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자애수행으로 마음의 해탈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1. 20. 11:45

 

 

자애수행으로 마음의 해탈을

 

 

 

가르침의 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다. 구입한 사부니까야와 법구경 등 일부 쿳다까니까야를 보면 그 방대함에 놀란다. 금액으로 따져 거의 백만원에 달하는 니까야 번역서를 접하면 그야말로 가르침의 바다라 아니할 수 없다.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근본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수행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사띠수행의 가르침, 계율에 대한 가르침 등 실로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거나 이것이 불교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거나 불교는 자비의 종교’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 ‘불교는 수행의 종교’ ‘불교는 행복의 종교라는 등 여러가지 불교를 말한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눈먼 장님이 코끼리의 특정 부위를 만져 보면서 이것이 코끼리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것 하나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시고 난 다음 45년간 설법하였다. 지금 부처님은 계시지 않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은 빠알리 니까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한글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게 되었다.

 

니까야를 통해 접한 부처님의 말씀은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다. 그런데 하나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니까야를 읽어 보아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의 소멸에 따른 윤회의 종식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바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에서도 해탈과 열반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라따나경

(보배경, Sn 2.1)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14)

열반에 드시나니

망갈라경

(길상경, Sn 2.4)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10)

열반을 이루니

 

멧따경

(자애경, Sn 1.8)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10)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

 

 

테라와다 불교의 예불문이자 수호경이자 생활경이라 볼 수 있는 삼대경에서 결론은 항상 열반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열반에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괴로움을 소멸하여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이 제자를 부르는 명칭이 있다. 그것은 빅카웨(bhikkhave)이다. 원래 빠알리 문법에 따르면 ‘빅카워(bhikkhavo)’라 해야 한다. 그러나 빅카웨(bhikkhave)라고 하는 것은 마가다식의 발음이라 한다. 제자들이 부처님을 잊지 못하여 추억하고 간직하기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에서는 빠알리 문법을 무시하고 ‘빅카웨(bhikkhave)’라고 하였다는 문법학자의 주장도 있다.

 

빠알리어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비구들이여또는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한다. 이런 번역어는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채택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직역한 것이기도 하지만 승가의 입장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출세간적인 것이 대부분이고 대부분 출가승을 위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비구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으로 본다. 반면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좀더 확장된 개념으로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출가승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가르침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비구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현전승가의 이미지가 강하고,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한 것은 사방승가의 이미지가 강하다.

 

스님과 신도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부르는 호칭은 매우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빅카웨(bhikkhave)를 들 수 있지만, 때로 “장자여” 라든가, “바라문이여” 등 신분에 따른 호칭을 부르기도 하고 “마하나마여” 라고 하여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빅쿠들이여(bhikkhave)”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빅쿠들이여(bhikkhave)”라고 호칭하였을 때 이는 대부분 출가승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을 펼칠 때 예외 없이 “빅쿠들이여(bhikkhave)”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재가불자들에게는 해당이 없는 것일까?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와 재가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마치 신분제를 연상시킨다. 마치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을 보는 듯 모든 것이 출가승 위주이고 출가승이 마치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된 스님과 신도의 관계에 있어서 스님의 역할이 있고 신도의 역할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스님은 스님다워야 하고 신도는 신도다워야 함을 강조한다. 스님은 참선 등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수행자로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고, 신도는 믿음과 지계와 보시를 바탕으로 한 신행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관념이 형성되어 있다.

 

부처님의 전도명령

 

빠알리니까야에서 재가불자를 위한 가르침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부분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경을 보면 항상 빅쿠들이여(bhikkhave)”라고 시작된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세간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게 붙이는 호칭이 빅쿠들이여(bhikkhave)”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이 출세간적이고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이라 하여 세간에 사는 재가자들에게는 필요 없는 것일까? 그래서 재가자는 오로지 삼보에 대한 믿음, 오계준수, 타인에게 보시하는 삶만이 전부일까? 그런 삶을 살아 이 다음에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재가불자 신행의 전부일까? 이런 물음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다. 재가자도 출가자 못지 않게 똑 같은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편적이고 평등한 것이기 때문에 출재가를 구분하여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만일 누군가 출가와 재가의 역할을 강조한다면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 된다. 어떤 성직자가 ‘재가자는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충실하는 삶을 살아야 만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여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S4:5)”라고 하였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같다. 따라서 재가자에게 오로지 믿음과 보시만 강요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어기는 것과 같다.

 

신도들이 무지할수록 성직자의 권위는 올라가고

 

그렇다면 왜 성직자들은 믿음과 보시를 그토록 강조할까? 그것은 성직자들의 필요에 따른 것이다. 자신을 신처럼 떠 받들고, 부처님처럼 믿게 만들었었을 때 그들의 권위가 올라 갈 것이다. 그리고 각종 불사 명목으로 보시를 강조함으로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신도들에게 믿음과 보시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은 신도들이 많이 아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 신도들이 많이 알면 알수록 의문도 많아지고 따지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신도들에게 교리나 교학에 대하여 알려 주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항상 하는 말이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다. 열심히 108배하고, 열심히 다라니 기도하고, 열심히 사경하는 등 믿음과 보시를 강조한다. 한마디로 성직자는 신도들이 무지하면 무지할수록자신들의 권위가 올라가는 것이다.

 

가르침을 따르는 모든 이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로 본다. 그래서 부처님이 “빅쿠들이여(bhikkhave)”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출가한 빅쿠들 만이 대상이 아니라 빅쿠니도 대상이 될 수 있고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도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빅카웨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수행자 여러분”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자비실천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점회귀와 같다. 한점으로 포커스가 맞추어지는 것이다. 마치 등산을 하였을 때 모든 길은 정상으로 향하듯이 열반이라는 한점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일점회귀에 있어서 수행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등 부처님의 다양한 가르침이 있다. 이중 자비실천의 가르침에 주목한다.

 

부처님은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가르침도 많이 설하였지만 그와 못지 않게 자비를 강조하였다. 그것이 자비실천의 가르침이다. 이런 자비실천의 가르침에 대한 정형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자애로운 마음으로 한쪽 방향을 충만시키고 마찬가지로 두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세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네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경우 모든 곳에 일체의 세계를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고 원한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충만시킵니다.

 

(빠딸리야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3, 전재성님역)

 

 

이것은 자애에 대한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열 가지 방향으로 한량없이 내라는 것이다. 연민, 기뻐함, 평정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한다. 이와 같은 자비실천에 대한 가르침은 네 가지 청정한 삶에 대한 것이다. 이를 사범주(四梵住)라 한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자애의 삶에 대하여 가장 잘 표현된 경이 자애경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예불문으로 사용되고 동시에 수호경이기도 한 자애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Mātā yathā niya putta               -- 야타- 니양 뿟땅
āyusā ekaputtam anurakkhe               -유사- 에까뿟당 아누락케
Evam pi sabbabh
ūtesu                    에왐 삐 삽바부-떼수
m
ānasam bhāvaye aparimāa             -나삼 바-와예 아빠리마-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이와같이 모든 님들을 위하여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Karaniya Metta Sutta -멧따경, 숫따니빠따 Sn 1.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하여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 (Mātā yathā niya putta, Sn 1.8)”라 하였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존재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자애의 마음을 내어 남을 움직이려 하는 것일까?

 

자애수행으로 마음의 해탈을

 

메타기도라는 것이 있다. 멧따와 기도의 신조어이다. 이런 신조어가 나오게 된 것은 테라와다불교와 대승불교가 혼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100일 소원성취 메타기도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기복신앙에 가깝다. 100일 소원성취기도를 하였는데, 아들이 원하는 미국의 대학에 합격하였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 한다든가 소원을 성취하려는 것은 멧따라는 말이 변질 된 것이다. 경전에 쓰여 있는 그대로 본다면 멧따가 결코 소원성취용 기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전에는 자애로운 한량없는 마음을 닦게 하여지이다. (mānasam bhāvaye aparimāa, Sn 1.8)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하여 마음의 해탈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를 한문용어로 자심해탈(慈心解脫)’이라 한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예불문이자 수호경이자 생활경인 멧따경(자애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애를 통한 마음의 해탈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도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Metta upekkha karua vimutti
Āsevamāno muditañca kāle,
Sabbena lokena avirujjhamāno
Eko care khaggavisā
akappo.

 

해탈로 이끄는 자애와 연민과,

기쁨과 평정, 올바른 때에 실천하며,

모든 세상으로부터 방해 받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Khaggavisāa sutta-무소의 뿔의 경, 숫따니빠따 S1.3,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자애(Metta)와 연민(karua)과 기쁨(mudita)과 평정(upekkha)해탈(vimutti)’로 이끈다고 하였다. 자애를 실천하여 자애가 생겨나면, 연민을 실천하는 등의 네 가지 거룩한 삶(자비희사)을 차례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에 평정은 네 번째 선정의 성취로 완성된다.

 

이와 같이 자애를 닦는 것은 마음의 해탈을 위해서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실천의 보살사상과 다른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해탈로 인하여 청정하게 되었을 때 세상이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한다고 하여 남의 마음을 바꾸려 한다거나 소원성취용 기도로 활용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이와 같은 자애수행은 연민수행과 함께 40 가지 사마타 명상수행 주제에 속한다.

 

어떻게 자비실천해야 하는가?

 

부처님의 다양한 가르침은 결국 해탈과 열반으로 지향하게 끔 되어 있다. 자애, 연민, 기쁨, 평정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수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의 해탈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수행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았다.

 

 

   

    

오종선

실패

자애의 삶

(Metta)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다.

초선-4선

애정

연민의 삶

(karua)

근심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의 태도를 갖는다.

초선-4선

근심

기쁨의 삶

(mudita)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한다.

초선-4선

들뜸

평정의 삶

(upekkha)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한다.

5선만

무관심

 

 

 

표를 보면 평정만이 오종선에 있어서 5선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초선에서 4선까지 되어 있다. 그리고 사무량심이 실패하는 요인도 있다.

 

어떨 때 사무량심이 실패하는가?

 

자애는수행은 자애경을 근거로 한다. 그래서 자애수행의 기본원칙은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Sn 1.8)”이다.  우리가 사는 욕계 뿐만 아니라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이르기 까지 뭇삶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행복을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불행하지 않기를!”하고 바라는 것과 같다. 악처에 떨어져서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자애수행이 실패할 때가 있다. 그것은 자애의 마음이 애정으로 변질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부부간, 이성간에 자애수행은 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연민수행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월감을 가지고 대해서는 안된다. 가장 이상적인 방식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대로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연민수행이 실패할 때가 있다. 그것은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연민을 넘어 근심과 걱정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다.

 

기쁨수행은 함께 축하해 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 구호단체에 10만원을 기부하였을 때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거들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였을 때 비록 돈은 내지 않았지만 함께 기뻐한 공덕으로 10만원을 기부한 것과 똑 같은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한자용어로 수희공덕(隨喜功德)’이라 한다. 그러나 수희공덕이 실패할 때도 있다. 함께 기뻐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시끌벅적하게 들뜨고 흥분하는 것을 말한다.

 

평정수행은 어떤 경우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험난한 고비를 맞아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평정을 유지한다. 비록 망해서 길바닥에 나 앉을지라도, 누군가로부터 악의적인 비방을 받아도 평정을 유지한다. 그렇게 하는 근거로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나의 권속이고, 업이 나의 의지처이다. 좋은 업이건 나쁜 업이건, 업을 지으면 나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A10.48)” 라고 끊임없이 반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정이 실패할 때가 있다. 그것은 무관심으로 일관하였을 때이다. 무지에 바탕한 무관심은 감각적 욕망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여러가지 가르침 중에 자애와 연민의 실천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런 자비실천은 대승불교와 다른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중생계가 다하는 한, 허공계가 다하는 한 남김 없이 성불시키겠다”는 대승보살의 ‘우월적 지위’에 따른 거창한 자비에 대한 것이다. 또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 !” 라고 외친 ‘산띠데바’류의 ‘공허한 발원’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비사상은  우월감 없이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자만없는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TV에서 ‘달라졌어요’라는 프로에서 보듯이 한 번 형성된 마음은 큰 충격파가 닥치기 전에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뜻대로’ 되기 바란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내도 내뜻대로 하기 바라고, 자식도 내뜻대로 되기 바란다. 이처럼 ‘내뜻대로’마음은 심지어 돈도 내뜻대로 벌려야 하고, 대통령도 내뜻대로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내자신도 내뜻대로 안되는데 남이 내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그러려니하라고 한다. 왜냐하면 한번 형성된 성향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이 바뀌지 않듯이 타고난 성향 바뀌기 어려움을 말한다. 그래서 내뜻대로 하지 말고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켜 보라는 것이다. 그대신 자신을 변화 시켜 나가라고 말한다. 그런 변화는 다름 아닌 수행을 통해서이다.

 

왜 수행을 하는가?

 

수행한다고 하여 반드시 좌선을 말하지 않는다.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모든 것이 수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행은 따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걸으면서도 할 수 있고, 대기하면서도 할 수 있고, 설거지 하면서도 할 수 있다. 그런 수행은 일반적으로 알아차림이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알아차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행은 일종의 습관들이기때문이다. 습관을 들여서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매일 꾸준히 습관들이다 보면 바뀌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수행이라는 말 대신 수습(修習)’이라 한다.  따라서 매일 꾸준히 경전읽기를 하는 것도 수행이고, 매일 사경하는 것도 수행이다. 그리고 매일 꾸준히 글을 쓰는 것도 역시 수행의 범주에 속한다. 이렇게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모두가 수행이다.

 

수행이라고 하여 다리꼬고 장시간 앉아 있는 것이 다가 아닌 것이다. 가르침대로 살기 위하여 꾸준히 습관들이는 것이 다름아닌 수행인 것이다.

 

꽃에서 향기가 나면 나비가 모여 들듯이

 

이렇게 습관을 들이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변화로 인하여 주위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것이 포교이다. 포교한다고 하여 ‘예천불지’식으로 피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꽃에서 향기가 나면 나비가 모여 들듯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감으로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다.

 

 

 

 

Flower and Butterfly

 

 

2013-11-20

진흙속의연꽃