 명상적 삶의 탁월성을 노래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게송은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tn18)”라고 자신만만하게 노래한 다니야에 대한 부처님의 답송이다.

 

세 가지 황무지가 있는데

 

게송에서 황무지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khīla의 번역어이다. 킬라는 ‘waste or fallow land, barrenness of mind, , 頑固, 荒地, 蕪心.’의 뜻이다. 일반적으로 황무지라고 번역된다.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마음의 황무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가지 황무지가 있다. 세가지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의 황무지, 성냄의 황무지, 어리석음의 황무지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것이 세가지 황무지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가지 황무지를 곧 바로 알기 위해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아야한다.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토대란 무엇인가?

 

(Khila-황무지의 경, 상윳따니까야 S47.9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황무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탐욕의 황무지(rāgakhīla), 성냄의 황무지(dosakhīla), 어리석음의 황무지(mohakhīla)이다. 이런 마음의 황무지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사념처를 닦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팔정도를 닦으라고 하였다. 수행을 통하여 이 세가지 황무지를 잘 알고 두루알고 소멸시켜 버리기 위해서이다.

 

맛지마니까야의 다섯 가지 황무지

 

그런데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섯 가지 황무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ssa kassa ci bhikkhave bhikkhuno pañca cetokhilā appahīnā, pañca cetaso vinibandhā asamucchinnā, so vatimasmi dhammavinaye vuddhi virūhi vepulla āpajjissatīti neta hāna vijj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수행승들이라도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를 버리지 못하고, 다섯 가지 마음의 속박을 제거하지 못하면, 그는 참으로 이 가르침과 계율 안에서 성장, 번영, 충만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

 

(Cetokhilasutta-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를 한역에서는 오심재(五心裁)’라 한다. 한자어 마를 재자이다. ‘다섯가지 매마른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초불연의 맛지마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열어 보니 경의 제목이 ‘마음의 삭막함 경(M16)’으로 되어 있다. 영문제목은 어떨까? 빅쿠 냐마몰리와 빅쿠 보디가 공동번역한 MDB에 따르면 ‘Cetokhila Sutta - The Wilderness in the Heart (M16)’라 되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마음의 황야(M16)’가 될 것이다. 이렇게 빠알리어 킬라(khīla)에 대하여 황무지, 마름(), 삭막함, 황야 등 다양하게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황무지를 보면

 

그렇다면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에서 어떤 마음의 황무지를 말씀 하셨을까? 우선 첫번째 황무지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이 스승에 대해 의심하고 주저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한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스승에 대해 의심하고 주저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그의 마음은 열심, 전념, 인내, 정근으로 향하지 못한다. 그의 마음이 열심, 전념, 인내, 정근으로 향하지 못하면, 그것이 그가 버리지 않은 첫 번째 마음의 황무지이다.

 

(Cetokhilasutta-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16,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첫 번째 마음의 황무지는 스승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스승에 대하여 의심하면 수행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마음은 열심, 전념, 인내, 정근으로 향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수행자에게 있어서 스승은 절대적이다. 먼저 길을 닦아 놓은 스승이 미덥지 않을 때, 예를 들어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점을 발견하였을 때 정진할 마음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황무지를 표로 만들어 보면

 

맛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다섯 가지 마음에 대한 황무지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내용에 대한 것은 초불연의 각주를 참고 하였다.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pañca cetokhilā)

No

   

    

1

스승에 대한 의심

스승의 몸이나 스승의 덕에 회의하는 것이다.

1) 32상이 몸에 있는지 회의 하는 것이다.

2)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알 수 있는 일체지가 있는지에 대하여 회의한다.

2

가르침에 대한 의심

부처님의 교학과 통찰지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1)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가?

2) 위빠사나를 통해 도와 과를 증득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있는가?

3

참모임에 대한 의심

성스런 상가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도와 과를 증득한 여덟 가지 부류의 성스런 상가가 참으로 존재하는가?

4

배움에 대한 의심

높은 통찰지를 얻기 위한 계정혜 삼학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5

동료에게 냉담함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를 보면 결국 불--승 삼보에 대한 의심이 주류를 이룬다. 삼보에 대하여 의심함으로서 마음이 매말라 가고 마음이 황무지처럼 바뀌는 것이다. 이렇게 삼보에 대하여 신뢰하지 못하였을 때 전념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결과 동료에게 화를 내고 불쾌하게 여기고 상처를 주고 냉담할 것이다.

 

조락의 계절에서도 희망을

 

11월은 마음의 황무지와 같은 계절이다. 낙엽이 지고 말았을 때 찾아 오는 공허감이 찬바람과 함께 공허감이 밀려 온다. 그러나 조락의 계절에서도 희망을 본다.

 

길을 걷다 보니 아직도 단풍나무에서는 단풍이 한창이다. 11 20일을 전후하여 도시의 대표수종인 은행나무잎은 일제히 져 버렸지만 아직까지 단풍은 건재하다. 언제까지 유지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 갈 듯 하다. 텅빈 공장의 담벼락에 단풍이 아직도 절정이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시멘트담벼락과 철재담사이에 나무가 끼어 있다. 어떻게 삐집고 들어와 자라다 보니 지금 보는 것처럼 감탄을 자아내게 이르렀다. 삐집고 자란 부분을 확대해 보았다.

 

 

 

 

 

 

 

 

마치 나무가 무정물인 시멘트와 철근을 먹은 듯 보인다. 사실 이런 류의 현상은 많이 볼 수 있다. 종종 엽기적인 사진에 가로수를 먹은 나무 등과 같은 장면을 보기 때문이다. 또 오래 된 절에 가면 커다란 바위를 마치 삼키고 있는 듯이 보이는 느티나무도 볼 수 있다.

 

행운목에서 꽃대

 

아무도 일하지 않는 텅빈 공장 담벼락에 기적처럼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단풍나무를 본다. 그리고 때가 되어 싹을 튀우고 번성하다가 노랗게 물든 아름다운 단풍을 보여준다. 그것도 모두 잎파리가 떨어지는 계절에 보란듯이 아직까지 건재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담벼락 사이를 삐집고 자란 단풍나무는 누가 보살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도 자란다. 그래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낀다. 그래서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사무실에서도 생명이 보였다. 행운목에서 꽃대가 보인 것이다. 매주 한 번씩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항상 이맘 때가 되면 행운목꽃이 핀다. 이번에 꽃이 피면 네 번째 꽃을 보게 된다.

 

 

 

 

 

 

2013-11-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